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만 찍는 사진작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세계 명산을 거의 모두 돌아다녔는데 결국은 도봉산이다. 산 규모는 작지만 아름다운 산의 거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전체 균형은 물론 다양한 세부 갈래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동안 이런저런 방식으로 여러 번 도봉산 주위를 어정거렸지만, 북한산과 경계를 이루는 우이령길 걸은 일 말고는 겨우 발치에 잠깐씩 머물렀을 뿐이다. 도봉산 서울 권역만이라도 걷는다 싶게 걷자, 특히 그 길 끄트머리께에 있는 연산군 묘를 꼭 한 번 다시 가보자, 싶어 치과 치료 끝나고 지하철을 이용해 도봉산 쪽으로 이동했다.

 

도봉역에서 내려 천변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숲으로 들어간 뒤 처음 20여 분은 익히 아는 길이라 빠르게 지나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고사하거나 베어 넘어진 등걸에 터 잡고 살아가는 버섯이 미세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기 때문이다. 그때와 이때가 다르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내 의식이 들을 수 없는 소리로 말미암아 깨어났다고 할까. 도봉산 오길 잘했다 연발하며 수시로 길을 벗어나 숲을 들락거렸다.

 

늘 그렇듯 사람들은 흰 수염 꽁지머리 노인이 하는 짓을 힐끗 한번 볼 뿐 바삐 지나갈 따름이다. 가끔 하늘도 올려다보지만, 눈은 덜 되바라진 낯빛으로 나를 기다리는 돌꽃이며 버섯을 보기 위해 후미진 구석구석을 물걸레질하듯 닦고 다닌다. 기우는 해, 원근이 다른 도시 소음, 수없이 오르내리는 길이 천천히 아래로 향하는 느낌 따위로 어디쯤 왔는지 짐작하며 걷고 또 걷는다. 어느 순간 문득 연산군 묘를 알리는 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거의 다 왔구나.......

 

나는 50여 년 전에 연산군 묘에 온 적이 있다. 미술 숙제인 탁본을 하기 위해서였다. 누구와 같이 왔었는데 그가 누군지, 어떻게 와서 어떻게 돌아갔는지, 무엇보다 거기 연산군 묘가 있는 줄 어찌 알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 마치 버려진 폐허처럼 쓸쓸했던 묘역 풍경은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이는 필경 어두운 감정이 묶인 기억이어서 보존되었으리라. 그 뒤로도 잊을 만하면 쓸쓸했던 묘역 풍경이 뜬금없이 떠오르곤 했다.

 

지금은 이 기억이 버려진 존재에 대한 내 감응 감수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 여느 사람과 다른 연산군에 대한 감정이 그 중심에 있거니와 그래도 50년 넘은 기억을 되살려 역사 인물의 묘를 다시 찾기까지 하는 심사를 더 깊이는 모르겠다. 다행히 묘는 몰라보게 잘 정돈·관리되고 있었다. 뭔가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해지는 심사도 더 깊이는 모르겠다.

 

스마트폰 가득 채운 돌꽃, 버섯 사진 끄트머리에 놓인 묘역 사진 석 장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문득 박두진 시 <도봉>이 떠오른다.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정신이 적요해질 무렵 이 ㅅㅅㅅㅅㅅㅅㅅ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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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5-30 1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ari_che님 글과 사진은 항상 못보고 지나치던 것들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네요. 오늘도 90도록 꺽인 나무와 연산군의 묘를 보며 꺾인 삶 역시 또 그대로 삶이기도 하겠다 뭐 그런 생각을 합니다. ^^

bari_che 2022-05-31 08:33   좋아요 1 | URL
저는 그저 제 본성에 맞춰 소미한 관지대로 살아가고 표현합니다. 알아차리시는 바람돌이님 시선에 감사할 따름입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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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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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를 인식하고 철회하면 개성화를 가리키는 중요한 이정표로 작용한다. 객관적이라고 믿었던 바가 인간 감정으로 가득 찬 바깥 세계 이미지에 힘입어 인간 정신에 되비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사실을 분명히 직시할 때만 투사로 말미암은 강요와 왜곡은 깨진다.(289)

