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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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 집단적·근본적으로 중요하고 예기치 못한 사건의 증인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 사건은 모든 예상을 뒤엎고 일어났다. 이것은·······그러나·······복종을 이끌어냈고, 파국이 닥칠 때까지 칭송되었다. 사건은 일어났고 따라서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이다.

  ·······불관용과 권력에 대한 욕망, 경제적 이유,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광신, 인종적 마찰 등이 발생시키는 폭력이 난무하는 조류 속에서 미래에 면역성이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는 나라는 소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벼리고 있어야 하며 예언자들과 마법사들, 또한 타당한 이유들의 밑받침이 없는 “아름다운 말들”을 말하고 쓰는 사람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247-248쪽)

 

 

오늘 우리에게 느닷없이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이것을 과연 누구 이야기로 들을 수밖에 없을까요?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경험을 넘어 집단적·근본적으로 중요하고 예기치 못한 사건의 증인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 사건은 모든 예상을 뒤엎고 일어났다.

 

구태여 대답할 필요조차 없이 자명합니다. 문제는 모르는 채, 아니 모르는 체 한 채, “불관용과 권력에 대한 욕망, 경제적 이유,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광신·······등이 발생시키는 폭력이 난무하는 조류 속에서” “타당한 이유들의 밑받침이 없는 “아름다운 말들”을 말하고 쓰는 사람들을 믿”는 자들이 알고도 속수무책인 사람들을 제압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저들은 거짓말과 폭력으로 공포에 떠는 이웃의 “복종을 이끌어냈고” 자신의 주인을 “칭송”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저들은 이 파렴치한 짓을 앞으로도 강고하게 계속할 것입니다.

 

파국이 닥칠 때까지”!

 

파국은 그러면 언제 닥칠까요? 우리가 “우리의 감각을 벼리고” 그 감각을 용기로 달여 내지 못하는 한 파국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은 언제라도 “모든 예상을 뒤엎고” “또다시” 사건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각의 날은 기억의 숫돌로 갈아서 벼립니다. 기억을 찰나마다 갱신해야 합니다. 찰나마다 새로워지는 기억이 벼려 내는 감각에서 무서움과 두려움을 끌어안고 칠흑의 바다, 저 진실의 심연으로 한 걸음 내디디는 용기가 우러날 것입니다. 침묵 아니면 막말로 일관하는 '야차'에게 닥치는 파국은 깨어서 행동하는 '사람'이 열어젖히는 새벽과 동의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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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편지를 보내온 40명의 독일인들에게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이 페이지들을 바친다. 이들은(내가 앞서 인용한 T. H. 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첫 번째(기분 좋은-인용자)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222-223쪽)

 

<L. I. 의 편지> ·······당신은 우리 독일인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스스로도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우리가 한 일을 우리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때 당신은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유죄입니다.·······(223쪽)

 

·······내 책이 독일에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내 책을 읽을 필요가 덜한 독일인들 사이에서였다·······. 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 없는 사람들이 내게 뉘우치는 편지들을 내게 보내왔던 것이다. 죄인들은 당연히 침묵했다.(237쪽)

 

마음병 치유 과정에서 가장 힘든 고비 가운데 하나는 아픈 사람이 먼저 상처 입힌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단계입니다. 아픈 사람이 상처 입힌 사람과 일상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경우 이 문제는 당연히 매우 결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용서라는 지고의 지점에 이르기 전에 무수히 시선, 언어, 행위를 주고받아야 하는 구체적인 상황을 어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치유하는 사람 처지에서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왜 그래야 하는지 아픈 사람이 공감·수긍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풀어내주는 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가해가 계속되고 있거나 가해자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피해자가 감정을 조절하고 일상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것 자체가 억울한 일일 뿐만 아니라 상처를 증폭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공감·수긍하고 실천하기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이 경우 제가 하는 말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손을 내미는 것이 치유 세계의 진실입니다.”

