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0장 일곱 번째 문단입니다.  

 

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誠者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聖人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有弗學 學之 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弗措也. 有弗辨 辨之 弗明弗措也. 有弗行 行之 弗篤弗措也. 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 必明 雖柔 必强.    

 

誠은 하늘의 도이고 誠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誠한 자는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되며 저절로 도에 적중하니 성인이다. 誠해지려고 하는 자는 선을 택해서 굳게 붙잡는 자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돈독하게 행한다.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운다면 능해지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묻는다면 알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하면 얻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분별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별하면 밝히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하면 독실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는다. 남이 하나를 할 수 있으면 자기는 백을 하고 남이 열을 할 수 있으면 자기는 천을 한다. 과연 이 방법을 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어도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연약하더라도 반드시 강해진다.  

 

2. 길고 긴 제20장이 이제야 끝납니다. 처음에는, 울퉁불퉁하고 부자연스러워서 앞부분을 모조리 없애고 딱 이 문단만 가지고 제20장 공부를 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이 내용만으로도 誠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다만 오랜 세월에 걸쳐 사회적 타당성을 획득해 가며 의미군을 쟁여 온 텍스트라는 역사적 현실성을 인정해 수신(修身)을 지도리 삼아 중용과 誠을 연결하는 문맥으로 이전 문단들을 자리매김 해 본 것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 자유나마 누릴 수 있는 세상이 고맙습니다. 조선시대 윤휴는 주희와 다른 해석을 했다 해서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임까지 당했으니 말입니다. 물론 지금 세상은 지금 세상대로 더 가혹한 질곡이 있지만 주희가 산 사람을 죽이지는 않으니 그 아니 다행이겠습니까.  

 

3.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誠은 성실함, 정성스러움이라고 이해하기에 앞서 중용의 中과 본질적으로 같은 뜻으로 새겨야 합니다. 제16장에서 살폈듯이 만물의 주체로서 도에서 무엇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體物而不可遺) 치열하게 실천한다는 역동적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그래서 적확하다, 벗어나지 않는다, 어긋나지 않는다는 내포로서 中과 연속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완전한 誠과 애쓰는 誠之를 구별합니다. 완전한 誠이야 舜 임금 같은 성인이나 할 수 있는 경지이니 현실적으로는 오로지 푯대요 깃발일 뿐입니다. 나머지 우리 모두는 찰나 찰나 선을 택해서 굳게 붙잡아야 하는(擇善而固執之) 노력 과정 자체로 살아갑니다. 늘 깨어서,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분별하며 돈독하게 행하는(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순간순간을 무릎으로 지나갑니다.  

 

안 하면 몰라도 하려 들면 하고자 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남보다 더 분투하는 과정에서 우유(愚柔)가 명강(明强)으로 바뀝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과정 자체가 誠입니다. 평범한 사람의 미련하고 어리석은 실천이 한 줄기 한 줄기 모여 중용의 강을 이루어 냅니다.    

 

중용은 존재가 아닙니다. 중용은 실천입니다. 중용은 결과가 아닙니다. 중용은 과정입니다. 중용은 완성이 아닙니다. 중용은 영원한 노력입니다. 중용은 특별한 자의 포효가 아닙니다. 중용은 평범한 자의 함성입니다. 바로 이런 중용의 모습을 돋을새김 한 표현이 誠입니다.  

 

4. 인터넷으로 열린 새로운 세상을 폄훼하고 통제하려는 자들이 여전히 독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 되겠지요. 아마도 인터넷 세상의 주체들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분산, 평등형 주체이기 때문에 통괄지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무제약과 소란함을 통해서 그들은 쌍방향 소통을 합니다. 바로 이게 희망입니다.  

 

아마도 이들이 이른바 "21세기 중용집단"의 원형이 될 것입니다. 쌍방향 소통으로써 배우고(學), 묻고(問), 생각하고(思), 분별하고(辨), 실천하는(行) 자율 주체로서 자신이 바라는 사회를 구성해 가는 평범한 성지자(誠之者)인데 더 이상 누구의 훈계 따위를 들어야 할까요? 그들의 직관과 담론을 희화화하는 자들은 지금 제 발등을 찍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그들은 어리석다(愚), 약하다(柔) 무시당하지만 내일 그들은 밝고도(明) 강한(强) 시민으로서 성숙한 한국사회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이룩할 중용세상, 저 大同을 희망으로 부둥켜안고 지금 우리를 에워싼 어둠, 견뎌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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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0장 여섯 번째 본문입니다.  

