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31장 본문입니다.  

 

唯天下至聖 爲能聰明睿知 足以有臨也 寬裕溫柔 足以有容也 發强剛毅 足以有執也 齊莊中正 足以有敬也 文理密察 足以有別也 薄博淵泉 而時出之. 薄博如天 淵泉如淵 見而民莫不敬 言而民莫不信 行而民莫不說. 是以 聲名 洋溢乎中國 施及蠻貊. 舟車所至 人力所通 天之所覆 地之所載 日月所照 霜露所隊 凡有血氣者莫不尊親 故 曰配天.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인만이 총명예지하여 임(臨)함이 있을 수 있고 관유온유하여 용납함이 있을 수 있고 발강강의하여 잡아줌이 있을 수 있으며 제장중정하여 공경함이 있을 수 있고 문리밀찰하여 분별함이 있을 수 있으니 두루 넓고 깊게 근원하여 때에 알맞게 나타난다. 두루 넓음은 하늘과 같고 깊이 근원함은 못과 같다. 나타나면 백성이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고 말을 하면 백성이 믿지 아니함이 없고 행동하면 백성이 기뻐하지 아니함이 없다.  이 때문에 명성이 중국에 넘치고 다시 퍼져 만맥(蠻貊) 지방까지 미친다. 배와 수레가 이끄는 곳과 사람의 힘이 통하는 곳과 하늘에 덮이어 있는 곳과 땅에 실리어 있는 곳과 해와 달이 비추는 곳과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에 무릇 피와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높이고 친애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그러므로 하늘과 짝을 이룬다고 한다.     

 

 2. 완전한 성인의 속성을 말하는 어법을 구사하고 있으나 실은 그런 실천을 해야 완전한 성인으로 볼 수 있다는 요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과 함께하며(臨), 백성의 뜻을 받아들이며(容), 백성을 든든히 잡아주며(執), 백성을 공경하며(敬),  백성 앞에서 사리 분명한 실천을 해야(別) 완전한 성인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용>의 성인은 철학적, 종교적 차원에서 말해지는 신비성과 거리가 멉니다. 일상적 삶의 현실에서 백성과 마주하는 정치권력을 단도직입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순과 문무가 등장하는 것이지요. 결국 위 요건은 오늘날 정치권력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실천 강령입니다. 그 요건을 따르면 백성이 공경함으로 되갚고(敬), 신뢰하며(信), 기뻐합니다(說).  

 

본문 내용을 아무리 정교하게 해설해도 더는 심오한 내용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명쾌하고 소박합니다. 정치권력이 어찌 하면 백성은 또 어찌 반응하는지 이보다 더 장황하게, 현학적으로 설명해야 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다만 우리는 사소한, 그러나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정치권력과 백성이 공경함(敬)을 서로 나눈다는 사실! 그러나 그 순서는 정치권력이 먼저라는 사실!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전혀 다르고, 전혀 거꾸로 라는 사실!  

 

비민주적이고 사유적인 권력행사로, 편벽한 종교로, 온갖 부패 행위로, 부조리한 인사로, 부끄러운 외교 행태로, 뒷골목 삼류 양아치 같은 언행으로, 이 정권은 백성의 마음과 함께하지 않네요(不臨),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네요(不容), 든든히 잡아주지 않네요(不執), 공경하지 않네요(不敬), 사리 분명한 실천을 전혀 하지 않네요(不別).  

 

어느 백성이 스스로 택한 통치세력을 공경하고(敬), 신뢰하고(信), 기뻐하고(說) 싶지 않겠습니까? 요순과 문무이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반만 년 동안 백성의 손으로  권력을 엎은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실로 엄청난 인내를 발휘해 온 이 선한 백성에게 지배집단은 입만 열면 사탄이라 빨갱이라 정신병자라 욕설을 퍼부으니 대체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3. 이럴 줄 알고 <중용>은 한 번 더 당부합니다.  

 

"무릇 피와 기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높이고 친애하라(凡有血氣者莫不尊親)."   

