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에 시달리던 딸아이가 조금 여유를 찾은 듯 어제, 일요일 이른 밤 영화 한 편 예매를 해놓았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함께 영화를 보았습니다. <26년>.


개인적으로 저는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바른 인식 덕분에 70년대 중반학번으로서는 늦깎이로 삶의 방향을 바꾼 사람입니다. 하여 영화 시작 이전부터 뻐근하고 뜨거운 흉통이 제게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영화 중후반부부터는 신열이 온 몸을 휘감으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찰나, 특정 인간을 죽여야만 한다는 간절한 염원 때문에 두 손을 으스러지도록 맞잡은 생애 최초의 경험으로 빨려들고 말았습니다. 누군들, 가슴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이다 이내 단 하나의 비원(悲願)으로 비수 끝처럼 예리해진 생명 감각이 온 영혼을 정적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총성과 함께 칠흑이 된 화면이 뜬 바로 그 순간, 저는 냉정하게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영화 아닌 현실, 그것이 아닙니다. 염원 아닌 현실, 그것도 아닙니다. 오직, 있어야 하는데 있지 않은, 바로 그 현실입니다. 그 현실로 돌아오자 제 눈에는 전혀 다른 의미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영화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영화도 사회행위의 일부입니다. 그 사회행위는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의미와 재미가 어우러져 또 하나의 사회행위를 이끌어내기 마련입니다. <실미도>를 보십시오. <도가니>를 보십시오. 이제 <26년>의 차례가 아닐까요. 마지막 장면 그 젊은, 아니 어린 의경의 눈초리를 불씨로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해피엔딩 아닌 것이 퍽 다행스럽습니다. 해피엔딩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민중에게 허위의식을 심어줍니다. 현실이 그렇지 않음에 대하여 눈감게 만듭니다. 그렇게라도 위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위안은 중독일 따름입니다. 중독인 위안이 현실을 더욱 어둡게 합니다. 아프디 아프게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당하지 않습니다.


돌아와서 트위터에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5.18은 12.19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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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9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1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5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6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자책] 물의 연인들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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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를 살아가는 醫者의 한 사람으로서 현재 의학이 지니고 있는 오류와 한계를 껴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고민을 담아 간결하게 21세기 의학론을 세 번에 나누어 썼습니다. 그 마지막 글이 하필 김선우의<물의 연인들>로 시작하여 끝을 맺었기에 여기에 실었습니다. 이 글 앞의 두 편 글은 http://bari_che.blog.me/에 실려 있습니다.

 

 

 

 

21세기 의학론: 인간과 자연의 아픔을 한꺼번에 보듬는다



나는 시인 김선우를 ‘천하시인(天下詩人)’이라 부릅니다. 그의 시(詩)가, 시심(詩心)이 내겐 천하이기 때문입니다. 그 천하시인 김선우가 최근 소설, ‘엄밀히는’ 소설-시 하나를 냈습니다, <물의 연인들>. 이 소설-시는 인간과 강(물(방울))이 이어져 있다는 도저한 미세 생명감각을 시적 감수성으로 빚어낸 절창입니다. 4대강사업으로 강(물(방울))이 죽어가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김선우가 자신의 충격, 즉 생명의 아픔과 슬픔, 그 상처(trauma)를, 그리고 어찌 할 것인가, 아니 어찌 할 수밖에 없나, 하는 고뇌를 살갑고도 깊게 가늘고도 넓게 펼쳐낸 영혼의 “타투”인 작품입니다. 김선우는 아파서 글을 썼고, 씀으로써 아픔을 견뎌냈습니다. 이 글은 필자(筆者)인 김선우의 고통이며 치유입니다. 나는 그 글의 속살을 어루만지며 김선우의 아픔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글은 의자(醫者)인 나의 고통이며 치유입니다. 김선우의 “물방울”과 나의 “물방울”은 이렇게 이어져 있습니다. 아니! 김선우의 “물방울”과 나의 “물방울”, 그리고 물방울(!)은 이렇게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합니다. 나는 김선우의 문학에 실려 물방울(!)에게 다다가고 물방울(!)이 됩니다. 마침내 물방울(!)입니다. 물방울(!), 바로 이것이 나의 21세기 의학론의 마지막 화두입니다. 물방울(!)로 대표되는, 인간을 둘러싼, 엄밀히는 품은, 인간의 존재 조건인 자연을 향하여 열린 의학이야말로 인간이 빚어내야 할 마지막 의학이라는 깨달음. 그 깨달음을 궁굴려 내 삶이 되게 하고 우리 모두의 삶이 되게 하는, 그 참다운 깨침. 그 깨침을 얻으려면 의학은 인간의 눈으로, 인간만을 들여다보는 울타리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종(種)적 배타성,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 한 지금 인간이 맞닥뜨리고 있는 파멸 상황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상황을 만든 것이 바로 저 4대강사업처럼 인간의 탐욕을 위해 자연을 침습, 파괴, 수탈한 행위와 명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이 인간 위한답시고 자연을 괴롭힌 것이 도리어 인간 파멸이라는 최후 질병을 몰고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정녕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면 자연에 행한 침습, 파괴, 수탈을 멈추어야 합니다. 자연을 치유해야 합니다. 아니 자연이 스스로 치유해 나아가는 데 겸손하게 시중들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가 의학적 관점과 자세의 설 자리입니다. 인간 생명의 조건인 자연의 시선으로 질병과 치유를 바라보는 관점과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간과 자연의 아픔을 한꺼번에 보듬는, 새로운, 최후의 의학이 가능합니다. 이 최후의 의학은 문명의 산물인 의학에서 문명을 비판하는 의학으로 차원을 높인, 의학의 의학, 곧 메타의학입니다. 메타의학의 감수성으로 서면, 김선우가 말한바, “목숨 가진 것들은 모두 눈물 냄새를 풍긴다.......”는 진실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눈물 냄새를 맡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김선우가 수없이 떠올린 ‘여리고 환한 목숨의 빛’이란 말을 가슴에 품어 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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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배웅하며


