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정릉 자리에 지킬 이 없이 서 있는 버드나무 잎 몇을 지난주에 거두어 놓았다. 오늘을 염두에 두어서다. 정갈한 마음으로 9월 하늘 흰 구름이 이끄는 대로 백악산 발치 바리데기 정릉을 향한다. 경내로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금천 낭랑한 물소리에 이끌려 걸음을 멈춘다. 오늘따라 눈 섶에 안겨드는 작은 도랑이랑 느티나무와 정겹게 인사 나누며 천천히 능으로 다가간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고요히 문안 인사를 올린다. 모셔 온 버드나무 잎을 꺼내 삼가 묻어드린다.

 

이로써 본디 자리로 돌아갈 원이 실제 발해질 수 없으려니와 6백 년 원한도 풀릴 리 만무하다. 영으로서 내 생애 서사에는 오늘 신덕왕후께서 본디 영전(靈展)으로 복귀하신다고 기록한다. 나는 신덕왕후를 모시고 신덕왕후 영의 길을 따라 그리로 간다. 마침내 태조의 길로 들어서 끝나는 곳까지 나아가 멈춘다. 신덕왕후께서는 경복궁 근정전을 향해 인사한 후에 영면의 자세를 취하고 마지막 눈을 감으신다. 나는 예를 올린 뒤 고종의 길을 가로질러 오늘로 직진한다.

 

직진은 이내 가로막힌다. 가로막은 자는 미국대사 관저를 지키는 대한민국 경찰이다. 대한민국 경찰은 미국대사관도 아관저를 차량 무려 6대씩이나 동원해 주야장천 공회전시키며 지키고 있다. 매연이 일대 공기를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덕수궁 돌담길을 살풍경으로 망치고 있다. 과연 제국은 힘이 세다. 일제가 훼손한 경운궁(덕수궁) 요지에 대궐 같은 집을 짓고 미제 대사가 거들먹거리며 사는 세상이 엄존한다. 내가 과연 고종의 길을 가로지르기는 하였는가.

 

경운궁 나무 아래 앉는다. 지나온 일들을 돌아본다. 현대인 눈에는 산책이고 고대인 속에선 순례다. 서구 과학 지식으로는 주술이고 범주 인류학 지혜로는 생명 네트워킹이다. 세계 진실은 둘 사이를 요동하는 나선 운동이다. 오늘날은 서구 현대 과학이 추동한 제국주의 극한 쏠림에 저항하는 방향으로 총력 숭고하게 운동해야 할 카이로스다. 천천히 일어나 해 기울어 더욱 파래진 하늘을 푸르른 나뭇잎 사이로 우러른다. 파래서 하늘 높듯, 아프게 깨달아 갈 길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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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국 전 수상 아베가 일으킨 제2차 조선 침공을 조국 가족 살해로 물타기 하려던 조선일보 음모에 앞잡이 노릇한 윤석열이가 검란을 일으켰을 때 그에 부역한 괴이한무리가 있었다. 이른바 진보 지식인 집단이었다. 기억에 남는 많은 자들이 있으나 단연 나를 경악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홍세화였다. 그는 조국이 범죄자라는 사실을 명토 박는 근거로 검찰 공소장을 제시했다. 공소 사실이 정확한지도 모르고, 판결이 확정되지도 않았고, 그 판결이 과연 정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일 때 그렇게 말하는 그 진보 아이콘을 보고 나는 통렬한 충격에 빠졌다. 그 충격은 홍세화가 지닌 피상성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조국이나 문재인을 내려다보며 언제 어디서나 옳기만 한 소리로 꾸짖어대는 맑은 자들에게서 지금까지도 받고 있다. 나는 그 무리를 고결 근본주의 집단이라 부른다.

 

고결 근본주의는 무흠(無欠) ‘추구전제로 치환한 주술이다. 요즘 유행하는 밈으로 표현하면 독생녀(獨生女)”. 그런 도착은 자기 허물을 상대에게 뒤집어씌우는 투사 병리다. 이 나라 유구한 토착 왜양구(倭洋寇) 매국노가 반공 애국을 전유하는 수작과 같다. 고결 근본주의자들 자신이 투사 병리에 결박됐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사악하고 그렇지 않다면 한심하다. 사악하거나 한심한 이 사태는 대개 구미 유학파나 그에 준하는 저들이 서 있는 지식 기반에서 발원한다. 그 지식 기반은 자본주의 범주로 세계를 읽고 비판하는 사상 자장을 본진으로 삼는다.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에서 나오는 사유와 언어를 찾을 수 없는 소이다. 제국주의를 범주 삼아야만 보이는 주름 깊은 역동 서사 대신 납작한 결벽 논증으로 두 손을 빡빡 문지른다.

