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욱(교수/사회학자)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극우몰이는 안 돼”. “우리는 극우 아닙니다”. “왜? 또 극우라고 하시지요.”


정치권과 언론에서 계속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극우가 아닌 사람에게 극우’몰이’는 물론 나쁩니다. 그런데 극우 개념을 처음으로 학문적으로 정립한 학자 중의 하나인 정치학자 만프레드 풍케는 일찍이 이렇게 썼습니다.

"극단주의라는 단어에는 근본적으로 비난의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자신을 극단주의자로 지칭하는 극단주의자는 아무도 없다."(Funke, 1978: 6).

*

지난 주말에 모 중앙일간지 인터넷판에 메인으로 올라온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극우? 그건 아니죠"…대학생 그들이 태극기 든 까닭”.

그럼요, 태극기 집회 나오는 사람이 다 극우주의자나 극우적 주장에 동조하는 건 아닐 겁니다. 그래서 저도 그 ‘까닭’이 알고 싶어서 기사를 읽어 봤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에 지난 17일 서울대에서 열린 탄핵반대 집회 참석자들과의 인터뷰가 인용된 내용이 이랬습니다.

“과반 의석을 가진 야당은 예산 삭감과 줄탄핵 등으로 반대쪽 의견은 손발을 묶고 ‘자유민주주의’의 자유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계엄 말고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싶다”

“과거 계엄과 비교하면 소수 병력이고 국회가 요구하자 철회했다. 사상자도 없었다.”

“계엄을 하지 않았다면 반국가·공산주의 세력에 잠식됐을 것.”

“문재인 정부가 되니 안보의 경계를 낮추고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경제를 폭망하게 했다. ‘국민 갈라치기’ 식의 여론을 유도해 분열을 조장했고 심했다. 이것이 간첩이 들어올 틈새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극우가 아니면 무엇이 극우라는 말일까요? 이런 내용이 ‘극우가 아니다’는 근거로 제시되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설령 저런 발언이 인터뷰에 나왔더라도 기사가 설득력이 있으려면 ‘극우는 아니지만 탄핵에는 반대’인 내용을 선별해서 담았을 법도 한데 말입니다. 극우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불분명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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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터뷰도 여러 번 했지만 ‘극우’에 대한 학문적 정의를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모든 학문적 정의가 그렇듯이 극우의 정의 역시 완전한 합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많은 학자가 경험적 연구를 토대로 개념 정의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학계에서 극우의 정의는 주로 이데올로기 또는 세계관의 측면에 초점을 맞춰 왔습니다. 인종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반유대주의, 반이슬람주의, 자민족중심주의, 반공주의, 반의회주의, 군사주의, 반동성애 등 많은 요소가 언급됩니다. 파시즘, 포퓰리즘 연구로도 유명한 학자인 카스 무데는 다양한 극우의 정의들에서 반민주주의, 권위주의 국가관, 헤테로포비아, 인종주의 등 몇 가지 공통분모를 찾아냈고, 그중에서도 반민주주의가 가장 핵심이라고 했습니다(Mudde, 1995; 2000).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극우 세계관의 특성은 차별, 배제, 반평등입니다. “'극우'는 많은 경우 폭력의 위협이나 행사를 통해 민주적 기본권을 제한 또는 폐지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표준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소수자들을 배제, 추방, 혹은 절멸하며, 사회적 해방과 민주적 참여의 목적을 추구하는 세력들을 약화시키거나 제거하려는 행위, 인물, 조직들을 지칭한다.”(Butterwege, 1996: 27)

특히 독일에서는 민주적 헌법국가의 수호라는 관점에서 개념 정의가 발달됐습니다. 정치학자 에크하르트 예세는 극단주의의 본질이 "민주적 헌법국가의 민주적 혹은 헌법적 요소를 거부하거나 제한하려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요소는 "다원주의, 다당 경쟁, 정치적 반대의 권리, 권력분립, 보편적 기본권" 등입니다(Jesse, 2000; 2021). 이 정의는 독일 정보기관과 경찰이 감시, 수사 대상을 판단하고, 헌재가 극우단체 해산 여부를 결정할 때 결정적인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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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내가 미워하는 정당과 사회집단을 없애기 위해 민주주의를 중지시킬 수도 있다(계엄 불가피, 계몽령), 내가 위험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기관을 무력화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법원 공격은 저항권), 이 사회와 정부가 적에 의해 점령되어 있다(부정선거론, 중공배후론, 헌재빨갱이론), 이런 생각들은 전 세계의 극우 연구에서 널리 관찰되는 전형적인 세계관입니다.

