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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 집회의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 외 옮김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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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곰팡이로 낭·풀 공부를 일단락 지은 뒤, 꽤 여러 날을 읽지도 쓰지도 않고 지냈다. 다시 잡은 첫 책이 주디스 버틀러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풀 공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시기와 이 책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던 시기가 겹치는 바람에 독서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뿐, 꼭 읽을 책으로 분류해 가까이 두고 있어서 먼저 눈에 띄지 않았나 싶다.

 

관심 깊은 곳을 부분적으로 골라 읽었던 흔적이 있어 먼저 거기부터 살폈다. 대부분 사라졌으나 저자를 드러내는 본성을 떠올리자 빠른 속도로 기억이 복원되었다. 처음부터 다시 통독해도 여전히 관심은 울퉁불퉁하다. 내 독서 습관에 비추어 비교적 빠른 속도로 통독을 마쳤는데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역시 내 독서 습관에 비추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번역자 도움을 받기로 했다. 범상치 않은 전공 이력에 신뢰를 주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에 힘입어 간과한 주안점을 건져내 전체 맥락에 풀어 놓으니 자연스런 이해 흐름이 만들어졌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 책에 소개한 바를 따르면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서 젠더와 퀴어 이론, 그리고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학자다. 그 스스로가 레즈비언이자 페미니스트며, 퀴어다. 나는 이미 다른 경로를 통해 저자를 알고 있었다. 그 삶과 이론과 실천을 내 인연에 맞는 전폭으로 공감하고 동의하고 응원한다.

 

  (2) 우선, 책 제목 이야기.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는 이 책 제2장 제목인데 책 전체 제목으로 삼았다. 번역 출판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로서 원제인 집회의 수행성 이론을 위한 노트NOTES TOWARD A PERFORMATIVE THEORY OF ASSEMBLY는 부제가 되었다. 이는 필경 저자 자신이 본디 원했던 제목이 연대하는 신체들Bodies in Alliance이었다는 사실과 관련 있으리라. 게다가 수행(성 이론)이라는 용어 자체가 한국 독자에게 낯설 뿐만 아니라 주의 깊게 탐색해도 함의를 산뜻하게 뽑아내기 어렵다는 측면이 고려되었을 듯하다.

 

말이 나온 김에 번역 문제를 짚고 가자. 번역 문제가 없는 번역서는 물론 없겠지만, 이 책은 유난히 결정적으로 중요한 단어들 번역이 적어도 내게는 자꾸 독서 속도를 떨어뜨리게 한다. 대표적인 예가 가장 중요한 단어인 수행성이다. 제목에 쓰인 performative의 명사인 performativity가 수행성의 원어인데 그러면 수행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 번역자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수행하면 수행修行부터 떠올린다. 번역자들은 수행遂行을 염두에 두고 번역했을까? 사실 遂行이라면 더 분명한 실천이란 단어가 있을 테고 거기 대응하는 practice가 있으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performativityperformance에 보편적, 집합적 속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를 담았다. 그렇다면 단도직입 "퍼포먼스" 함의를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가령 예술에서 퍼포먼스는 신체행위 또는 행위신체 자체가 예술이고, 예술 자체가 신체행위 또는 행위신체인 경우를 가리킨다. 이를 준거점으로 삼아 함의를 정리하면, 수행은 신체행위 또는 행위신체인 정치, 정치인 신체행위 또는 행위신체라 할 수 있다. 수행은 모호하다개인 performance 너머 공동, 그러니까 네트워크 performativity가 책 전체를 관류하는 핵심어라 할지라도 이 사실은 불변이다.

 

수행을 필두로 중요한 단어인 상연, 출현, 현전, 노출 같은 단어들이 교차적으로 쓰일 때 그 구체적인 내용이 선명히 잡히지 않는다. 꼭 그렇게까지 명석함을 요구해야 할 필요가 없는지는 몰라도 내 독서 현실에서는 그랬다. 뭐 워낙 천천히 읽는 사람이라 그다지 큰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지만 어정뜨게 맴도는 어의를 헤아리느라 보내는 시간에 마냥 관대할 수만은 없다. 공들여 읽은 만큼 책은 가치를 드러내는 법이라지만 이런 공을 말하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싶다.

