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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째 구비-비결정의 세계에 맡기다

 

그린 상담의 연금술은 마음의 병과 인간의 품격이 동일한 것일 수 있음을 알게 해준, 매우 지난한, 아픈 여정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여행을 멈추면 따스한 행복감에 젖어 남은 삶이 더없이 안온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안온은, 그래서, 적요寂廖가 되고 맙니다. 멈춰 선 천국, 고요한 극락이 우리가 이르러야 할 지복 시공은 아닙니다. 사람인 한, 생명인 한 부단히 흘러야 합니다. 흐르려면 거듭 부정해야 합니다. 통속의 가르침은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 합니다. 틀렸습니다.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은 부정不定입니다. 거듭 부정하면 긍정과 부정을 넘어선 비결정의 세계로 풀립니다. 비결정의 세계는 어디에도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자재의 세계입니다.

 

자유자재의 세계는 역동적 사건입니다. 불변의 실체가 아닙니다. 한 번 깨치면 더 닦을 필요가 없는 돈오가 아닙니다. 일단 올라가면 절대 내려오지 않는 경지가 아닙니다. 찰나마다 솟아오르는 불꽃입니다. 구조를 깨뜨리는 도발입니다. 남이 만든 유를 따르지 않는 앙칼짐입니다. 예술적 창조입니다. 미학의 실천입니다. 결 따라 노니는 삶입니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마음에 걸림 없이 기꺼이 맞고 보내므로 언제든 어디서든 격정 상태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더 이상 괴로움의 근원이 되지 않는 아픔이니 든들 어떻고 난들 어떻겠습니까. 표표히 흐르는 대로 무심히 흘러갑니다. 문제 삼지 않아서 해답도 일없습니다. 산은 산, 물은 물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누구에게도 이런 삶은 아득해 보입니다. 말이 쉽지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하실 것입니다. , 공감합니다. 하지만 아무나 못 간다는 말이 나도 못 간다는 말하고는 다릅니다. 어찌 하면 이런 자유를 우리 삶에서 구가할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신과 삶을 믿고 내맡기는 것, 똑 그 하나만이 그 길입니다. 내맡기면 탐욕이 사라집니다. 탐욕이 사라지면 집착이 사라집니다. 집착이 사라지면 놀 수 있습니다. 노는 것은 일상사입니다. 붓다가 회향하듯, 예수가 창기나 세리와 함께 하듯, 원효가 저자거리 걸인과 함께 춤추듯, 정녕 격정에서 놓여났다면 그 삶은 평범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울 자리에서 울고, 웃을 때 웃는 것, 그뿐입니다.

 

  ☸ 여덟째 구비-절벽 끝에서 밀어버리다

 

마지막 구비는 마침내 절벽입니다. 절벽일 수밖에 없습니다. 절벽 끝에 서서 말을 끊어버립니다. 말을 끊으니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머릿속이 하얘지니 마음이 텅 빕니다. 마음이 텅 비니 그냥 모를 뿐입니다. 그냥 모르므로 더 이상 치료니 뭐니 할 까닭이 사라집니다. 까닭을 잊은 채 오직 살아갈 따름입니다. 목표도 계획도 의미도 가치도 심지어 참 나도 찾지 않은 채로 다만 살아갈 따름입니다. 마침내, 절벽 끝에서 그인 나를 밀어버립니다, ! 허공에 뜬 그인 내가 이내 아래로 떨어지고 만다면 그린 상담은 소박한 열매를 거둔 것입니다. 허공에 뜬 그인 내가 이내 위로 날아오른다면 그린 상담은 쪽박 차고 만 것입니다. 과연 뭐가 대박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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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째 구비-비대칭적 대칭구조를 품게 하다

 

해독 과정을 거쳐 부정적 에너지에 대한 깊은 혐오를 걷어내고 어둠과 빛을 차례로 받아들이는 동안 일어난 변화는 실로 대단합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하지 않은 힘 때문에 파괴당했던 삶의 전체 구조가 복원됐습니다. 전에는 부정 감정 일극집중이었습니다. 이제는 팽팽한 균형이 싱그러운 생명 감각을 일깨웁니다. 밝은 자기 자신과 어두운 자기 자신이 서로 마주보고 전체 사실을 생생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참 삶으로 건너가는 강물에 배를 띄우고 일렁이는 푸른 물결 위에 놓일 때 뼛속을 파고드는 양날의 감각, 그러니까 두려움과 놀라움의 도저한 비대칭적 대칭의 물질 느낌으로 충만해집니다. 여기가 바로 새로운 아틀란티스입니다.

