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0장 본문입니다.  

 

子路問强 子曰 南方之强與 北方之强與 抑而强與  寬柔以敎 不報無道 南方之强也 君子居之

衽金革 死而不厭 北方之强也 而强者居之 故君子 和而不流 强哉矯 中立而不倚 强哉矯 

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  

 

자로가 강한 것에 대해 물었다. 이에 공자는 답하셨다. "남방의 강함인가? 북방의 강함인가? 아니면 너의 강함인가? 너그럽고 부드러운 것으로써 가르치고 무도한 자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은 남방의 강함이니 군자는 이를 택한다. 창검과 갑옷을 깔고 누워 죽어도 싫어하지 아니함은 북방의 강함이니 너의 강함은 이를 택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조화되지만 흐르지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가운데에 서서 기대지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궁색하던 때의 절조를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으면 죽음에 이르러도 변치 아니하니 그 강한 꿋꿋함이여!"  

 

2. 남방과 북방을 대비한 본문은 아무래도 후대 냄새가 납니다. 물론 고증과 무관한 관견입니다. 남북에서 남은 중원 또는 남송을 가리키는 漢族의 가치와 연결되고 북은 이른바 오랑캐의 가치와 연결되는 암시가 느껴지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해 본 것입니다.   

 

사실이야 어떻든 우리는 본문을 꿰뚫고 내용을  간취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군자는 유연하고 관대한 내면의 덕으로 강함을 삼지 힘으로 밀어 붙이는 외적인 제압으로 강함을 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맥락이  서로 닿아서 문득 생각난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선친께서 들려주셨던 김굉집 부자의 일화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널 속이려 한다. 어떻게 그것을 막겠느냐?"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첫째, 감히 속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힘으로 누르는 것이지요. 둘째, 능히 속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식을 동원하는 것이지요. 셋째, 차마 속이지 못 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힘으로든 지식으로든 다 가능하지만 인격적 승복 때문에 속일 수 없게 만드는 것이지요. 최후의 것이 으뜸입니다."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자로가 추구하는 강함은 춘추전국의 제후적 강함이었습니다. 공자는 그것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눈에는 과연 누가 자로일까요? 시장경제적 자유민주주의 기치를 내건 천민자본주의 헤게모니 블록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너그러움도 부드러움도 없습니다. 무도한 자가 아님에도 자신과 다르면 전광석화처럼 보복을 감행하면서 개혁이라 우깁니다.   

 

하필 왜 강함의  화두가 여기서 나온 것일까요? 우리 관점에서 보면 지당한 흐름입니다. 중용은 강자, 승자의 덕목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강자, 승자의 경직성에서는 결코 소통이 나올 수 없습니다. 소통 없이 "평범함"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두 평범함에 깃들 때 평등의 원리, 즉 大同이 실현됩니다.  

 

필요악(!)으로서 사회계층구조가 인격의 계층구조가 아님을 깨닫는 지배집단이 아닌 한 그들은 죄다 자로의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로의 무리들이 제아무리 누구를 좌경이다, 급진이다 몰아쳐도 자신들이 턱없이 중용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3.  이제 본격적인 중용의 도가 나옵니다. "어울리되 휩쓸리지 않는다.", 또는 "어울리되 벗어나지 않는다."로 읽을 수 있는  和而不流는 아마도 和而不同과 같은 뜻일 것입니다. 개인적 느낌으로는 和而不流가 훨씬 역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제후적 가치, 천민자본주의적 시대정신과 함께 흘러가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不倚) (우뚝) 서서 벗어나지 않는(中立) 꼿꼿함(矯)이야말로 군자의 강함이라고 갈파합니다. 제 생각으로 중립은 가운데 선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대지 않고 (우뚝) 선 자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中에 대한 명사적 독법에 반대한다는 지론에 입각한 것입니다.  