 

在下位不獲乎上 民不可得而治矣. 獲乎上有道 不信乎朋友 不獲乎上矣. 信乎朋友有道 不順乎親不信乎朋友矣. 順乎親有道 反諸身不誠 不順乎親矣. 誠身有道 不明乎善 不誠乎身矣.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의 신임을 얻어서 다스릴 수 없다.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친구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못하면 윗사람에게 신용을 얻지 못한다. 친구에게 신임을 얻는 데에도 방법이 있으니 어버이(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친구에게 신임을 얻지 못한다. 어버이(의 뜻)에 따르는 데에도 방법이 있으니 자기 몸을 돌이켜 보아 성실하지 않으면 어버이(의 뜻)에 따르게 되지 않는 것이다. 몸을 성실하게 하는 데에도 방법이 있으니 선(善)에 밝지 않으면 몸에서 성실하게 되지 않는다.  

 

2. 네 번째 문단에서 최상위 정치인에게 길게 다스림의 원칙을 설파한 데 이어 여기서는 백성과 직접 맞닥뜨리는 현장 관료에게 행정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윗사람, 친구, 부모로 이어지는 인간관계의 연결고리를 통해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이런 패턴은 제20장 전반에서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실천 주체인 자기 자신을 성찰(反)하여 적확하지 못하면(不誠), 즉 어긋남이 있으면, 벗어나 흐르면 모든 인간관계에 파행이 오게 되고 결국 올바른 행정은 펼쳐지지 않습니다. 관료의 행정적 실천이라는 것도 본질적으로 인간관계의 지평을 떠날 수 없는 것이고, 그 인간관계의 고갱이에는 늘 자기 성찰이 자리하는 법입니다.  

 

3. 자기 성찰의 기준은 善에 밝으냐, 아니냐, 입니다. 善은 무엇입니까? 군더더기가 필요하지 않지요, 그대로 중용입니다. 善으로 표현되는 사적 실천이야말로 중용으로 표현되는 공적 실천의 뿌리요, 동력이요, 증거입니다.  사적 부도덕성에 눈감은 채 공적 도덕성을 입에 담는 것은 사기요 협잡입니다.  

 

흔히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말들을 합니다. 허나 그 말은 여기에 쓸 게 아닙니다. 공적인 일을 사적인 이득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쓰는 상식적 경계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 현실은 이 문제에서 오류를 범함으로써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 있습니다.   

 

실천적 차원에서 사적 투명성과 공적 아우라의 일치는 불퇴전의 원칙입니다. 사적인 차원에서 거짓 언행을 일삼은 자가 어느 날 공적 위치에 앉았다고 해서 환골탈태, 짐실하게 변하는 게 아닙니다. 사적 이익을 위해 위장전입 한 자는 여전히 국가 간 계약도 위장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입만 열면 도덕적 훈계를 합니다. 아, 물론 독선(獨善)이지요. 그들의 독선은 어디에 기대고 있을까요? 바로 수신하지 않은 자의 자기확신이지요. 오로지 자기 경험, 자기 종교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4. 초등학교 6학년 아이를 둔 엄마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현 정치세력과 척 질 사회경제적 신분이나 이념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그 분 입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정치하는 사람들'은 왜 그럼 그리 무지할까요? 정보와 지식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핵심은 수신(修身)입니다. 자기성찰에 근본 결핍을 안고 있는 부류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지배블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에 어두운(不明乎善) 자들이 스스로 선하다 하면서 힘과 돈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성찰을 통해 자기규정을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희망을 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말하기에 현실은 너무 어둡고 아픕니다. 그 희망을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사람들이 스스로 희망을 버려 가고 있습니다. 지쳐 가고 있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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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0장 다섯 번째 본문입니다.  

 

凡事豫則立 不豫則廢. 言前定則不跲 事前定則不困 行前定則不疚 道前定則不窮.  

 

무릇 모든 일은 미리 준비되면 이루어지고 미리 준비되지 않으면 어그러진다. 말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착오가 생기지 않고 일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곤란하지 않게 되며 행동하는 것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탈이 없게 되고 방법이 미리 정해져 있으면 궁하지 않게 된다.    