 

저들이 제국주의 범주로 들어서지 못하는 까닭은 저들이 배운 학문이 제국 학문이기 때문이다. 제국이 어떻게 자기 어둠인 제국주의를 들여다볼 수 있겠나. 제국을 치지 못하고 자본을 친 마르크스도 결국은 제국 지식인이다. 이 진실에 눈감은 이 나라 지식인도 당연히 부역 지식인이다. 눈감아주고 받은 그 계급장이 중해서 이 나라 진보 지식인은 제국주의 범주로 나아가지 못한다. 또 다른 진보 지식 아이콘인 백낙청이 분단 체제 넘어 제국주의 비판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와 맥락이 같다. 자기모순을 조국이나 문재인에게 투사하고 빌라도 손 씻기나 하는 진보 지식인보다 차라리 쌩 꼴통인 토착 왜양구(倭洋寇) 매국노가 덜 야비하다. 그들은 성조기, 일장기 들고 아스팔트 위에 선다.


 

야비한 윤똑똑이들이 고결한 말씀을 자판에 두들겨 넣는 동안 나는 그저 광장으로 간다. 한의원 문을 일찍 닫고 서둘러 왔는데도 광장은 이미 뜨겁다. 비록 가득 차지는 않았지만 늘 탱탱하고 맑은 광장 시민 함성이 빈자리를 그득 메운다. 초가을 여물리는 9월 오후 햇살처럼 이 함성이 자주민주주의 키우는 영양소로 작용하리라 믿는다. 오늘은 서영교 민주당 국회의원이 응원차 왔다. 알아보고 환호하는 시민들이 그가 어떤 흠을 지녔는지 모를 리 없다. 현실 정치는 이렇게 흘러가며 전선 실재를 만들어간다. 고결 근본주의 지식인에게는 전선이 실재하지 않는다. 저들이 전선이라 굳게 믿는 시공에는 같은 부류 종자만 모여 있다. 광장을 떠나며 저들도 모순에 발 담그기를 간절히 축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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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월백삼경천(梨花月白三更天)

제혈성성원두견(啼血聲聲怨杜鵑)

진각다정원시병(儘覺多情原是病)

불관인사불성면(不關人事不成眠)

 

배꽃으로 달 밝힌 깊디깊은 밤

두견새 피 울음 내 원망이리

살가움이 병 되는 사무친 깨침

인간사 무심해도 잠 못 이루네

 

(★ 자하 신위 (紫霞 申緯)가 이조년의 아래 시조를 한역하고 그 한역시를 강용원이 번역했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ㅇㄹㅇ가 왔다. 앞으로 읽어도 ㅇㄹㅇ 뒤로 읽어도 ㅇㄹㅇ가 이상한 변호사 ㅇㅇㅇ처럼 불쑥 나타났다. 불쑥 와야 반갑죠, 아버지! 그렇다. ㅇㄹㅇ는 내 딸이다. 낳아주어서가 아니라 죽기 직전에 세 번이나 살려내어서 나는 아비다. 물론 ㅇㄹㅇ 기억에서는 사라졌을 테다. 기억하지 못해서 더욱 애틋하다. 애틋함은 언제나 그 고운 목소리를 타고 낭창거리는 슬픔으로 온다.

 

ㅇㄹㅇ는 똑 아픈 사람 어조를 지녔다. 웃으며 말해도 아픔에 겨운 선율이 흘러나온다. 손짓도 거의 없다. 말하는 일, 아니 그 전에 사는 일 자체가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은 어떻게 바꾸어도 모두 같은 이미지로 번역된다. 하다못해 담벼락에라도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좌우명을 지닌 사람처럼 한껏 몸을 움츠린 채 사부자기 다가들어 나직나직 도란댄다.

