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필부로 사는 동안 참 무던히도 비범한 지식을 추구해 왔다. 법학, 신학, 의학을 차례로 공부하면서 교과서 범주 너머로 나아가는 가속도가 점점 더 가팔라졌다. 스승은 둘이었다: 원효 사상과 물리학. 원효 사상은 내 사유 본진으로서 메타인지 능력을 만개시킨 사사 스승이다. 물리학은 빈틈없는 인과 사유를 통해 세계 본성으로 육박해 가도록 자극한 사숙 스승이다.

 

방정식 체계로서 물리학은 어렵다. 나는 서사로서 물리학에 다가가면서 내 아름으로 품을 수 있는 만큼만 배웠다. 예컨대 최근에 내가 고민한 문제인 “E=mc²는 어디서 왔을까?”에 대해 문송답게 간단명료한 서사로서 답을 찾아다녔으나 헛일이었다. 어떤 과학자가 아인슈타인이 E=mc² 유도 과정을 밝히지 않아서 자기 나름대로 유도했다며 제시한 전개식을 마주했는데 겉모양을 한눈에 보고 놀라서 아예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포기한 채 혼자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때 홀연히 뉴턴 방정식 F=ma가 떠올랐다. 대뜸 이렇게 추정했다. “아인슈타인은 E=mc²F=ma에서 유도했다. 방법은 미적분이다.” 딱 여기까지다.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이런 멈춤과 또 다른 까닭에서 더 멀리 나가는 물리학 지식을 이제는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찾아왔다.

 

요 두 달 동안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멈추고 서성일 때 날아든 책이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 노벨상 받은 석학 9인과 인터뷰한 내용을 재구성한 책이다. 내용 자체가 나를 바꾼 게 아니다. 읽는 동안, 이 최고 지성들이 첨단 지식에 이르기까지 들어간 어마어마한 돈 생각이 불현듯 든다. 다음 순간, 그 빛나는 지식과 기술은 내게 무엇일까, 하는 생각으로 번진다.

 

두 생각은 결국 하나다. 양자물리학이든 천체물리학이든 구미 제국 아니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거대 자본을 들여야 그 지식과 기술 축적이 가능하다. 그 지식과 기술 덕에 나는 컴퓨터며 스마트폰을 쓴다. 그러나 내게 도달한 편의는 그 지식과 기술의 부산물 또는 떡고물에 지나지 않는다. 내게는 그나마 부산물 또는 떡고물 정도라도 떨어지지만,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는 아이에게는 아무것도 가닿지 못한다. 저 돈 억만 분의 일이면 굶어 죽는 아이들을 모두 살릴 수 있다. 아이들을 희생시키더라도 인류가 도달해야 할 지식과 기술이라 할 때 과연 그게 무엇일까? 결국은 극소수 지배층에나 혜택이 돌아갈 이상향 건설에 쓰일 도구다. 인류를 다행성 종족으로 만들겠다는 일론 머스크가 그 증거다. 이때 인류는 백인, 특히 앵글로아메리칸 특권층을 말한다.

 

저들이 간직한 비전은 기독교 성서가 전하는 미신에서 발원한다. 선택된 자들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려 올라간다는 휴거 주술에 마름 짓하는 첨단 고급 지식과 기술에 나는 더 이상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결단한 가난처럼 결단한 능동 무식을 반제국주의 전쟁 병기로 삼는다. 제국주의 근본정신인 과대망상에 맞서 휴먼스케일 아름 슬기로 싸운다. 백전백패야말로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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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출근길, 언덕진 골목을 내려오는데 뒤에서 자동차 소리가 난다. 걸음 속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조금 걸어 옆으로 비켜주는 순간 경적이 울린다. 나는 돌아선다. 차를 가로막고 선다. 운전자가 화난 표정으로 창문을 연다. 내가 묻는다:왜 경적을 울립니까? 그가 답한다: 차가 오면 빨리 비켜야 할 게 아닙니까? 내가 다시 묻는다: 이런 골목길에서 차가 오면 사람이 비켜야 합니까? 그가 다시 답한다: 당연하죠. 내가 못 박는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흉기가 될 수도 있는 차가 사람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따라오는 게 옳습니다.