요즘 아이들 95%가 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를 혹시 접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이들이 욕하는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최근 청소년들과 상담치료를 하면서 알게 된 내용은 의자(醫者)로서, 아니 그 이상으로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고등학생끼리는 말할 것도 없고 초등학생끼리도 가입해서 활동하는 부모, 교사 욕하기 사이트 수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 작게는 몇 십 명 정도 크기에서 많게는 몇 천 명에 이르는 큰 것도 있다고 합니다. (2-3만 명 되는 것도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의 손 전화 단축키에 저장된 엄마, 아빠의 호칭부터 일단 욕으로 되어 있습니다. 회원끼리 대화할 때 엄마, 아빠라는 호칭을 써도 안 된다고 합니다. 부모 당사자가 이런 사실을 알면 큰 충격을 받을 테지만 저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럴만한 상황 그럴만한 시공간에서 일어난 지극히 자연스러운 증후라고 생각합니다.


욕의 표면에는 보통 분노와 경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와 경멸의 이면은 공포와 불안, 그리고 그 침전물인 우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결국 아이들의 욕은 이 사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사회 전반을 거머쥐고 있는, 특히 지배집단 어른들에 대한 공포와 불안, 그리고 우울의 감정을 담은 것입니다.


좀 더 명쾌하게 연결하지요. 아이들의 욕은 우울증의 대표 증상입니다! 아이들이 욕하는 문제를 성품이나 윤리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길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지금 아프다고 울부짖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최소한의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 어떻게 하시렵니까? 인제 아이들의 울부짖음에 어른이, 부모가, 엄마가 답을 할 차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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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쌤, 엄마한테 꼭 말씀해주세요!



[질문]


저는 3~4년간 우울증을 앓아왔고, 지금은 우울증으로 인해 학업에 실패하고, 대학진학도 포기하고, 사람에 대한 기피현상이 심해져서 일반적이 사회생활이 힘들 정도입니다. 사람자체가 싫어 친구들과 연락을 끊은 지도 1달이 넘어가고, 가족들과의 상태는 우울증을 겪으며 급속히 나빠졌고, 저는 지금 가족들, 특히 엄마에 대한 많은 실망과 배신감들로 괴롭습니다.


자살충동을 자주 느끼고, 자살시도는 한번 있었고, 자살에 대한 생각들도 많이 합니다. 삶이 허무하기만 하고, 공허한 마음만 듭니다. 가끔은 세상 속에 있는 제가 투명한 막에 휩싸여 둥둥 떠다닌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인간이 작게 보이고, 저는 그보다 작게 보입니다. 열등감이나 외로움과 같은 갖가지 부정적인 감정들로 힘이 듭니다.


