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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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어느 초등학교 5학년 학급으로부터 내 책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학생들의 질문에 답변해달라는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반장인 듯한 똘망똘망해 보이는 한 소년이 내게 예의 그 익숙한 질문을 했다. “왜 도망치지 않으셨어요?” 나는·······설명했다. 별로 납득이 되지 않은 소년은 내게 감시탑과 출입문들, 철조망과 발전소의 위치를 넣어서 수용소의 약도를 칠판에 그려달라고 했다.·······나는 최선을 다해 그려보였다. 소년은 몇 초간 약도를 찬찬히 살펴보고는 좀 더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요구하더니 나에게 자신이 생각해낸 계획을 말했다. 여기서 밤중에 보초의 목을 친 다음, 그의 옷을 입고, 곧바로 발전소로 달려가서 전기를 차단한다. 그러면 탐조등이 꺼질 것이고 고압전류의 철조망에도 전기가 흐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걱정 없이 나가면 된다, 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진지하게 덧붙였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세요. 꼭 성공하실 거예요.”

 

  ·······‘그곳’에서의 실제 상황(에 대하여-인용자 변경) 책이나 영화, 신화들이 키워낸·······상상력은 치명적 단순화와 고정관념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이는·······타인의 경험을 인지하는 데 있어 우리가 가진 어려움이나 무능력의 일부를 보여준다. 타인의 경험이 시간적·공간적으로, 또 질적으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러한 어려움이나 무능력은 더 심해진다.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주변’의 경험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아우슈비츠에서의 굶주림이 한 끼를 건너뛴 사람의 배고픔인 것처럼·······.(191-192쪽)

 

서구의학은 정신을 뇌로 환원하기 때문에 뇌를 조절하는 약물 중심으로 마음병을 치료합니다. 저는 정신이 뇌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 그러니까 대화/상담 중심으로 마음병을 치유합니다. 정신은 말을 매개로 접히고 펴집니다. 말은 본질적으로 은유(와 환유)입니다. 은유인 말을 매개로 접히고 펴지는 정신 역시 은유의 세계입니다. 은유의 세계인 정신에서 은유의 수사修辭만큼 좋은 소통/치유 방편은 없습니다. 은유의 수사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삶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 (이야기)를 들려주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은유의 본디 목적에 맞게, 다른 에피소드 속에서 같은 메시지를 찾아냅니다. 치유가 잘 일어납니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은 같은 메시지에는 귀를 막고 다른 에피소드에서 자신보다 덜 힘들다는 근거를 찾아냅니다. 치유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차이는 마음병의 형태와 연결되지만 좀 더 깊이 따지고 들어가 보면 병 이전에 인간 자체의 한계성에 닿아 있는 문제임을 알게 됩니다. 필경 후자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는·······타인의 경험을 인지하는 데 있어 우리가 가진 어려움이나 무능력의 일부를 보여준다. 타인의 경험이 시간적·공간적으로, 또 질적으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러한 어려움이나 무능력은 더 심해진다.

 

프리모 레비가 정확히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이 어려움이나 무능력은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불가피하게 자기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경험은 본질상 같아도, 심지어 더 본질적이어도 자기 감각 너머의 무엇입니다. ‘내 손톱 밑 가시가 남 가슴 속 대못보다 더 아프다.’는 우리 속담이 바로 이런 맥락입니다. 프리모 레비가 다시 명쾌한 고찰을 내놓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주변’의 경험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중심은 ‘커’ 보이고 주변은 ‘작아’ 보이기 마련입니다. 내 문제는 ‘어려워’ 보이고 남의 문제는 ‘쉬워’ 보이기 마련입니다. 내 판단은 ‘뛰어나’ 보이고 남의 판단은 ‘모자라’ 보이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치우친 생각, 그러니까 고정관념은 언제나 진지하고 의젓하게 충고합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세요. 꼭 성공하실 거예요.

 

프리모 레비에게 아우슈비츠 탈출비법을 가르쳐준 그는 무려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였습니다! 마치 이 어린이처럼 인간은 타인의 경험을 주변화합니다. 진심을 다했다고 해서 안이함과 어설픔을 넘어 순진한 고의로 가한 공격이 백지화될 수는 없습니다.

