온통 갈색 스펙트럼에 휩싸인 이른 봄 나지막한 산에 이렇게 야심 없이 서로 조금씩 떨어져 핀 진달래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아. 그래서 얼마나 고운지 몰라, 저 새치름한 연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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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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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의 관점을 취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은 19세기 사회주의 운동을 일으켰다.·······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을 발표하고, 역사는 필연적으로 집단적 재산 소유·집단적 의사 결정·노동계급의 자치정부 등이 이루어지는 완전한 평등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역사관을 발전시켰다.·······(그들)도 아메리카 원주민의 평등사회에 관한 보고서·······를 읽고 영향을 받았다. 그들이 권고하고 예언한 이상사회는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의 평등사회에 매우 가까웠다.

  19세기 후반까지 사회주의는 유럽 전역에서 실제적인 정치세력이 되었으며, 대부분의 사회주의자 그룹은 의회를 통해 점진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러시아에는 의회가 없었으므로 진보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정부를 전복하는 방법이었는데 1917년 마침내 공산주의 혁명이 발발했다. 그러나 공산주의라는 급진적 사회주의는 실패할 운명이었다. 타락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하기에 너무나 큰 도약이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지나치게 야심적이긴 하지만, 제2차 물결은 정통 사회주의 정당들에게서 효과적인 방식으로 나타나, 제도를 통해 작동하고 있었다.·······

  ·······사회주의가 번창하면서 민주주의도 꽃을 피웠다. 1790년에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와 헌법이 모든 사람-여성은 제외되었지만-의 평등을 선언한 국가는 미국·스위스·프랑스뿐이었다.·······21세기 초반 현재 119개국으로 늘어났다.·······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과 같은 수준의 민주주의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404-406쪽)


이승만-박정희 체제의 거대 아이콘이 무너진 뒤에도 여전히 이 땅에 준동하고 있는 나경원이 같은 “토착 왜구” 종자들이 만들어낸 왜곡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것이 “반공주의=민주주의” 등식이다. 자신들의 매판적 본질을 감추기 위해 미군정 아래 만든 프레임이다. 오늘날까지 조중동서껀 ‘개’독교를 중심으로 한 유튜브, 카톡을 통해 양산하며 적폐체제의 망령을 불러내고 있다.


공산주의, 그러니까 “급진적” 사회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다.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사회주의가 번창하면서 민주주의도 꽃을 피웠다.”다. 이치를 따져 보아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가 아직도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과 같은 수준의 민주주의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는 공산주의 이상이 온전하게 역사 속으로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에 발목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로쿼이 민주주의에서라면 반공주의 토착왜구 종자들이 당최 생겨날 여지조차 없었을 것이다.


급진적인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한 것은 스티브 테일러가 제시하듯 “타락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하기에 너무나 큰 도약”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사회주의 이론 자체의 흠결도 있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지적하듯 돈과 사유私有의 본질에 관한 피상적 통찰, 자본의 사용 이익 제거, 의무·징발을 정당화하는 국가제도에 대한 편향된 태도도 중대 요인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계의 신성성을 폐기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다. 자본주의의 근원인 분리 이데올로기를 간파하지 못한 탓이다. 사회주의-민주주의 운동이 진정한 제2차 물결로 완결되려면 이로쿼이 사회주의-민주주의의 정수를 재확인해야 한다. 타락 이전 인류가 인간을, 자연을, 세계를 어떻게 감지하고 인식하고 수용했는지 다시 배워 깨우쳐야 한다.


