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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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지적 이해만으로는 심오한 영적 진리를 구현하기에 결코 충분하지 않다. 우리 본성이 완전히 변화하는 데는 평생에 걸친 철학적 연구와 명상, 수행이 필요하다. 나는 해방, 성불, 또는 견성이라는 말을 서로 바꿔 쓰거니와, 이 상태는 영적 거인들이 다다른 흔치 않은 성취다. 고맙게도 그들은 고군분투하는 난쟁이인 우리에게 사다리를 내려준다.(396)


강력한 동시성 경험조차 과장될 수 있다. 작은 목소리가 속삭인다: 세계가 내 유익과 교육을 위해 의미 있게 자기 배열한다면, 나는 선택받은 매우 앞선 사람이 틀림없다.......

  거의 동일한 문제가 영적 영역에서도 일어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기망상 대가이기 때문에 인간 모두에게는 늘 철학적 규율과 유능한 안내자가 필요하다.(399)

 

왜 인간은 평생에 걸친 철학적 연구와 명상, 수행으로 그것도 거인이 내려주는 사다리에 힘입어 심오한 영적 진리를 탐구해야 하는가? 왜 진리는 그토록 멀리 있는가? 왜 인간은 절대다수가 고군분투하는 난쟁이에 지나지 않는가? 난쟁이 주제에 재수 좋게 동시성 경험을 하면 감지덕지할 일이지 왜 과장하는가? 영성을 추구하면서 왜 자기망상 대가인가?

 

이 의문과 관련해 저자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영적 진리 과잉 숭배 문제인지 인간 능력 과잉 폄하 문제인지, 독자가 나서서 따져볼 일이다. 전에 함께 읽었던 책 가운데 귀중한 참조 지점을 제공해주는 둘이 있다: 스티브 테일러 자아폭발-타락-(2019.01.05.~03.30.), 그리고 찰스 아이젠스타인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2018.06.09.~09.06.)

 

<13. 고매와 심오를 거절함>에서 우리는 이미 이른바 영적 진리 담론이, 있지도 않은 세계 바깥으로 나가버린 정신 기획임을 알아차렸다. 우리가 주장하는 영적 진리는 공생 네트워킹으로서 고매와 심오를 단호히 거절한다는 얘기까지 했다. 당연히 그 뒤 얘기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공생 네트워킹 내용 이야기가 필수다. 대체 그 네트워킹은 뭐란 말인가?

 

네트워킹, 이제 여기부터 혁명이다. 혁명은 관념 인간이 말하는 비범한 초월이 아니라, 평범한 네트워킹이 창발하는 일이다. 문제는 창발의 기원이나 중심에 인간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인간이, 특히 잘나가는 인간들이 실패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가령 유심론을 전개할 때, 다른 존재에게는 심이 없다고 전제하는 실패가 대표적이며 핵심적인 실패다.

 

우리는 고양이에게 고문당하는 생쥐처럼 고통당한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고통당한다. 왜냐하면 쥐와 달리 육체적 고통에 심리적 고뇌를 더하기 때문이다.(391아무리 천체물리학 전공이라 하더라도 생물학에 이렇게 무지를 드러내는 일은 인간중심주의 철학과 영성에 함몰돼 있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피할 길이 없다. 어떻게 쥐가 다만 물질이란 말인가.

 

물질인 쥐로 하는 인간 정신질환 생체 실험이 가능한 이유가 그 물질에게 인간이 정신을 창조해주기 때문이 아닌 한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울증에 빠진 쥐의 장에 Mycobacterium vaccae를 넣어 세로토닌 생성을 유도한다. 쥐가 물질이면 Mycobacterium vaccae는 더욱 다만 물질이다. 그 다만 물질은 어떻게 건강한 인간 정신을 만드는가.

 

그보다 더 궁금한 일은 그 다만 물질이 어떻게 인간 장 속에서 세로토닌을 생산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바이러스는 또 얼마나 더 다만 물질인가. 오늘날 바이러스는 생명 세계 헌법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물질에서 정신이 나왔다는 말인데, 그럼 이 유물론이 말이 되지 않아 유심론으로 갔단 말인가, 인간 뺀 모든 마음 빛 띠를 깡그리 없애고?

 

좋다. 인간에게만 마음이 있다 치자. 그 마음이 과연 인간, 그러니까 humanbiont의 마음인가? 무슨. 인간 마음 자체가 공생 네트워킹 창발 과정이자 그 결과가 순환하는 운동이다. 물론 공생의 또 다른 주체는 인간이 물질이라 거침없이 말하는 미소 생명이다. 그 미소 생명이 무의식의 본진이며, 그 본진이 네트워킹을 지휘한다: 신의 나라, 영의 정치다.