 

2. 이 문단 또한 조금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앞에서 아홉 가지 다스림의 원칙에 대해 장황하게 말하다가 느닷없이 예(豫)와 전정(前定)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편집자가 흩어져 있는 문서 조각(fragment)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불협화음이 아닐까 합니다. 칼 같은 문헌비평에 의거 빼버려도 무방하겠지만, 이 경우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자연스러움을 보완해주는 방향으로 해석하면 크게 무리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수신(修身)문제를 계속해서 말하였고, 이 문단 바로 뒤에서는 성(誠) 문제를 언급합니다. 대략 이런 연결의 지도리로   豫와 前定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준비하고 정한다는 말은 사회적 실천의 핵심으로 사적 실천을 놓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미리" 준비하고 정한다는 말은 단순히 시간적인 앞섬, 예비적 단계를 지시하지 않습니다.  개인 개인의 내면적 성찰과 꼿꼿한 발걸음 없이 사회적 외양만을 갖추고서는 참된 중용이라 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지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의미 내함은 修身과 한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다음 문단의 誠과 잡는 것이지요.   

 

豫前定은 끊임없는 실천의 닦음, 즉 修身의 자세를 다른 방향에서 본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매 순간 알아차리고 챙겨야 적확한(誠) 사회적 실천, 즉 중용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의 의미군을 이런저런 측면에서 살핀 것이 修身, 豫前定, 誠으로 표현되었다고 이해하면 간편합니다.  물론 誠은 그 자체로 중(中) 또는 중용의 '본토'에 깊이 발 들여 놓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불연속성을 구태여 예리하게 구분할 실익은 관념 영역 에서나 찾을 일입니다. 궁극적 실천영역에서는 상호 연속성이 그대로 힘이 됩니다.     

 

3. 豫前定은 사회의 동향, 역사의 흐름을 읽고 참여하는 삶에서 일어나는 통찰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올바른 결과를 내기 위한 기계적 인과간계의 전제 조건으로 豫前定을 거론하는 게 아닙니다. 豫前定은 선택이며 결단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투명한 정신, 옹골찬 기상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는 야합과 흥정이 설 땅이 없습니다.  

 

4대강 사업과 내년도 예산 문제를 둘러싼 소용돌이 속에서 국민들은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지배집단의 야합과 흥정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전혀 豫前定이 안 된 상태에서 저마다 준동하고 있습니다.  백성의 삶과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하고 모르쇠하고 얼렁뚱땅 넘어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豫前定하려면 저 "높으신 분들"은 저자 거리로 나와야 합니다. "특별함"의 기득권과 편견을 타고 앉은 채 이루어지는 仁은 없습니다, 중용은 없습니다. 지도자입네, 원로입네, 지식인입네  하며 자기기만 하는 자리에서 냉큼 내려와 백성과 호흡해야 합니다. 그들의 소리를 경청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순(舜)임금의 실천인데 누가 감히 여기에 토를 달 것입니까?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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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0장 네 번째 문단입니다.   

 

子曰 好學近乎知 力行近乎仁 知恥近乎勇. 知斯三者 則知所以修身 知所以修身 則知所以治人 知所以治人 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 凡爲天下國家 有九經 曰 修身也 尊賢也 親親也 敬大臣也 體群臣也 子庶民也 來百工也 柔遠人也 懷諸候也. 修身則道立 尊賢則不惑 親親則諸父昆弟不怨 敬大臣則不眩 體群臣則士之報禮重 子庶民則百姓勸 來百工則財用足 柔遠人則四方歸之 懷諸侯則天下畏之. 齊明盛服 非禮不動 所以修身也 去讒遠色 賤貨而貴德 所以勸賢也 尊其位 重其祿 同其好惡 所以勸親親也 官盛任使 所以勸大臣也 忠信重祿 所以勸士也 時使薄斂 所以勸百姓也 日省月試 餼禀(廩)稱事 所以勸百工也 送往迎來 嘉善而矜不能 所以柔遠人也 繼絶世 擧廢國 治亂持危 朝聘以時 厚往而薄來 所以懷諸侯也. 凡爲天下國家有九經 所以行之者一也.  