 

가라앉았다가 다시 솟아오른 이 대륙은 전체성을 성찰하기 위한 첫 번째 시공간입니다. 마주보고 있는 에너지 체계가 각각의 중심에서 서로를 주장하고 상대방에 길항하는 모순·공존의 장입니다. 독립된 자율 존재로서 대칭하는 가치가 각기 가차 없이 자기 긍정을 밀어붙임으로써 대립의 척력이 극대화 하는 상황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힘차게 살아가지만 정반대로 나날이 죽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삶의 의지와 죽음의 의지가 격렬하게 대립하는 역동적 모순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죽음은 한사코 삶을 밀어내고, 삶은 한사코 죽음을 밀어냅니다. 서로를 부수기 위해 자신을 극단적으로 단단하게 담금질하고, 날카롭게 벼립니다.

 

급기야 서로 부수기 위해 꿰뚫고 들어갑니다. 관통貫通입니다. 팽팽한 대치, 밀고 밀리는 흔들림, 선택과 후회, 분노와 좌절이 뒤엉키면서 불편하고도 아프게 삶의 전체성을 향해 비틀비틀 휘청휘청 나아갑니다. 파국에 이르기 직전 벼락같이 알아차립니다. 상대를 없애고 나면 나만 남을 줄 알았는데 나도 없는 참담한 상황을 말입니다. 돌연히 깨닫습니다. 네가 있어야 내가 있구나, 내가 있어야 네가 있구나. 깨달음은 서로 관통하고서야 얻어진다는 진실이 인간의 숙명입니다. 불가피한 불화입니다. 불가피한 불화는 가차 없는 분리를 전제합니다. 분리의 극한에서 일치를 비원으로 세울 수 있습니다. 그 비원이 인간을 숙명에서 천명으로 이끕니다.

 

  ☸ 여섯째 구비-스스로 대칭을 깨뜨리게 하다

 

이렇게 어렵사리 복구된 비대칭적 대칭구조를 품는 것은 부정적 에너지의 독을 빼고 긍정적 에너지의 현실성을 확인함으로써 생명의 본디 모습을 되살리긴 했으나 마주보는 두 힘이 서로를 밀어내는 중심 집착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갈등과 대립의 원심력이 뒤끝 작렬인 상황입니다. 서로 기대는 존재임을 확인했지만, 낯설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국면입니다. 죽기 살기로 싸우다 탈진해서 서로의 등을 기댄 채, , 이젠 너도 나도 살 수밖에 없구나, 하지만 뻣뻣해서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정녕 둘 다 살려면 어찌 해야 할까요? 그야말로 목숨 걸고 확보한 진실의 전체성을 지키며 건강하게 살려면 어찌 해야 할까요?

 

뻣뻣함을 풀고 낭창낭창해지려면 힘을 빼야 합니다. 보는 것을 가지고 말하자면,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이른바 중심시각central vision에서 보고 싶은 것을 둘러싼 조건을 돌아보는 이른바 주변시각peripheral vision(분산/-중심시각이란 표현이 더 적합할 수 있다.)으로 이동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이 보는 범위 차 문제가 아닙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볼 때는 집중, 주위 조건을 볼 때는 주의가 필요하므로 원리가 전혀 다른 시각입니다. 집중할 때는 보고 싶은 것 외에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주의할 때는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지만 아무 것에도 집중하지 않습니다. 전체를 보려 하면 주의 쪽으로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렇게 시각을 바꾸어서 다다른 전체성의 두 번째 국면에서 사뭇 다른 풍경을 목도합니다. 날카롭고 단단한 자기 자신이 상대를 꿰뚫어버린 줄 알았는데 도리어 상대가 받아들여준 것이었다는 진실. 상대한테 무력하게 뚫려버린 줄 알았는데 도리어 자기 자신이 빨아들였다는 진실. 흡수吸收입니다. 관통과 흡수의 비대칭적 대칭은 흡수 국면에서 마침내 깨어집니다. 나와 너의 분리가 없어집니다. 슬픔과 기쁨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병든 상태와 건강한 상태의 대척점이 가뭇없습니다. 모순이 공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껴안습니다, 맞바꿉니다, 뒤집습니다. 살갑습니다. 따뜻합니다. 말랑말랑합니다. 이윽고 서로 배어듭니다. 더불어 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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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넷째 구비-맞은편 진실을 보이다