 

신의 나라, 영의 정치가 서서히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한 일은 인간 뇌, 문명, 진보가 음성 되먹임 구조를 이탈하면서부터다. 스티브 테일러는 타락(자아 폭발),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분리라고 규정한다. 발달론 유비든 진화적 윤리학이든 신성한 경제학이든 인간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나와 있는지, 성숙한 복귀에 얼마나 큰 대가가 따르는지 통렬히 지적한다.

 

이 논의를 누락시킨 맨스필드 유심론 초월은 역사, 공동체, 평범이라는 중대한 축을 놓쳤다. 영적 진리가 개인 수행에 볼모 잡힘으로써 영적 거인의 사다리 근처에조차 가지 못하는 난쟁이들은 결국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잔같은 존재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동시성 사건이 비인과로 다가오더라도 의미로 연결되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만다.

 

분명히 해야 한다. 진정한 초월은 명상이나 요가를 통해 관념적 대극 합일에 이르는 유심론적 환각이 아니다; 평범한 생명이 작디작은 생명에 깃들어 공생함으로써 더불어 번져가는 네트워킹이다. 마음은 몸으로 발현하고, 몸은 마음으로 녹아 흐른다. 둘이 답이 아니라고 해서 하나가 답이라는 생각은 아이 생각이다. 영의 역사는 어른이 되어가는 제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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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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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 심리학에서 이론과 실제는 모두 해방철학과 다르다. 융은 우리에게 대극 긴장이 언제나 분명히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말하는 데 반해, 해방철학은 우리에게 궁극 목표는 완전한 대극 초월이라고 말한다. 융은 무의식과 대화하기, 즉 깨어 있는 동안 꿈꾸기, 생각을 제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상상하기를 제안한다.......해방철학은 작용하는 마음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정신 산물이나 형태를 철저히 부정하기를 원한다.(372)

 

적극적 상상과 대상 없는 명상은 원리와 수행에서 너무 달라서 한꺼번에 적용한다면 상쇄시킬 수 있으므로.......동시 작용이 아니라 전체를 파악하는 대안적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375)

 

융이 이 글을 읽는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구태여 애써 묘사하지 않아도 나는 그가 지을 미소를 대뜸 떠올릴 수 있다. 맨스필드는 시종일관 융이 정신 치료하는 임상의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글을 썼다. 물리학자이면서 영적 지도자인 그는 융을 심리학자로만 대했을 뿐이다. 상대방이 마주한 현실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이론 비판은, 옳고 그름을 떠나 자기 관지만 대변할 뿐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라캉처럼 실제 치료는 거의 않고 이론만 펼친 사람이라면 모르되, 융은 자신이 치료한, 또는 치료할 사람을 의식하지 않은 채 이론을 펼칠 수 없는 상황임에도, 심지어 오만한 하수 취급을 받았으니, 그가 지을 미소를 상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숙의 치료하는 과정에서 드물지 않게 받는 질문이 있다. “선생님, 우울증 치료에 기도가 도움이 될까요?” 물론 기도란 말에는 참선, 명상, 요가 따위가 모두 포함된다. 나는 질문자가 이미 어떤 종교나 수행에 접근해 있을 경우, 일단 무조건 아니!”라고 답한다. 이치는 간단하다. 그게 도움이 된다면 나한테 왜 왔겠나. 유효 여부를 떠나 기본적으로 범주 오류다. 구도와 치료가 같다면 사제와 의사가 같아야 하지 않겠나. 고대에는 그랬다가 답일 수 없다. 고대는 오늘 인간에게 외계다. 외계에 잘 적응하는 자들이 있다. 그래서 예컨대 나는 인문과 한의학, 치료로 만나다(2014)를 통해 철학자라는 강신주와 스님이라는 법륜이 치료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강연과 상담을 비판했다.

 

물론 구도와 치유에는 교집합이 존재한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고갱이가 같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맨스필드가 그토록 의지해 마지않는 유심론에 따른다면, 환자가 스스로 구도자라고 마음 구성하지 않는 사실, 구도자가 스스로 환자라고 마음 구성하지 않는 사실은 전혀 다른 만큼 전적으로 중요하다. 환자는 스스로 원해서 아프지 않았으므로 그가 처한 일극 치우침을 바로잡기 위해 적극적 상상력이 필요하고, 구도자는 스스로 원해서 참선하므로 화두 이외 사념을 제압하는 일이 필요하다. 전자는 후자보다 수준이 낮은 일도 아니고, 후자에 이르기 위한 한 과정도 아니다. 세계 내적 본성에 따르는 삶인 한, 본질과 비본질로 나눌 수도 없다. 세계는 여러 겹, 여러 결이다.