 

하마터면 싸움 날 뻔했으나 옆자리에 앉은 여성-배우자로 보이는-이 얼른 사과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차는 쌩하고 떠나고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검푸른 새벽하늘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사실 이럴 때마다 내가 혹시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닐까, “검열하게 된다. 이런 경험은 한두 번이 아니고 수십 년 동안 바뀌지 않는 풍조라면 내가 유난 떤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일일이 대응하는 일도 이젠 넌덜머리가 나지만 그럴수록 모욕당한다는 느낌은 강해진다.

 

생겨날 때부터 그랬겠지만, 자동차는 그 자체는 물론 소유자, 심지어 운전자까지 귀한대접을 해줘야 마땅한 선진 문물로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했다. 자가용차는 부와 성공, 결국 계급을 의미했다. 재물을 떠나 이동 수단 개념으로까지 나아간 요즘이지만 이 통념은 오히려 강고해지고 있다. 무슨 차를 가졌는가로 신분을 알아본다. 당연하다. 대형 고급 승용차 모는사람이 경차 끄는사람 무시한다. 당연하다. 심지어 오늘처럼 보행자보다 자동차, 정확히는 그 소유자나 운전자를 우선시한다. 당연하다. 왜 갈수록 당연해질까?

 

<가난이 병기다>에서 언급한 제국주의 생활 양식 3대 아이콘이 자가용차, 자기 집, 육식이다. 이것들은 정착형 식민 과정을 환기하는 상징이다: 정복 전쟁과 자동차, 점령·소유와 자기 집, 제노사이드와 육식. 제국주의를 완성해 가는 역사를 따라 이 아이콘은 제국 경계 넘어 식민지까지 물들이며 탐욕 극대화에 주구로 복무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짝퉁이나 싸구려 떡고물이 식민지 무지렁이 부역자들에게까지 떨어뜨려짐으로써 적극·능동 부역 체제가 난공불락 지경으로 치달아 가고 있다.

 

자가용차는 제국 용병이 거침없이 정복 전쟁을 수행하는 진군 이미지를 화려하고 경쾌하게 만들어내어 가부장 오르가슴을 만족시킨다. 일방 독단으로 조작하고 조종하는 소유·운전자는 제국 통치자 심리를 그대로 복사할 수 있다. 운전대를 잡는 순간부터 제국 아바타가 되어 역사도 문화도 없는 인류를 살육하도록 천명 부여받은 성스러운 전사가 되니, 누군들 골목길 아니라 주차장에서라도 경적을 울려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가용차가 어떻게 제국 성막이며 군대며 병기가 아닐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아가는 식민지 백성 사정을 나도 무지렁이 부역자인 한 한사코 외면할 수만은 없다. 이해도 공감도 십분 넘친다. 그러나 알고는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중첩 식민지를 살아가며 어떤 모순에 침윤되어 있는지를, 알아도 사무치게 알아야 한다. 일제 마지막 총독 아베가 축원한 바를 완수하려 뉴라이트 바지 사장 앞세워 대통이 날뛰고 있는 오늘 내 정치적 상상력은 이렇게 애먼 새벽 운전자에게까지 신랄하게 꽂힌다. 40일도 채 남지 않은 내 60대를 이 모멸로 채우고 싶지 않다. 어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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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역에서 열차를 기다린다. 고주파 찰 신라어를 구사하는 내 또래 사내가 화차 삶아 먹은 소리로 비슷한 또래 아낙들에게 떠든다: , 두 다리 멀쩡한데 말라꼬 경로석에 쭈그리고 앉을끼고. 내는 거 안 앉는데이. 아낙들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인다. 버전만 바꾸어 같은 자랑질을 되풀이하자, 좀 젊어 보이는 아낙 하나가 묻는다: 그럼, 어르신 카드도 안 쓰세요?

 

갑자기 주위가 찬물 끼얹은 듯 조용해진다. 모두 다 답을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물론 그 답이 그 사내한테서 나오지 않으리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는 표정도 포함된다. 마침 그때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열차가 들어온다. 사람들은 서둘러 열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그 사내 모습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나는 빈 경로석, 아니 정확히는 노약자 보호석에 앉는다.

