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 무장승의 기다림-“.......무장승이 약수弱水 바닷가에서 가슴을 쾅쾅 두드리자 발밑이 쿠웅쿠웅 울리며 천지가 진동했다. 계속 수평선을 주시하던 그가 안타까운 듯 한쪽 발을 쿵, 구르자 서편 하늘을 빼곡하게 덮으며 검은 독수리 떼와 황금 빛 박쥐 떼가 몰려와 명령을 기다리듯 그의 머리 위에서 맴돌았다.

“휘이, 돌아들 가! 오늘 내 심사가 잠시 어지러운 것뿐이다.”

무장승의 말에 독수리 떼와 박쥐 떼가 순식간에 왔던 곳으로 다시 날아갔다.......수평선을 바라보며 무장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장승이 수평선 저편을 바라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거대한 그림자가 주저앉자 갯가에 사는 생물들이 썰물 빠지듯 황급히 달아났다........

무장승의 깊은 한숨 소리가 약수 변을 괴이한 적막으로 뒤덮고 있었다.”(120-122쪽)

 

무장승은 바리가 가져가야 할 약수藥水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서천서역국에서 바리가 만날 마지막, 아니 오직 한 사람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하늘이 점지한 바리의 지아비이기도 합니다. 그를 만나 사랑으로 치유를 완성해야 여정이 끝나므로 무장승과 바리의 인연은 가히 화룡점정에 해당하는 중요성을 지닙니다. 청소년을 독자로 삼아 고쳐 쓰면서 김선우는 이 대목에 극적인 분위기가 더 번지도록 공을 들였습니다. 지어미를 기다리는 무장승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그럼에도 부질없음에 대한 절망감이 얼마나 깊은지, 그 역설의 상황을 절절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문득 이병률의 시 <화분>이 떠오릅니다.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약속한 그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날을 잊었거나 심한 눈비로 길이 막히어

영 어긋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봄날이 이렇습니다, 어지럽습니다

천지사방 마음 날리느라

봄날이 나비처럼 가볍습니다

그래도 먼저 손 내민 약속인지라

문단속에 잘 씻고 나가보지만

한 한 시간 동안 돌처럼 앉아 있다 돌아온다면

여한이 없겠다 싶은 날, 그런 날

제물처럼 놓였다가 재처럼 내려앉으리라

햇살에 목숨을 내놓습니다

부디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오지 말고 거기 계십시오

 

무장승은 잘못을 저질러 하늘에서 쫓겨 내려왔으니 죄 값을 치루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야 할 존재입니다. 지어미를 만나 아들 셋을 낳으면 삼십년으로 탕감된다, 하니 얼마나 간절한 심정일 것입니까. 그러나 팔만사천 지옥을 건너고 날짐승의 깃털도 가라앉는 약수弱水까지 건널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싶으니 얼마나 절망적인 심정일 것입니까. 더군다나 바리를 만나 자신의 운명이 또 어찌 바뀔지 모르는 상태이므로 미상불 그 무의식은 모순으로 요동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김선우는 이 상황을 평범하되 역동적인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무장승이 수평선 저편을 바라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정곡을 찔러 묘사할 말이 더는 없을 것입니다. 안타까움이 극에 달한 기다림의 끄트머리, 털썩.......그렇습니다, 털썩! 

 

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깁니다. 나는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다 이렇게 털썩 주저앉았던가. 돌이켜보니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날카롭고도 질긴 순간 하나 있었습니다. 떠나간 엄마를 애타게 기다리던 유년의 어느 날, 그 기억이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힙니다. 무장승에게 바리가 그렇듯, 제게 엄마가 그렇듯, 오늘 팽목 앞바다에서 기다리는 엄마에게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아이가 그렇게, 털썩 주저앉은 기다림의 대상입니다. 무장승에게 바리는 기어이 올 것입니다. 제게 엄마는 기어이 오지 않았습니다. 팽목 앞바다의 엄마에게 아이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 지옥을 건너다-11년 전 <바리공주>는 지옥을 ‘무사히’ 건넜습니다. 오늘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는 지옥을 ‘뒤흔들며’ 건넙니다. 염라대왕의 엄격한 통치 방식을 유연한 것으로 바꾸며 건넙니다. 