 

다른 생명은 고사하고 제 백성만이라도 공경, 즉 존귀하게 여기고(尊), 피붙이처럼 사랑하기를(親) 곡진하게 권합니다. 하지만 현 통치세력은 백성의 눈높이가 낮다는 타령만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짝한다(配天)는 말을 '신성모독' 쯤으로 오해하고 눈 감고 귀 막은 것인지, 백성에 등 돌린 채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리며 권력의 맛을 즐기고 있을 따름입니다.  백성을 공경하면 자기들이 업신여김 당할 거라 철석같이 믿는 모양이니 딱하지만 도리 없군요. 결국은, 쯧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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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 시인선 28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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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직 이 한 수의 시를 읽기 위해 

시집을 집어들었습니다.  

 

강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小蛇大足 - 당신만 강가에 갈 일 있는 게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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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아픔 -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의 시집
프리모 레비 지음, 이산하 엮음 / 노마드북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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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ndela's Way>>라는 책에 이런 내용의 말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이 행한 선만큼 선하지 않다."   

이 말을 저는 이렇게 바꿉니다.   

"어떤 시인도 자신이 쓴 시만큼 아름답지 않다."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적어도 프리모 레비만큼은 이 진실에 날카로운 틈을 냅니다.  

2. 시집을 펴기 전!
표지에 나온 그의 사진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있다면.......
저 철저한 눈빛, 뭔가?
얼굴과 시선이 절묘하게 어긋나 있고,
그 눈은 응시와 응시를 벗어난 가녘에 칼 같은 중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아마도,  
그가 이런 시선을 유지한 채 죽음으로 걸어들어 갔을 것이라고 느낍니다. 

편역자는 그의 허무주의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그는 허무주의자로 죽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그는초월하지도 않습니다.
뭇 시인의 운명인, 저 초월을,
그는끝내 거부합니다.
그의 시, 그의 삶은 단 한 순간도 인간의 지평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니, 그는 내려갑니다! 

<수레바퀴>의 마지막 네 줄. 

이젠 내려가야 할 때다.
절벽 아래로 내려가 세월의 그늘 속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침묵해야 할 시간이다. 

그렇습니다.  
그 침묵의 절창, <석양>을 보십시오. 

그 어떤 것도 억지로 꿈꾸지 않았고 
그 어떤 것에도 애써 매달리지 않았네. 
거센 폭풍의 바다를 헤치고 나와 
항구의 선술집 난로 옆에 앉아 
홀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그런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여라. 

축제 뒤의 사그라져가는 불씨처럼
저물어가는 강가의 모래알처럼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은 채 
이마의 땀방울을 닦으며
조용히 길모퉁이에 앉아 쉬고 있는
그런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여라.
욕망도 집착도 모두 내려놓고
말없이 저무는 석양만 응시하네. 


그 응시하는 눈은 웅숭깊은 질문으로 젖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 질문으로 그는 죽었습니다.
이 죽음으로 그가 택한 것은 허무 아닌 침묵의 응시입니다.  

글로 할 수 없는 증언을 위해 몸을 벗어난 것입니다. 

3. <게달레 대장>에 세 번 반복되는 후렴이자 마지막 연,
이를 그대 가슴에 안기면서
프리모 레비를 간곡히 권합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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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0장 본문입니다.  

 

仲尼 祖述堯舜 憲章文武 上律天時 下襲水土. 辟如天地之無不持載 無不覆도(巾壽*). 辟如四時之錯行 如日月之代明. 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小德川流 大德敦化. 此天地之所以爲大也. (*수건 건 에 목숨 수를 붙인 덮어 가린다는 뜻의 '도' 자인데 인터넷 사전에서 찾지 못해 이렇게 해 놓았습니다.^^)  

 

공자께서는 요 임금과 순 임금을 으뜸으로 계승하시고 문왕과 무왕을 본받아서 (그 법도를) 밝히셨으며 위로는 천시를 본받으시고 아래로는 물과 흙의 상황에 맞추시었다. 비유하면 하늘과 땅이 붙들어 실어주지 아니함이 없고 덮어서 감싸주지 아니함이 없음과 같다. 비유하면 사계절이 번갈아 운행됨과 같고 해와 달이 번갈아 밝아지는 것과 같다. 만물은 함께 자라도 서로 방해하지 않고 도는 함께 행하여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작은 덕은 냇물처럼 흐르지만 큰 덕은 일시에 변화시킨다. 이것이 천지가 위대하게 되는 까닭이다.  