 

  공자는 말씀하셨다. "배우기를 좋아함은 지(知)에 가깝고 실천을 힘씀은 인(仁)에 가까우며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勇)에 가깝다." 이 세 가지를 알면 몸을 닦는 방법을 알며, 몸을 닦는 방법을 알면 남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며, 남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을 안다.  

  무릇 천하국가를 다스림에 아홉 가지 원칙이 있으니 몸을 닦음과, 어진 사람을 존경하는 것과, 친족과 하나가 되는 것과, 대신을 공경하는 것과, 여러 신하를 내 몸처럼 여기는 것과, 서민들을 자식처럼 여기는 것과, 백공들을 오게 하는 것과, 먼데 있는 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과, 제후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을 말한다.   

  몸을 닦으면 곧 방법이 생기고, 어진 사람을 존경하면 미혹되지 않으며, 친족과 하나가 되면 제부(諸父)와 형제가 원망하지 않고, 대신을 공경하면 현혹되지 않으며, 여러 신하들을 내 몸처럼 여기면 선비들의 보례(報禮)가 중후하게 되고, 서민들을 자식처럼 여기면 백성들이 분발하게 되며, 백공들을 오게 하면 재물을 쓰는 것이 풍족해지고, 먼데 있는 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 사방 사람들이 돌아오며, 제후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면 천하가 두려워하게 된다.   

  재계하고 깨끗이 하며 정복을 갖추어 입고서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몸을 닦는 수단이고, 아첨하는 자를 제거하고 여색(女色)을 멀리하며 재물을 천하게 생각하고 덕(德)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현자(賢者)를 권면하는 수단이며, 그 지위를 높이고 그 녹(祿)을 무겁게 해주며 그 호오(好惡)를 같이 하는 것은 친족과 하나 됨을 권면하는 수단이고, 관직의 수가 많아져 지휘권을 맡기는 것은 대신을 권면하는 수단이며, 충심(忠心)으로 대하고 믿으며 녹을 많이 주는 것은 사(士)를 권면하는 수단이고, 부역을 때맞게 하고 세금 걷는 것을 줄이는 것은 백성을 권면하는 수단이며, 날로 살피고 달로 시험하여 보수를 일의 능력에 맞게 하는 것은 백공을 권면하는 수단이며, 가는 이를 보내고 오는 이를 맞이하며 착한 것을 칭찬하고 잘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먼데 있는 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수단이고, 끊어진 대를 이어주고 망하는 나라를 일으켜주며 어지러운 것을 다스리고 위태로운 것을 붙잡아주며 조회[朝]와 초빙[聘]을 때에 맞게 하며, 보내는 것을 많이 하고 받는 것을 적게 하는 것은 제후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수단이다.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아홉 가지 원칙이 있으나 그것을 행하는 수단은 하나이다.  

 

2. 다섯 가지의 보편적인 도와 세 가지 보편적인 덕을 거쳐 아홉 가지 다스림의 칙을 말하는 데까지 왔습니다. 길고 상세한 언급이 있으나 일일이 풀어 설명할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봉건시대 최상위 정치 지도자를 대상으로 강론한 듯한 느낌을 주는 내용이라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될 성질의 것으로 판단됩니다.  

 

오히려 강조할 것은 수신(修身)으로 풀어서 수신(修身)으로 매듭지은 사실입니다.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일 또한 다함없이 실천의 결기를 닦는 평범한 일에서 비롯한다는 내용입니다.  부단히 깨어 있어 찰나 찰나를 챙기는 닦음, 그 미세한 통찰을 소홀히 하고서는 천하와 국가의 다스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한 사회의 통치자 위치에 서는 꿈을 지닌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사적 실천에서 떳떳함을 기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회의 어두움을 틈타 온갖 부조리에 발을 담그며 이득을 누려 왔다면 통치자 자리에 앉으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통치자 자리조차 이득의  하나로 여기는 판국이라 이런 말도 우습습니다만 사적 이익 추구 능력을 공적 통치 능력과 혼동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이런 혼동의 후폭풍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새삼 수신(修身)이란 말의 향기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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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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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이 책을 두 달에 걸쳐 읽었습니다. 까닭은 아주 복잡한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간단합니다. 제 사유의 결이 비-화학적(?)(!)이기 때문이지요. 아, 이건, 뭐, 주기율표 암기, 기억, 화학적 지식,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프리모 레비가 한 평생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글을 썼던, "이해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 "(348쪽), 그리고 "자연주의자의 호기심"(348쪽)을 제가 따라잡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근본적으로 이게 그와 저 사이를 가르는 금이었습니다. 