 

본디 투사는 자신이 지닌 욕망을 타자에게 뒤집어씌움으로써 은폐하는 방어기제다. 이 이치를 그대로 적용하면 바깥 세계, 그러니까 물질에 실체를 투사한 궁극 목적은 인간 정신을 실체화하고자 하는 욕망을 은폐하기 위해서다. 도달지점은 약간 다르지만 융도 맨스필드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채, 거기를 향해 달려왔다. 자각하지 못한 까닭은 그들이 인생 맥락상 역사적 사유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갈릴레이가 유럽인에게 실체 우주를 가리키기 전까지 실체는 신이었다. 더는 신을 실체로 인정할 수 없다는 섬밀한 저항이 고전물리학이고 그 기치가 물질 실체였다. 물질 실체가 주도하는 과학혁명 덕에 외부 세계가 화려하게 변하는 데 눈길이 쏠려 인간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대중은 이 변화를 기적으로 받아들이며 열광했고, 통속 과학자와 기술 정치세력은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바 괴물 지구촌을 구축하는 데 매진했다. 그 사이 극소수 천재들은 과학이 물질 실체를 전파하는 사도가 아니라, 물질 실체를 부정하는 관측정의 주체임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중세 대중에게 라틴어같이 암호나 다름없는 수학적 과학용어로 그 비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들은 중세 이전 신 실체 옥좌를 무혈혁명으로 차지했다. 생각해보라, 처음부터 신 대신 인간을 실체화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를. 이 얼마나 영악 무인지경 투사인가.

 

인간이 정작 철회해야 할 투사는 물질 실체 투사가 아니다; 영악하게 숨긴 자기 실체 투사다. 맨스필드는 무슨 생각으로 여기 이렇게 썼을까? 그가 보기에 정신주의에 갇힌 사람은 융이지 자신이 아니다. 자신은 융이 주저앉은 지점을 넘어서 대극 합일에 도달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방식으로 대극 합일에 도달할까. 그게 인도유럽어 아리안-힌두 전통에서 가능한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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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실체를 어떤 식으로든 다른 원칙으로 대체하지 않고 부정한다. 현상에 대한 지고한 진리는 상호의존, 상호연관뿐이다. 이 외에 더 말해질 수 없고, 말해져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윤회에 더욱 확고하게 고정하는, 본래 존재하는 또 다른 우상을 세우게 되기 때문이다.(274)

 

 

중도불교 귀류 논증은 서구와 다르다. 상대 주장이 오류임을 부정으로 증명한 뒤,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 대안은 어떤 식으로든 부정될 테고, 그러면 부정을 부정하는 꼴이 되어 결국은 긍정으로 되돌아가고 말기 때문이다. 매우 현명해 보이지만 반 똑똑이고, 그래서 오류다. 그들도 맨스필드도 알아차리지 못하니 따끔하게 톺아주자.

 

우선 논리 문제. 부정을 부정하면 긍정이 되는가? 무슨. 아리안 전승 깨달음은 여기까지다. 부정을 부정하면 긍정이 되는 일은 형식논리 안에서만 일어난다. 형식논리를 넘어선 세계에서 부정을 부정하면 불확정-원효 어법으로 하면 무애-이 된다. 불확정은 물질 실체론을 부정하기만 했을 때 불가피하게 떨어지는 정신 실체론도 부정함으로써 물질과 정신 이원론, 실체 비실체 이원론을 관통한다. 실체 비실체 이원론이란 말이 이상하게 들릴는지 모르지만, 물질 실체 부정은 정신 실체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님에도 논리력 부족으로 그렇게 되었으므로 아리안 전승이 자초한 결과다. 부정을 부정하는 일은 딱 한 번 거듭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무한히 다음 부정을 열어 놓음으로써 이원론과 그 쌍생아인 일원론을 타파하고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여여 세계에 참여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 이치를 모르므로 저들은 끝내 실패한다.