 

4. 나라에 도가 행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궁색함(塞)을 얼마든지 벗어나도 될 테지만 찰나찰나 중용의 실천에 깨어 있으려고 늘(不變) 궁색하던 때의 절조를 간직하는 것이 군자의 기품입니다. 이 不變은 자기의무로서 결단입니다. 반대로 나라가 어지러울 경우 제후적, 천민자본주의적 가치가 군자를 유혹, 나아가 핍박할 것입니다. 이 때는 결연히(至死)  맞서서 본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습니다. 이 不變은 공적의무로서 저항입니다.   

 

꼿꼿함도 이처럼 時中하는 것입니다. 홀연히 君子豹變이란 <역경>의 말이 떠오르는데 망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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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9장 본문입니다.  

 

子曰 天下國家 可均也 爵祿 可辭也 白刃 可蹈也 中庸 不可能也.  

 

공자는 말씀하셨다. "천하나 국가도 고르게 할 수 있으며, 벼슬이나 녹도 사양할 수 있으며, 시퍼런 칼날도 디딜 수 있으나 중용은 할 수가 없다."   

 

2. 중용은 과연 최고의 덕입니다. 천하나 국가를 고르게 하는 위대한 정치력의  "특별함"으로도, 큰 벼슬이나 녹을 받을 만한 재목의 "특별함"으로도, 시퍼런 칼날을 디딜 수 있는 재능의 "특별함'으로도 접근이 불가능한 가치입니다.   

 

중용의 이 도저한 "평범함"은 인간 생명의 전 면모를 통해 드러나는 통합가치입니다. 참된 소통의 흐름에 자신을 놓는 맑은 마음, 소통을 꿰뚫어 보는 슬기, 꿋꿋이 소통을 실천하는 옹골참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오히려 "특별함"이 더 쉽습니다. 애써 통합할 것 없이 갈라놓으면 그뿐이기 때문이지요.  

 

사실 중용실천의 전제 조건을 살펴보면 "이걸 어찌 평범하다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도리어 관념적이지 않느냐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허나 핵심은 무엇이 평범한가 하는 추상적 문제에 있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누리기를 바라는 권력, 돈, 지식이 특별한 가치로 이미 자리매김 되어 있는 현실 세계가 大同을 거절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결국 평범하지 않은 것을 평범하다 하는 요청적인 어려움은 바로  그 사이비 특별함 때문에 생긴 난제인 셈이지요. 세상이 꼬인 것입니다. 가치가 뒤바뀐 것입니다. 이래서 중용은 혁파입니다. 혁파이기 때문에 공자의 입에서 "할 수가 없다(不可能也)"는 탄식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3. 요즘 우리사회 돌아가는 모양이 꼭 그와 같습니다. 입만 열면 경제를 말하는데 경제는 더 나빠지고 그로써 더더욱 백성들은 "배부른 돼지"가 되도록 교묘하게 '사육' 당하고 있습니다. 그 사육정책으로 누가 무슨 이득을 챙길지 뻔히 알면서도 온 사회가 마치 무엇에 씌운 것처럼 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마음을 챙기고 다시 세상을 보면 지. 금. 여. 기. 야말로 공자가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중용적 혁파가 필요한 시공간임을 알게 됩니다. 다시 한 번 곰곰 챙겨 보겠습니다.   

 

참된 소통의 흐름에 자신을 놓는 맑은 마음,

소통을 꿰뚫어 보는 슬기,

그리고 꿋꿋이 소통을 실천하는 옹골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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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본문입니다.  

 

子曰 回之爲人也 擇乎中庸 得一善則拳拳服膺而弗失之矣.  

 

공자는 말씀하셨다. "회(안회)의 사람됨은 중용을 골라서 실천하는 것이니 하나의 착한 것이라도 얻으면 받들어 가슴에 꼭 붙잡고 잃어버리지 아니한다."   

 

2. 중용이 군자에게 주어진 자격증이 아니고 찰나찰나 결단해야 하는 "선택(擇)"의 문제임은 앞 장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더 거론할 일은 없으나 연상되는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하고 넘어가지요. 
 