정치경제학 비판으로서 사회주의-민주주의 운동이 신성성을 되찾았을 때, 그 정치적 내용은 어떨까?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쓴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를 길잡이로 삼을만하다. 경제 이야기지만 정치에까지 그 패러다임을 적용할 수 있다. 신성한 정치학을 구성한다면 그 근간은 저자가 직접 제시한 분권화, 자기조직화, P2P, 생태적 통합이다. 낯익은 풍경이다. 작은 공동체, 공동체의 평등한 연대, 관용이 일으키는 융합의 시너지, 그러니까 제국주의 타도전선의 다른 이름이다. 결국 이들은 “대문자”(미셸 마페졸리) 정치의 종언을 의미한다. 대문자 정치의 종언은 대문자 경제의 종언과 그대로 맞물린다. 역이자 화폐, 경제적 지대의 제거와 공유자원 고갈에 대한 배상, 사회·환경 비용의 내부화, 경제·통화의 지역화, 사회배당금, 경제 역성장, 선물문화와 P2P 경제(찰스 아이젠스타인). 이들의 주술적 상호침투로써 신성한 사회주의-민주주의 운동은 완결의 길을 간다. 아브라카다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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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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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쇠퇴하는 데에는 과학 발전과 물질 번영 같은 많은 사회문화적 요인이 있다. 그러나 유일신 종교가 더 이상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전능한 실체가 세상을 돌보고 모든 고통은 내세 때문에 정당화된다는 것을 간절하게 느껴야만 할 필요가 있는 타락한 정신이 더 이상 강력하지 않은 까닭일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유일신 종교를 대체하는 새로운 종류의 믿음과 관행에 대한 많은 증거가 있다. 19세기 말부터 제1차 물결 당시에 발생했던 잘 알려지지 않은 밀교적 전통이 주류로 진입하였다.(411쪽)


종교, 특히 거대유일신교의 쇠퇴 추세는 분명하다. 제도적 종교가 정치경제적 이권세력으로 엄존하는 것은 맞지만 실질적으로 인류 정신에 더 이상 중요하지도 강력하지도 않은 형해다. 이대로 종교는 사라지고 마는가? 아니다. 타락한 정신이 만들어낸 거대유일신을 없애고 무신론을 집어든 정신도 타락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타락에서 벗어난 인간 정신이라면 신의 참 실재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스티브 테일러는 그다지 찰진 관심을 지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종교를 다루는 문맥 바깥에서 근원적 의미로 보면 종교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하기는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종교는 내가 생각하는 종교보다 훨씬 덜 관건적인 무엇인 듯하다. “유일신 종교를 대체하는 새로운 종류의 믿음과 관행에 대한 많은 증거가 있다. 19세기 말부터 제1차 물결 당시에 발생했던 잘 알려지지 않은 밀교적 전통이 주류로 진입하였다.”는 언급 이상의 내용이 이 책에 더는 없다. 제1차 물결 당시에 발생한 밀교적 전통이 주류로 진입했다는 사실이 어떻게 제2차 물결일 수 있는가? (종교의) 제2차 물결에 대한 인식이 투미해지지 않으려면 (종교의) 제2차 타락에 대한 인식이 뚜렷해야 한다.


제1차 타락이 기독교를 일으켰다면, 제2차 타락은 기독교가 일으켰다. 제국주의의 선봉도 후견도 모두 기독교였다. 제1차 물결이 기독교 밀교 전통을 일으켰다면, 제2차 물결은 기독교 밀교 전통을 주류로 진입시켰다라고 도식화하는 것으로 끝낼 수 없는 까닭이 여기 있다. 주류로 진입한 기독교 밀교 전통이 제국주의 타도의 선봉이자 후견이 되지 않는 한, “제2차”라는 표현은 무의미하다. 종교가 제국주의를 무너뜨린다? 허무맹랑하게 느끼는 사람은 가짜 종교의 노예거나 천박한 무신론의 희생양이다.


제국주의 아킬레스건을 벨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의 소재는 작은 공동체, 공동체의 평등한 연대, 관용이 일으키는 융합의 시너지다. 전형적인 모델이 이로쿼이연합이다. 이로쿼이연합 정신의 핵심은 그들의 신화다. 그들의 신화를 바탕으로 한 영성을 “이로쿼이 종교”라 이름 한다면 그 내용은 공동체적 각성, 생태학적 다신, 주술적 합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대로 제국주의를 무너뜨리는 힘인 작은 공동체, 공동체의 평등한 연대, 관용이 일으키는 융합의 시너지와 상응한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참 종교는 개인적 수행과 영성을 넘어서는 사회운동이어야 한다. 헤아리기조차 힘든 장외 미세생명체 하나하나가 신임을 알고 경외하는 ‘분위기’여야 한다. 과학 너머의 상호작용이 주는 황홀함의 체현이어야 한다.


