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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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의 오(誤)작동을 수락하는 이의 평정(416쪽)-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헤어짐을 이별(離別)이라 하고, 제 힘으로 힘껏 갈라서는 헤어짐을 작별(作別)이라 한다. 이별은 ‘겪는’ 것이고 작별은 ‘하는’ 것이다.·······작별은 인정이고, 선택이고, 결단이·······다. 헤어짐을 ‘짓는’ 일이다.(411-412쪽)

 

철학자 김영민의 어법으로 바꿉니다.

 

“이별은 ‘어긋나는’ 것이고 작별은 ‘어긋내는’ 것이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당신의 말을 믿고 따랐다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 사과하라.’ 육십갑자 가까이 살면서 이렇게 당황했던 적이 또 있었을까, 싶을 만큼 젊은이의 요구는 느닷없고 거침없었습니다. 꽤나 긴 기간 동안 뒤졌지만 저는 제 잘못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 젊은이에게 잘못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제게도 그 젊은이에게도 잘못은 없었습니다.

 

흔히 생각하듯 두 사람 사이가 어긋나거나 오작동 될 때, 어느 한 사람에게 반드시 잘못이 있거나 두 사람 모두에게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둘 다 잘못하지 않아도 오작동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아예 그것이 오작동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작동이라고 생각하고 잘라내는 순간 진짜 오작동이 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설혹 오작동이라 하더라도 ‘수락’하면 오작동이 아니게 됩니다. 그러면 ‘평정’이 깃듭니다.

 

A도 진실이고 non A도 진실인 경우를 서양철학에서는 이율배반이라고 합니다. 형식논리학으로는 풀 수 없는, 그래서 칸트도 풀지 못한 난제입니다. 학문적 차원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일지 모르지만 일상에서는 수없이 이런 상황과 마주칩니다. 우리 또한 대부분 못 풀고 넘어갑니다. 모순이 공존하는 역설, 그 대칭성의 진실에 낯을 가리도록 교육받아왔기 때문입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치 아래 극단적 승패 문제로 처리하도록 강제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정의가 승리하는 사회가 된 게 아니라 거꾸로 승자가 정의를 전유하고 그 전리품을 독식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권력, 자본, 종교를 거머쥔 승자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빨갱이, 종북, 미개인, 시체장사, 근본 없는 종자로 몰아 죽이고 있는 현실을 고통 속에서 ‘겪는’ 우리가 아닙니까.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요. 정의를 당연한 존재로 놓고 사악을 그것의 부재로 이해하는 관념적 오류 때문입니다. 인간에 관한 한, 사악함이야말로 당연한 존재입니다. 정의는 애써 ‘짓지’ 않으면 존재의 반열에 오를 수 없는 요청이며 소망입니다. 그러면 누가 과연 애써 정의를 ‘인정, 선택, 결단’으로 지어야 할까요. 권력, 자본, 종교를 거머쥔 승자가 과연 애써 정의를 지을까요.

 

버림받은 사람들, 빼앗긴 사람들, 매 맞은 사람들은 애써 정의를 지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요. 저 사악한 권력, 자본, 종교 집단을 응징하려는 것일까요. 물론입니다. 저들의 죄를 낱낱이 밝혀 추상같이 벌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처벌은 멸절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그런 짓은 저들이나 하는 것입니다. 벌을 받음으로써 자신들이 버리고 빼앗고 때린 사람들이 먼저 깨달은 진실을 나중에라도 깨닫게 하려 함입니다.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생에는 오작동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그것을 수락하여 평정에 이르는 저 대동大同의 길로 가야 한다는 진실 말입니다. 벌까지 받아도 끝내 깨닫지 못하는 자, 제 무덤을 파는 것일 테지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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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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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가·······창안하는·······삶은 존재론적으로 어떤 (의미가 아니라) 힘을 갖는가,·······과연 윤리적으로 (선한 삶이 아니라) 좋은 삶인가. 말하자면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다.·······촉발(affection)의 텍스트는 몸을 자극하고 삶의 좌표를 흔든다.(403쪽)

 

당신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물을 때, 그 ‘의미’의 지평은 과거, 그러니까 기존 질서에 닿아 있습니다. 당신의 삶은 선한가, 물을 때, 그 ‘선’의 지평 또한 과거, 그러니까 기존 질서에 닿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묻기 위해 창안된 텍스트라면 그것을 구태여 문학이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국민윤리’ 교과서만으로 충분하기에 말입니다.

 

삶의 힘에 대한 물음은 ‘의미’를 허물어뜨리는 에너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아니 의미 이전의 생명력, 그 진동수를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삶의 좌표를 흔듭니다. 촉발입니다. 삶의 좋음에 대한 물음은 ‘선’을 허물어뜨리는 도발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아니 선 이전의 생명감각, 그 쾌감을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몸을 자극합니다. 촉발입니다.