 

다음 실천 문제. 중도불교 승려라면 예외 없이 참선·명상 같은 집중 수련을 통해야만 대극 합일에 도달한다. 이 실천은 물론 정신 수련이다. 정신 수련으로 도달하는 대극 합일이 참 대극 합일일 수 있는가? 저들이 도달한 대극 합일이 뇌 현상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이 깨달음이 하는 실천, 즉 자비행은 무엇인가? 생불이라 일컫는 중도불교 높은 승려가 행하는 자비행은 실제로 도탄에 빠진 인간, 인간 탐욕에 희생당하는 동물, 동물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아 무차별로 살육되는 낭·, 그리고 돌꽃, 팡이, , 버금바리, 으뜸바리를 어떻게 살리고 있는가? 대극 합일에 도달한 저들의 정신이 정신주의가 아니라는 증거를 나는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맨스필드가 아는 중도불교 생불들은 모르니 우리나라 생불들을 떠올려본 결과, 그렇다. 참선해서 공 진리에 이르고 그 다음 자비행으로 가는 길은 사도다. 원효 길은 그 반대다.

 

원효는 흔히 일심화쟁무애 사상을 펼쳤다고 하지만 실행은 거꾸로다. 통속한 중도를 깨뜨린 원효 반야는 거듭 부정이 지닌 묘리를 현실 삶에서 깨친 덕에 체득되었다. 물질로 발현하지 않는 정신은 정신이 아니다. 정신 아닌 정신으로 공, 대극 합일을 말하는 일은 후원 근처에도 가지 않고 창덕궁 진경 봤다고 말하는 일보다 더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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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죽나무꽃은 모르는 이가 너무 많고 아는 이도 너무 쉽게 지나치지만 참으로 예쁜 꽃이다. 만개해도 종bell 모습을 지키며 다소곳 땅을 향하기에 꽃말이 겸손이다. 이 겸손한 한 생이 끝나 그리던 땅을 향해 떨어지다가 더러는 이렇게 시즌2 은총을 누리기도 한다. 이 은총에는 하늘 향해 온몸 활짝 펴는 황홀이 보너스로 추가된다. 그지없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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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불교에서 공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특정한 존재인 실체에 대한 부정이다.......너무 광범위하게 실체를 정의하면 허무주의가 따라오게 되고, 다음에는 무가 존재하게 된다. 반면에, 너무 좁게 정의하면 엘리트주의가 따라오게 되고, 그러면 무상 종지가 강하게 부정하는바 사람과 대상이 영원한 본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두 극단을 조심스럽게 피해야 한다. 중도는 양극단 혼합이 아니라 철저한 반박이다.(234)

 

저자는 귀류 논증 전통에 따르는 티베트 불교를 중도불교라 일컫는다. ‘중도라는 번역이 정확한지 의문이 든다. 중도는 불교 최상 범주 언어로서 곧 정도를 말한다. 정도는 삼법인 또는 삼특상으로 집약되는 불교 보편 종지이므로 특정 전통에 국한할 수 없다. 공을 일관되게 말하는 사실로 보아 이른바 북방 대승 가운데 한 흐름을 따르는 듯하다.

 

그가 어디에 서 있는가, 자체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내리는 최종 결론은 그 전승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 진경을 보기 전, 일단 여기 이 진술은 정확하다. 붓다는 인식론적 절대주의와 회의주의, 존재론적 영원론과 허무론 양극단을 반박한다. 이 반박이 중도다. 중도는 중간이 아니다. 패권을 쥔 정통사상과 맞서는 힘에 따라 요동하기 마련이다. 붓다는 아리안-힌두 전통이 지닌 유적 제압을 거부하는 무적 기조에 극진히 서 있다. 이 기조를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중도, 곧 정도를 지키는 일이다.

 

중도가 지니는 역동적 실상을 모른 채 도식적 논리만 좇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쪽 극단에 치우치고 만다. 현실에서는 패권 정통사상에 휩쓸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마치 결곡한 양비론이 권력 편을 들게 되는 이치와 같다. 자연과학, 심지어 물리학에서도 형편은 마찬가지다. 해석 아닌 학문, 선택 아닌 진리는 없다. 내남없이 허물어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반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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