대학 진학을 다시 결심했지만 공부는 잘 되지 않고, 나아갈 방향도 잡지 못하겠습니다. 흥미가 있는 것도 없고, 절 그나마 오래 붙잡아 두는 것은 판타지, 무협 같은 소설이나 만화책 그리고 TV를 보는 것뿐입니다. 그것조차 좋아하는 감정보다는 지루하고, 재미없지만 그저 멍하게 보는 수준입니다. 이것조차 안하면 제가 정말 인간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요. 어느 것도 제게 긍정적인 마음이나 관심은 끌지 못하고, 그래서인지 꿈도 없습니다. 무언가를 시도해보려고 해도, 인간관계나 여러 능력 면에서 저는 너무 작아져서 생각에 그칠 뿐입니다. 갈수록 소심해지고, 신경질적이게 됩니다. 잘해나가고 싶지만, 사람들 말처럼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도움의 손길이 너무도 필요하지만 주위에는 그럴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병원에는 두 달 정도 다녔지만 의사선생님과 만나면 자꾸만 긴장을 하게 되고, 말을 잘 하지 못했었고, 여러 상황들로 상담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병원을 다니고 싶지만 가족 특히 엄마에게서 또다시 같은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 두려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엄마나 가족들은 제가 유별나다고 생각하고, 공부하기 싫어 핑계를 대는 거라 생각합니다. 저를 전혀 이해해 주지 못하고, 그런 가족들과 대화하는 것이 저에게는 상처일 뿐입니다.


지금 병원을 다닌다면 돈 때문에 가족들에게 말해야할 텐데, 아니 적어도 한사람에게는 말해야할 텐데 가족 중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습니다.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지켜질 보장도 없고요. 알바를 해서라도 병원비를 구하고 싶지만, 알바 할 때 부딪힐 사람들을 생각하면 포기하게 됩니다. 도움이 필요하지만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없고, 병원을 다니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주위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나아질 방법이 필요합니다. 가족들에게 알리는 게 가장 좋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갔었지만 부모님에 대한 제 실망만 커졌을 뿐입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가족들에게 알리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선생님.......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울증이란 병에서도, 그리고 제 인생에서도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답변]


1. 그야말로 사면초가시군요. 글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제 인생의 어떤 길목들과 겹쳐지는 바람에 가슴이 자꾸 가라앉는 걸 느꼈습니다. 이 상황에서 어떤 위로의 말이 귀에 들어 오겠습니까만 그래도 곁에 계신다면 등 한 번 따스하게 도닥여 드리고 싶은 마음은 꼭 전하고자 합니다.


2. 지금 상태를 이론이든 임상사례든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그닥 마땅해 보이지 않네요. 스스로 아시는 바대로 깊이 있는 대화/상담치료와 약물치료를 시급히 받으셔야 합니다. 이런 때일수록 판단은 간결하게 하셔야 해요. 이것저것 고려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핵심 하나만 붙잡으세요. 우울증에 사로잡힌 자신의 생명을 구출하는 일밖에 달리 선택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돈 걱정하다가 생명 놓치는 일을 선택하실 것입니까? 아직은 이 땅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 속에 의사도 있는 법입니다. 돈 없다면 치료 안 하겠다는 의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3. 용기를 내셔서 직접 연락을 주시면 좋겠군요. 도와드릴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사시는 곳이 어딘지 등 상세한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제 안타까움도 막연할 수밖에 없거든요. 자, 일단 그 힘부터 내 보세요. 홧팅!


[두 번째 질문]


안녕하세요. 답변을 읽기 전까지 많은 망설임 끝에 읽고, 또 이런 글을 쓰기까지 한 10번은 썼다 지웠다....... 반복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글이 안 써지는지.......


저는 돈이 아깝다거나, 돈이 아까워 치료를 받지 않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절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상담하는 일이라고 해도 될까요? 그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짐작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제 상황에는 치료가 필요하다는 걸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 자신이 느끼고도 있고, 그 치료에 응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제 자신도 진지하고 끈기 있게 치료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돈이 없어 걱정하는 게 맞지만 뭐랄까....... 돈 구할 데는 있지만 뭐든 하기 전에 숨이 턱 막힌다는 게 문제이지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알바를 하거나,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거나 가족 중 누구 한사람에게라도 말하여 금전적 지원을 받는 것....... 셋 다 딱 이거다 마음 내켜 할 만한 게 없고, 그나마 알바가 차라리 낫지만....... 이 생각 저 생각 안하려 해도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저는 조그만 거에도 상처받고, 또 그 상처받는 거에도 스트레스 받고, 그 스트레스 받는 것에 또 제 자신에게 실망하고....... 그렇게 진행될 것들이 눈앞을 스치니 깜깜하기만 합니다.