 

  (3) ·풀 공부 이전과 이후, 이 책을 읽을 때 느낌이 많이 달랐다. 이전에는 비록 부분적으로 읽었지만 매우 놀라워했었다. 이후에는 읽는 동안 못내 답답했다. 그 답답함은 주디스 버틀러가 모자라서가 아니다. 그가 인연 따라 생성한 사유와 내가 인연 따라 생성한 사유 사이에 흐르던 강이 더 넓고 깊어졌기 때문이다. 그 강이 바로 낭·풀 내러티브다. ·풀 이후 내 눈에는 그가 치열하고 치밀하게 구사하는 언어가 대부분 은유로 읽힌다. 인간이 낭·풀 은유인 이상 불가피하다. 나는 이 사실이 고맙다. ·풀 없는 사유에서 주디스 버틀러가 탄생했다는 사실도 이에 못지않게 고맙다. 고마워서 고맙게 읽으며 내 삶 결과 겹을 다시 한 번 들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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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치료를 하는 사람이라 정신이 바깥으로 드러내는 신체 증후를 소미 섬세하게 포착할 수 있다. 지하철 객차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일거수일투족에는 그런 증후가 넘실거린다. 거의 대부분 비슷한 옷을 입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지만 정신장애(에 근접한) 증후는 가차 없이 내 감각을 파고든다.

 

의학 공부 이전에는 그런 증후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여느 사람처럼 혐오하거나 비난했다. ·풀 공부 이전에는 예리하게 포착한 사실에 머무를 뿐이었다. ·, 마침내 팡이 생명이 지닌 네트워킹 본성을 깨달은 뒤부터는 기도한다. 기도란 그 증후 나타내는 사람이 내가 모르는 어떤 인연을 통해서 건강한 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네트워킹 온 생명에게 소식 전하고, 도움 청하는 발화행동이다. 상담하는 임상의임을 밝히고 정신에 문제 있으니 치료 받으시라 직접 다가가 권하는 일이 다시없이 몰상식한 한, 필경 이 기도 말고 최선은 달리 없다.

 

낯선 이를 위한 기도. ·, 마침내 팡이 공부가 내게 가져다준 실팍한 변화 가운데 하나다. 이 변화는 구체적으로 어떤 연쇄반응을 일으킬까? 가방 두 개에다 하얀 면장갑 수십 켤레를 넣고 다니며 수시로 갈아 끼던 60대 여성은 평안 세계로 접근할 수 있을까? 커다란 백 팩을 메고 조그만 틈이라도 보이면 헤집고 들어가 남을 밀어내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던 70대 남성은 평화 세계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기도하는 내가 시나브로 평안해지고 평화로워지는 사건과 짝을 이루는 사건이 어디선가 일어나리라는 설렘은 분명하게 있다.

 

종교인들은 기도 응답을 말하거니와 나는 기도 순환을 말한다. 순환은 호혜적인 선물 네트워킹이다. 네트워킹에서 호혜 당사자는 직접성과 간접성 사이를 가로지른다. 무궁무진한 결과 겹으로 얽히고설킨다. 얽히고설킨 꿈을 따라간다. 꿈은 길을 알고 있으므로. Qui de l'arbre ou du soleil réchauffe l'autre?



 _Maria Riv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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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높이 떠 있는 지성소가 아니다 

하늘은

광활한 허공이 아니다

하늘은

뭇 별들의 틈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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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년 들어 통 꿈을 꾸(거나 기억하)지 못했다. 202211일 새벽, 꿈을 꾸었다. 이 꿈은 선명하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도 시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에 그대로 재현되곤 한다.

 

샤워나 배변 조건이 매우 열악한 풍경으로 그려진 힘든 여행을 끝내고 마침내 돌아가는 길이다. 집 가까이 이르러 문득 보니 하늘에 영롱한 무지개가 떠 있다. 얼른 사진기를 꺼내든다. 초점을 맞추는 찰나 그 무지개가 쌍무지개로 바뀐다. 놀라면서 셔터를 누른다. 곧이어 차르르필름 되감기는 소리가 들린다. 손으로 전해지는 진동감각도 워낙 생생해 잠시 거기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마지막 와 닿는 감각과 함께 꿈에서 깬다. 즉시 일어나 불을 켠다. 10년 넘게 한의원에 두고 쓰다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20211231일 저녁 처음 집으로 들고 온 일기장을 편다. 생전 처음 꿈 일기를 쓴다. 03:32.

 

즉각 알레고리 해석을 마쳤으나 쌍무지개가 탐색 이미지로 걸려 있지 않아서 기억지성소에 모셔만 둔다. 이 꿈을 영몽이라 하면 신비주의일까; 개꿈이라 하면 네트워킹 모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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