주류로 진입한 밀교 전통이 여기에 이르지 못한다면 다만 제1차 물결의 리뉴얼에 지나지 않는다. 제1차 물결의 리뉴얼로는 세계가 지니는 신성함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신성함의 저 불온한 조건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성함의 불온한 조건은 “주술”이란 말 한 마디에 응축되어 있다. 주술은 네트워킹 화학이다. 이 숭고한 화학 방정식에는 미지수 너머의 해가 있다. 장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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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듬뿍 머금은

만개 박두 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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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 타락
스티브 테일러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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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말과 19세기 초부터 제2차 물결이 모습을 드러낸 또 다른 방식은 문학이었다.·······19세기 말 이른바 낭만파라는 새로운 시 조류가 나타났다. 이것은·······시란 주관적이고 시인의 내면의 삶을 표현하거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서정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낳았다.·······

  ·······낭만파 시인들에게는 새로운 공감정신이 다른 인간과 동물에게만 확장된 것이 아니라 전체 자연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들은 세상과 분리된 이원론적 관찰자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참여하였다.(300-402쪽)


  18세기에는 또 다른 중요한 문학적인 발전이 있었다. 현대소설의 등장이었다.·······소설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신만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소설은 인간에게 꿈꾸는 것을 가르쳤다.(콜린 윌슨)”(402-403쪽)


  새로운 감성의 파도가 이 기간의 미술과 음악 분야에도 밀려들었다.·······미술가 자신의 감수성을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작품들로 이행되었다.·······이 시기를 낭만주의 시기라고 말한다.·······

  음악에서도·······19세기 초반에 베토벤이 신구시대의 간극을 연결하면서 음악은 더 풍부한 표현력과 극적인 요소를 지니게 되었다.(403-404쪽)


아름다움의 향수享受는 본질상 개인적 소유가 아니라 공동체적 참여로 일으켜지는 사건이다. 함께 체험하고 느끼는 것이다. 제2차 물결의 “미학적 패러다임”(미셸 마페졸리)은 이 진리를 구현한 문학·미술·음악 운동에서 확인되었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이다. 어떻게 아름다움을 창조하는가? 접히고 구겨지고 구부러지고 뒤틀린 것을 폄으로써 그리한다. 이 생각을 더 밀고 가면 잘리고 끊긴 것들을 이어줌으로써 그리 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펴고 이어주는 힘은 극적인 묘사에서 나온다. 극적일수록 묘사는 정확해진다. 정확할수록 묘사는 불확정성의 진실에 이른다. 이 역설이 세계 진실의 전체, 그러니까 펴지고 이어진 세계로 함께 들어가게 인도한다. 펴지고 이어진 세계가 드러내 보이는 고요한 술렁임, 그 지상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끼도록 하는 것이 예술의 천명이다.


참된 예술의 천명은 그러므로 분리문명의 자발적 파괴이자 일치문화의 창발적 건설이다. 파괴와 건설의 동시성은 예술적 상상력과 즉흥성, 그러니까 감성폭발에 힘입는다. 감성폭발은 저 사하라시아 자아폭발을 폭발시킨다. 폭발의 폭발은 무너져 흩어지게 하지 않는다. 무너져 열리게 한다(파커 J. 파머). 열림은 전체성을 향한 네트워킹이다. 감성 네트워킹.


감성 네트워킹의 감성으로 낭만주의를 찰나의 즉흥성 속에서 상상한다. 낭만주의, 그 통속한 ‘낭만주의’ 아니다.


“18세기가 끝날 무렵 루소와 낭만주의는 자연이 곧 감성이고 감성이 곧 민주주의라는 등식을 성립시켰으며, 사회질서를 극히 인위적인 것이라 서술하고 계급 특권에 반기를 드는 일이야말로 ‘유일하게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일’이라고 주장했다.·······이때의 자연은 가난한 사람들과 연결되고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온갖 급진주의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사회가 자연을 훼손한다는 것은 아이들과 못 배운 사람들이 가장 순수한 최상의 존재라는 뜻이기도 했다. 가히 급진적 반전이었다.·······워즈워스의 업적은 루소의 과제를 이어받아 더 발전시켰고, 유년과 자연과 민주주의 삼자의 관계를 밝히되 논리로 증명하는 대신 이미지로 그려보였다는 것이다.”(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179-180쪽)


워즈워스의 시를 다시 읽어야 하듯 워즈워스의 길을 완결해야 할 천명이 이제 나네에게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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