 

세월호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 우리사회는 끊임없이 이런 짓을 자행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자는 자신이 부보들보다 더 가슴 아프다는 할리우드 “상상력”을 공식석상에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엊그제 나온 ‘4·16세월호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 합의안’은 전지적 시점을 취함으로써 다시 한 번 아이들의 죽음을 모독하고 부모들의 고통을 희화하였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죽어간 아이들과 그 부모들에게 지켜야 할 도리는 우리의 인지 무능력을 철저히 자각하는 데 바탕을 두고서만 성립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진실은 묻어둔 채 보상과 지원, 그리고 추모로 떠들썩하다가 잊고 말 것입니다. 그 잊음으로 우리는 영원히 인간을 회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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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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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지론자가 아닌 사람들, 어떤 믿음이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의 유혹에 더 잘 저항했다.·······

  아메리처럼 나도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라거에 들어왔다.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해방을 맞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오히려 라거의 경험이, 그 무시무시한 부당함이 내 불신을 한층 더 굳혔다.·······그럼에도 나는 굴복하고 싶은 유혹, 기도에서 피난처를 찾고 싶은 유혹을 느낌 적이 있었음을·······시인해야겠다. 그 일은 1944년 10월, 임박한 죽음을 선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던 유일한 순간에 일어났다.·······한 순간 나는 도움과 피난처를 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는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평정을 되찾았다. 경기의 끝에 가서 경기의 규칙을 바꾸지는 않는 법이다. 그것이 비록 지고 있는 경기일지라도.·······나는 그 유혹을 지웠다.·······

  가스실 선발이나 공중 폭격 같은 결정적 순간들에서뿐만 아니라, 고된 일상 속에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살았다. 아메리와 나, 우리 둘 다 그것을 알아차렸다. 종교적 믿음이든 정치적 믿음이든·······그들의 우주는 우리의 우주보다 더 방대하고, 시간과 공간 속에 더 확장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그들 마음속의 고통이나 그들 주위의 고통은 해석 가능한 것이었고, 따라서 절망으로 넘어가지 않았다.·······그들 중 일부는·······우리를 전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떻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시의적절한’ 믿음을 단지 시의적절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거나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176-178쪽)

 

제법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강남의 그 뜨르르한 대형교회 권사 한 분이 잠이 도통 오지 않는다며 한의원에 오셨습니다. 자세한 진단 결과 그 불면 현상은 우울증에서 비롯한 것이었습니다. 그 의학적 진실을 말씀드리자 그 분은 버럭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한테 우울증이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저는 예의를 갖추어 그러나 단호히 말씀드렸습니다.

 

“신앙의 논리로 의학적 진단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분은 발을 탕탕 구르시면서 한의원을 떠나셨습니다. 아마 기독교 신앙을 지닌 분들 가운데 이 권사님 의견에 동의하실 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순서가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우울증 치료를 위해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질문을 드물지 않게 받습니다.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하면 어떻게 독이 될 수 있느냐고 항의합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기독교인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기독교인 우울증 환우와 상담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도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콕 찔러 한 부류를 지적한다면 목회자 부인들입니다. 이들이 신앙이 잘못되어 우울증에 걸린 것입니까. 이들이 신앙이 모자라 우울증을 신앙의 힘으로 고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정말로 이들이 잘못된 신앙으로 우울증에 걸리고 신앙이 모자라 우울증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잘못되고 모자란 신앙이란 대체 어떤 신앙일까요. 그 신앙이 지금 대부분의 기독교인의 바로 그 신앙 아닌가요.

 

이 지점에서 우리는 프리모 레비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스실 선발이나 공중 폭격 같은 결정적 순간들에서뿐만 아니라, 고된 일상 속에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살았다.

 

생사가 엇갈리는 찰나적 삶에서도 고통이 그득한 매일의 삶에서도 신앙인은 더 잘 살아냈다고 적고 있습니다. 자신은 결곡한 불가지론적 지식인으로서 죽음을 느끼는 순간에도 신앙의 ‘유혹’을 거절한 사람이지만 신앙인의 이러한 특별함, 좀 더 정확히는 탁월함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그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우주는 우리의 우주보다 더 방대하고, 시간과 공간 속에 더 확장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신앙인은 자신의 존재와 삶을 광활함the Spaciouness의 세계를 향해 열어놓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없을 때 인간 존재와 삶은 걷잡을 수 없이 파괴되고 마는 것이기에 넓은 관점의 확보야말로 관건적 사항이라 할 것입니다.

