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 - 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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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에 겨울옷을 다 버렸어요. 겨울까지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그런데 또 살게 되더라고요. 그냥저냥 지내다가도 갑자기 세영이가 예쁜 짓 하던 게 떠오르면 하··· 미쳐버려요. (울음을 삼키며) 뭐 하러 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이제는 사는 게 의미가 없죠.(35쪽-세영 아빠 한재창)


회사도 그만두었다. 교회도 나가지 않는다. 대인관계도 다 내동댕이쳤다. 이윽고 사는 의미마저 느끼지 못한다. 마침내 세영 아빠 한재창은 모든 것을 잃었다. 아니, 빼앗겼다. 빼앗긴 것 가운데 맨 마지막, 사는 의미를 구성한 존재는 다름 아닌 딸 세영이었다. 세영이를 빼앗김으로써 한재창은 모든 것을 빼앗겼다. 아니, 찬찬히 죽임 당했다. 죽음 한가운데서 한재창은 오늘 어버이날을 맞는다. 카네이션 가슴에 달아줄 세영이를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못한다. 죽임 당하는 세영이를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비의 처절히 부서진 마음조차 돌아보지 못한다. 못내 미안할 따름이다. 이렇게 아비는 어버이날 또 한 번 죽임 당한다. 더 이상 이렇게 죽음으로 오늘이 오면 안 된다. 진실이 밝혀지고 범죄자가 심판되면 내년 어버이날 한재창은 조금이나마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으려나. 부디·······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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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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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족 분들이 항상 억울하다고 말씀하실 때도 나는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우리 애는 살아서 왔으니까. 살아서 온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면서 살아야지, 했어요. 그런데 이런 삶을 사는 거잖아요. 죄인처럼 숨죽이고, 남들이 알까봐 쉬쉬하고·······

  그 일이 없었다면 우리 아이는 평범하게 살았을 거잖아요. 평생 친구들을 버리고 왔다는 죄책감을 갖고 살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 고통으로 자기 허벅지를 베고 손목을 긋는 아이들이 있다는 게 너무 억울해요.(31쪽)


가족을 잃지 않고는 그 마음 모르는 거라지만 우리 마음도 아무도 몰라요.

  아이가 뜬금없이 울 때마다 생각해요.

  ‘아직도 세월호 안에서 나오지 못했구나. 아직도 갇혀 있구나.’(32쪽-생존학생 이시원 엄마 문석연)


정직하게 말하면 나는 416 직후부터 상당한 기간 동안 생존학생과 그 가족이 겪는 고통에 거의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아마 나뿐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심지어 가족도 그랬으니 말이다. 다만, 마음을 치유하는 의자인 내가 여느 사람들과 같은 생각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 못내 부끄럽다.


그들은, 특히 생존학생들은 여전히 공포와 불안, 죄의식에 시달린다. “그 고통으로 자기 허벅지를 베고 손목을 긋는”다. “뜬금없이 울”고는 한다. “아직도 세월호 안에·······갇혀” 산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그래도 죽은 것보다는 감사한 일이라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그들 “마음도 아무도” 모른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통속한 논리로 삶과 죽음의 우열을 단정할 수는 없다. 사악한 권력이 쳐 놓은 덫에 걸려 허덕이다 비참하게 죽는다는 점에서 그날 죽임당한 아이들과 지금 서서히 죽임당하고 있는 아이들이 다를 리 없다. 생물학적 목숨 부지하는 시간의 연장이 대체 얼마나 어떻게 축복이란 말인가.


살아 있기에 더 긴 시간 동안 겪어야 하는 아이들의 참혹한 고통을 살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말이 맹렬한 물질적 진실로 들이닥친다. 살아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하면서 살아야지” 하기 전에 준엄하게 물어야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허벅지를 베고 손목을 그어서 살아 있는 것인가?


416은 개인의 생사 넘어 체제 문제다. 그 체제에서 수탈당하는 사람들의 생사는 하나다. 죽음은 장엄으로 산 사람과 일치되고, 삶은 숭고로 죽은 사람과 일치된다. 산 사람은 죽음의 행간을 채우고, 죽은 사람은 삶의 행간을 채운다. 채워진 진실은 시간을 궤멸시키고 채워진 진리는 공간을 붕괴시킨다. 해원의 장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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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이 보내고 진짜 눈만 뜨면 박근혜고 뭐고 다 죽여 버리고 싶었어요. 미치겠더라고요! 나는 무교였거든요.·······혁이 보낸 후에는 하느님을 곁에 안 두면 죽을 것 같았어요.·······하지만 하느님을 믿는다고 용서가 되지는 않더라고요. 혁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죽여 버리고 싶어요. 그리고 또 기도를 해요.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그래도 또 미워요. 그렇게 안 하면 견딜 수가 없어요.(30쪽-강혁 엄마 조순애)