 

내 앞에서 펼쳐내는 이런 모습만으로는 그가 불같이 화를 내는 장면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남편에게도 딸에게도 제풀에 기절할 정도로 화를 낸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사람이 이토록 다른 풍경을 그려내는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십수 년째 풀지 못한다. 나는 안다. 그 분노가 두려움에서 오고, 두려움은 심각한살가움에서 온다는 진실을.

 

심각한살가움은 정확히 말하면 병인 또는 병으로서살가움이다. 이 정도 살가움은 마치 화상 입어 한 겹 벗겨낸 피부와도 같다. 지극히 사소한 침습조차 견디지 못한다. 살가움에 지극히 사소한 침습은 살천스러움이 아니라 둔함이다. 따스하고 부드럽고 상냥한 마음결을 상대가 뚱하고 멍하게 지나칠 때 살가움은 관통상을 입는다. 죽음 냄새가 가차 없이 스며든다.

 

한가위 인사차 와서는 또 한참을 도란대던 ㅇㄹㅇ가 떠나기 전 나는 말해주었다. “얘야, 네가 여전히 아픔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까닭은 너무 진지하기 때문이다. 지나친 진지함은 곧장 심각함, 그러니까 질병 상태로 넘어간다. 네 살가움은 언제든 그 선을 넘어갈 준비가 돼 있어서 위험하다. 맨살 드러낸 살가움은 널 죽일 수도 있고 상대를 병들게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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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將除去無非草(약장제거무비초) 如取看來總是朶(여취간래총시타)

 

나는 이 시/문구를 초서로 휘갈긴 서예 작품에서 20여 년 전 처음 만났다. 초서를 배운 적이 없는 나로서는 대부분 글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 호기심에 못 이겨 붓이 움직여간 순서를 따라가며 그 이상한 글씨 하나하나를 독해해 갔다. 이 독해에는 작은 옥편이 큰 도움을 주었다. 큰 도움은 물론 작지 않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세 글자를 잘못 읽었다. 원문은 이렇다.

 

惡將除去無非草(오장제거무비초) 好取看來總是花(호취간래총시화)

 

저 뜨르르한 주희 작품이라 한다. 그 뜻은 싫어해 베기로 하면 풀 아닐 리 없지만 좋게 보면 모두 다 꽃이라네.”. ()(), ()()가 대구를 이룬다는 사실을 모른 나는 () 대신 (), 그러니까 만일로 읽고, () 대신 (),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로 읽었다. ()를 잘못 읽은 ()는 옥편에 꽃봉오리로 나와 있으니 거의 불가피한 오독이었다.

 

잘못 읽은 대로 풀면 이렇다: 만일 베기로 하면 풀 아닐 리 없지만 있는 그대로 보면 모두 다 꽃봉오리라네. 대강에서 뜻은 다르지 않으니 큰 오독이라 볼 수 없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는 옥편에 적혀 있는 뜻과 달리 정확히 말하면 꽃을 세는 단위라고 하므로 바로잡아야 옳다. ()를 꽃봉오리로 쓴 옛 그림 하나를 기억하고 읽었으니 그냥 놓아두기로 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 ()()와 대구를 이룰 수 있는가. 통상 생각하는 대구로 치면 그럴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잘못 읽은 대로 글을 썼더니 어느 후배가 ()()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해 주었다. 나는 생각이 달라서 그대로 두기로 했다. 호오는 인간 관지(觀地)고 그에 따라 그만큼 풀이든 꽃이든 인간중심주의 그물에 걸리기 때문이다.

 

()가 지닌 넓은 의미에서 좋다는 말은 아름답다’, ‘사랑스럽다라는 뜻까지 포괄하고 있으므로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스럽게 의인법으로 나아간다. 의인법이 꽃을 사람처럼 귀하게 여기는 방법이라 할 때에도 극진히 제한해 비인간 생명을 인간 시선에서 한껏 해방해야 한다. (),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꽃을 꽃에서도 해방할 수 있다. 왜 하필 꽃이어야 하는가?

 

주희가 무슨 목적으로 이 글을 남겼는지 몰라서 톺아보는 게 아니다. 구태여 그가 지닌 한계를 넘어가지 않고 그대로 읽어도 괜찮다. 이 글을 긍정주의 독본으로 써먹는 장사치들이 나타날 때는 문제가 다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류세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논의할 때 비판 독본으로 삼을 수도 있다. 고전을 대하는 자세다. 공동체 지혜는 열린 순환이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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