 

적극적 상상과 대상 없는 명상은 동시 작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른가? 피상적인 관찰이다. 하나를 상상하면 제압되는 다른 하나가 있기 마련이다. 하나를 제압하면 다른 하나는 솟아오르기 마련이다. 둘 다 단박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 한, 전경 속에서 보면 다르지 않다. 동시 작용이 가능하다. 아니 이치상 언제나 동시 작용이다. 모순 공존, 인도유럽어로는 역설, 내 언어로는 비대칭 대칭이다. 이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아리안-힌두 전승에서 한사코 합일을 추구한다. 정신을 뛰어넘는다고 자부하지만, 저들의 합일은 정신 기획일 따름이다; 찰나적 해방은 양자 세계에 뚫린 구멍일 따름이다. 그 해방을 일상화한다는 말은 세계 바깥으로 나간다는 말이다. 세계 바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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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하자면 하나인 세계를, 정신적이거나 더 적절하게는 영적 원리로 이해하는 일을 좋아하지만, 융은 물질과 정신 원리에 대해 중립성을 지키려 한다.(340)

 

뛰어난 지성이 세계 안에 있는 자아인 우리에게 이 세계를 구체적으로 표상하게 한다는 관념은 더 큰 맥락에 개성화를 위치시키고 인식하게 한다. 이때 개성화는 대극을 다룸으로써 전체성 성취하는 이상 무엇에 관심을 가진다. 이제 우리 개개인 마음이.......한 옥타브 높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유심론이 강조하듯, 세계 마음은 우리 정신-신체적 본성을 포함하는 세계 내용을 개개인 마음에 제공한다. 마음과 무관한 물질은 불가능한 생각이다.(345)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논리적으로 시공간 작용 이전 마음 측면이 우리 참된 불멸성이다. 이 객관화할 수 없는 마음 본질은 무한한 시간 연장이라는 의미에서 불멸이 아니라, 완전한 시공간 초월이라는 의미에서 불멸을 말한다. 우리는 결코 객관적으로 이 마음 옥타브를 알 수 없으므로 어떤 상이나 이미지 없는 명상으로, 아주 조용한 존재 심연에서 추구한다.......이런 경험은 정신 한계, 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무엇을 초월하고 있음이 분명하다.(346)

 

위에서 인용한 세 문장 또는 문단은 정확히 다음 세 단어를 차례로 돋을새김하고 있다: , 고매, 심오. 그러나,

 

세계는 피부다. 피부는 수직 없는 수평 네트워킹이다. 네트워킹에는 그러므로 높이도 깊이도 없고 부단히 번져가는 넓이만 있다. 높이와 깊이는 인간이 넓이를 은유해 강화한 과장 감각이다. 양성 되먹임으로까지 나아간 대뇌 전두엽이 만들어낸 신화다. 신화는 그렇게 인간 정신을 고매와 심오로 윤색해 영이라 이름 붙였다.

 

정신보다 높고 깊은 영이 있고, 그 영 hierarchy 지극한 데 이르러야 직성이 풀리는 아리안-힌두 남성 가부장적 불안, 탐욕, 무지가 수천 년 동안 공들여 만든 이데올로기가 유심론이다. 유심론이 진리라 하더라도 그 진경에 이르기 위해 요가와 명상이 필수적이라면 불가피하게 권력이 된다. 권력으로라야 이를 수 있는 초월이라면 나는 단호히 거절한다. 내가 주장하는 초월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네트워킹, 그 피부 세계에 부단히 배어드는 일이다. 이 일을 수행하는 주체가 영이다. 영은 공생 사건이다. 공생 사건은 고매와 심오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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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심 불교와 내가 정신이나 마음이란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확실히 말해두겠다. 우리는 물질과 마음을 대비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질로 의미 짓는 바는 단지 마음이 취할 수 있는 특정한 형태로 마음 범주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322)

 

맨스필드는 왜 구태여 이렇게 에돌아 왔을까?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지식인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을지 알기 때문이었을까? “물질로 의미 짓는 바는 단지 마음이 취할 수 있는 특정한 형태로 마음 범주 안에 포함되기 때문물질과 마음을 대비시키지 않는다.는 말은 그대로 헤겔이 스스로 정의한 절대적 관념론아니던가. 물론 헤겔 또한 인도유럽어족이어서 사하라시안 전통을 충실히 따르므로 아리안-힌두 전승과 결론이 같을 수밖에 없다.