 

“내가 지옥을 둘러보니 지옥불 죄인 가운데는 좋은 말씀과 마음으로 보살피면 선한 영혼으로 거듭날 혼귀들이 꽤 있더이다. 형벌로만 다스린다고 죄가 씻기지는 않을 것이오. 불쌍한 혼귀들을 내 식대로 한번 구제해보고 싶소. 염라대왕님의 하락을 받아주오.”

수문장이 곰곰 따져보니, 필요하긴 하나 아무도 할 생각을 못 하던 지옥 일을 이 자가 자처하고 있지 않은가. 그 길로 염라대왕께 전령을 보내 여쭈었더니 흔쾌한 수락의 답변이 돌아왔다.”(133쪽)

죄지은 ‘사실’에 터 잡아 가차 없는 형벌로 다스려지던 지옥의 법도에 죄지을 수밖에 없었던 ‘진실’이 들어갈 틈을 낸 것입니다. 구제의 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의 방식입니다. 이것이 바리의 길입니다. 바야흐로 지옥에 인간의 입김이 쐬어지기 시작합니다.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가 제시하는 세계는 이렇게 다릅니다. 다른 어떤 종교사상에도 없는 지옥의 풍경을 바리의 지옥에서는 볼 수 있습니다. 지옥의 한가운데 산 사람 하나가 들어가 죽은 사람을 구제하고 있는 경이롭고 장엄한 풍경 말입니다. 삶과 죽음의 이분법적 격절이 바리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진실의 꽃을 피워내는 바리에게 지옥이든 천국이든 인간세계든 걸릴 바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원효의 일심-화쟁-무애 사상입니다. 바로 이것이 한(본디 아래아를 써서 표현해야 함) 사상입니다. 포개지되 하나가 아니고 쪼개지되 둘이 아닌 묘법의 이치가 구현되는 누리가 바리의 시공간입니다. 지구상의 그 어떤 사상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 가로-세로-높이를 지녔습니다.

 

이 옹골차게 말랑말랑하며 탱맑은 세계는 바리가 버림받은 존재지만, 아니 버림받은 존재라서 자신을 극진히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빚어낸 세계입니다. 쌍방향 생명작용의 비밀은 바로 버려짐, 그 절대 아픔에 있습니다. 절대 아픔에 대한 도저한 마음 씀은 개인의 경계를 넘어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넘어섬이 지옥의 통치 질서까지도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지옥을 건너오면서 눈물을 속으로 삼킨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수척하게 깊었다. 그간 무쇠 옷은 옷소매며 앞섶이 많이 닳아 있었다. 손등이며 손가락 끝이 죄다 갈라터지고 얼굴의 살결도 거칠게 터서 외형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으나, 바리공주의 얼굴에선 단단하고 투명한 빛이 그윽하게 배어나오고 있었다. 강하고 고독한 바리의 눈빛은 첫새벽 이슬을 그대로 얼려놓은 듯한 영롱함으로 가득했다. 목표를 향해 두려움 없이 나아가고자 매 순간 자기 자신과 맨얼굴로 만나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하고 환한 빛이 바리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서천서역국으로 출발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강인한 얼굴로 바리가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134-135쪽)

 

바뀐 것은 지옥만이 아닙니다. 바리도 바뀌었습니다. 바뀌고 있습니다. “단단하고 투명한 빛이 그윽하게 배어나오”는 얼굴, “첫새벽 이슬을 그대로 얼려놓은 듯한 영롱함으로 가득”한 눈은 물론 “당당하고 환한 빛”이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이 바뀜이 곧 치유입니다. 바리는 곡진한 변화과정을 거쳐 완벽한 치유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본디 마음의 아픔은 배움과 자람에 문제가 생긴 것이니 치유로서 변화는 배움과 자람의 흐름으로 나타납니다. 바리는 여자 사람으로 배우고 자라납니다. 바리는 여자 너머 사람으로 배우고 자라납니다.

바뀐 지옥이 바리를 바꾼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일과 개인을 바꾸는 일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현대 여성운동의 명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타당합니다. ​바리공주가 지옥을 바꾸듯 세월호의 바리들이 지옥 같은 이 나라를 바꾸고야 말 것입니다. 나라를 바꾸지 않으면 결코 아이들 생령의 치유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에. 이제 점점 운명의 웅숭깊은 산 그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 금주령과 낭화 세 가지-바리가 유리산을 꿰뚫고 나온 것은 트라우마로서의 공포, 버려진 운명, 삶의 천명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일어서 내달리는 일련의 깨침, 그러니까 치유 체험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만난 것은 청태산 마고할미입니다.