 

2. 공자의 중용은 사람의 실천과 자연의 운행을 두루 이치로 삼습니다. 사람의 실천에서 나타나는 도덕성과 창조성, 자연의 운행에서 나타나는 법칙성과 풍요성을 통합하는 혜안이 있었던 것이지요.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꿰뚫는 혜안은 크게 두 갈래의 통찰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인 맥락을 따라  그 변화의 결을 감지하는  통찰입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 변화에는 반드시 특이점이 존재합니다. 이런 상황을 간파하고 전후의 맥을 짚을 수 있다면 과거의 반성, 오늘의 성찰, 내일의 전망이 모두 가능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인 지평을 한눈에 보고 분석, 종합하는 통찰입니다. 변화를 견디는 구조와 그 역학관계를 알아차림으로써 현안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내는  조정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결국 시공간적 대칭 또는 모순을 역설적으로 공존시키는  능력입니다. 변화와 지속, 역사와 사회, 개체와 전체, 문명과 자연, 정의와 사랑, 자유와 평등, 결속과 대립...그 요동치는 경계에서 영예로움으로 남을 수 있는 선택을 하는 능력! 바로 이것이 중용이고, 공자의 실천입니다.  

 

3. 그 역설적 공존 능력을 본문은 우선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은 함께 자라도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생명은 제각각 최대한 살기 위해 애씁니다. 그 과정에서 남을 해칠 수 있습니다. 아니 해칩니다. 우리 인간만 보더라도 목하 그렇게들 살고 있습니다. 금융자본이 세계를 제압한 현 신자유주의 체제는 가혹한 약육강식, 승자독식을 본령으로 합니다.  더군다나 그 세계체제의 주변부에 속한 이 나라는 이중, 삼중의 억압구조를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올바르고 현명한 정치, 즉 중용 정치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땅의 헤게모니 블럭은 오히려 그렇게 중첩된 억압과 차별의 구조를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축적하는 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양극화가 극으로 치달아가는 과정에서 백성들이 서로 사소한 이익을 놓고 막가는 싸움을 싸우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래야 편하게 통치할 수 있기에 그리 하는 것일 테지만 반드시 그 편함은 부메랑으로 돌아와 등을 찍을 것입니다. 

 

함께 자라도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죽이려 하지만 자신만 살아 남아서는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모르고 있으니 이 아니 비극입니까. 남을 일으켜야 자신도 일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하루빨리 깨달아야 할 텐데 아득하기만 하군요. 생명의 공존, 더 나아가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는 일은 평등한 상호 소통을 전제로 합니다. 언제나 그러하듯 이 땅의 어진 백성은 먼저 시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제발 바라건대 그 뜻을 으뜸으로 계승하고(祖述), 본받아서 밝혀(憲章)주기를.......   

 

4. 그 다음엔 이렇게 말합니다.   

 