 

광활함의 세계를 향해 열린 존재와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단순히 유한한 인간보다 큰 존재인 신을 믿고 구원과 행복을 의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정도라면 우울증에 걸리고도 아니라고 잡아떼는 수준일 터인데 어찌 그 수준으로 아우슈비츠 안에서 탁월함으로 빛날 수 있겠습니까.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신을 섬기면서 이를 광활함의 세계로 열린 존재와 삶이라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신성모독입니다. 인간의 사적 영역으로 신을 유폐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이 광활함의 세계를 향해 열린 존재로서 산다면 그는 분명히 공적 영역,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사회정치적 영역에서 신의 뜻을 펼치면서 살 것입니다. 기독교 어법으로 말한다면 하느님나라 구현에 헌신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상태입니다. 정의가 땅에 떨어진 현실은 오히려 두호하면서 교회 건물이나 호화롭게 짓고, 세습이나 하고, 막무가내 선교나 하고, 타종교 모독이나 하면서 이를 어찌 광활함의 세계를 향해 열린 존재와 삶이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불가지론자가 아닌 사람들, 어떤 믿음이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권력의 유혹에 더 잘 저항했다.”라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우리사회는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영역이 퇴행일로를 치닫고 있습니다. 어둠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아니, 밝은 쪽도 있어요, 라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이 자기 밝음에 눈멀어 어둠 속에서 죽어가는 이웃을 내팽개치는, 그러니까 신을 자기 안으로 유폐시키는 사이비 신앙인입니다. 퇴행과 어둠의 시대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불가지론 지식인 프리모 레비의 질문 아닌 질문을 떠올립니다.

 

그들 중 일부는·······우리를 전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떻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시의적절한’ 믿음을 단지 시의적절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거나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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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상식은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을 진실로서 받아들이는 데 저항했지만, 그 상식의 벽을 허무는 일이 철학자에게도 일어날 수 있었다. 결국 철학자는 괴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괴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데카르트의 논리 옆에 SS의 논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지식인은·······그 속성상 권력의 공범이 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권력을 승인하는 경향이 있·······다. 지식인은·······어떤 국가든 국가를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다.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존재를 정당화한·······다.(174-175쪽)

 

마음병 치유의 요체는 현실 인정입니다. 일어난 것을 일어난 것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인정은 옳다고 여기는 사적 긍정이 아닙니다. 정당하다고 판단하는 공적 승인은 더군다나 아닙니다. 옳든 그르든 정당하든 부당하든 내 삶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감성으로 이성으로 의지로 “그렇다” 하는 것입니다.

 

현실reality 인정은 문제를 정확히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문제를 정확히 들여다보지 않은 풀이로는 치유의 실재the Real를 일구어낼 수 없습니다. 치유의 실재는 사물(구조)이나 사건(운동)이 지니는 전체성에 터하여 구현되기 때문에 긍정하기 싫은, 승인하기 싫은 어두움을 ‘두 눈 똑바로 뜨고’ 꿰뚫어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정을 거부하거나 허투루 하였을 때 사이비 치유가 준동합니다. 목하 치유 마케팅을 주름잡고 있는 「시크릿」류의 긍정주의 ‘힐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인기 연예인, 그에 버금가는 종교인들이 대중매체에 나와 호들갑스럽게 뿌려대는 ‘힐링’ 이야기들은 대부분 부풀린 신변잡담 아니면 금방 들통 나고 말 거짓말 수준의 것들입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마음병 치유 문제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치 치하의 수많은 지식인이 현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의한 권력을 ‘승인’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지식인의 이런 곡학아세曲學阿世 사례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지식인은 그 속성상 권력의 공범이 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권력을 승인하는 경향이 있다. 지식인은 어떤 국가든 국가를 신격화하는 경향이 있다.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존재를 정당화한다.

