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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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는 존재론적으로 확실하고 인식론적으로 모호하다.·······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의 고통은 윤리적이다.·······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조급과 허영이 세상을 불행에 빠뜨린다·······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가히 해부학적이라고 해야 할 시선으로 파고들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는·······유물론적 타자론·······(47-51쪽)

 

세월호 국정조사 자리에서 대통령비서실장이란 자가 “유족보다 더 가슴 아프다”며 허풍떨자 어느 여성 국회의원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조급과 허영이 세상을 불행에 빠뜨리는 경우의 전형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언급은 아무리 천천히 해도 언제나 조급이며, 아무리 알뜰히 해도 언제나 허영입니다. 

 

 

마음병을 앓는 사람들의 고통과 마주할 때 정직한 의자醫者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막막함”입니다. 저 고통에 가 닿을 수 없구나, 가 가장 먼저 들이닥칩니다. 곧 이어, 건넬 말에 비해 고통이 너무 크구나, 가 몰려옵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을 뻘뻘 흘리는 정신 줄을 놓지 않고 하염없이 듣다 보면 예기치 않은 어떤 순간 홀연히 작은 틈 하나를 볼 수 있습니다. 그 틈에 깃들고서야 인연 지어갈 길을 보는 것입니다.

 

상담을 하는 중에 모순된 진실을 도처에서 만납니다. 어느 때에는 말이 턱없이 무디고 모자라는구나, 하다가, 또 어느 때에는 말이 지나치게 번다하고 장황하구나, 합니다. 앞의 경우는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느낌입니다. 뒤의 경우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느낌입니다. 이 뒤집어짐에서 오는 자책으로 격한 우울감에 빠져들곤 합니다. 마음치유의 길을 걷는 자에게 문학과 명상이 필요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치유자의 길을 걷는 자는 시를, 소설을, 비평을 다만 읽지 않습니다. 살과 뼈를 발라내며 읽습니다. 마음치유의 길을 걷는 자는 그저 웰 빙으로 소비하는 고요를 누리지 않습니다. 침묵을 창조하는 고요에 깃듭니다. '조급과 허영으로 세상을 불행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해부와 침묵을 가로지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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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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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윤리학과 진실의 윤리학이 있다. 선의 윤리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방호벽이다. 그것은 치명적인 진실의 바이러스를 선의 이름으로 퇴치한다. 반면 진실의 윤리는 시스템을 다시 부팅하는 리셋 버튼이다. 그것은 때로 선이라는 이름의 하드디스크가 말소될 것을 각오한 채 감행되는 벼랑 끝에서의 한 걸음이다.(18-19쪽)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

 

2013년 프랑스 대학 입학자격 시험인 바칼로레아 문제입니다. 프랑스 아이들이 이런 문제에 논문 식 답안을 쓸 수 있는 철학을 배우는 동안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국민윤리를 주입식으로 배웁니다. 바로 이 차이가 세월호 참극을 낳은 것입니다.

 

국민윤리라는 교과목은 지배이데올로기 아래서 ‘선’한 국민으로 이이들을 길들이기 위해 정당성 없는 정권이 만들어낸 홍보수단입니다. 선이 애당초 무슨 의미를 지녔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사회 현실에서 본다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방호벽이라고 선을 규정한 것은 지극히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하다”는 표현처럼 어려서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가치 개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한” 사람처럼 시스템적인 악에 잘 순응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선의 반대말이 악인데도 이렇게 길들여진 “선한” 사람들은 분연히 악의 편에 섭니다. 사회정치적 스톡홀름증후군이랄 밖에요.

 

선은 길이 아닙니다. 선은 접힌 현실을 펴지 않은 채 “차카게” 머리 조아리는 것입니다. 진실이 길입니다. 진실은 접힌 현실을 펴기 위해 내디디는 벼랑 끝에서의 한 걸음입니다.

 

 

마음치유의 일선에 선 사람의 처지에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선한 것은 약한 것이다. 약한 것은 악한 것이다.”