 

고통을 정확히 드러내는 것은 아픈 사람의 시지를 칼 같이 세우는 것입니다. 그 칼 같은 만큼 삶의 전경을 보려면 맞은편 진실이 필수입니다. 지금 얼마나 아픔에 시달리고 있든, 아무리 살았으나 사실상 죽은 삶을 살든,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닌 한, 아픈 사람의 생명에는 삶을 지탱하는 힘이 엄존합니다. 고통의 어둠 맞은편에 생명을 지키는 밝은 에너지가 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도저한 진실입니다. 고통 한복판에서 이 진실에 유념하기 힘든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단 하나의 격정이 다른 모든 감정을 제압합니다. 그러나 격정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빛이 비췹니다. 여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구비는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모든 아픔은 생명이 있고서야 가능한 아픔입니다. 생명이 먼저 있었습니다. 거기 빛 또한 먼저 있었습니다. 이 장엄한 진실을 다시금 오소소 소름 돋는 맑은 마음으로 직면해야 합니다. 가령, 어머니한테 버림받아 우울증이 벼락같이 내려왔다고 할 때, 어머니가 내게 생명을 준 사건이 먼저 천둥처럼 울렸다는 사실을 비수에 찔리듯 알아차려야 합니다. 버림받은 슬픔, 원망, 분노, 외로움, 그리움, 모두 살아 있기에 그 생명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입니다. 피고름이 섞인 눈물일지라도 그것은 죽은 자의 눈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 생명 표지입니다. 맞은편 진실의 언덕에는 낯선, 그러므로 더욱 웅숭깊은 그 빛 부신 황금나무가 우뚝 서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살아 있는 한, 내 생명에 엄연히 존재하는 빛에 대해 고마워해야 하는 까닭이 존재합니다. 공포·불안, 우울이란 이름의 내 어둠 저 건너편에 시리도록 밝은 빛이 있어, 그 당당함이 있어, 세포 하나하나가 탱탱하게 발기하는 전율이 있어, 마디마디 후들거리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비록 코로나블루에 뒤덮여서 숨죽인 채 웅크렸을망정 그렇게 묵묵히 견뎌준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엎드려야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내가 코로나블루보다 작지 않다는 진실입니다. 코로나블루보다 더 큰 나이기에 여태까지보다 더 큰 인생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구비 돌아서면 더 큰 인생의 지평선이 펼쳐져 있습니다. 설레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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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셋째 구비-고통을 정확히 드러내게 하다

 

어두운 감정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억압, 퇴출의 헛된 노력이 습관으로 쌓인 마음병 앓는 사람에게는 드러난 감정과 숨겨진 감정, 그러니까 몸 반응으로서 감정 사이가 어긋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거듭되는 삶의 실패가 내면에 고착시킨 부정적 예기가 밖으로 드러낸 낙관적 소망을 제압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아픈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무심코 비관적 소망을 드러내는 방어 전략을 씁니다. 두 가지 이득이 있습니다. 바라는 대로실패하더라도 덜 실망스럽고, ‘요행히성공하면 갑절로 기쁘니 말입니다. 이런 삶이 지속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성취가 안 되거나, 되더라도 미미합니다. 마음병 앓는 이에게 거의 전혀 예외가 없습니다.


