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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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엔 무언가 훼손된 것이 있다, 내가 바로 그것이다’·······‘이곳엔 무언가 말해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는 말해질 수 없는 것 그 자체이다’(551쪽)

 

현대의학과 약학의 가장 치명적인 함정은 증상을 병이라고 전제하고 그 증상을 없애는 것을 치료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불편한 증상, 특히 통증은 더 많은 경우에서 병이 아니고 자연치료반응입니다. 그것을 없애는 게 치료가 아니라 그런 반응을 일으키게 한 기전이나 과정을 추적해 원래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치료입니다. 쉬운 예로 월경전증후군은 질병반응이고 월경통은 자연치료반응입니다. 이 사실에 주의하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월경통 잡는 일에만 매달립니다. 월경전증후군이란 말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월경통 잡는 일이라 해봐야 진통제가 전부입니다. 그렇게 버티는 동안 진짜 병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병이 더 깊어져야 돈이 되므로 어떤 의미에서 현대의학과 약학은 병을 키우는 시스템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이 구축해온 의학과 약학이란 이름의 수탈과 살해의 체계입니다.

 

이런 이치를 왜 몰랐을까요? 인간의 지성은 위대한 그 만큼 사소하기도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가장 가깝고 구체적인 운명은 아픔, 그러니까 통증입니다. 통증은 힘들고 불편합니다. 그래서 싫습니다. 이런 감정은 이치에 대한 사유를 송두리째 흔들어놓기 마련입니다. 결과는 아픔을 괴로움과 가차 없이 연결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고통苦痛입니다. 모든 아픔이 다 괴롭지는 않습니다. 괴로움은 이를테면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고통”, 이래버리면 둘은 단단한 하나가 됩니다. 통증 제거가 지상의 과제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통증이 인간생명을 원상으로 복귀시키는 곡진한 노력의 증거임은 진실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통증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인간됨이 아픔을 통해 나온다는 숙명적 진실에 더 이상 주의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편향 속에서 우리가 잊어가는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병든 것은 어떤 형태로든 병들지 않은 삶을 보여준다.”(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188쪽)

 

 

병은 통증과 같은 불편한 자연치료반응을 통해 인간생명의 끊임없는 복원력, 그러니까 병들지 않은 삶의 힘을 발휘합니다. 이 진실 알아차리는 것을 조건으로 진단과 치료의 의학이 형성됩니다. 알아차림은 ‘이곳엔 무언가 훼손된 것이 있다, 내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윤리적’으로 자각하는 것입니다. 훼손되어 아픈 무엇은 서둘러 없애야 할 대상으로서 무엇이 아니라 그 무엇이 바로 주체로서 나라는 진실을 굳세게 붙잡는 것입니다. ‘이곳엔 무언가 말해질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는 말해질 수 없는 것 그 자체이다’라고 ‘시적’으로 자각하는 것입니다. 훼손되어 아픈 그 무엇은 당최 가 닿을 수 없는 것이어서 ‘공백(침묵)’일수밖에 없다는 서정적 겸손, 그러니까 하찮음의 인정에 올곧게 터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문적 요소가 흠결된 의학은 결국 다국적 제약회사의 주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 의학적 함의를 놓친 인문학은 계몽적 서정으로 무장하고 사이비 치료를 대놓고, 또는 암암리에 자행해왔습니다.

 