"저는 특이할 정도로 정신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것 같아요."(348쪽)  

그렇습니다. 사실, 정확히 14년 후에는 제가 레비 스트로스 최후의 나이를 맞습니다. 물론 제 삶 그 자체를 그와 비교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허나 그의 삶에 대한 태도는 비교할 수도, 비교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찰나적 시간에서나, 사소한 일상의 공간에서나, 프리모 레비는,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그 투명한 눈으로 저를 들여다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 특히, 본디 인문사회학도였던 제가 낯설어 하면서 더듬거리고, 때로는 건성건성 지나가는 길목마다 그가 손목을 슬며시 잡아주었던 것이겠지요. 아르곤은, 아마, 다섯 번은 읽었을 것입니다. 세 문단을 못가 삼베 바지에 방귀 빠지듯 집중력이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나중에 보니 다른 사람들은 격찬을 했더군요. 민망해서 다시 읽어도 마찬가지. 다섯 번 째만에 겨우, 나름대로 실존적 독서의 줄긋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 이 도저한 비-화학적 감수성(?)(!)! 

결국 이 책의 깊숙한 읽기는  바나듐, 탄소 부분이 견인해냈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던 일인데, 작가의 연표를 세밀하게 살펴 그 삶 속으로 들어가면서, 서로 끌어당기는 에피소드를 재구성하면서,  독서가 어느 정도 농익었습니다. 아, 물론 아직, 여러 번 더 읽을 생각입니다만! 

2. 일단, 저는 이 책을 프리모 레비의 아이덴티티, 그리고 죽음의 빛으로 관통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필립 로스와 나눈 이야기에서 그가 한 표현대로라면 이런 시도는 이 책에 대한 정서와 기억을 "흑백"(351쪽)으로 단순화하는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허나, 용서를 구하면서라도 이리 하는 까닭은, 제가 그런 context에서, 그런 punctum으로 읽었기 때문입니다.  

3. 이책의 해설을 쓴 서경식이 프리모 레비의 죽음에 관해 한 말은 <이것이 인간인가>를 말하면서 간단히 언급했습니다. 그 내용은 바나듐  이야기와 맞물려 있지요. 저는, 처음엔, 이 부분에서 저 아우슈비츠(정확히는 부나)의 뮐러 이야기가 등장할 줄 모른 채 읽다가, 그 사실을 눈치 챈 순간부터 책 전체가 순식간에 이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사실, 이 느낌은 단순화를 넘어 모독이자 오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이후 프리모 레비의 삶과 문학의 핵심 일단이 바로 이 이야기 속에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는 한, 제 느낌이 마냥 엉뚱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적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아마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그들이 후회의 표시를 보이는 경우에만, 그러니까 그들이 적으로 남아 있기를 포기한 경우에만 가능했다. 반대의 경우, 여전히 적으로 남아 있고, 남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고집스러운 의지를 고수하는 사람이라면그를 용서해서는 안 되었다.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고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만(나누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은 그를 심판하는 것이지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322-323쪽)   

그리고,   

".......나는 인간이 모두 영웅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아니며 모두가 그처럼 솔직하고 무방비 상태인 세상이라도 그럭저럭 살아갈 만은 하리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비현실적이다. 현실 세상에는 무장한 사람들이 존재했고 그들이 아우슈비츠를 만들었으며 솔직하고 무방비 상태인 사람들은 무장한 이들의 길을 닦아야 했다. 그러니까 아우슈비츠에 대해서는 모든 독일인이, 아니모든 인간이 대답해야만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무방비로 있는다는 게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323쪽) 

이 대목이 프리모 레비의 죽음의 의미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추정은 서경식의 통찰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비록 뮐러가 완벽한 적도 아니고 적의 대표자도 아니지만, 어차피 현실 세계에서, 구체적 상징으로, 프리모 레비가 마주해야 할 적은 뮐러일 수밖에 없는데, 그가, 만나기로 약속한 8일 후, 느닷없이, 어이없이 죽음으로써 프리모 레비의 냉엄하고도 옹골찬 이 생각이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 도저한 절연의 상황을, 프리모 레비는 그 문학적 문장의 교본인 실험보고서 문체로 간결하게 마무리합니다.  