 

오늘 아침 유명한 승려 한 사람이 ‘자기 삶의 내용이 풍요롭지 못하면 정치 이야기나 하고 남 일에 거품 문다’는 내용의 트윗을 올려 물의를 일으켰습니다. 풍요로워지는 방법 제시도 가관이거니와 ‘정치’와 ‘남 일’에 대한 천박한 인식은 ‘기도 안 찰’ 정도입니다. 대학교수이기조차 한 이런 백치 부역자가 오히려 사람들을 더욱 현혹시킵니다.

 

승려 교수에게 정치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길게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중생제도를 생애의 의무이자 보람으로 삼은 승려가 잘못된 정치로 말미암아 중생이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 이야기를 연예인 이야기와 동급으로 치부하는 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닙니다. 능동적 ‘승인’입니다. 우리사회는 그를 국민멘토라고 부릅니다. 오호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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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예술과 시는 그것들이 추방단한 곳을 해석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공포로 누벼지고 권태로 이루어진 ‘그곳’의 일상생활에서는 집과 가족을 잊는 법을 배우는 것이 건강에 좋으며, 마찬가지로 이성과 예술과 시를 잊어버리는 것이 건강에 좋다.·······

  이러한 일에는 교양 없는 사람들이 교양 있는 사람들보다 더 소질이 있었다. 그들은 “이해하려 하지 마라”라는 라거에서 배워야 할 첫 번째 현명한 격언에 먼저 적응했다. 거기 그 현장에서 이해하려 하는 행위는·······쓸데없는 노력이었다.·······논리와 도덕은 비논리적이고 부도덕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저항했다. 일반적으로 교양 있는 인간을 급속도로 절망으로 이끈 현실 거부는 바로 여기서 비롯했다. 그러나 각양각색의 짐승-인간들은 수없이 많았다. 세련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특히 젊은 사람들이면 더더욱 그 문화를 던져버리고, 단순화되고 야만적으로 되고, 그래서 살아남는 것을 나는 보았고 또 묘사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에 익숙한 단순한 인간은 이유를 묻는 쓸데없는 고문으로부터 안전한 곳에 있었다.(172-173쪽)

 

인간은 태초에 인간으로서 존재being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오직 질문으로서 생성becoming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려면 오직 질문하는 인간homo interrogatorius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뉩니다. 질문하는 인간과 질문하지 않는 인간. 질문하는 인간만이 참 인간입니다. 이 참 인간이 지식인입니다. 질문하지 않는 인간은 사이비 인간입니다. 사이비 인간은 다시 두 종류로 나뉩니다. 악마-인간과 짐승-인간.

 

프리모 레비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짐승-인간은 “그 문화를 던져버리고, 단순화되고 야만적으로 되고, 그래서 살아남는” 인간입니다. 여기서 문화란 “이성과 예술과 시”이며 “논리와 도덕”입니다. 바로 질문의 근거이자 소산입니다. 하여 짐승-인간은 재차 이렇게 정의됩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에 익숙한 단순한 인간

 

구약 성서에 나오는 에서가 팥죽 한 그릇을 위해 장자의 권리를 넘기듯 이들은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을 대가로 질문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이들이 의문문 대신 신봉하게 된 것은 다음의 금지명령문입니다.

 

“이해하려 하지 마라.”

 

이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자들이 바로 악마-인간입니다. 악마-인간에게는 폭력 프로그램만이 입력되어 있을 뿐이므로 질문이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폭력을 통해 절대소수의 악마와 절대다수의 짐승으로 양극화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지상과제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사회가 이 아우슈비츠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말만을 투명한 진리라고 선포하는 무리가 “파부침주破釜沈舟의 자세로 임하지 않으면 적에게 질 것”이라며 더욱 강고하게 모든 질문을 봉쇄할 것임을 재천명하고 나섰습니다. 생명 살릴 골든타임은 말아먹고 경제 살릴 골든타임을 말하는 악마의 입으로 99%에게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에 순응한 자들은 즐겁게 “행복”과 “힐링”을 지절거리며 짐승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수용소 안의 행복과 힐링이 마약임을 모르는 한 인간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옆 사람과 공유하는 자만이 인간입니다. 악마-인간과 짐승-인간 사이, 지식-인간, 그 이름이 바로 지식인입니다. 지금-여기서 인간은 오직 지식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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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슈비츠에서 문화가 갖는·······유리한 점들은 정말 없었던가?·······