 

마고할미는 “두 눈 사이에 청옥을 박아 넣은 것 같은”(109쪽) 제3의 눈을 지닌 욕쟁이 할미입니다. 제3의 눈을 지닌 것과 욕쟁이인 것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깊은 일치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3의 눈은 통속적 관점으로는 볼 수 없는 차원 높은 진실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욕은 인간이 지닌 언어 가운데 가장 곡진한 것입니다. 거칠고 딱딱한 표현을 통해 돌연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진면목을 드러내는 선禪적 언어입니다. 말하자면, 둘 다, 세계를 구성하는 비대칭의 대칭이라는 진실에 이르게 하는 탁월한 방편인 셈입니다.

 

마고할미가 제시한 과제는 빨래하기입니다. 빨래의 통속한 의미는 때나 얼룩을 제거해 깨끗하게 하는 작업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어려워도 언젠가는 완수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차원에 있는 작업입니다. 검은 빨래 희게 하기지요. 그러나 흰 빨래 검게 하기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통속한 빨래 의미로는 실현이 불가능한 과제입니다. 제3의 눈이 없으면, 마고할미의 욕이란 자극이 없으면 도달할 수 없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흰 빨래 더미의 빨래를 방망이질하면서 또 몇 밤이 지나간 어느 아침이었다. 바리공주의 표정이 일순 환해지더니 빨래 더미를 들고 개울가 흙바닥으로 나가 앉아 흙에다 빨래를 비벼대기 시작했다.......

물에다가만 빨래를 하란 법 있나. 세상이 처음 날 적에 지수화풍이 그 모체였으니 흙 묻은 옷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사람살이의 생각 한끝 차이지.......

그렇지. 생각 한끝 차이지. 연꽃이 꽃잎을 여는 것도 진흙탕을 통과한 다음부터지.

흙빨래를 해서 걷어진 빨래를 다시 빨래 방망이로 두드리며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지는가 싶었다. 그러더니 거무튀튀해진 빨래들이 감탕 같은 검은 빛을 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바리공주의 숱 많은 머리칼 색을 꼭 닮아 있었다.”(110-111쪽)

 

그렇습니다. 빨래는 다만 때나 얼룩을 제거해 깨끗하게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빨래는 “감탕 같은 검은 빛을 내기” 위한 능동적·창조적 작업이기도 한 것입니다. “생각 한끝 차이”로 이런 발상을 한다면 세상은 더 이상 고통도, 악도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생각 한끝 차이”를 실행하기 지난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바리가 이런 깨침에 이른 것은 마고할미의 깨우침에 힘입은 바 크지만 그 전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일어서 내달린 유리산 체험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바리는 이제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부분은 오류라는 것. 세계의 진실은 비대칭의 대칭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이 깨달음의 끝에 바리가 다다른 곳은

 

기이한 곳이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바리는 자신이 물위를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색 물고기들이 가득 노니는 물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바리는 그 위를 걷고 있었다. 물에 빠지지도 젖지도 않은 채 마치 얼음판 위를 걷듯이 가다 보니 눈앞에 불쑥 검은 섬이 나타났다.”(113쪽)

 

진실을 온 몸에 지닌 사람은 “물에 빠지지도 젖지도 않은 채 마치 얼음판 위를 걷듯이” 물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 또한 어린 시절 버림받은 상처 때문에 길디긴 세월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한창 아플 때 자주 꾼 물 꿈은 시퍼런 물에 빨려 들어가거나 무서워 도망치는 꿈이었습니다. 치유가 익어갈 무렵에 더 자주 꾼 꿈은 물에 빠지지 않고 달리거나 나는 꿈이었습니다.

