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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평점 :
이리가레: 이 문화가 필요로 하는 모든 조건은 자연을 굴복시키고 은폐하며 망각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문화가 필요로 하는 조건은 참된 우리 정체성을 가리고 숨기면서 우리 각자와 우리들 사이에서 그것을 키울 수 없게 가로막는 상당히 아둔한 장치임이 드러났습니다. 전통이든 현재든 우리 세계는 일종의 연극이거나 그 변종으로 보입니다. 이 연극에서 생명은 더 이상 순환하지도 자라지도 키워지지도 공유되지도 않습니다. 자연에게 살게 해달라고 의탁하면서 이 연극을 비판하는 것이 내게 유일한 가능성으로 다가왔습니다.(36~37쪽)
마더: 일부 과학자, 철학자, 종교적 광신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대문자 ‘생명’을 선호하면서 여러 생명들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비건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비건은 식물성이라는 생명 형태를 희생시키고 동물 생명만을 협소하게 옹호하는 데 굴복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그로테스크하고 뒤집힌 세계의 근원에 놓인 것이 바로 이 생명 망각입니다. 이 세계에서 생명 긍정 철학은 니힐리즘의 정점으로 보이고, 식물에 관심 두면 동물과 인간을 배려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며, 생명과 지능의 의미를 둘러싼 오랜 편견은 상식의 마스크를 쓰고 ‘명징한 합리적 사유’의 산물로 여겨집니다.(189~190쪽)
이리가레에게는 식물 생명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이 생명을 의탁할 큰 존재로서 문화의 피안에 서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정체성”이다. 마더에게는 자연이 포함하고 있는 식물 생명이 대문자 ‘생명’을 선호하느라 망각하는 여러 생명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존재로 문화의 대칭점에 서 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식물성”이다.
식물성이 내게 논쟁적 각성으로 자리 잡은 계기는 불교다. 불교 승려는 육식을 하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날 한 소식 접했다는 승려에게 물었다. “불살생 의미에서 동물 먹는 것을 금하는 거라면 왜 식물을 먹는 것은 살생이 아닌가?” 그 승려는 근원적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이후 불교사상이 심오하다는 말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
똑 같은 질문을 비건에게 한다. “동물권만 있고 식물권은 없는가?” 또는 “동물권보다 식물권이 중요하지 않은가?” 비건이 얼굴 있는 것은 먹지 않는다, 식용 동물을 키우려고 아마존을 불태운다, 코로나19는 인간이 동물과 관계를 잘못 설정해 일어났다고 말할 때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거기서 멈출 때 나는 반대한다.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얼굴이라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동물 대신 식물만 먹는다고 해도 인간은 아마존을 불태우는 짓을 멈추지 않는다. 코로나19는 인간이 동물보다 먼저 식물과 잘못된 근원적 관계를 설정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다시 정색하고 당위 질문을 한다. “왜 동물을 먹으면 안 되는가?” 내 개인 현실 질문으로 바꾼다. “왜 동물을 먹지 않는가?” 나는 동물권 운운하며 동물 먹기를 멀리하는 게 아니다. 나는 동물이 식물보다 먹을거리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삼간다. 무엇을 먹느냐가 인간이 어떠하냐를 결정하는 주요 근거가 된다. 나는 동물의 분리, 편향, 기생을 취하고 싶지 않다. 나는 식물의 통합, 양향, 자생을 취하고 싶다. 내겐 식물이 동물보다 격조 높은 생명이다. 그래서 식물을 먹고, 그럴 때는 극진히 감사에 깃든다. 나는 식물을 먹을 때 신의 공양, 그러니까 하늘이 나를 먹인다고 여긴다. 여기서 마침내 근원 질문이다. “먹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먹는 행위는 다른 생명을 죽여 내 생명의 일부로 다시 살려내는 역설 사건이다. 살육殺戮도 필연이고 생육生育도 필연이다. 먹는 행위는 도구적 행위가 아니다. 먹는 행위는 존재론적 행위다. 인간은 먹는 인간homo esus이다. 인간은 먹음으로써 존재를 구현한다. ‘격조 높은 생명’이라면서 차마 먹는 까닭이 여기 있다. 차마 먹기 때문에 먹는 행위는 거룩하면서도 즐거운 제의다. 이 제의에서 진정한 사제는 먹는 인간이 아니라 먹히는, 아니 ‘먹이는’ 식물 생명이다. 먹는 인간은 예를 갖추어야 한다. 그 생명을 전유할 권리를 전제하고 먹는 것은, 심지어 동물권을 보호하기 위해 먹는 것은 ‘함부로’ 먹는 것이다. 아니. 수탈이다. 수탈당하면서 내는 식물 생명의 냄새와 신음, 그리고 비명에 아랑곳하지 않는 비건의 저 도저한 동물성이 나는 무섭다. 비건의 투철함이 내게는 종적 집착으로 다가온다. 먹는다는 것의 근원을 접어둔 어떤 최종판단도 나는 전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
예를 갖춘 근원 식사에 탐욕과 향락은 설 자리가 없다. 지나치게 많이 지나치게 맛있게 먹는 문명국가 중위 이상 집단이 없다면 저 많은 식용 동물은 물론 기업농이 벌이는 대규모 식용 식물의 생산도 필요하지 않다. 자본주의가 극대화한 탐욕과 향락의 식사 문제를 존재윤리 차원에서 재검토해야만 인간 대멸종이 저지된다. 이것이 바로 식물성 의식이다. 식물성 의식으로 벼려지지 않은 정체성 의식으로는 제대로 된 종말론적 윤리를 일으킬 수 없다. 곤드레가 어디 그냥 나물일 뿐인가, 미륵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