한국 불교 논쟁사에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가 이른바 돈점(頓漸) 논쟁입니다. 보조국사 이래 내려온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해 성철선사가 돈오돈수(頓悟頓修)로써 이의 제기를 하면서 태풍처럼 일세를 몰아친 논쟁이었습니다. 단박에 깨치더라도 그 뒤 끊임없이 닦아야 한다는 전자에 대해 단박에 깨쳤는데 뭘 더 닦을 게 있겠느냐는 반론이 후자이지요.  

 

후폭풍이 여전합니다. 둘 다 맞다는 포용론이 있는가 하면 각기 다른 용처가 있다는 현실론도 있습니다. 단박에 깨친 경험도 없고 성실히 닦은 세월도 없는 중생이 여기에 입 댈 처지는 아닙니다. 다만 깨친다는 것과 닦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 맥락에서 대칭구도를 이루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성찰하는 작업이 미흡한 논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즉 논쟁 자체에 가담하기 앞서 논쟁의 전후 연관성을 살펴 중생에게 빛이 될 수 있는 현실 지평을 열어 놓지 않은 채 "그들만의" 논쟁으로 깊어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중생제도와 절연된 논쟁이 어떤 의미에서 부처의 길인지 문득 의문을 품게 됩니다.  

 

중생의 처지에서 보면 깨침의 높은 경지에 오른 분들이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회행위를 하는 것을 수긍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어리석어서 그리 생각한다면 별 도리 없지만 깨치지 못한 중생도 안 하는 행동을 생불(生佛)들이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을 보면 도대체 깨침이 무엇은 열고 무엇은 닫는지 황당해지지요.  

 

사회동원력을 갖춘 큰 스님이 거대한 사회 부조리를 보고도 관념적 거대담론으로 호도하는 일은 또 어찌 이해해야 될까요? 세속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깨친 자의 길이라면  그 깨침으로 관여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런 이원론이 과연 선불교의 근본 철학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다수 중생들이 힘들게 사는 것이 다만 미망에 빠져 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장(場)이 스님들과 전혀 다르다는 측면을  십분 고려해야 마땅합니다. 스님들한테 누가 와서 돈을 달랍니까, 새끼를 키워 달랍니까, 부모를 봉양하랍니까? 그런 고단한 삶에서 벗어난 산중 정진을 통해 얻은 깨침이, 닦음이  중생의 삶보다 어떤 의미에서 윗길일지 정말 한 생각 크게 돌이켜 성찰해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 중용을 논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꼭 이와 같은 함정에 빠져 있기에 돈점논쟁을 예시하여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음양이 어떻고, 조화가 어떻고....... 고담준론이야 하늘을 찌르더라도  삼시 세 끼 밥 먹어야 하고 돈 있어야 아이 학교도 보내는 게 엄연한 현실 삶인데, 그 이야기에서 한사코 멀어지기만 하는 중용이 과연 참된 중용일 수 있겠습니까? 평범한 백성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내리는 선택이 모여 사회적 삶이 되고 문명이 되어 가는 법인데 거기에 뿌리 내리지 않은 지혜를 어찌 중용이라  하겠습니까?  

 

3. 안회는 사소한(一) 선(善), 즉 중용의 결단일지라도 소중히 여겨 삼가 받들어(拳拳) 가슴에  새겨서(服膺) 잃지 않았습니다. 한 일(一)을 "사소한" 으로 읽은 것이 지나친 해석은 아닐 터, 이는 대뜸 중용의 "평범함"과 상통합니다.   

 

이리 읽으면 안회의 완벽함을 찬양하는 독법에서 안회의 겸손함, 그리고 예의 "평범함"을 강조하는 쪽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여태까지 우리가 견지한 중용 독법에서 보면 이게 더 어울리겠지요. 나아가 중용이 그 때 그 때의 결단, 선택에 따른 역동적 실천이라는 사실에 부합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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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7장 본문입니다.  

 

子曰 人皆曰予知 驅而納諸網獲陷穽之中而莫之知抗也, 人皆曰予知 擇乎中庸而不能期月守也.   

 

(이기동 역해 본문은 網이 아니라 그물 망 머리 아래 옛 고를 쓴 그물이란 뜻의 '고'이며, 抗이 아니라 避에서 책받침이 빠진 '벽'(뜻이 避와 같아 '피'로 읽어야 한다고 함)입니다. 본문 비평은 능력 밖이고 뜻에 큰 차이가 없으므로 번역은 이기동을 따릅니다.)    