저는 **에 살고 있고, 작년까지는 고2때부터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서울에는 친 언니, 오빠가 있어서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았는데 외지 살다보니 건강도 나빠지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다시 **로 온 것입니다.


직접 연락한다는 것이 전화말씀이신지? 02-***-**** 이리로 하면 되나요? 선생님이 직접 받으시나요? 아니면 간호사 언니들이.......?


오늘 따라 말투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제가 느끼기로 공격적인 것도 같고....... 왜이런지 잘 모르겠지만 혹시 선생님도 그렇게 느끼셔서 기분이 상하시지는 않을지 걱정이네요.


[두 번째 답변]


1. 그렇게 망설이면서도 글을 쓰고, 또 읽으시는 일 자체로 이미 치유의 길에 들어서신 것입니다. 우선 그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격려하시면 내면의 힘이 생길 것입니다. 조금 더 용기를 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를 향해 글을 쓰고, 또 그 상대방의 글을 읽는 일,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어려워해요. 저도 그렇습니다. 많이 망설이고, 또 고치고.......그럽니다. 무슨 일이든 시작할 때 숨 막히고 가슴 조이며 오만 생각 다 하게 되는 거, 웬만한 사람들 다 그래요.


자, 일단 심호흡 한 번 하세요. 그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세요. 저 많은 사람들이 **님보다 훨씬 강하고 유능하고 행복해 보이겠지만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을 테지요. 중요한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입니다.


물론, 고통은, 당하는 사람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법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예민하고, 힘들고, 숨 막히는 느낌이 들게 되었는지 연유를 잘 생각해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직시함으로써 문제는 해결을 향하여 본격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2. 스스로 공격적이 된 사실을 알아차리신 것도 훌륭해요. 하지만 대뜸 상대방 걱정으로 넘어간 대목이 문제네요. 왜냐하면 상대방도 자신처럼 상처 받지나 않을까, 사실상은 그랬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돈 이야기를 꺼낸 것은 결코 **님이 돈 아끼느라 치료를 안 받으시려 한다거나, 돈 안 내고 어디 치료 받을 데 없나 두리번거린다는 의미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전체 문맥을 살피면 능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님이 스스로 공격적이라고 느끼실 만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신 것은 상대방의 현실적인 배려를 나름대로 공격으로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반응은 약도 되고 독도 됩니다. 약이 되도록 하는 게 우리 공통 목표 맞지요?


그럼, 아시는 바, 그 번호로 전화를 주세요. 제가 드릴 수도 있지만 스스로 전화하시는 것 자체도 하나의 치유행동이며, 성숙한 사회행동이기 때문에 그리 권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면 간호사가 그 즉시 저를 바꿔 줄 겁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그 때 나누기로 하지요. 힘!


2008년 초, 이 소녀와 실제로 만나 밥까지 먹여가며 하는 무료 상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뒤 몇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았지요. 그러나 획기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바로 엄마, 다른 하나는 돈. 바로 이게 우리사회의 좌우 아킬레스건입니다. 그중에서도 우선은 엄마.


사회적, 경제적 자립이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엄마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우주 자체지요. 엄마가 앞장서면 모든 길이 열립니다. 엄마가 가로막으면 모든 길이 닫힙니다. 이 소녀 가슴에는 분명히 이런 소원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제발, 우리 엄마가 제 상황을 꼭 알았으면 해요! 그런데 상황은 뒤집혀 있습니다. 2010년 벽두에 13살짜리 소녀하고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질문]


안녕하세요아직13살인데이런글올려도될지모르겠네요

마음상담실이라고해서올리는건데요

친구들이다들절싫어해요왕따는아니구요그냥대놓고

제가싫다고말하네요그리고엄마도많이아프세요

엄마가혼자일하세요왜냐면부모님이이혼했거든요

저정말마음도아프고힘드네요

친구들은저정말많이싫어하구요저이제중학교올라가는데요

입학식날친구들이절어떻게볼지걱정되네요

방금도많이울었어요엄마아픈것만생각하면진짜눈물나구요

친구들도절싫어하구요어떻해야되죠위로말씀듣고싶네요

정말자기전에안우는날이없습니다힘드네요


[답변]