이런 주장과 세력은 이미 많은 곳에 퍼져 있었지만 밝은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고 깊은 지하창고에 묻혀 있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윤석열은 계엄에 실패하자 자기 살자고 이 위험천만한 극우적 힘을 정치 무대에 주연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국민의힘도 자기 살자고 그 불장난에 동참해 극우정당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를 살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극우는 안 된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런데 극우를 비호하면서 ‘이것은 극우가 아니다’, ‘극우라고 부르지 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극우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싸잡아서 경멸하거나 증오해선 안 됩니다. 우리의 부모님, 친구, 형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타인의 존엄, 공존의 전제를 파괴하는 행위가 우리 사회에서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10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가진 사이버렉카와 그 구독자들이 젊은 BJ여성을 ‘페미’라고 마구 공격하여 그 여성과 어머니가 자살하는 비극이 있었지만 그 유튜버는 사법처리도 받지 않았습니다. 지난 남태령 집회에서 자유발언한 중국인 여성이 그후 인터넷에서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공격을 당하고, 그 다음 집회에서 다시 무대에 올라 이 나라에서 자란 자신을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해 달라고 울며 절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고통을 외면하고, 그러한 폭력을 행한 자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공감이 앞서야겠습니까? 그건 위선입니다. 그들은 결코 악마가 아니지만 분명 악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다수가 그런 극우적 사고와 행동에 분명히 반대하고, 우리 공동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회’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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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정(국회의원)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교정당국과 법무부는 국민의 분노가 들리지 않습니까? 법무부 태도는 변한 게 없었습니다. 그간 피청구인에게 제공되어 온 황제 출장 스타일링 서비스도 여전합니다.


수인번호 0010 윤석열 피고인을 법과 원칙대로 일반 수용자와 동일하게 처우하는 게 그렇게나 힘듭니까? 형집행법상 부분 가발을 포함한 장신구는 엄격히 금지되고, 스타일링을 허용할 법적 근거는 전무합니다.

지난 21일 헌재 탄핵심판 변론에 처음 나타난 피청구인은 머리에 한껏 힘을 준 모습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공수처는 피의자 윤석열에 대한 일반 접견을 금지한 바 있습니다.

법무부 설명대로 대통령실이 섭외한 일반인 스타일리스트가 머리 손질을 해줬다면, 이는 형집행법 제41조 제1항 위반에 해당됩니다. 법을 우습게 아는 평소 습관대로 대수롭게 넘긴 그깟 머리 손질이었는지, 이후 헌재에 출석할 때마다 소위 뽕이 잔뜩 들어간 그의 머리는 한껏 부풀어 있었습니다.

별도로 추계한 출장 스타일링 서비스 1회 금액(대통령실 인근 A미용실 12만 원, 구치소 인근 B미용실 10만 원, 헌재 인근 C미용실 10만 원)은 대략 10만 원 선으로 추정됩니다. 메이크업이 추가된다면, 금액은 2배로 뜁니다. 피청구인이 다섯 차례 헌재에 출석하며 발생한 스타일링 비용은 누가, 어느 기관이 지불했습니까?

대통령실이 대납했다면, 권한행사가 정지된 자의 편의에 국고금을 유용한 셈입니다. 경호 업무와는 무관한 스타일링 비용을 경호처에서 지급했어도 문제입니다. 국고금 횡령과 직무유기 혐의에 해당하며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내란 수괴 피고인이 직접 지불했어도 규정 위반입니다. 법무부 보관금품 관리지침상 보관금, 소위 영치금은 1일 2만 원 한도에서 음식 구입에 사용하고, 나머지 금액도 의류ㆍ침구ㆍ약품ㆍ일상용품ㆍ도서 등의 구입비용으로 용처를 정하고 있습니다.

법무부는 스타일링이 대통령실 요구였다며, 구체적 내용을 함구하고 있습니다. 직무가 정지된 자에게 대통령실이 편의를 봐줬다면, 이는 헌법 65조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 아니겠습니까? 국민들은 피가 끓어 분노의 감정을 억누르며 탄핵심판을 보고 있습니다.

내란 수괴 피고인은 스타병에라도 걸린 겁니까? 스타일링 없이는 외부 노출도 힘든 피청구인의 행태와 이를 용인한 교정당국의 위법적 결정에 반드시 책임을 묻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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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25-02-13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이 보아주는 눈길’을 받아먹고 사는 무리한테는, ‘그깟 헤어스타일’일 수 없겠지요. 그러니 ‘나랏일’이나 ‘사람들 살림살이’가 아닌 ‘머릿결’에 힘을 쓰는 모지리짓을 한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그 모지리뿐 아니라 다른 벼슬아치(정치꾼)도 똑같이 머리카락에 힘주고 비싸고 값진 옷차림에 까만 자동차를 몰고서 움직입니다. 그 모지리도 모지리이지만, 우리나라 벼슬아치는 모조리 ‘그깟 헤어스타일’에 갇혀서 ‘사진 잘 찍히려’고 용을 쓴다고 느낍니다.
 