 

공자는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다 '나는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몰아서 그물이나 덫이나 함정에 넣어도 피할 줄을 알지 못하며, 사람들은 다 '나는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중용을 골라서 한 달도 지킬 수 없다."  

 

2.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자의 지혜는 앞에서 말한 小知, 즉 내남을 구별하여 세상을 나누어야 직성이 풀리는 강자, 승자 부류의 기능적 지식을 뜻합니다. 권력, 돈, 전문지식을 독점하는 데 필요한 극단적 프로세스로 작동하는 지식이지요. 대부분 불공정한 경쟁을 통해 획득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 삶 또한 불공정한 틀 속에서 영위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정당하다고 굳게 믿습니다. 이를테면 확신범인 셈입니다.  

 

그들의 확신은 너무나 완벽합니다. 그래서 그물, 덫, 함정으로 몰리는 일조차 강함과 이김의 기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이런 망상은 권력, 돈, 전문지식을 자신의 인격과 동일시하는 데서 극치를 이룹니다. 힘없고 돈 없고 전문지식 없으면 사람의 격도 없다고 생각하므로 그런 사람들을 "근본 없는 것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렴풋이 이해할 수는 있을 듯합니다. 권력, 돈, 전문지식을 누릴 때 한껏 고양되는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세상이 '돈짝' 만하게 보이고, 사람이 개미처럼 보이고.......  

 

하지만 그 끝은 파멸입니다. 그 파멸은 소통을 거절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형벌입니다. 생명의 영속성은 더불어 살 때만, 관통과 흡수가 일어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것에 의지해 "멀쩡한 사람 산 채로 포 뜨는"(인기 있었던 주말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사를 취한 것입니다.) 짓의 대가는 그물이고 덫이고 함정입니다.   

 

죽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이 파멸을 면한 증거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잘 먹고 잘 사는 동안 생명의 진수를 몰랐으니 돌이킬 수 없는 형벌에 처해진 것이지요.  자신들이 누리는 그것만이 최고, 최상이라 착각한 대가로 존재의 숭고함에서 끝내 "왕따" 당한 것입니다. 대롱으로 본 하늘 밖에 흐드러진 별들이 얼마나 찬란한지 "지옥"에 가서 확인하고 나서야 땅을 치게 될 것입니다.  

 

3. 어찌어찌 중용을 고르기는 했는데 한 달도 못 지키는 주제에 스스로 지혜롭다고 한답니다. 아, 물론 중용이 어렵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지혜롭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가 더 큰 무게를 지닙니다.  

 

사실 이 문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고른다(擇)"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용은 선택입니다. 선택이란 말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반드시 선택하지 않은 무엇이 있다는 사실이지요. 중용을 선택한 군자는 과연 무엇을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길게 얘기할 것 없겠지요.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면서 결국은 자신을 그물, 덫, 함정으로 몰아넣는 자들이 사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소통을 거절하는 삶, 독식하는 삶, 군림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택하지 않은 것을 견디는 일이 중용이며, 길이 견디는 사람이 군자입니다.  

 

군자는 찰나찰나 결단하는 용기를 요구 받습니다. 중용은 군자에게 어느 순간 주어진 자격증이 결코 아닙니다. 군자는 중용을 "지켜내야(守)" 이루어지는 길고 긴 과정 자체입니다. 중용 없이 군자 없는 것이지 군자 없이 중용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선택한 삶을 지키는 만큼이 바로 그 사람됨입니다. 

 

4. 小知의 끝이 파멸이란 사실과 선택한 大知를 지키는 것, 선택하지 않은 바를 견디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붙여놓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전자의 현실적 힘이 후자의 것을 늘 제압해 왔다는  우리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권력, 돈, 전문지식의 매혹에서 자유로운 자 그 누구이겠습니까? 얼마나 살겠다고 소통을 들먹이며, 생명의 연대성을 운위하느냐, 다 부질없다,  생각  안 해 본 사람이 그 누구이겠습니까?  