1. 13살 소녀도 인격이며 생명입니다. 아플 수 있습니다. 위로 받을 권리도 있습니다. 이렇게 온라인으로나마 도움을 청해주셔서 고마워요. 그 용기와 진정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2. 부모의 이혼에 따른 상처, 어머니에 대한 걱정, 그리고 친구들 때문에 느끼는 소외감....... 누군가 감싸주지 않으면 홀로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군요. 우선 무조건의 위로를 전합니다. 다만 섣부른 격려는 일단 보류하지요. 이 상황에서 힘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부추김인지 잘 아는 까닭입니다.


그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 한 가지만 쉽게 말씀드려 볼까 해요. 이렇게 글을 쓰신 것처럼 되풀이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도록 하세요. "나 아파, 나 슬퍼, 나 외로워!"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듣고 스스로 고개를 끄덕여주세요. 아플만하고 슬플만하고 외로울만하다고 스스로 지지해주세요.


아파해선 안 돼, 슬퍼해선 안 돼, 외로워해선 안 돼, 이러지 마세요. 아니, 나 인제 안 아파, 안 슬퍼, 안 외로워, 이러진 더더욱 마세요. 부정하고 외면할수록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은 더 깊어지기 때문이지요. 따뜻하게 자신의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을 안아주고 다독여주세요.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은 상처에 대하여 병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것은 치유를 위해 감응하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표현이죠?^^ 하지만 무슨 뜻으로 드리는 말씀인지 알아차릴 수 있죠?^^ 좋아요! 일단 이렇게만 하더라도 마음의 힘이 조금씩 생긴답니다.


3. 오늘은 요기까지. 다시 한 번 위로의 마음을 전해드려요. 쌤이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럼.......^^


13세 초등학생 소녀가 아픈 엄마를 진심으로 걱정합니다. 그래서 눈물 흘립니다. 자기 자신의 우울증을 의심하면서도 엄마를 살피는 마음이 제 온 영혼을 적셔 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 긴 제 임상 기간 동안 딸이나 아들을 위해 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전해 온 엄마가 전혀 없었다는 기억이 새삼 저를 전율하게 합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도대체 어찌하여 우리가 이런 삶을 살게 된 걸까요?


물론 엄마들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갈 일, 아닙니다. 아니 엄마들이 더 힘들겠지요. 그들이 산 세월, 얼마나 신산했는지 모르는 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 또한 어디선가 흘러왔을 것입니다. 책임이 있다 해도 온통 뒤집어씌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각성은 고통을 겪은 자에게서 먼저 일어나는 법입니다. 먼저 각성한 자가 먼저 길을 여는 것, 또한 이치입니다. 엄마들의 각성은 잘못한 것에 대한 윤리적 책임 때문이 아니라 왜곡되고 억압된 자신과 자녀의 영혼을 본디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한 생명적 의무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마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진실을 보아야만 합니다. 내 자식이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내 자식이 발달불균형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내 자식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핵심에는 사회 체제가 있습니다. 이 사회 체제를 주도하고 있는 헤게모니 블록을 상대로 내가, 이 엄마가 싸워야 합니다. 혼자서는 안 됩니다. 연대해야 합니다. 생명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들이 죽어가면서 사무치게 엄마를 부르고 있습니다. 절통한 마음으로 제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쌤, 엄마한테 꼭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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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 무엇보다 사회제도 개혁과 인식 전환이 선결문제 아닐까요?


우울증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특히 아이들의 우울증은 어른이, 그들이 주무르는 사회가, 제도가, 인식의 틀이 만든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아이들 개인 문제로 치부합니다. 사회가, 제도가 얽어매는 족쇄를 풀어줄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아이들을 기성 체제와 가치의 노예로 만들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현실에 대한 어른들의 인식을 전환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아이들 탓만 하고 있습니다.