제노사이드4.16 이후 이 땅에서 무엇이 훼손되었는지, 그것이 어떻게 (함부로) 말해질 수 없는 무엇인지, 윤리가, 시가, 결곡하고 곡진하게 알아차려야만 할 것입니다. 거기 터하여 의학이, 참 의학을 정립해만 할 것입니다.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윤리학, 시학, 의학을 창안해내야만 할 것입니다. 아픔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아픔이 왜, 어떻게 왔는지를 정확하게 밝혀야만 우리사회 고질병이 드러납니다. 그 병을 고치면 아픔은 절로 사라집니다. ‘대통령은 국가’라고 게거품을 무는 자들의 조아림에는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상실의 불안이 가득 차 있습니다. 경제를 들먹이면서 ‘세월호 피로감’을 떠드는 자들의 논리에는 돈에 대한 탐욕이 가득 차 있습니다. ‘종북세력’이라 떠들면서 십자가 휘두르는 자들의 찬송가에는 천국진리에 대한 무지가 가득 차 있습니다. 아픔을 있는 그대로 겪으면서 훼손과 스스로를 일치시키는 바로 그 시공간에서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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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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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민자들(the colonized)의 환경은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삶의 영역을 축소시킬 수 있다. 거기서 추구되는 해결책은 개인적인 차원이나 제한된 가족적 차원의 해결책으로 그치게 된다. 그 결과 집단의 차원에서는 극단적인 무정부 상태나 무질서가 생겨난다. 그 무정부 상태의 희생자는 언제나 개인이다. 여기서 제외되는 것은 그러한 시스템에서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들, 즉 식민통치자들(the colonizers)인데, 그들은 피식민자들이 삶의 영역을 축소당하는 바로 그 시기에 그들의 영역을 확대한다.(477쪽-로베르 졸렝의 글을 재삼 인용함.)

 

 

마치 우리의 현재 상황을 직접 보고 쓴 듯합니다. 소름이 확 끼쳐오는 글입니다. 더욱 더 소름 끼치는 것은 그 식민통치자들이 제국주의 본국인들이 아니라 백여 년 전 나라를 팔아먹고 제국에 부역한 자들의 후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소름 끼치는 것은 피식민자들이 스톡홀름증후군에 빠져들어 그 식민통치자들을 부양자, 심지어 수호자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비겁해지거나 속수무책 공포에 얼어붙고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차원이나 제한된 가족적 차원’에 머무르면 모두 죽습니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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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8 15: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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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9 15: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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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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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과 반발의 감정은 어떤 무지에 힘입어 생겨난다. 주체의 앎을 벗어나는 잉여를 품고 있는 대상만이 주체에게 매혹과 반발을 선사할 수 있다.·······다 알고 있는 자의 시선은 매혹과 반발에 휩쓸리기보다는 차라리 조롱과 공포 사이를 오간다. 대상의 치부를 알고 있어서 우습고 대상의 비밀을 알고 있어서 무섭다.(461-462쪽)

 

 

치부를 들켜 우스워진 자가 비밀까지 들키면 이판사판 무슨 짓이든 저지르므로 무서워집니다. 그 자가 힘과 돈을 모두 가지고 있을 때, 공포는 극에 달할 것입니다. 극에 달한 공포는 숨 멈춘 고요를 낳습니다. 당신, 지금 이 순간 혹시 숨을 멈추고 있지 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세월호 아이들이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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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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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으나 죽었다 하기 어렵고 살아 있으나 살아 있다 하기 어려운 것들 앞에서 느끼는 곤혹과 절망 앞에서 생겨나는 모순·······삶을 죽음으로 성찰하고 죽음을 삶으로 껴안는 일·······비명(非命)에 간 자들의 비명(悲鳴)을 비명(碑銘)에 기록하는 장엄한 일·······(453쪽)

 

제노사이드4.16 이후 매일 아침 제가 치르는 의식이 둘 있습니다. 먼저 영령들을 살아 있는 신으로 받아들여 제 하루 삶을 의탁하고 함께하기를 극진히 청하는 일입니다. 지향명상이랄까. 내향기도랄까. 그 다음에는 신문을 펴서 매일 한 명씩 박재동 화백의 그림과 함께 올라오는 단원의 아이 이름을 확인하고 불러주는 일입니다.