"도는 함께 행하여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 방법(道)은 많이 다릅니다. 아니 대립합니다, 그것도 격렬하게. 국가 중대 현안 문제에 대하여 막무가내 들이미는 검증 안 된 정부 자료를 보고 날카롭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느 나라 백성이냐며 빨갱이로 모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이념의 차이든, 종교의 차이든, 단순한 정보의 차이든 이 정도의 난센스적 균열은 헤게모니 블럭이 충분히 없앨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이간질 하고 부추기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견해를 상호 인정하고,  견디고, 기다리는 너그러움을 이끌어야 할 자들이 먼저 나서서 독선과 배타를 구가하다가 도리어 백성들이 편협하다며 뒷 삽질을 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드러내는 탈중심적이고 자유로운 의사 교환, 지식 공유의 전체 모습은 외면한 채  구석에 박힌 사소한 에피소드를 들춰내서 크게 떠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너절함으로 똘똘 뭉친 인간집단의 진면목이 이렇구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밀고 당기면서도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본디 생명 속에 깃든 길항관계들입니다. 마주서 있다고 해서 다 적인 것은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합니다. 풍부할수록, 두터울수록 좋습니다. 중용 정치란 바로 이 풍요와 후덕을 빚어가는 일 아닐까요?    

 

5. 지난 촛불 정국 이후 우리사회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로 "포퓰리즘"이란 게 있습니다. 이문열이든 오세훈이든 헤게모니 블럭에 속한 자들의 어감은 한마디로 저급한 악마들의 음모적 소란 정도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근거를 둘러대보아도, 일시에 되게 하는(敦化) 백성의 큰 덕을 불에 덴듯 알아차렸기 때문에 생긴 불쾌감을 드러내는 작태일 뿐입니다. 소수 엘리트가 조작하고 통제함으로써 명품 시혜 체계를 만들어 길이 즐기는(川流) 일에 반하기 때문에 갖는 거부감일 따름입니다.  

 

허나 봄기운이 만물을 일제히 소생시키듯 상호소통으로 공유하게 된 백성의 생명감각은  어! 하는 사이에 새 세상을 일으킵니다. 그게 대덕(大德)이 아니라면 21세기에 우리가 앉아서 요순(堯舜)과 문무(文武)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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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9장 본문입니다.  

 

王天下有三重焉其寡過矣乎. 上焉者雖善無徵無徵不信不信民弗從. 下焉者雖善不尊不尊不信不信民弗從. 故君子之道本諸身徵諸庶民考諸三王而不繆建諸天地而不悖質諸鬼神而無疑百世以俟聖人而不惑質諸鬼神而無疑知天也百世以俟聖人而不惑知人也. 是故君子動而世爲天下道行而世爲天下法言而世爲天下則遠之則有望近之則不厭. 詩曰在彼無惡在此無射庶幾夙也以永終譽. 君子未有不如此而蚤有譽於天下者也.  

 

천하에 왕 노릇하는 데 세 가지 중요한 것을 갖추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옛 시대의 것은 비록 좋다고 하더라도 증거할  만한 것이 없으니 증거할 만한 것이 없으면 믿어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나중 시대의 것은 비록 좋을지라도 높여지지 아니하니 높여지지 아니하면 믿어지지 않고 믿어지지 않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자신의 몸에서 근본을 삼고 여러 백성에게 징험하는 것이니 이는 삼왕(三王)에게 상고하여 보아도 그릇되지 아니하고 천지에 세워 보아도 어긋나지 않으며 귀신에게 물어 보아도 의심스러움이 없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이고 백세를 지나 성인을 기다려서 따져 보아도 의혹스럽지 아니한 것은 사람을 아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움직이면 대대로 천하의 도리가 되는 것이니 행하면 대대로 천하의 법도가 되고 말하면 대대로 천하의 준칙이 된다. 멀리 있으면 우러러 보게 되고 가까이 있으면 싫어하지 않는다. <시경>에 이르기를 "저쪽에서도 미워함이 없고 이쪽에서도 싫어함이 없다. 바라건대 밤낮으로 힘써서 길이 명예로움을 마치도록"이라 했다. 군자가 이와 같이 하지 않고서 일찍이 명예로움을 천하에 가지게 된 일은 없다.  

 

2. 법이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은 없습니다. 그 시대, 사회 상황에 맞는 것을 만들어 쓸 뿐입니다. 오래 된 것이라고 해서 성인의 작품 운운하며 신비화할 일도 없고 오늘날 상황에 꼭 들어맞는다 하더라도 미비점은 늘 있기 마련이므로 절대화할 일도 없습니다.   