2010년 12월 8일 어느 일간신문 보도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만 15살 학생들의 읽기·수학·과학 실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1~4위에 올라 학업성취도가 최상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읽기 학습’에 대한 흥미도가 낮고 혼자 읽고 공부하는 능력이 다른 회원국 학생 평균보다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오이시디는 34개 회원국과 31개 비회원국의 만 15살 학생 약 47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09년 국제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PISA 2009) 보고서를 7일 공개했다. 우리나라에선 137개 고등학교와 20개 중학교 학생 5123명이 참가했다.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는 오이시디 회원국 가운데 읽기 1~2위, 수학 1~2위, 과학 2~4위로 모두 최상위권이었다. 피사 결과는 통계 오차 등을 고려해 순위를 1~2위처럼 범위로 표시한다. 읽기와 수학의 평균점수는 각각 539점, 546점으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았는데, 특히 수학에선 ‘만년 1위’ 핀란드(541점)를 처음으로 앞질렀다. 과학(538점)은 핀란드(554점)·일본(539)에 뒤졌다.

평가에 참여한 65개국 전체를 비교한 결과에서도 우리 학생들은 읽기 2~4위, 수학 3~6위, 과학 4~7위를 기록해 최상위권이었다. 과학은 2006년 평가 때는 7~13위였으나 이번에 순위가 크게 올랐다. 전체 참여국 비교에서 순위가 약간씩 떨어진 것은 중국의 대도시인 상하이가 새로 평가에 참여해 모든 분야에서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피사는 오이시디 회원국 평가를 중심으로 하되, 비회원국은 경제협력 파트너 자격으로 도시 단위로 참여할 수 있다.

성적은 최상위권이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습 흥미도는 여전히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평가의 집중 분석 과목인 읽기 영역에서 흥미·즐거움 지수가 65개 나라 가운데 28위에 그쳤다. 또 읽기 성취도에 영향을 주는 학습전략 가운데 ‘암기 전략’은 오이시디 평균을 웃돌아 37위로 나타났지만, ‘통제 전략’(자기학습관리능력)은 최하위권인 58위를 기록해 남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공부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평가에서도 우리나라는 집중 분석 과목이던 수학 성적이 상위권이었지만 흥미도와 학습동기에서 전체 41개 나라 가운데 각각 31위와 38위였고, 과학이 집중 분석 과목이었던 2006년 평가에서도 흥미도가 오이시디 평균을 밑돌아 단순 암기식 교육의 부정적인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 바 있다.


후반 밑줄 그은 부분은 대개 생략된 채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보도 사실 자체가 우리사회의 커다란 문제점을 여지없이 폭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교육이 단순암기식, 주입식이어서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은폐해야 할 만큼 부끄러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교육 제도, 그 제도를 뒷받침하는 지배집단의 전략, 그 전략의 노예로 살아가는 침묵하는 다수의 굴종이 우리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무엇이든, 인간에게 의미를 부여해주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흥미를 느껴 스스로 하는 일에서 생겨납니다. 흥미를 느껴 스스로 하는 일은 인간을 경이로움에 열려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가장 고귀하면서도 힘 있는 끌개는 바로 경이로움입니다. 이것을 박탈당한 사람은 살아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말하자면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그게 다름 아닌 우울증입니다.


해결의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아이들을 경이로움의 세계에 풀어놓아야만 합니다. 교육, 입시 제도를 총체적으로 혁파해야 합니다. 주입된 지식을 암기해서 성취하는 능력은 종당 자기 자신을 사악한 체계의 노예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이걸 누가 할 수 있으며, 그래서 누가 해야 할까요? 


정치인들로 대표되는 이른바 국가에 맡길까요? 어림없습니다. 피해 당사자인 아이들에게 맡길까요? 물색없습니다. 그 경계에 선 존재, 바로 엄마입니다. 엄마들이 뭉쳐야 이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럼 엄마들이 어떻게 뭉칠 수 있을 까요? 이 또한 오직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내 아이의 심리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입니다. 내 아이가 우울증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프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바야흐로 경천동지할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엄마들! 그들의 현주소는 어딜까요? 책의 들머리 초등학생 이야기에서 보셨듯이, 아이들의 현실과 고통을 가장 민감하게 감지해야 할 엄마들이 사실은 문제의 최전선에 서 있습니다. 물론 이 문제 또한 그 어머니 개인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려 두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망치고 싶겠습니까. 그들 하나하나 물어보면 누군들 자기 자식 사랑한다고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회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그게 자식에게 어떤 상처가 되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성가부장적 경쟁 사회 속에서 자신들조차 그 희생양이 되어 아이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비극의 자궁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어머니를 깨워야 합니다. 모성을 복원해야 아이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과 손길로 아이들을 돌보지 않으면 우리 미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 됨을 사무치게 각인하고 떨쳐 일어나 이 포악한 세상을 뒤집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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