 

마음병 치유의 본질에는 반드시 앎, 그러니까 깨달음이 포함됩니다. 깨달음이 치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깨달음 없는 치유는 없습니다. 깨달음은 진실의 문제입니다. 진실은 결국 내 마음에 역설을 담아내는 일입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 없는 사람들이 내게 뉘우치는 편지들을 내게 보내왔던 것이다.

 

죄가 없는데, 그럼에도, 뉘우친다, 그러니까 사죄를 한다는 말입니다. 아니 도저하게 말한다면 죄가 없으므로 사죄한다는 것입니다. 이 역설이 세계의 진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 깨달은 사람이 손을 내민다는 것의 윤리적·정치적 버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죄가 없으므로 뉘우친다, 상처 입었으므로 손 내민다는 것은 인간이 사적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공적인 인격, 공적인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공공성의 지평으로 펼쳐져 간다는 것입니다. 광활함spaciousness, 그러니까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영성, 불교식으로 말하면 불성의 세계로 번져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졌습니다. 싯다르타는 왕위를 버렸습니다. 사적인 자아에 갇혀 어둠만 들여다보거나 어둠을 한사코 부인하면 병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적인 자아에 갇혀 제 손에 피 묻지 않은 것만 보면 자기 존재가 터하고 있는 공동체의 부도덕함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월호사건 일어나자 대통령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호통 치는 자들이 결국은 판을 따냈습니다. 대통령이 배를 뒤집었느냐, 아이들한테 가만히 있으라 했느냐, “따위”의 여부를 가지고 판단할 문제가 아님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저들은 파렴치하게 본질을 호도했습니다. 대통령은 이 나라 최고 헌법기관입니다. 주권자인 국민 수백 명이 한꺼번에 죽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러면 그 책임을, 그 죄를 누가 져야 한다는 말입니까. 대통령을 모독하는 것은 곧 국가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말할 줄은 알면서, 어찌 고작 유병언 “따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손을 씻는다는 말인가요. 히틀러가 저지른 죄에 대하여 평범한 시민이 이렇게 고백한 것을 저들은 어찌 들을까요.

 

우리는 유죄입니다.

 

저들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타인에게도 그 침묵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프리모 레비의 이 말은 저들이 어떻게 들을까요.

 

죄인들은 당연히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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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H. 박사의 편지> ·······물론 당신은 왜 히틀러가 권좌에 올랐나, 왜 그 후 우리는 그 멍에를 벗어버리지 못했나?, 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기대하시겠지요.·······히틀러가 우리에게 수상쩍어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적으로 가장 덜한 악으로 보였습니다. 그의 모든 아름다운 말들이 기만이고 배신이라는 것을 우리는 처음에 깨닫지 못했습니다.·······우리가 범죄자이자 배신자를 타고 가고 있다고·······그 누가 의심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쨌든 배신당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죄도 돌릴 수 없지요. 오로지 배신한 사람만이 유죄지요.

이제, 더 어려운 문제인 유대인들에 대한 무분별한 증오의 문제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이러한 증오는 결코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독일은 전 세계의 유대인들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나라로서 마땅히 간주되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리고 책에서 읽은 한에서는 히틀러 통치 기간 내내, 또 그 종말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에 대한 자발적 모욕이나 공격은 결코 단 한 건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216-217)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본문 반박 글> 히틀러·······엄청난 재앙을 가져온 이 남자는 배신자가 아니었다. 극도로 명확한 생각을 가진, 일관성 있는 광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그 생각들을 바꾸지도 않았고 결코 숨기지도 않았다. 그에게 찬성표를 던진 사람은 당연히 그의 생각들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었다.(219)

 