 

촉발까지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문학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텍스트를 향해 공감만으로 부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연 짓는 모습은 각기 다릅니다. 물론 임상의臨床醫인 제 처지로 보면 이 경계는 루비콘 강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촉발은 치료의 영지에서 불어오는 향기를 맡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임상의는 시인이 아니지만 시의 미학을 체현해야 합니다. 임상의는 비평가가 아니지만 비평의 냉정과 열정 사이를 가로질러야 합니다. 마음병 앓는 이와 함께 증상을 옹골차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드러냄을 결곡하고 넉넉하게 만져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촉발이야말로 분수령입니다. 치료는 결국 자극하고 흔들어 ‘바꾸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상담 또는 대화로 우울증을 치료해오면서 절실히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이른바 항우울제 따위의 약물로 뇌만 조절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울증을 앓으면 기분만 망가지는 게 아니라 인간다움의 근본 조건인 생명력과 생명감각도 손상됩니다. 자극하고 흔들어 삶의 전반을 바꾸는 인문치료가 필수적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노사이드4.16 이후 유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침륜되어 사회가 거대한 우울증 병동으로 변해갑니다. 여태까지 진행되어온 개별적·부분적 치료는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혜신 선생을 중심으로 펼치는 치료를 포함하면서 그것을 넘어 인문치료, 사회치료, 정치치료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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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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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당신의 놀이에 동참하는 일, 어제 당신의 상처를 이해하는 일, 그래서 내일 당신과 함께 침묵하는 일.(390쪽)

 

이렇게 바꿉니다.

 

어제 당신의 상처를 이해하는 일: 일심一心, 오늘 당신의 놀이에 동참하는 일: 화쟁和諍, 그래서 내일 당신과 함께 침묵하는 일: 무애無碍.

 

일심은 통속적인 감각으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한 마음’이라는 표현 자체가 둘인 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그 사이에 있습니다.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비대칭의 대칭, 그 구조가 무량무수 자발적으로 부서지면서 새로운 무엇이 창조되는 운동 전체를 일심이라 합니다. 내가 당신의 상처를 이해하는 진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화쟁은 비대칭의 대칭, 그 구조가 무량무수 자발적으로 부서지는 지극한 소요騷擾 과정 그 자체입니다. 소란스러운 동요動搖가 천방지축 날뜁니다. 칼날을 타고 덩실거리는 춤의 굿판이 신명과 경이를 교차적으로 쏟아냅니다. 슬픈 놀이와 웃기는 제의가 한 시공에서 뒤엉킵니다. 대성통곡과 포복절도가 난장을 칩니다. 내가 당신의 놀이에 동참하는 진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무애는 화쟁의 소요가 끝난 뒤에 오는 고요입니다. 자유를 찾기 위해 소요는 불가피하지만 자유를 찾은 다음 소요는 불필요합니다. 더 이상의 떠들썩한 ‘스캔들’은 도리어 자유를 싸구려로 만들 뿐입니다. 부르지 않아도 잘만 들리는, 아무리 불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의 ‘음악’이 거침없이, 또한 가없이 번져갑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과 함께 침묵하는 진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지난 4월 16일 당신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상처를 이해한 것입니까? 당신은 지금 청운동에서 국회에서 팽목항에서 분노와 슬픔에 겨운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놀이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까? 침묵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침묵하는 내일을 과연 맞이할 수는 있는 것입니까? 질문에 답변을 차마 할 수 없으니 참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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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전 아내와 딸에게 한가위날 세월호 1일 동조단식을 할까, 한다고 말을 꺼냈습니다. 왜 하필 추석날이냐며 반대할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마치 당연하다는 듯,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듯, 감응해주었습니다. 

 

광화문에 정오까지 앉아 있다가 침을 들고 동조단식하는 시민들이 앉아 있는 곳을 한 바퀴 돌며 건강 이상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 중 단식 15일째인 사제 한 분께 수기치료를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유가족이 모여 있는 청운동주민센터로 이동하여 역류식도염 증상 있는 유가족 한 분을 치료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부 유가족이 있는 국회로 향하다가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돌아섰습니다.

 

 

오후 늦게 다시 광화문으로 돌아가 단식을 마쳤습니다. 한가위날임에도 많은 시민이 더위 속에 앉아 동조단식을 하였습니다.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 희망의 배 세월호를 만들어 하늘에 띄웠습니다.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우리 곁에 저 이은미가 찾아왔습니다. 가슴을 파고드는 절창에 시민의 환호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청와대도 조중동도 그 소리를 들었겠지요.