春有百花秋有月(춘유백화추유월) 갖은 꽃들 피는 봄, 달 뜨는 가을

夏有凉風冬有雪(하유량풍동유설) 바람 시원한 여름, 눈 오는 겨울

若無閑事掛心頭(약무한사괘심두) 쓸데없는 일 따위 마음 두지 않으면

便是人間好時節(편시인간호시절) 겨울 가을 여름 봄 모두 좋은 나날들

_무문혜개(無門慧開) 짓고 강용원 옮기다.

 

이 시를 발견한 곳은 우이동 어느 쌈밥집이다. 아직도 연탄난로를 쓰는 노포다. 밥 먹다 말고 내가 연탄과 난로 사진을 찍자 다른 곳도 있다며 바깥쪽을 가리킨다. 식당 주 공간 아닌 보조 공간인데 연탄 광으로 쓴다. 거기 벽에 떡하니 이 시 담은 액자가 걸려 있다. 승려가 쓴 것으로 보이는 붓글씨 서체가 특이해 사진에 담았다가 내친김에 번역까지 해 글 들머리 화제부터 삼았으나 시는 오늘 이야기 문을 여닫는 조연일 따름이다. 주인공은 연탄이다.

 

사진 찍고 돌아와 내가 연탄 이야기를 꺼내자, 주인과 직원이 옛 벗을 만난 양 오래된 기억을 서로 꺼내놓으며 수다 삼매로 들어간다. 1965년 서울로 와 도시빈민으로 살아온 내게 연탄은 어두운 기억으로 점철된 존재다. 무엇보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세 번 쓰러져 바보(!)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부터 떠오른다. 연탄가스 중독이 거듭해서 일어났지만, 대책은 없었다. 절대빈곤이 마주한 절벽이었다. 그 암담함을 돌이키면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그다음은 단연 고된 배달 기억이다. 성북구 동소문동 616번지는 대표 산동네로 당시 서울 사람이면 모를 수 없는 빈촌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극빈층에 속했던 우리 집은 대부분 연탄을 낱장 구매해 손으로 날랐다. 그나마 돈이 좀 돌면 두 장, 마르면 한 장을 가운데 구멍에 매듭진 새끼줄을 넣어 들고 산 아래 연탄 가게서부터 꼭대기 우리 집까지 날랐다. 초등학생인 내가 그 일을 했고 어른인 아버지는 일절 손대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이제 연탄재 이야기다. 산동네 쓰레기는 일주일에 한 번 쓰레기차가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일주일 치를 모아 메고 들고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뛰어가 쓰레기차에 던져넣어서 버렸다. 왜냐하면 쓰레기차가 계속 멀어져가기 때문이다. 이때 주된 쓰레기가 다름 아닌 연탄재다. 이 일도 내 몫이었다. 눈 내리면 미끄럼 막고, 장마 끝엔 파인 길 메우는 경우 빼고 연탄재를 이렇게 모아줬으니 나도 난지도 표고를 100m 높이는 데 공을 세운 셈이다.

 

1950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해 1990년대 초반까지 서민 사회를 상징했던 연탄은 한창일 때 서울에서만 하루 1,000만 장을 소비했다. 지금은 서울에서 1,800가구가 연탄을 쓴다. 그나마 이문동에 있던 마지막 삼천리 연탄 공장이 2024년 문을 닫았다. 전국적으로는 74,000가구 정도가 연탄을 쓴다. 20곳가량 남아 소규모 생산을 이어가는 중이다. 한 시대가 저물어간다. 연탄과 더불어 출발한 내 10대가 이제 70대로 접어들었으니 내 인생도 저물어간다.

 

연탄은 본디 왜놈 발명품으로서 병탄기에 들어와 우리 삶에 이식되었다. 그 자체를 바로 정치적 의미와 결부시켜 해석할 수는 없지만 고난에 찬 현대사 속 서민 애환에 드리운 식민지 유제, 이승만과 박정희 그림자를 지우고 이해할 수도 없다. 사라지는 연탄과 더불어 사라져야 할 유제와 그림자가 여전히 날뛰는 현실에서라면 연탄 한 장 바라보는 일이 예사로울 수 없다. 내란 상황에서 불안해하는 일은 연탄가스 중독을 걱정하는 일과 어찌 그리 비슷한가.

 

내란 수괴들이 벌인 기이하고 더러운 짓거리가 점입가경이다. “노상원 뒤에는 김충식이 있다. 김충식은 명신이 엄마 내연남으로 일본 왕족 밀서를 명신이 연놈한테 전달했다. 국 이 내란 맨 뒤에는 일본이 있다.” 어젯밤 분노와 슬픔으로 내가 처마신 술은 왜놈 발명품 가짜 소주다. 오늘 아침 일어나니 연탄가스 중독에서 막 깬 상태와 같다. 대체 이 악무한을 어찌할까.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이라니. 대체 어떤 삶이면 이렇게 노래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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