416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시험에 들게” 했다. 물론 결과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반응으로 나타났다. 김삼환이 같은 세습재벌 교회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일부러 아이들을 빠뜨려 죽였다고 떠들었다. 어떤 사람은 그 동안 굳게 믿어왔던 하느님을 떠났다. 어떤 사람은 혹독한 질문을 거듭하며 여전히 하느님 곁에 머물러 있다. 어떤 사람은 뼈저린 고통 속에서 전혀 다른 하느님을 발견했다. 매우 드물게도 강혁의 엄마 조순애는 하느님을 처음 믿기 시작했다. 극우개신교 신자 대다수가 동의할 김삼환이와 같은 반응의 성격이 여타 반응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 같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그들 모두가 전제하는 하느님은 그들의 삶을 보살피는 전지전능한 의로운 거대유일신이다. 이 전제가 스스로 떠안아야 하는 모순 때문에 실은 여러 다른 반응이 나온 것이다. 어떤 반응이든 그 신관을 넘어서지 않는 한, 길은 없다. 자기 아들을 살해한 자들에게 품는 살의가 너무 괴로워 하느님에 의지해 용서하려 했으나 살의는 그때마다 되살아나고 그래서 그때마다 도리어 그 잘못(이라 스스로 생각한 것)을 용서해 달라 기도하는 참담한 악순환, 기막힌 도착倒錯을 어찌 해결한단 말인가. 조순애의 울음소리를 듣고 침묵하는 하느님은 박근혜의 웃음소리를 듣고도 침묵한다. 앞의 침묵은 징벌이고 뒤의 침묵은 포상이다.


거대유일신이 침묵으로 징벌과 포상을 뒤바꾸는 중심 저 멀리, 거대함에 금을 내어 소소함의 진실을 드러내고, 유일함에 금을 내어 여럿이 함께함의 진실을 드러내는 참 하느님 운동, 곧 소소함의 네트워킹[小少沁心]이 변방부터 일어난다. 변방이기에 416은 사건이 되고 가족이 되고 운동이 되고 네트워킹이 된다. 엄마들은 각각의 곡절 속에서 스스로 참 하느님이 되어간다. 스스로에게 기도하고 스스로를 용서한다. 스스로 진실이 되고 심판이 되고 정의가 되고 진리가 된다. 강혁의 엄마 조순애는 강혁의 엄마를 넘어 공동체 엄마가 된다. 공동체 엄마 조순애는 이미 미움을 용서의 탕제로 달여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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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이가 마음속에 자리 잡는 것이 너무 무서워요. 거기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내가 도망가는 것 같아요. 사진을 보면·······내 안의 감정을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우리 지현이 어렸을 때 모습을 보면 또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언제쯤 사진을 볼 수 있을 까·······잘 모르겠어요.(29쪽-남지현 엄마 전옥)


까꿍 놀이를 통해 아기는 공포·불안에 감응하는 법을 배운다.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무섭지만 놀이 삼을 수 있는 것은 다시 나타리라는 신뢰·희망 때문이다. 신뢰·희망이 공포·불안과 절묘하게 어긋나고 맞물리면서 경이감을 분사한다. 엄마가 보이지 않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면 놀이가 무너진다. 놀이가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거나 끝내 놀이가 복원되지 않는 일이 벌어지면 트라우마로 침전된다. 침전된 트라우마가 폭발하면 마음병이 된다.


공포·불안이 신뢰·희망으로 전화되는 순간을 더는 기대할 수 없을 때, 그 사실을 확인하고 소환해 절망을 선고하는 사물, 그 사물에 깃든 기억 앞에서 무심할 수 없기가 어른이라고 어찌 다르랴. 전옥이 무서워하는 것은 “마음속에 자리 잡는” 남지현이 오로지 “사진”으로만 존재한다는 절망의 확인이다. 확인이 절망을 영원 속에 가둘 테니 말이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딸이 너무 보고 싶어서 차마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사진이다. 사진은 다만 사진이 아니다. 찰나적으로 상실을 재현하고 절망을 격동시키는 주술이다.


이 주술은 저주인가? 저주다. 저주인 한, 그 상실과 절망은 삶의 일부가 아니다. 삶의 일부가 아닌 한, 그 상실과 절망을 야기한 죽음은 대상으로 남는다. 대상인 한, 죽음은 산 사람의 삶의 내부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산 사람의 삶속으로 들어와야 죽음은 산 사람의 삶에 새로운 신뢰·희망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신뢰·희망은 저주 주술을 전조로 바꾼다. 전조인 남지현의 사진을 엄마 전옥이 볼 수 있는 날은 이미 당도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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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은 내가 우는 걸 보기 힘들어해요.·······내가 아플까봐 걱정했던 거예요.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요.(26쪽-김호연 엄마 유희순)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 안됐지만”이 앞에 있어 역접논리를 구성한다. 불연속이며 끝내는 단절일 수밖에 없는 어법이다. 냉엄한 현실을 반영한다. 하지만 근본 이치로 따지자면 죽은 사람만 이 말을 할 자격이 있다. 그 불가능성과 맞물려 이 말은 산 사람이 차마 입에 올려서는 안 될 말이다.


산 사람이 이 말을 입에 올리려면 일반적 논리를 전복해야 한다.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죽었으니”를 앞에 두어 순접논리를 구성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뒤에 따라오는 말은 “산 사람은 살아내야 한다.”를 의미로 지니게 된다. 죽음과 삶이 연대하는 순간이다. 운명이 천명으로 승화는 순간이다. 416사건에 적용해 문장 전체를 확충하면 이렇다.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죽임을 당했으니 산 사람은 기어이 살아내야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 불의한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 산 사람은 기어이 진실을 규명하여 범죄자를 심판하고 의로운 세상을 일궈내야 한다.”


유가족도 생존자도 생존자 가족도 깨어 있는 시민도 모두 죽임당한 사람들을 구심으로 하는 동심원적 희생자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할 역사적 의무 앞에 결곡히 서야 한다. 우리의 의무가 숭고한 것은 절대불의의 권력에 의해 죽임당한 것만으로 죽임당한 사람들은 장엄하기 때문이다. 장엄이 존재하므로 거기로 가는 길이 숭고한 것이다. 숭고를 담아 나지막이 다시 한 번 입에 올린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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