 

무엇보다 우울증 앓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주위에서 언제나 착하다는 말을 듣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착함은 거절하지 못 하고, 양보하고, 배려하고, 퍼주고, 보살피는 드넓은 오지랖으로 나타납니다. 그 오지랖은 본인의 진정성과 무관하게 타인에게 ‘봉’으로 각인됩니다. ‘봉’은 착함의 경계를 한참 지나쳐 약함으로까지 나아갑니다. 그 약함은 끝내 자신을 파괴하고 맙니다. 우울증의 본령이자 최후입니다. 제 생명을 이렇게 파괴하는 것이 어찌 악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우울증 앓는 사람들에게 우선 무조건적인 정서적 지지를 보냅니다. 이것은 자기 파괴적 선에 빠져 있는 진실을 알아차리게 하려고 내는 틈입니다. 그 틈을 통해 불편한 진실이 배어들도록 합니다. 그 다음, 선이라는 이름의 하드디스크가 말소될 것을 각오한 채 감행할 무엇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모순에 맞닥뜨린 그들이 혼란에 빠져들 때 곁을 지킵니다. 혼란의 소용돌이가 빚어내는 “숭고한 표정”(5쪽)에 함께 물들어 갑니다. 더 이상 ‘봉’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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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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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불가피하다. 인간이 말하고 행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 말과 행동이 형편없는 불량품이기 때문이다.·······말은 미끄러지고 행동은 엇나간다.·······내 안의 이 심연을 어찌할 것인가.·······어렵고도 용기 있는 일은 그것과 대면하는 일이다.·······그 대치(對峙) 없이는 돌파도 없다. 그것이 시인과 소설가의 일이다.·······요컨대 문학의 근원적 물음은 이것이다. “나는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고/없고,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없는가?”(13-14쪽)

 

흔히, 문학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때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할 때, 그 의미가 전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은 인간의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진 불량품입니다. 불량품이 불량하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합니다. 불량품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은 같은 말입니다.

 

조금 더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불량품으로서 현실은 거의 대부분 접혀 있습니다. 접혀 있으므로 그를 펴는 것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접힌, 그러니까 반쪽인 상태를 그대로 말하는 것이 재현하는 것입니다.

 

접혀 있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몰락의 에티카」에서는 말의 미끄러짐, 행동의 엇나감이라 표현하였습니다. 서로 이탈하여 적중하지 못 함으로써 삶이 이치대로, 바라는 대로 활짝 펼쳐지지 못 하고 구겨지거나 비틀리거나 심지어 뒤엉켜 붙어버리는 상황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간단히 접혔다, 라고 정리하였습니다.

 

접히면 전체 진실이 부분으로 축소되고 은폐됩니다. 축소되고 은폐되는 진실은 다만 크기 차원이 아닙니다. 전체 진실의 근본 성격을 왜곡하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전체 진실의 근본 성격이란 다름 아닌 대칭성입니다. 대칭성을 드러내지 못 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독단, 그러니까 일극(집중)성이 바로 접힌 상태입니다.

 

문학은 대칭성이라는 진실인 현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일극(집중)성이라는 접힌 현실과 용기 있게 대면, 그러니까 대치(對峙)하는 것입니다. 접힌 현실의 눈으로 보면 문학은 허구이며 과장됨입니다. 열린 현실의 눈으로 보면 문학은 진실이며 정확함입니다. 문학은 뻥튀기가 아닙니다. 문학은 다림질입니다. 문학의 표면이 팽창된 게 아닙니다. 우리 일상 현실의 표면이 쭈글쭈글한 것입니다.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의자醫者의 처지에서 말씀드리자면 이 접힘이 바로 마음의 병입니다. 치유는 당연히 펴는 일입니다. 바로 지금-여기서 단도직입의 질문이 불가피합니다. 그러면 문학과 치유는 같은 층위의 말이며 행동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가 답입니다. 교집합과 차집합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펴지 않으면 치유는 불가능합니다. 펴지 않은 채 하는 치유는 모두 가짜입니다. 예컨대 긍정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펴기만 하면 치유가 될까요?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입니다. 세계의 진실, 대칭성은 그 자체로는 모순이기 때문에 펴만 놓아서는 견딜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미치거나 죽습니다. 견딜 수 있도록 틈을 마련하고, 모순을 가로지르는 이치를 터득하는 동안 보살피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의자醫者의 구실입니다.