"8일 후 나는 뮐러 부인으로부터 로타르 뮐러 박사가 60세를 일기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324쪽) 

과연 그 답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문장 뒤에 얼마나 많은 언어가 생략되어 있는지....... 내가 가슴이 막히고 목이 메이는데 그는 어땠을까,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의 죽음은 이로부터 20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므로 섣부른 인과관계로 얽어맬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살은 철학적 행위이며 사유를 통해 결정된다......."(363쪽, 연보에 인용된 글)  

그렇다면, 자살에 대한 그의 웅숭깊은 이해는 20년이란 세월, 아니 전 생애를 견디며 정련되어 실천적 직면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가 그것을 "결정"이라 했다는 사실,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덮었던 책을 다시 열어, 마지막 이야기, 탄소를 천천히 읽기 시작합니다. 앞에 어디선가 탄소 이야기를 마지막에 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떠올리며....... 급기야, 맨 마지막. 제 눈에는 이 "마침표"란 말이 책의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로 보였지만, 제 가슴에는 결코 그렇게 와 박히지 않았습니다! 

4. 첫 번째  아르곤 이야기에서 프리모 레비는 자신이 속한 디아스포라 유대교(인) 집단의 모순적이고 경계적인 아이덴티티를 말합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교.......이것은 이교도들(곧 구윔) 사이에 흩어져서 살아가는 이들의 하루하루의 비참한 유배 생활과 그들의 성스러운 소명 사이의 모순이다.......유대 민족은 흩어진 후 오랜 세월 동안 슬픔 속에서 그러한 모순을 살아 왔다......."(16쪽)  

한편은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받은 중심으로 다른 한편은 ".......큰 강처럼 흐르는 삶의 대열 변두리로......."(8쪽) 자리매김 되는 집단적, 역사적 모순이 프리 모레비의 피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 그 숙명을 그는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 숙명이 아우슈비츠로 그를 이끌었고, 그 아우슈비츠가 그의 문학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문학의 끝은....... 

5. 이 모순은 아연 이야기에서 좀 더 밀도 높은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말씀드린 바,   

".......부드럽고 예민하며 산(酸)에 고분고분해서 한 입에 먹히는 아연도 불순물 없이 아주 순수한 경우에는 행동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럴 경우 아연은 어떤 결합도 완강히 거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충돌하는 두 가지 철학적 결론을 일끌어낼 수 있다. 악에서 지켜주는 보호막 같은 순수함에 대한 찬미와, 변화를 일으켜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불순함에 대한 찬미가 그 둘이다. 나는 메스꺼울 정도로 도덕주의적인 첫째 것을 버리고, 내 맘에 드는 둘째 것에 대해 생각하느라 꾸물거리고 있었다. 바퀴가 돌아가고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불순물 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잘 알고 있듯이, 땅도 무엇을 키워내려면 그래야 한다. 불일치, 다양성, 소금과 겨자가 있어야 한다. 파시즘은 이러한 것들을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하기까지 한다....... 얼룩 하나 없는 미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게 존재한다면 정말 혐오스러울 것이다......."(51-52쪽)  

이 부분입니다. 단순히 모순 속에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변화, 즉 "화학반응을 일으키는"(54쪽) 불순물이며, 소금과 겨자입니다. 모순은 여기서부터 역설로 나아가는 역동적 뒤섞임이 됩니다. 이에 대해 프리모 레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내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데 자부심을  갖기 시작했(다)......."(54쪽) 

홀연히 함민복의 절창 <꽃>이 떠오릅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 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6. 탄소 이야기로 아이덴티티를 철저하게 완성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결정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탄소는 독특한 원소다. 그다지 에너지 소모를 하지 않고 안정된 긴 사슬 속에 스스로 들어가 결속될 수 있는 유일한 원소다. 그리고 땅 위의 삶(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삶)에서는 바로 그 긴 사슬이 필요하다. 그래서 탄소는 생명체의 중요한 원소다......."(329쪽)  

여기서 스스로 들어가 결속된다는 말은 뒤에 나오는 "삽입"(331쪽)과 같은 의미의 말일 것입니다. 더 나아가면 "용해"(331쪽)로까지 이어집니다. 용해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용해된다는 것은 변화할 운명을 타고난(거의 '변화를 원하는'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실체의 의무이자 특권이다......."(331쪽) 