 

 

이 순간 문득 저 어둡고 차가운 물속에서 숨져간 아이들, 우리 시대의 바리들을 생각합니다. 하루 빨리 치유해서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이 땅의 어른들이 끝내 잊지 않고 정치경제적·사회역사적 처결을 관철해내야 할 것입니다. 치유와 자유는 단지 부분적 뒤치다꺼리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_()_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을 부르는 소녀 바리 단비 청소년 문학 42.195 5
김선우 지음, 양세은 그림 / 단비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 생명수를 찾아 떠나다-“.......거대한 유리산이 바리공주 앞을 가로막았다.......무서웠다. 공포가 몰려오자 옥함 속에서 울던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그것이 자신의 울음소리란 걸 깨닫자 외면하고 싶었다. 바리공주가 손으로 두 귀를 막고 고개를 저었으나 아기울음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다.......귀를 막았던 손으로 바리공주가 유리벽을 두드리며 아기와 함께 울었다.......숨을 고른 후 눈을 질끈 감은 바리공주가 갓난아기가 울고 있는 유리벽을 향해 정면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101-102쪽)

 

고난의 여정, 그 첫 번째 난관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유리산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유리산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비밀을 드러내어 알게 함으로써 공포를 불러일으킵니다. 바리의 공포는 버림받음에서 왔습니다. 갓난아기의 우주인 엄마가 사라진 시공에 찾아오는 검푸른 공포, 바로 그것입니다. 공포 뒤에 들이닥치는 눈물과 그 눈물에 대한 기억이 너무 아파서 바리는 한사코 외면하고, 부인하려 발버둥 칩니다. 그럴수록 아픔은 점점 더 폐부 깊숙이 파고들어옵니다. 급기야 바리의 영혼은 그 아픔에 꿰뚫립니다. 바리는 그 찰나 모든 아픔을 통째로 받아들입니다. 바리는 아픔을 품어 안고 함께 웁니다. 극진한 애도입니다. 마침내 바리는 공포, 그 두려움을 향해 정면으로 내달아 나아갑니다.

 

김선우가 정신치료 과정을 공부하고 이 과정을 풀어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질문할 필요 또한 없습니다. 이치상 이런 과정을 거쳐 마음의 병이 치유된다는 진실을 유심히 톺아보면 그만입니다. 특정한 해석·평가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상처를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일어서 나아가지 않으면 치유란 없다는 진실이 간단명료한 내러티브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마음의 아픔을 겪을 때 흔히 생각하는 방법은 피하기입니다.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 없다고 간주하는 것, 합리화하는 것 등 모두가 사실은 넓은 의미에서 피하기입니다. 이런 방법은 사소한 버릇에서부터 세련된 긍정주의 전략까지 모두 허망한 거짓입니다. 아픈 것은 실제로 아픈 것이고, 있는 것은 엄연히 있는 것이고, 알 수 없는 것은 끝까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상태에서 내 팔 뻗어 잡을 수 있는 곳, 내 발 뻗어 닿을 수 있는 곳을 홀딱 벗은 눈으로 마주볼 때만이 아픔을 뚫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리의 자세이며, 바리의 삶입니다.

 

꾸르릉, 쩡! 날카로운 소리와 둔중한 소리가 함께 울리며 유리산이 산산조각 난다는 느낌과 함께 바리의 몸이 붕 떠올랐다가 쿵 떨어졌다. 유리산을 뚫고 나오자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쾌청한 하늘과 너른 풀밭이었다. 너는 누구냐? 너는 버려졌던 여자아지. 아니야. 나는 강한 바리다........나는 나를 믿으면 돼. 나는 나를 사랑하면 돼.......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거야.......바리공주가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102-103쪽)

 

유리산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거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치유는 끝이 아닙니다. 건강한 삶의 새로운 출발점입니다. 참된 건강인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입니다. 자신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은 영성의 사람이며 열반의 사람입니다. 바리가 인도하는 길은 다름 아닌 영성과 열반의 길입니다.

 

사회 전체가 아픕니다. 혼자 행복하기 위해 은폐와 조작, 그리고 무시로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권력의 민낯을 보면서, 오늘 여기 우리 모두가 바리로서 살아야만 하는 날 선 진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야 한다, 아가. 살라고 태어난 목숨이다.”(10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막>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대화에

말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말과 말 사이다.

 

대화에는

말보다

말과 말 사이가 더 많다.

 

말과 말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말은 대화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 오랫동안 마음 아픈 사람들과 대화/상담 치료를 함께 해왔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따스하고 정확한 치료의 말을 해주었기 때문에 낫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말 자체는 본디 실체적 힘이 없습니다. 말이 끝난 자리에서 열리기 시작하는 틈, 곧 침묵 속에서 아픈 사람 스스로 말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일어섬으로써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상담자의 핵심적 임무는 아픈 사람이 자발적으로 병 앞에 서도록 허공을 열어놓는 일입니다. 무슨 말을 하느냐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말은 침묵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오래된 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