<프리모 레비의 답장 편지> 당신이 단언한 것 중 가장 대담한 것은 독일에서 반유대주의가 인기가 없었다는 대목입니다. 반유대주의는 애초부터 나치 신조의 근간이었습니다.·······히틀러의 그 어떤 글, 어떤 연설 속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강박적일 정도로 반복되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유대인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민족이 어떻게 유대인을 독일의 첫 번째 적으로 정의하고유대의 히드라를 목 졸라 죽이는 일을 정책의 첫 번째 목표로 삼은 당에 투표하고 그 사람을 칭송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발적 공격과 모욕에 대한 당신의 말 자체가 모욕적입니다. 수백만의 죽음 앞에서 자발적인 학대에 대한 문제였는지 아닌지를 논한다는 것이 제게는 한가롭고 혐오스러운 일로 보입니다.(220)

 

T. H. 박사, 당시 독일 지식인의 대표단수일 법한 이 사람의 편지는 부역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배신에 모든 죄악을 뒤집어씌우는 비겁한 억지. 수많은 사람을 죽여 놓고도 그들에게 가장 우호적이었으며 자발적 모욕이나 공격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는 의도적 무지. 이에 대한 프리모 레비의 통렬한 반박은 사실 불필요한 친절이었습니다. T. H. 박사가 정말 몰랐었다면 프리모 레비의 책을 읽고 이런 식의 편지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알면서도 이런 편지를 쓴 것이므로 답장을 받고 생각이 바뀌었을 리 없습니다. 프리모 레비의 진실은 프리모 레비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히틀러라는 이름 대신 대한민국 매판 과두나 마름 이름 써 넣고 유대인 대신 단원고등학교 아이 이름 써 넣으면 이 편지들은 그대로 우리사회 부역지식인 아무개와 유민 아빠 김영오씨 간의 편지가 됩니다. 처음부터 배신자 따위는 없었습니다. 매판 세력의 다양하고 현란한 야합이 있었습니다. 우연한, 그러니까 비자발적인 교통사고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자발적인 대량학살사건이었습니다. 죽이고도 그 뒤에 끊임없이 자발적으로 모욕하고 공격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자발적으로 모욕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배신당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죄도 돌릴 수 없다고 억지를 쓰며 자발적 모욕이나 공격은 결코 단 한 건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무지를 우깁니다. 프리모 레비의 진실이 다시 한 번 프리모 레비 자신에게 되돌아왔듯 김영오씨의 진실이 다시 한 번 김영오씨 자신에게 되돌아올지라도 끝까지 거짓을 통박하는 외침소리를 내야만 합니다. 자신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면서라도 기어이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역지식인한테만 귀가 달린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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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세 번째 형태의 질문에 이르렀다. 국경이 폐쇄되기 전에, 덫이 철컥 물기 전에, 사전에도망가지 않았나? 라는 질문이다.·······(196)

  일이 다 벌어진 뒤의 뒤늦은 깨달음과 고정관념들을 경계해야 한다.·······위협에 직면한 인간은 준비를 하고, 저항하거나 달아난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위협들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분명하게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자발적 불신과 정신적 억압, 위안을 주는 진실·······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확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날의 두려움은 당시의 두려움보다 덜 혹은 더 근거 있는 것인가?·······왜 우리는·······‘사전에도망가지 않는가?(201-203)

 

비선실세논란의 당사자인 한 인사가 지난번 의문의 7시간알리바이를 대는 과정에서 그 때 역술인과 함께 있었다고 진술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사실 어디 그 인사뿐이겠습니까. 이 나라 권력과 재력의 최정상에 서 있는 사람들이 역술인의 점괘에 의존해 중대한 일을 결정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입니다. 고작-, 이 표현은 역술인 자체를 향한 폄사貶辭가 아님을 밝혀둡니다-점괘 하나에 국가와 거대 기업의 운명이 좌우된다니 참 익숙하고도 기이한 일입니다. 어찌 보면 웃픈일이지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서늘한 진실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만 제대로 알려준다면 아니 할 말로 그것이 사주풀이든 공수든 괘념할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과연 그것들이 제대로 미래사를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꽤 오래 전 어느 유명한 역술인의 간청(!)으로 그와 마주앉은 일이 있습니다. 제 앞에서 분명히 접신spirit possession 상태로 들어갔지만 그는 도무지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신당으로 다시 들어가 20여분 동안 의식을 행하고 나온 뒤에도 공수는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접신 상태를 푼 다음 그가 정직하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앞에서는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알아 뵐 수 없다고 하십니다.”