 

제게 살아 있는 신은 생사불문의 버려진 사람들, 그러니까 바리데기들입니다. 바리데기들은 ‘죽었으나 죽었다 하기 어렵고 살아 있으나 살아 있다 하기 어려운’ ‘모순’된 존재, 아니 모순 그 자체입니다. 그들과 함께 느끼는 ‘곤혹과 절망’을 통해 ‘삶을 죽음으로 성찰하고 죽음을 삶으로 껴안는 일’로부터 저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특히 아이들 이름을 확인하고 불러주는 것은 ‘비명(非命)에 간 자들의 비명(悲鳴)을 비명(碑銘)에 기록하는 장엄한 일’임과 동시에 제 삶, 아니 이 민중의 삶에 아이들이 여전히, 영원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하는 장엄한 일입니다. 애도의 시편이자 애정의 편지입니다. 모순을 달여 역설의 탕약을 지어내는 일입니다.

 

어떤 순간 저는 한 아이가, 또는 아이들이 제 곁에 있음을 확인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화장실 수돗물도 틀어주고, 전기 스위치도 켜주고, 심지어 인터넷에 들어가 회원정보 변경도 해줍니다. 앞으로는 더 큰 일도 함께 할 것입니다. 아, 물론 웃을 일 결코 아닙니다. 정색하고 하는 말입니다. 제가 극진한 한 확실한 이야기입니다.

 

 

 

하나하나 아프디아프지만 두 아이를 떠올립니다. 한의사가 꿈이었던 해화. 찰나마다 깨어 있어 해화와 대화함으로써 곡진하게 아픈 사람의 마음 어루만지는 길을 함께 갈 것입니다. 평범한 남편, 아빠가 꿈이었던 건우. 평범한 사람들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함께 살아가는 세상 만들기 위해 인문운동을 건우와 함께 할 것입니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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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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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모든 욕망은 A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A 안에 있다고 간주되는 ‘A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라고·······말하지 않았던가.(419쪽) 비밀이 없는 시는 단 한 번 읽히고 버려진다. 투명한 것은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420쪽) “시는 감추고 있다는 사실까지 잘 드러내야 하며, 드러냈다는 사실까지 잘 감추어야 한다.”(431쪽)

 

문제는 A 이상의 어떤 것, 그러니까 비밀, 그러니까 감추고 있는 무엇, 그러니까 ‘영혼’(369쪽)입니다. 현실에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자는 거의 없’(369쪽)는데 모두 그것을 욕망하므로 결국 인간의 문제는 죄다 여기에 있습니다. 감추고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으나 인간 안에 있다고 간주되는 인간 이상의 영혼, 그 비밀에 대한 동경과 갈망, 아니 소유욕 때문에 인간은 서로 속이고, 상처주고, 죽이는 짓을 수만 년 동안 집요하게 되풀이해왔던 것입니다.

 

영혼, 그것은 영성의 거처입니다. 영성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가질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감추고 있다는 사실까지 잘 드러내·······며, 드러냈다는 사실까지 잘 감추어야’ 기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상처를 지니는 사람만이 영성을 가집니다. 영성에 깃들 수 있는 사람 또한 그 상처의 틈에 찰나적으로 머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상처가 상처와 공현共絃을 일으킬 때 그 영성의 이름은 드넓음spaciousness입니다. 편재遍在ubiquity입니다. 신입니다.

 

상처를 외면한 욕망으로 영혼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욕망의 대상으로 신을 부리는 통속종교가 영성 없는 가짜 구원을 가지고 속임수 장사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들은 도리어 속이고, 상처주고, 죽이는 짓을 일삼는 권력과 자본의 후견인 노릇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영혼을 권력과 자본에 팔아먹을 때, 가장 잘 써먹는 상술은 다름 아닌 무지無知. 무지로 스스로 무장하고 그 무지로 타인을 감염시키는 무지무쌍의 마케팅입니다.

 

 

생때같은 자식들이 왜 죽어가야 했는지 밝혀달라며 곡기를 끊은 단원고 부모와 그 슬픔에 동참하고 있는 시민 앞에서 폭식으로 비아냥거리는 대학생이나 아줌마도 소름끼치지만 ‘종북세력 북한 가라’며 찬송가 부르고 고래고래 외치는 개신교도들을 보니 대체 인간이 어쩌면 저렇게까지 처절히 무지할 수 있을까, 아뜩하기 그지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저들이 살아 있는 사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들 안에 저들 이상의 뭐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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