여기까지 가면 탄소는 단순히 어떤 결속된, 삽입된 요소를 넘어서, 그 대상 자체가 되어버립니다. 바로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탄소가 우리들 .......속에 들어 있다.......이리저리 이동하다가 신경세포의 문을 두드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 그 세포의 일부분인 또 다른 탄소의 자리를 빼앗는다. 이 세포는 뇌에 속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뇌, 글을 쓰고 있는 의 뇌다. 문제가 된 세포, 그리고 그 속에 들어 있는문제의 원자는, 아무도 묘사하지 않았던 엄청나게 섬세한 놀이인 내 글쓰기에 속해 있다. 지금 이 순간 미궁처럼 복잡한 줄거리를 벗어나 내 손으로 하여금 종이 위의 어떤 여정을 따라 달려가며 기호들의 소용돌이를 그리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세포다: 위로, 아래로, 두 차원의 에너지 사이로 이중 도약을 한 이 세포는 내 손을 이끌어 종이 위에 점 하나를 찍게 만든다, 바로 이 마침표를."(336-337쪽) 

스스로 삽입되고 용해된 탄소는 프리모 레비의 생명이자 삶이 되어 이 책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탄소는 어디든지 있으나 어디에도 없는 존재가 됩니다. 

"탄소는 모두에게 모든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담이 특수한 조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특수한 게 아니다."(326쪽) 

이것은 ".......위대한 인류를 대표하......나 익명의 존재들로 남겨질 뿐"(367-368쪽, 연보에서 인용된 글)인 프리모 레비 자신과 같은 숙련공들의 숙명과 일치합니다. 프리모 레비는 탄소와 문학과 그의 생명을 이렇게 연결합니다. 

".......나는 바로 이 탄소에게 해묵은 빚이 있었다. 중요한 시기에 진 것이다. 최초로 내가 품은 문학적 꿈은 생명의 원소인 탄소에 있었다. 내 목숨이 별 가치 없었던 시간과 장소에서 끊임없이 꾸었던 꿈. 그러니까 나는 탄소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싶었다."(326-327쪽) 

저는 이 대목이야말로 프리모 레비의 모든 것이 담긴 절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탄소로 살았고, 그 탄소를 말했고, 그 탄소로 죽었습니다. 여기서 불현듯 떠오르는  <중용> 한 구절이 있습니다.  

"君子之道 費而隱.(군자지도 비이은)." 

보통 '군자의 도, 즉 중용은 널리 쓰이면서 은밀하다'로 이해하지만 저는 이를 동사적 독법으로 읽어, '군자의 도, 즉 중용은 널리 쓰이지만(어디에서나 활동하지만)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다'로 읽습니다. 군자의 생각, 군자의 말, 군자의 삶은 보편적 이치와 생명력이 되어 편재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드러내어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군자의 중용이 바로 저 프리모 레비의 탄소입니다. 그러므로 프리모 레비의 탄소적 "마침표"(!)는 그의 이치와 생명력을 우리 모두에게 "삽입"되고 "용해"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위대한 삶은 문학을 거쳐, 문학을 넘어, 마침내 보편성과 영원성을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탄소가 그의 아이덴티티며 죽음의 의미입니다. 하여 그의 아이덴티티는 우리 모두의 아이덴티티를 든든하게 지켜줍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핏속에 스며들어 따스한 생명으로 되태어납니다.  

7. <표>를 관통한다는 것이 썩 어울리는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이리 읽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생각을 마무리하려 하자니, 다시 바나듐 이야기의 한 구절이 비수처럼 폐부를 찔러 옵니다. 

"침묵하는 다수자.......들 사이에서 가장 흔한 전략은 최대한 적게 알려고 하는 것, 그래서 어떤 것도 묻지 않는 것이(었)(괄호-필자)다."(320쪽) 

과연 그렇습니다. 입만 열면 거짓을 말하는 지배집단의 참 모습에 대해 최대한 적게 알려고 하고, 그래서 어떤 것도 묻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사회를 파멸로 몰아가는 "길을 닦고" 있습니다. 저들은 자기 자신들이 결코 "무방비 상태"로 있을 수 없다는 진실을 모릅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여, 우리의 탄소 프리모 레비는 "날마다 죽습니다." 어허, 哀哉 哀哉, 또 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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