 

그럴수록 중용은 가벼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또 그럴수록 중용을 관념 세계로 밀어내는 경향은 짙어지고.......그렇습니다. 이쯤에서  공자의 인간적 고뇌가 물결이 되어 독자의 가슴에 전달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칼날 같은 답이 없는 상황에서 과연 무엇을 지표 삼아 내 삶을 "선택할" 것인가? 어떻게 그 선택을 "지킬" 것인가? 어떻게 선택하지 않은 것을 "견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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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6장 본문입니다.  

 

子曰 舜其大知也與. 舜 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爲舜乎.   

 

공자는 말씀하셨다.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우시다. 순은 묻기를 좋아하시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 좋아하시며, 악을 숨기고 선을 드러내시며, 그 두 끝을 붙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쓰시니, 그 이로써 순이 되신 것이다."    

 

2. 제4장에서 이른바 지혜로운 자는 지나쳐서 중용을 실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른바 지혜로운 자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자의식을 지니고 있어 어리석은 자들과 구별합니다. 그렇게 갈라야 자신의 권위와 기득권이 수호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가 소인이고, 그 지혜는 小知입니다.  

 

제6장은 군자의 표본으로 순임금을  제시합니다. 대뜸, 그가 大知를 실천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 함으로써 세간의 이른바 지혜로운 자들이 小知임을 알게 하는 것이지요. 小知가 나와 남을 구별/차별하여 "홀로 주체성"을 확보한다면 大知는 나와 남을 하나로 묶어 "서로 주체성"을 펼칩니다. 홀로 주체일 때 남은 대상물이지만 서로 주체일 때 남은 소통하는 인격입니다.   

 

그래서 大知는 묻기를 좋아하고 평범한 말 살피기를 좋아합니다. 묻는다는 것은 듣는다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자아 중심성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상실을 통해 오히려 참된 주체성을 획득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수동성으로 시작함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말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수동성이야말로 서로 주체를 이룩하는 상호능동성, 즉 소통을 낳는 모태입니다. 이 역설이 바로 중용의 요체입니다.  

 

묻는다는 것은, 또한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묻는 자는 답하는 자 아래 섭니다.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기다립니다. 답하는 자를 중심에 놓고 자신은 변두리로 물러섭니다. 자신의 지혜는 답하는 자의 지혜에 "깃들" 따름입니다. 입만 열면 백성을 가르치려 드는 이 땅의 권력자와 얼마나 상반된 모습인지요.  

 

묻는 것은, 그리고 "보는" 것과 다릅니다. 보는 것은 보는 자의 눈에 의존합니다. 기실 보고 싶은 것만 보지요. 무엇보다 밖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파악할 수 있으니 소통은 불가합니다. 보는 자는 소통을 거절하는 자입니다. 보는 자는 보이는 사물 위에 섭니다. 고개를 세우고 팔짱을 낍니다. 보이는 사물을 변두리에 세우고 자신이 중심에 섭니다. 자신의 지혜로 보이는 사물을 제압합니다.  

 

저는 한의사로서 우울증을 포함한 마음의 병을 상담/대화를 통해 치료하는 일을 합니다. 서양의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을 배운 사람들과 달리 한국 문화에 맞는 상담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서양 이론에 따르면 의사와 환자는 분리되어야 마땅합니다. 의사는 고치는 주체이고 환자는 고침을 받는 대상일 뿐이지요. 의사가 환자의 말을 듣기는 하지만 사실은 말하기 위해, 즉 가르치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적 정서로 보면 의사는 듣기 위해 말을 해야 합니다. 환자를 중심에 세우고 의사는 거기에 깃들어야 합니다.  

 

흔히 한의사는 척 보면 알아야 고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치 점쟁이처럼 "잘 보는" 한의사를 "용하다"고 합니다. 한의사 스스로도 대부분 망진(望診)을 우선으로 꼽습니다. 그러나 중용의 맥락에서 살피건대  묻는 것을 선두에 세우는 진단이 더 윗길입니다. 환자의 삶과 인격은 묻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드러난 병이나 고친다면 의사는 그저 기술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의사의 관심은 병을 넘어 사람 자체에 닿아야 합니다.  

