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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사유 -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루스 이리가레.마이클 마더 지음, 이명호.김지은 옮김 / 알렙 / 2020년 8월
평점 :
이리가레: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속성을 회복하고 자연적 속성에서 시작하기 위해 ‘당신’을, 자연적으로 다른 ‘당신’을 만나야 합니다........욕망과 사랑을 결합하는 것은 우리의 길을 여는 더 나은 방법입니다. 그 길은 우리 안과 우리 사이에서 성적 욕망이 일어나는 곳에서 출발합니다. 성적 끌림, 특히 성애적 끌림이 표현하는 근원과 부가적 생명 에너지를 육욕적 결합으로 바꾸는 일은 우리의 인간적 존재를 성취하고 모든 생명 존재들과 더불어 행동하고 교감하는 인간적 방식을 습득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142~143쪽)
마더: 나는 자기를 강화하는 가상의 회로에 의거하여 퓌시스의 충만함 가운데 있는 ‘하나’에서 사랑 속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둘’로 옮겨가고, 이 둘이 서로를 마주한 둘과 퓌시스로 옮겨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자연과 함께하는 고독은 다른 인간을 어떻게 더 사랑할지를 알려주는 반면에, 내 경험상 더 이상 편향적이지 않은 사랑은 개개 자연의 고유함을 더 잘 존중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이 세 계기는 극복해야 할 단계가 아니라 인간으로 존재하고 인간이 되는 과정에서 서로를 보완하는 똑같이 중요한 세 측면입니다.(304쪽)
스테파노 만쿠소·알렉산드라 비올라의 『매혹하는 식물의 뇌』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암수한꽃이란 암술과 수술이 하나의 꽃에 모두 존재하는 식물을 말하며, 여기에 속하는 식물들이 가장 많다. 이론적으로 모든 암수한꽃 식물들은 자가수분을 한다........자가수분은 편리하기 때문에 많은 식물(특히 밀이나 벼와 같은 목초)들이 이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사실 많은 목초류와 제비꽃류, 난초류, 육식식물은 꽃이 피기 전에 봉오리 속에서 수분이 이루어지므로 폐쇄화라 부른다.”
방임수분을 이유로 들어 식물의 성과 인간의 그것 사이에 굵은 금을 긋고, 심지어 식물이 중성이라고까지 말한 이리가레가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떤 태도를 취할까? 시종 성 문제에 관해서는 적극적인 언급을 하지 않은 마더는 어떤 태도를 취할까? 이 미개화자가수분의 상황을 구태여 의인화하지 않더라도 『식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에서 수잔네 파울젠이 쓴 “녹색 섹스”라는 개념의 풍경을 충분히 ‘섹시하게’ 상상할 수 있다. 상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감지하지 못하는 지극히 촘촘하고 농밀한 성애가 식물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고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적 생명 인식이 아닌가.
두 사람의 대화가 종착점에 육박하고 있다. 이리가레에게 식물은 인간과 구체적인 배음구조 속에 놓인 연속성으로 다가들어야 한다. 마더에게 식물은 각별히 성애 감각을 돋을새김해주는 차별성으로 드러나야 한다. 두 사람 모두 어딘가 편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완전히 포개지지도 쪼개지지도 않는 존재와 사랑의 비대칭적 대칭 사유로 온전히 배어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식물에 대한 개별화된 경험과 농밀한 이야기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산골 아이의 원초적 경험에서 시작해 인생의 온갖 풍상을 식물처럼 견디며 살다가 이윽고 바리공주의 ‘뼈살이 풀, 살살이 풀, 피살이 풀’을 손에 든 임상가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가 끝일 리 없다. 풀 든 임상가는 풀에 빙의되어야 하니까. 천명이 향하는 길을 발맘발맘 좇으며 풀 사람으로 살아갈 여생 앞에 곡진히 엎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