 

시인과 소설가는 펴는 일에 능하나 틈 내고 보살피는 일에 어수룩합니다. 의자醫者는 틈 내고 보살피는 일에 능하나 펴는 일에 어수룩합니다. 문학이 불가피한 저 건너편에서 의학 또한 불가피합니다. 바로 여기가 문학과 의학, 그러니까 인문과 치료가 만나는 어름입니다. 오늘날 접힌 현실에서 문학은 문학대로 허접하고 의학은 의학대로 허접한 까닭은 서로 그 대칭성의 한 축인 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여, 소설가여, 의자醫者를 그대 삶에 초대하시라. 의자醫者여, 그대 삶에 시인과 소설가를 초대하시라. 연대하시라. 말은 착착 달라붙고, 행동은 딱딱 맞물리는 세계를 창조해야 하지 않겠나. 아직도 차갑고 어두운 바다 속에 있는 우리 아이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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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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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5쪽)

 

 

“지면서 이기는 사람에게는 참혹한 아름다움이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다.” 이 문장은 서로 버성긴 말 세 쌍을 겹으로 안고 있습니다. 자연스럽지 않음을 넘어 탐탁하지 않습니다. 탐탁하지 않음을 넘어 혼란스럽습니다. 혼란스러움을 넘어 당최 말이 안 됩니다. 지면서 이기다니. 참혹하게 아름답다니. 텅 빈 채로 가득 차다니.

 

세계는 본디 서로 버성긴 진실이 접속사 없이 마주서는 장엄한 대칭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대칭성을 자발적으로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면서 세계는 영원한 창조 사건을 일으킵니다. 대칭이 깨뜨려지면서 생겨난 어떤 질서를 영속적으로 소유하려는 지향에너지를 과잉진화의 부산물로 지니게 된 인간이 이 세계의 자기창조 흐름을 가로막습니다. 인간의 그 잔혹한 지향에너지는 일극집중구조를 지닌 권력·자본·종교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일극집중구조에서는 질문이 불가능합니다. 공포 어린 복종·노예적 추구·조건 없는 숭배로 평정된 부동불변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는 겉으로는 살아 있지만 속으로는 죽어 있습니다. 자기들만 살아 있다고 확신하는 상위 0.1%도 실은 좀비일 따름입니다. 이 세계를 흔들어 바꿀 수 있는 질문은 한순간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기꺼이 몰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에게서만 나옵니다. 선택하는 몰락은 불쏘시개처럼 제 몸을 살라서 큰 불을 지핍니다. 그 길 아니면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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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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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보편성과 객관성에 대한 야망이 많지 않다. 나는 차라리 압도적인 특수성 혹은 매혹적인 주관성이고 싶다. 나에게 비평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절박하다. 나는 부조리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사람이다. 많은 상처를 주었고 적은 상처를 받았다. 이 불균형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 나의 삶을 나의 글로 덮어버리기 위해 썼다. 문학이 아니었으면 정처 없었을 것이다.·······”(7~8쪽)

 

위 글에서 비평이란 말 대신 시 또는 소설을 넣어 읽는다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비평가가 비평을 압도적인 특수성으로, 매혹적인 주관성으로 쓰다니. 아름다움에 대한 절박함으로 아름다운 비평을 쓰다니. 형용모순처럼 들립니다. 분명한 것은 그의 고백(!)대로 그의 비평은 절박함으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쓴 아름다운 글이라는 사실입니다. 도처에 시인과 소설가의 체취가 낭자합니다. 이렇듯 아름다운 비평이 과연 비평으로서는 얼마나 비평다운 것일까요? 평범한 독자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제 깜냥으로는 그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가만가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당최 그 자신이 특수성과 주관성의 땅에 선 사람임을 밝히고 있는 이상 보편성과 객관성의 견지에서 판단하는 일 자체가 부질없지 않은가. 이미 알고 자신의 한계, 그러니까 부조리함과 이기적임과 무책임함을 품어 안고 그에 대한 인간적 감응response으로 쓰는 비평에다 대고 완벽성을 전제한 보편성과 객관성의 기준을 들이미는 것이 허탕 치기 아니냐는 것입니다. 비평가가 아름다운 비평을 쓰는 것이 형용모순이면 불완전한 자가 완전을 전제한 보편과 객관을 말하는 것도 형용모순입니다. 비평 또한 사람의 일입니다. 이 단순한 진실이 답이 줍니다.

 

 

마음치유 또한 사람의 일입니다. 저 또한 부조리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사람이므로 상처의 불균형 덕분에 살아갑니다. 저 또한 압도적인 특수성으로 매혹적인 주관성으로 환우 앞에 서고 싶습니다. 아픔에 대한 절박함으로 아프게 1인칭 어법을 주고받으며 환우와 저는 느리디느리게 역설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려 합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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