 

묻고, 답하는 말에 귀 기울여 듣는 자가 大知임을 안다면 의사는 더 이상 환자 위에 군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사와 환자가 서로 주체로서 소통을 이룰 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납니다. 이 때 비로소 치유연대가 결성됩니다. 이 치유연대를 사회 전체로 확대하면  그게 곧 大同 세상인 것이지요.  

 

순임금은 大知로써 大同을 이룩했습니다. 大知의 길은 묻는 데서 시작됩니다. 경건하게 듣는 자가 大知의 기수입니다. 이 땅의 지배층은 지금 당장 눈 감고 입 다물어야 할 것입니다,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하여.   

 

3. 임금 된 자가 백성 아래 서서 물으니 백성이 "평범한 말"로 답합니다. 저자거리에 흘러 다니는 "쌍스러운" 언어를 날 것인 채로 드러내겠지요. 사는 게 어찌 고달픈지, 정치판을 얼마나 한심하게 여기는지, 어디가 아픈지, 물가는 얼마나 뛰는지, 자식 놈은 무슨 속을 썩이는지.......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듣기 위해 물었고, 들은 다음에는 사회를 통합하는 大同의 정치를 펼쳐낸 것이 舜이  한 일입니다. 백성이 주인이라고 선언하는 오늘날 권력자도 하지 않는 일을 전제군주가 했으니 가히 군자의 도요, 그래서 중용이라 일컬은 것입니다.  

 

중용의 뜻이 여기서 다시 한 번 명백해집니다. "특별한" 사람이 "평범함"에 깃들어 함께 "평범함"으로 통합되는 사건이 바로 舜의 중용인 것입니다. 결국 "특별함"은 사라집니다. 舜이 "평범함"에 승복하는데 누가 감히 스스로 높여 "특별하다" 할 것입니까?   

 

舜, 스스로 "특별함"을 버린 마음의 흐름, 몸의 실천이 중용입니다. 중용은 선험적 전제로 존재하는(being) 어떤 실체가 아닙니다. 중용은 구체적 실천을 통해 바야흐로 형성되는(becoming) 운동입니다. 이럼에도 기라성 같은 해석가들은 중용을 만고불변의 실체적 진리로 규정하여 높은 곳에 모시는 일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중용을 현실과 단절하여 형이상학의 세계로 끌고 감으로써 오히려 "명상"적 시공간에 가두어버리는 우를 범한 것입니다. 중용은 "명상"의 대상이 아닙니다. 중용은 "웰 빙"의 포로가 아닙니다. 중용은 도저한 현실 삶의 울퉁불퉁한 길을 걷는 결단이며 용기입니다.  

 

중용은 어지럽고 더러운 정치판을 혁파하는 에너지로 나타나야 합니다. 돈으로 인격을 사는 천민적 자본 판에 비수를 들이미는 기개로 드러나야 합니다. 전문지식의 독점을 통해 정보사회를 분할통치하는 야비한 엘리트에게 채찍을 드는 의분으로 뿜어져 나와야 합니다.  

 

중용의 언어는 예의 바르며 중용의 실천은 정중해야 한다는 통속 유교의 고정관념에서 중용을 해방하는 일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중용일 것입니다. 그 "어정쩡함"에 묶인  중용은 주희와 그 아류로서 족합니다. 물론 아직도 이 나라는 노론의 나라라는 자조가 들리지만  세상은 분명 달라져야 합니다.   

 

4. 고대의 파편문서(fragment)적 직관에 따른다면 "악을 감추고 선을 드러내시며, 그 두 끝을 붙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쓰시니" 라는 구절은 후대에 가필한 느낌을 줍니다. 두 가지가 마음에 걸립니다.  