 

문제는 백성의 법 감정입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 하더라도 백성의 직관과 생명감각을 무시하고서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어렵습니다. 합리성이든 과학성이든 결국은 사람의 판단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에서 권력자들은 이성과 논리, 그리고 전문지식을 동원하여 백성을 제압하려 하지만 백성은 감성과 직관, 그리고 생명감각을 통해 역동적으로 반응합니다.   

 

최근 튀니지를 출발점으로 하여 독재 권력을 무너뜨리는 백성의 맨주먹 혁명이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정신병적 수준에서 백성을 학살하는 카다피는 물론 그 이전의 독재자들 모두 백성을 업신여기고 오직 지배 대상으로만 여기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작금의 상황을 보고 우리나라 수구언론은 자신들이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지금도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 떠들어대고 있지만 불과 3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났던 일, 그리고 그 여파을 생각해 보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 옵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촛불정국' 문제의 본질은 지배블록이 백성의 감성과 직관, 그리고 생명감각을 이른바 과학성이 결여된 낮은 눈높이로 폄하한 데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과학은 미국 측 일부, 즉 쇠고기 수출을 어떻게 해서든 관철시키려는 세력과 그들보다 더 혈안이 된 한국 종미(從米) 집단의 과학일 뿐이었습니다. 설혹 공정한 제삼자의 견해라 하더라도 광우병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확립된 주장 단 한마디를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백성의 판단 기준은 순간순간을 살아내야 하는 자연적 생명주체가 지닌 몸 감각 이외에 달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배블록은 그것을 괴담과 선동에 휩쓸린  어리석음으로 멸시했습니다. 백 보 천 보를 양보해서 정말 백성 눈높이가 그렇게 형편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주권자인데 누가 누구를 제압한다는 것입니까? 그 당시 조갑제란 자는 "백성에게 항복할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결국 그리 되어서 그 자는 만족했을 테지요. 지금 리비아의 카다피한테 그 말을 한 번 해보면 어떨까요?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백성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3. 중용의 정치는 군자의 몸, 즉 실천의 진정성을 점검함에서 출발합니다(本諸身). 자신의 실천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생략한 채 백성을 훈계하려고만 드는 권력자를 군자라고 할 수 도 없고 그의 정치를 중용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이치가 이러함에도 부도덕한 지배블록은 독선을 진리로 믿고 거침없이 내달립니다. 도무지 자기성찰을 모르는 자, 카다피나 베를루스코니만이 아닙니다.  

 

군자란 실천의 진정성을 돌아본 다음 겸허하게 백성과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존재입니다(徵諸庶民). 평등한 쌍방향 소통으로 이룩되는 "평범한 선"이 바로 중용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부도덕한 지배블록은 소통을 홍보와 설득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백성 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중심"에 있다는 뜻입니다. 백성을 "주변"으로 취급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과연 민주주의를 하자는 것일까요?  

 

4. 천하에 실체, 즉 명사로 존재하는 도리(道), 법규(法), 준칙(則)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군자의 실천, 즉 동사적 사건으로만 드러납니다. 실체는 관념이고 의식입니다. 실천은 몸이고 감각입니다. 중용은 결코 관념과 의식이 아닙니다. 중용은 한사코 몸이며 실천입니다. 人能弘道非道弘人(동사적 실천이 명사적 실체를 담보하는 것이지 명사적 실체가 동사적 실천을 담보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속이 꽉 들어찬 중용은 온 백성의 것입니다(遠之則有望近之則不厭). 백성은 다만 적용 대상으로 사물화될 수 없습니다. 중용의 주체로 존중될 때 백성은 스스로 적용해 갈 것입니다. 무능한 대의정치가 거리의 백성에게 뺨 맞는 꼴을 보면서도 제도 정치만을 두둔했던 책상물림의 한심한 작태들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5. 지구상의 모든 권력이 백성과 더불어 "길이 영예로움으로 마칠 수 있기를(以永終譽)" 바랍니다,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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