 

붓다와 상카라를 함께 묶어 끌어들이고, 아리안-힌두와 습합된 중관 불교사상에 의지하더니, 이제는 유심 불교를 동원한다. 중도 불교와 유심 불교 모두 번역자의 작은 안일에서 비롯한 번역 문제거니와, 유심 불교는 유식학파 또는 유식론을 가리킨다. 유식은 아뢰야식 이외에 어떤 실재도 아뢰야식이 만들어낸 바라는 주장이다. 물론 끝내는 그 식까지도 부정한다. 이 점에서 서구 유심론과 다른바, 마치 귀류 논증에서 보여주는 차이와 같다.

 

여기서도 맨스필드가 유식을 거론할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헤겔로 가면 그뿐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학문하는 방식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가 이제 어디로 향할지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그가 꾸민 음모^^는 이미 전모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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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관점에서 우리는 요가 수행을 통해 정신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불가지론적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융은 그런 초월을 단지 원형적 주제로만 생각했고, 엑스타시를 위한 욕망이라고 했다. 따라서 융에 따르면 플라톤과 플로티누스, 붓다와 아디 상카라 등 위대한 철학자-현자들이 신과 연합함으로써 인간 한계를 초월하고 대극 세계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일은 단지 원형적 충동 표현일 뿐이다.(298~299)

 

(융이 만나기를 단념했던-인용자 붙임-) 라마나 마하르시는 인도 베단타 대표였다. 그 전통은 정신이 지고한 경지에 든 자기보다 훨씬 낮은 수준 실재라고 이해한다. 베단타에서 절대자와 같은 본성을 지닌 초월적 자기와 합일하는 일은 영적 탐구가 자연스럽고 불가피하게 도달하는 결론이다. 만약 우리가 인간을 정신적 삶과 그 대극들에 감금된 상태로 정의한다면, 이런 합일은 완전히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이 사실이다. 참된 본성에 대한 자아 방해를 해체할 때, 완전한 자비 개화, 지고한 인간 사랑이 이루어진다. 융은 어떻게 그런 비범한 성취를 재미없다고 불평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었을까?

 

심층심리학과 인도 사상을 함께 공부한 사람이라면 융의 이 같은 태도에 깊이 실망할 수밖에 없다. 두 전통 학생들은 융의 오만함 때문에 큰 손실을 입었다.(301~302)

 

 

바야흐로 결정적인 지점에 도달했다. 맨스필드가 융이 오만해서 후학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고 질타하는 장면은 독자 관지를 분명히 하라 도발한다. 과연 누가 오만한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내가 쓴 R. 뿔리간들라 인도철학주해리뷰(2010. 11.23.) 일부를 세부만 수정해 가져온다.

 

이 책은.......베다에 대한 자세를 중심으로 인도 사상 전체를 정통파와 비정통파로 나눕니다. 비정통파를 앞에 배치하고 정통파를 뒤에 배치하여 서술합니다. 그런데 비정통파에서는 불교를, 정통파에서는 베단타를 중심축으로 세웁니다. 두 부분에 대한 내용만으로 책 전체의 절반을 채웁니다. 그리고 뒤에 인도의 시간관과 역사관이란 장을 마련하여 불교사상과 베단타의 일치를 말합니다.......


.......모헨조다로 문명의 주체를 정복하고 외부에서 들어온 아리안의 사유 체계인 베다. 그 베다적 사유의 적 기조. 즉 불멸의 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생각. 그것은 실제로 인도 사회의 영적 지휘집단인 브라만의 상징이며 그 체제를 인정하는 것이 정통입니다. 붓다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적 기조를 유지합니다. 無常, 그리고 無我, 그 결절점에 . 이 세 가지가 붓다의 진실입니다. 無常無我도 브라만의 진실은 아닙니다, 는 더더욱 아닙니다. 붓다의 이 가르침은 그러므로 매우 사회정치적입니다. 매우 실천적입니다. 브라만의 카스트를 거부합니다. 평등 공동체를 만듭니다. 그는 고대 공화주의의 패러곤입니다. 수드라와 언터처블의 고통을 현안문제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의 無常은 현실 삶의 불안입니다. 그들의 無我는 현실 생명의 위태입니다. 붓다에게 살아 꿈틀거리는 고통을 외면한 그 어떤 교설도 邪道이며, 그 어떤 질문도 無記의 대상일 뿐입니다.