이 어긋남을 따뜻하게 받아 안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앞 구비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해야 할 일은 유심히, 그러니까 대놓고 숨겨진 감정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를테면 정면으로 작정하고 어긋나게 하 것이지요. 부정적 평가 때문에 억압되어 있던 감정을 예술적으로 정확히 드러내면 됩니다. 무심코 하는 방어는 병적 증상이지만 유심히 하는 표현은 치료 행동입니다. 이 구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억압되고 비틀린 표현을, 예술적으로 정확히, 연극배우가 연기하듯, 각가지 감정의 결은 물론 몸 증상까지 섬세하게 감지하여 낱낱이 표현함으로써 아픈 사람 스스로 그 억압과 비틀림에서 해방되도록 하는 전복이니 말입니다.

 

감정은 실제 사건과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을 생생하고 자세하게 떠올려야 더 좋은 치료 효과가 나타납니다. 특히 충격적인 외상이 있다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가령 성폭행처럼 큰 사건이라면 내부 장기의 느낌과 근육 상태는 물론 신체 발육 상태까지 고려하되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을 재현시킬 뿐만 아니라 증상을 심화시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떠올리는 것은 안 됩니다. 정확한 자기 언급self reference 없는 떠올림은 치료가 아닙니다. 자기 언급이 해방의 시공간을 창조하고, 그 해방은 감흥을 일으키고, 그 감흥이 자유의 세계로 나아가게 합니다. 반드시, 그렇다고, 그래서 아프다고 예술적으로 정확히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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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구비-두 팔 벌리다

 

진부한 말이지만 진정한 상담이 이루어지려면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물론 열림의 결은 같고도 다릅니다. 의뢰하는 사람은 자신의 곡절을 스스로 평가, 억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의뢰 받 사람은 의뢰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선입견 없이, 자신의 지식을 전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을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의뢰 받 사람은 가르치거나 깨우치려고 덤비지 않고 공감의 말부터 건넬 따뜻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의뢰 사람은 지나치게 기대지도 말고, 어디 무슨 말 하는지 보자, 하지도 말고 맑은 마음으로 들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두 팔을 벌리고 마주섭니다. 신뢰 내음을 맡는 순간 입을 엽니다.

 

둘째 구비-맞장구치다

 

가령, 제가 어떤 사람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습니다. 그때 마침 친한 친구가 지나가다 이 광경을 보았습니다. 다가와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지해준다면 화가 더 날까요, 덜 날까요? 임상 현장에서 물었더니, 많은 사람들이 더 난다, 고 대답했습니다. 싸움의 기세를 잡은 것과 화가 더 나는 것을 혼동했기 때문입니다. 덜 난다, 가 답입니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와서 이야기할 때, 듣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어두운 감정에 휩싸인 채 하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공감하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어떤 토도 달지 않고 정서적 지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맞장구치는 것입니다.

 

맞장구치는 것은 공포·불안, 우울의 어두운 감정을 해석·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끼며 알아차리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인 한 피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는 진실에 저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불가피하지 않은 경우라도 반드시 그만한 곡절이 있다는 진실에 유념하는 것입니다. 불가피하든, 선택이든 어두운 감정 그 자체로 악은 아닙니다. 허나 우리는 어둠을 악으로 인식합니다. 아픔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인 경험이 윤리적 인식으로 둔갑한 탓입니다. 오류지만 현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둠을 악이라 혐오하는 격정도 분명히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해독解毒이 가능합니다.

 

인기 높은 자기계발서나 마음 수련 단체들은 대개 부정 감정을 내다 버려라, 부정 감정을 기억하고 일으키는 대신 긍정 감정으로 채우라고 가르칩니다. 저 유명한 긍정주의입니다. 이 긍정주의는 세계의 진실을 반 토막 이하로 만드는 위험한 사기술입니다. 정녕 부정 감정에 휘감기고 싶지 않다면 그 답을 긍정주의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긍정주의 또한 긍정 감정에 휘감기는 격정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문제 해결의 핵심은 이 격정에서 놓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독입니다. 해독하려면 오히려 이 격정을 정서적으로 지지하고 맞장구쳐야 합니다. 맞장구치면 공포·불안, 우울의 격정을 덜 수 있습니다. 그 오솔길에서 치료의 큰길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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