 

지하철 이용하는 노인들 대부분이 저지르는 잘못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각 칸 끄트머리에 세 좌석씩 마련해 둔 보호석은 경로석이 아니다. 노약자, 그러니까 노인만이 아니라 어린아이, 영유아를 안은 엄마, 아픈 사람, 임산부···들을 포함한 교통 약자 모두에게 제공하는 공간이다. 의도적 무지를 장착한 일부 노인이 그 자리 앉아 나이 쌈질을 벌이곤 한다. 정말 ·이다.

 

둘째, 노약자 보호석이 비어 있음에도 구태여 일반 좌석에 앉는 노인이 드물지 않다. 아니 많다. 정말 많다. 노약자 보호석을 만든 사회적 합의가 어떤 약속을 포함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은 자들이 그 짓을 한다. 자신이 차지한 그 자리에 앉지 못한, 그러니까 빼앗긴 젊은이가 경로석에 앉는 일은 용납하지 않을 게 뻔하면서 말이다. 이 자들에겐 우대도 보호도 무의미하다.

 

이야기를 다시 앞으로 돌린다. ‘경로석에는 앉지 않는다면서 어르신 카드는 아무 생각 없이 쓰는( 것으로 보이는) 그 사내는 정말 건강한 다리는 지녔으나 보호받지 않아도 살 정도 돈은 없어서 어르신 카드를 쓰고 있을까? 아니라면 둘 사이 모순은 왜 발생했을까? 복잡하게 따질 필요도 없다. 돈 문제만큼은 양보나 포기가 불가하기 때문이다. ‘경로석을 둘러싼 이 이야기들은 다른 갈래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다. “늙은이아닌 노인 드문 우리 사회를 드러내는 표지다.

 

노인 공경은 한 공동체가 스스로 세운 권위를 장로에게 헌정하는 윤리다. 그러니까 노인 공경은 한 사회가 공동체성을 유지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처럼 공동체성이 무너진 집단에는 당치않은 허례다. 김종인이나 윤여준, 또는 김형석 따위 특권층 부역자들이 원로로 소비되며, 노탐이 성공과 전형으로 칭송되는 판에 무슨. 물론 나 또한 늙은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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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혁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일본은 이미 가난한 나라가 되어있다. 신주쿠 거리에 와서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일본 여성에게 돈을 주고 매춘을 하는 남성은 백인도 있지만 중국인이 가장 많다고 한다. 약 100년 전엔 중국과 한국, 기타 아시아인 여성들을 전쟁터에 유인해 위안부로 삼았던 일본은 이제 정확히 반대의 상황에 처해 있다.

한국도 가난해지고 있다. 국민 연금까지 헐어가면서 환율을 방어하고 있지만, 더 이상 오래 버티기 힘들 것이다. 원화 금리를 더 높이지 않으면 치솟는 물가를 도저히 못 잡는다.

한국 기업들은 지난 10-20년 간 중국을 상대로 돈을 벌어왔으나 중국 특수는 이미 끝났다. 미국에서 돈을 버는 것 같았지만, 트럼프 2.0의 등장과 함께 중국이 빠진 자리를 메꿔온 행태도 끝이라고 봐야 한다.

한국은 곧 아주 가난해질 것이다. 롯데 등 굴지의 대기업들마저 공중 분해될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자영업자들은 빚밖에 없는 상황. 누가 구매를 한단 말인가? 일본 신주쿠처럼 매춘부들이 득실거리는 거리. 유럽처럼 강도들이 설치는 상황. 이제 멀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국은 검찰 정치와 결탁한 언론이, 경제위기론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다. 언론이 밀고 있는 정부의 지지율이 빠질까 봐...

이게 가장 위험한 맥락이다. 일본, 유럽은 경제 위기를 인식하고 문제 제기를 하고 있지만, 한국은 문제 제기조차 불온하게 취급한다. 이대로면 진짜로 망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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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원장(KBS 기자)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글을 그대로 싣는다




경기가 안좋다… 이걸…어떻게 증명하지? 어렵지 않아요. 자, 일단 통계청의 3분기 지역경제동향에 들어갑니다. 그중에 ‘소매판매지수’ 칸이 보이죠? 대형마트부터 동네 편의점까지 2,700개를 정해놓고 매달 통계청 직원이 이메일이나 전화로 물어서 뽑는 통계입니다. 