 

 

단식은 생명을 포기하는 진지한 제의입니다. 하늘 배는, 이은미는 즐거운 놀이입니다. 제의와 놀이가 이렇게 하나로 만납니다. 생사를 가로질러 민중의 한恨과 흥興이 어우러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여기 대동세상이 펼펴지고 있습니다. 신명 다해 논 이은미가 진지하게 당부했습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지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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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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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소통되지 않고 치유는 점점 병리적인 놀이가 되어간다.·······도대체 이런 놀이들은 왜 필요한 것일까. 상처 때문이다.·······상처는 왜 놀이를 낳는가. “처음에 그는 수동적인상황에 있었다. (···) 놀이로 그것을 반복함으로써 그는 능동적인역할을 취하게 되었다.” 수동적으로 겪은 상처를 능동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다.(382-383: 큰 따옴표 안 문장은 프로이트의 견해임-재인용자)

 

상처는 반응reaction을 낳습니다. 반응은 병리적 상호작용입니다. 병리적 상호작용 가운데 재연이 있습니다. 재연 가운데 놀이가 있습니다. 놀이는, 결곡하고 곡진하면, 감응response으로 갑니다. 감응할 때 상처는 낫습니다.

 

놀이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해는 정곡을 찌른 것이 아닙니다. 진실의 핵심과 어느 정도 교집합을 이루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동에서 능동으로 가는 것이 극복의 요체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상처 입은 사건을 놀이로 전환하는 행동은 자기가 겪은 사건의 접힌 진실을 펴는 옹골참과 그것을 자기 삶의 소중한 일부로 받아 안는 드넓음이 맞물릴 때만이 극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놀이는 그저 병리적 상태에서 머무르고 말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 입은 자의 놀이가 상처 없는 자의 놀이를 흉내 내다 끝나는 것만큼 참담한 비극은 다시없습니다.

 

[접힌 진실을 펴는 옹골참]

 

놀이는 상처의 증상을 예술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술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협소하고 진부하게 느끼고 알아차린 증상을 정확하고, 깨끗하고, 야무지게 펼치고 새로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술적일수록 옹골차고 옹골찰수록 예술적입니다. 미학적일수록 진단의학적이고 진단의학적일수록 미학적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고통에 직면해야 합니다. 더 아픈 곳을 더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눈에는 연극처럼 과장처럼 보입니다. 억압되어 있는 진실을 해방하려면 앙칼지고도 질탕한 연기가 불가피합니다. 우울이든 분열이든, 꺽꺽이든 깔깔이든, 너울너울 넘나드는.

 

[상처를 삶의 소중한 일부로 받아 안는 드넓음]

 

포개고 쪼개고 울고 웃으며 노는 동안 상처 받은 사람은 알게 됩니다. 그 상처가 내 인생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있어서는 안 될 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있어도 되고 있을만하다는 진실을. 전혀 상처 없는 인생으로 축복 받은 바도 없고, 온통 상처뿐인 인생으로 저주 받은 바도 없다는 진실을. 상처 받는 것이 인생의 본령이라는 진실을. 내 인생에 실린 상처는 종당 내가 부둥켜안을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그렇게 부둥켜안으면 아파서 더 애틋한 내 인생의 일부가 된다는 진실을. 애틋한 상처의 영지를 더하면 내 인생은 더욱 드넓은 우주가 된다는 진실을.

 

  

  

본디 놀이가 거룩함의 본진입니다. 이른바 고등종교 제의 따위로 떠올려지는 엄숙주의 거룩함은 상처로 운명 지워진 인간이 그것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인 뒤 쌓아올린 짐짓퍼포먼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짐짓퍼포먼스가 만들어내는 거짓 거룩함의 정체를 밝히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짐짓퍼포먼스보다 더 큰 진실의 전체에 주의해서 다시 짐짓퍼포먼스를 보면 그것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습니다. 우스꽝스럽지요. 그 다음, ‘짐짓퍼포먼스의 단위 하나하나를 해체해보면 그것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습니다. 장난이지요. 놀이에 이런 검증방식을 적용하면 어찌 될까요? 이민하의 시를 읽으면 답을 저절로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함에 사이비가 엄존하듯 놀이에도 사이비가 있습니다. 놀이는 무심코시작해서 유심히진행되다가 무심히종결되어야 참된 놀이입니다. 처음부터 유심히하면 놀이가 아니고, ‘무심코로 시종일관하면 병리증상이고, ‘무심히가 생략되면 노동이 됩니다. 마음의학 어법으로 말하면 놀이는 치료를 향하되 치료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 무엇입니다. 치료의 욕망을 드러내는 순간 거룩함은 사라집니다.

 

여기까지 오면 향 맑은 영혼을 지니신 분은 미소 지으실 것입니다. 그래, 삶이 놀이로구나. 여기까지 오면 향 맑은 영혼을 지니신 분은 가슴 아프실 것입니다. 이 이치를 저버리고 엄숙무인지경의 세상을 만든 자들이 권력과 자본과 종교를 만들어내고 거기에 충성하는 노동 일극집중구조를 강요하는 거로구나. 오늘도, 내일도, 향 맑은 영혼은 거룩한 놀이로 광화문에 좌정합니다. 거기서 고통은 소통되고 상처는 상동相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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