  내게도 문화는 유용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고, 가끔은 아마도 예기치 못한 숨은 방식으로였지만 내게는 도움이 되었고 어쩌면 나를 살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실용적인 개념들의 축적과 함께, 화학과 인접학문들로부터 유래하지만 더욱 폭넓게 응용할 수 있는 정신적 습관들의 막연한 자산을 학업으로부터 얻었다. 그리고 그것을 라거에 가지고 들어갔다.·······

  ·······나는 무엇보다도 내 직업으로부터 한 가지 습관을 얻었다. 곧 우연히 내 앞에 놓인 대상에 절대로 무관심하게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대상은 인간이지만 ‘표본’이기도 하다. 확인하고 분석하고 무게를 측정해야 할·······내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양식이었다. 몇몇 사람들은·······나의 호기심을 거리를 두는 자세라고 평했다. 그렇지만 그 양식은 나의 일부분을 살아있게끔 유지하는데 확실히 도움을 주었고, 또 나중에는 내가 사고하고 책들을 집필할 수 있도록 소재를 제공해주었다.·······‘자연주의적’인 이러한 태도·······는 화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내게 라거는 일종의 대학이었으며 우리에게 주변을 돌아보고 인간을 가늠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부디 냉소적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166-171쪽)

 

마음 치료를 할 때 필요에 따라 종종 나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로 특정 인물에게 받은 상처가 끈질긴 원망과 분노로 남아 있는데 그 상대방은 인식 없이 요지부동일 때입니다.

 

“무심코 운전하고 길을 가던 중 뒤에서 쾅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납니다. 돌아보니 어떤 다른 차입니다. 그럼 대뜸 그 운전자에게 화를 냅니다. 그렇지요?”

“예!”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돌입니다. 그럼 그 돌에게 화를 내나요?”

“.......”

 

돌한테 감정이 끼어들 여지란 없습니다. 상처를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습니다.

 

아우슈비츠의 SS든 카포든 동료 포로든 감정을 교류할 만한 상태의 ‘사람’이 아님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아차린 프리모 레비의 감각 이성은 화학이란 학문이 가져다준 자연주의적 훈습을 통해 마련된 것입니다. 사람이지만 표본일 때, 그것은 “확인하고 분석하고 무게를 측정해야 할”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므로 감정과 상처를 주고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감정과 상처를 주고받느냐 하는 문제는 아우슈비츠 상황에서라면 가히 결정적, 아니 치명적인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어쩌면 나를 살렸는지도 모른다.”는 표현을 두고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설혹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손 치더라도 한 사람의 삶에서 운명적으로 생겨나 시시각각 그의 생사와 결합해 들어가는 “습관”의 무게는 어떤 진리와 깨달음보다도 육중합니다.

 

스스로를 아우슈비츠에서 살려낸 이 자연주의 지식인의 삶이 오늘 대한민국에서 우리를 살려내고 싶은 지식인이고자 하는 사람에게 매우 중대한 전언傳言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연히 내 앞에 놓인 대상에 절대로 무관심하게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대상은 인간이지만 ‘표본’이기도 하다. 확인하고 분석하고 무게를 측정해야 할·······내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양식이었다.

 

우리 앞에 놓인 대상, 그러니까 국가조직을 이용해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매판독재반통일 세력에 절대로 무관심하게 있지 않는 기본자세. 인간이지만 ‘표본’이기도 한 저들을 확인하고 분석하고 무게를 측정하는 자연주의 호기심. 이 과정에서 발휘되는 도저한 주의 깊음, 냉정함, 결곡함, 곡진함. 바로 이것이 생사를 가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저들을 향해 분노와 원망을 짓는 일이 아닙니다. 감정 투입은 저들을 ‘표본’ 이상의 존재로 전제했을 때 하는 행동입니다. 인간으로서 지닌 생명감각과 윤리의식에 기대어 하는 행위입니다. 이미 저들은 시스템 뒤에 숨었습니다. 더 강한 자들은 시스템 위에서 초월적 권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감정도 상처도 닿지 않는 세계를 향해 소리치고 울부짖은 결과가 스스로의 소진, 개죽음의 공포 이 둘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모르지 않습니다.

 

자연주의 지식인, 끽긴한 필요로 우리 앞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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