붓다는 스승이지 학자가 아닙니다. 붓다는 땅에서의 삶을 말하지 구름 위의 꿈을 말하지 않습니다. 붓다는 실천을 말하지, 이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제자들은 스승의 살아 있는 말을 서둘러 죽은 언어로 봉인하여 경전을 만듭니다. 경전은 소수 엘리트, 특히 크샤트리아의 독점 재산이 됩니다. 아뿔싸, 어느덧 불경이 베다가 되고 크샤트리아가 브라만이 됩니다! 하여 경전은 구름 위로 올라갑니다. 수드라, 언터처블은 속수무책입니다. 이 흐름이 노골화하는 상황에서 상좌부와 대중부가 갈리고, 소승과 대승이 갈립니다. 그러므로 초기불교가 붓다의 원음을 보존하고 있다는 말은 매우 신중하게 의미 부여를 해야 합니다. 붓다의 고구정녕한 가르침을 지켰는지 여부는 초기불교 정체성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초기불교 운동을 수행할 때,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도 붓다의 가르침과 그 실천 구조가 이 땅의 백성들에게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자로서 어찌하면 바르게 붓다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하는 내적 질문에 함몰되면 사회동원력을 얻기 어렵습니다. 사회동원력 문제는 이미 불교가 대승, 소승으로 갈릴 때 물은 바 있는 뼈아픈 질문입니다. 대승이 자신을 그리 부르고 상대방을 소승이라 한 게 100% 악의가 아닌 한, 소승으로 지목된 집단은 역사적으로든, 현안 의식으로든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사회동원력을 지니는 철학적 내용과 종교적 실천을 담보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나는 여기서 맨스필드가 두 가지 중요한 문제에서 실패했음을 먼저 지적한다. 무엇보다, “플라톤과 플로티누스, 붓다와 아디 상카라 등 위대한 철학자-현자들이라고 함으로써 네 사람, 그 중 특히 붓다와 상카라를 한꺼번에 싸잡아 말한 실패가 뼈아프다. 상카라는 베단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베단타가 불교 영향을 받았으므로 시간관과 역사관정도에서 일치를 보일 수는 있으나 근원에서 둘은 일치하지 않는다. 정통 비정통이 문제가 아니라, “불멸의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느냐가 문제다. 붓다는 인정하지 않고 상카라, 그러므로 라마나 마하르시는 인정한다.

 

맨스필드는 완전히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한계를 초월하고 대극 세계를 초월한다고 말하는” “비범한 성취를 인정함으로써 베단타 편에 선다. 그러면서 어떻게 붓다를 거론하는 실패에 눈감을 수 있었나? 또 다른 실패가 그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가 거론한 이른바 중도불교는 귀류 논증을 토대 삼은 티베트 중관 불교를 의미한다. 다른 나라 불교도 마찬가지거니와 티베트 불교는 워낙 복잡해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밀교 수행을 밑바탕에 깔고 있음은 분명하다. 밀교 수행을 통한 즉신성불卽身成佛은 엄밀하게 말하면 철저하게 을 관철하는 중관 사상과 배치된다. 사실 다른 대승불교 현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으며, 이점을 날카롭게 인식하지 않는 한, 을 낳은 붓다 적 전통은 끊어진다. 적 전통이 끊어진 곳에 무슨 불교가 있나. 맨스필드 근본 실패는 바로 여기에서 발원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실패가 있다. “신과 연합함으로써” “정신을 뛰어넘을” “지고한 경지에 든 자기에 이른다고 할 때, 신은 무엇인가? 정신을 뛰어넘는다는 말이 육체(물질)를 가로지른다는 말이 아니고, 그 반대라면 어떻게 완전히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가, 그 인간은 무엇인가?

 

마지막 논점 하나를 남기고 중간 결론을 내리면 맨스필드는 인도 사상에 대한 기본적 무지와 티베트 불교와 맺은 인연 때문에 중관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대극 합일을 아리안-힌두 전통 베단타가 주장하는 완전한 불이론nondualism’에 내주었다. 아니 자신이 속한 전통을 확인한 여정일 수도 있다. 양자물리학이 DNA를 이기지 못한다면 이제는 정녕 그가 생물학을 공부해야 할 시간이다. 오만이 오류를 부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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