소매판매는 언제 줄었을까요? 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런때 마이너스였어요. 하지만 금새 좋아져서 2009년 4분기에는 무려 10.8%가 올라요. 그리고 10여년동안 마이너스로 떨어진 적이 한번도 없어요. 그러다 코로나 때 또 두차례 소매판매가 줄어듭니다. 그때 –2.0%까지 떨어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올 2분기에는 얼마나 줄었을까요? ‘2.9%’나 줄었어요. 그래요. 동네 상권은 코로나 때 보다 더 어려운거죠. 그리고 며칠전 나온 3분기 통계, 또 1.9%나 줄었습니다. 이렇게 10분기 연속 소매판매가 줄었어요. 20년 동안 소매판매가 2분기 이상 감소한 적이 없답니다. 그런데 지금 10분기 연속 소비가 줄고 있어요. 


감이 잘 안오죠? 감이 잘 오도록 통계청은 이를 그래프로도 보여줍니다. 가운데 상단에 [기간]을 눌러서 시계열을 10년 정도로 비교해 보세요. 지난 2년반 동안 소비가 얼마나 뚜렷하게 줄고 있는지 한눈에 보이죠? (그래도 못 찾는 분들을 위해 제가 캡처해서 댓글에 붙여놓을게요)


(이도저도 귀찮다면 그냥 아래 URL을 누르세요)

index.go.kr/unity/potal/ma… 


이 그래픽을 붙이고 제목을 ‘코로나 때보다 더 차갑게 식어버린 동네 상권’이라는 제목을 쓰면 됩니다. 그래요 내수가 식어갑니다. 외수(수출) 때문에 버티고 있는데, 내년에는 이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어제 IMF는 내년 우리 성장률 전망을 큰 폭으로 내렸고, 이미  씨티나 JP모건은 내년에 우리가 2%도 성장을 못할거래요. 


잠재성장률은 재정이나 통화같은 인위적인 정책 없이 경제가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죠(과외나 학원 수업 없이 학생 스스로 수능 성적을 몇 점이나 올릴 수 있느냐). 그런데 우리 경제성장률이 잠재성장률(2.0%)과 이븐하게 또는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은 뭘 의미할까요. 정부가 아무 일도 안한다는 또는 뭔가 했는데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자영업자들은 계속 문을 닫고, 그런데 지난해 60세 이상 자영업은 200만을 넘어섰습니다(통계청). 무슨 말이냐. 노후를 위해 저축해놓은 게 부족한 국민들이 다들 하면 망한다는 자영업에 뛰어들고 있는겁니다. 이들 중 몇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정부는 여전히 물가상승률은 낮고(1.3%) 실업률은 사상 최저 수준(2.1%)이라고 해요. 그런데 오르고 오른 것 중 뭐가 제일 올랐죠? 네, 집값이죠. 그 집값(자가주거비)은 우리 물가상승률에 안들어 갑니다(정부는 계속 검토중이여요. 저라도 내 임기동안에는 안 넣을 것 같아요.) 맞아요. 아버지 편의점에서 무급으로 일해도 우리 실업률에는 반영이 안된답니다.‘행정고시 준비하다가 잘 안돼서 교직 준비하다 그만두고 지금 그냥 누나 약국에서 일 도와주고 있는 후배’도 실업률에 반영이 안됩니다. 통계라는 게 그런 거예요. 원래 그런거예요.


‘이런’ 통계를 바탕으로 정부는 11월 경기동향에서‘경기회복 저점이 서서히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밝혔습니다. 어때요 저점이 보이나요. 그러면서 ‘내수회복’이라는 단어는 (7개월만에) 경기동향 자료에서 슬그머니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내수는 공식적으로 회복되지 않고 있음이 확인됐습니다. 자… 우리 경제는 지금 어떤가요. 어렵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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