 

하나는 그 위상이 군더더기 같다는 것입니다. 그냥 "순(임금)은 크게 지혜로우시다. 순은 묻기를 좋아하시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 좋아하시니, 그 이로써 순이 되신 것이다." 하여 그야말로 질박 명쾌한 제시로 부족함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용이 후대의 통속적인 중용 이해에 터 잡은듯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비유로써 가르치는 국민윤리 교과서 한 구절처럼 보이는군요. 격이 떨어지는 것도 그렇지만 내용 자체도 앞에 나온 "묻기를 좋아하시고......." 하는 부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느낌 또한  확실히 있습니다.    

 

5. 그러나 고증을 거치지 않은 이런 제 느낌을 뒤로 물리고 본문이 가지고 있는 뜻을 앞부분과 격 맞추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악을 감추고 선을 드러낸다는 것은 얼핏 보면 정확한 대비인 것처럼 보이지만 곰곰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을 드러내는 것은 이의를 달기 어렵습니다. 헌데 악을 처리하는 것은 우리 윤리의식이나 법 감정과 어울리지 않지요. 악을 명백히 밝혀 제거하는 것이  선과의 대칭이라는 측면에서는 명쾌한 선택일 것입니다. 악을 제거하여 선한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인류가 오래 꿈꾸어 온 이상이 아니던가요?  

 

선으로 충만한 세상,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기만입니다. 영원히 논리적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인 가치입니다. 그 가치를 현실의 경세치용에 그대로 적용하면 독선이 됩니다. 선하기 때문에 악하게 되는 모순을 낳는 것입니다. 까닭은 자명합니다. 소통의 폐기!  

  

순이 악을 제거하지 않고 다만 감추는 차원에 놓아둔 것은 영원한 실체로서 선이 없듯이  영원한 실체로서 악도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구분도 흘러가는 것입니다. 선이 이른바 "특별함"이 되지 않고 "평범함"이 되려면 악을 자신과 구분하여 떼어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순의 大知입니다.   

  

백성에게 묻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마음으로 판단할 때, 그들의 고단한 삶이 빚어내는 악은 따스하고 너그럽게 "묻어주면" 언제라도 선으로 꽃필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의 그 마음을 아는 한 "차마" 악을 되풀이 하지는 못했을 수도 있겠고요. 이게 소통이고, 이게 大同이 아닌가 합니다.  

 

좀 더 나아가 보지요. 상당히 많은 경우 악은 그 시대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버려진 가치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간적, 공시(共時)적 지평에서는 악으로 규정될지라도 시간적, 통시(通時)적 맥락에서는 선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유연하고 다양한 관점을 지닌 사람의 넉넉함이 또한 중용입니다.   

 

6. 두 끝을 붙잡아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썼다는 것은 대칭/대립하는 두 가치/입장을 時中으로 조절하여 원만한 소통, 거래를 이루게 했다는 뜻일 터이니 길게 재론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兩非論의 비겁함을 논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딸아이와 일간 신문 사설을 비교해서 읽는 일을 가끔 합니다. 그런데 이른바 재벌언론이라 일컬어지는 거대 일간지 사설에 유난히 양비론이 많아서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양측의 단점 또는 악을 모두 비판하는 게 매우 정당해  보이지만 양비론은 두 가지 발톱을 숨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공평함을 과시함으로써 도덕성을 확보하고 현실에서 발을 뺄 수 있는 근거를 남기는 기회주의가 그 하나입니다. 더 나쁜 발톱은 바로 양쪽을 싸잡아 비판함으로써 실제로는 힘 있는 쪽을 돕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지요. 양비론의 눈속임은 이른바 "산술적" 가운데를 중용이라 오해하게 합니다.    

 

제가 "두 끝을......." 운운하는 이 부분을 의혹의 눈초리로 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순의 중용이라 보기보다는  후대 통속적 중용가의 양비론적 혐의가 짙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구절을 순의 수준에서 역동적으로 해석하면 그만이긴 하지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7. 제가 쓰고 있는 글을 들여다 보던 아내가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해주었습니다. "평범은 평등이네." 그렇습니다. 순의 중용은 평범함으로 大同을 이루는 정치경제학적 실천의 중용입니다. 중용은 "평등 원리를 구현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회적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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