 

아마 그 할아버지란 그 역술인의 수호신장’(몸주)일 것입니다. 그 몸주의 수준, 그러니까 영적 위계로는 감히제 영적 시공 속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동서고금의 버림받은 억조의 영혼을 모두 모시고 살아서 그럴 것이라 웃으며 말해주니 과연 두려운 분이 라며 낯빛을 바꾸었습니다. 보편적 진실에 부합하든 아니든 이 일로 말미암아 저는 미래에 대한 궁금증과 충족이 대개 어떤 차원에서 진행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사에서 무슨 일이든, 앞두고 있거나 겪고 있을 때는 그 일에 묶여 흘러가기 때문에 시간을 꿰뚫는 통찰이 불가능합니다. 다 겪고 나야 비로소 아, 그랬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옵니다. 이 깨달음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단단한 논리를 가지게 됩니다. 이 사후논리가 자기 자신에게는 후회를 끌어들입니다. 타인에게는 훈계의 근거로 작용합니다. 둘 다 건강하지 않습니다. 이런 결과가 초래되고 아무리 반복해도 잘 개선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단도직입으로 말하자면 시간의 흐름을 사후에 인과적·선형적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인과적·선형적으로 재구성하면 그 시간은 일종의 공간으로 변합니다. 공간으로 변한 시간은 통제와 복제가 가능해집니다. 여기에 권력이 개입합니다. 아니 본디 권력이 바로 이 음모를 꾸미고 공작을 진행합니다. 개인의 후회를 사회화하고 사적인 훈계를 국가화합니다. 후회하는 대중을 국가가 정치와 법의 이름으로 훈계함으로써 대중의 삶은 개선되지 않고 극소수 지배집단의 이익만 극대화되는 것입니다.

 

사후 논리에 입각한 질문-왜 사전에 준비하지 않았는가? 왜 사전에 도망가지 않았는가?-은 의문문의 형태를 띤 비난과 공격의 평서문입니다. 아니, 이렇게 된 것은 너희들의 잘못 때문이므로 앞으로도 쭉 이렇게 가라는 명령문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렇게 사후 논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무지가 필연적으로 빚어내는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궁금증이 탐욕·공포(불안)와 뒤엉켜 손쉬운 해법을 찾기 때문입니다. 알 수 없는 일 앞에서 점괘를 구하는 것은 급하다고 고리의 사채를 끌어다 쓰는 것과 같습니다. 내 힘이 부족하다고 깡패를 사서 형제를 제압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차피 어떻게 수를 쓰더라도 알 수 없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큰 이치를 깨달았다는 것이 한치 앞을 모른다는 것까지 포함한 것이 아니라면 이는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모른다는 것을 공포(불안)의 대상으로 삼고, 안다는 것을 탐욕의 대상으로 삼는 한 악무한에 갇힐 뿐입니다. 모름을 활짝 열어둔다면, 앎을 짐짓 닫아둔다면 점괘의 노예가 되지도, 사후 논리의 포로가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속절없이 오늘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가뭇없이 진실의 증거들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알 수 없는 내일이 엄습해옵니다 두려움을 뚫고 나아가야 합니다. 탐욕을 내려놓고 손을 잡아야 합니다. 사전에도망가지 못하는 것은 269번째 2014416일을 살고 있는 우리의 천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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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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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금과 탈출의 결합과 마찬가지로 억압과 반란의 결합 역시 하나의 고정관념이다.······반란의 역사, 그러니까 ‘소수의 권력자’에 대항하는 ‘억압받는 다수’의 아래로부터의 봉기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고, 또 그만큼 다양하고 비극적이다.·······어떤 경우든 간에 가장 억압받는 개인들은 운동의 선봉에는 결코 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보통은 대담하고 편협하지 않으며 개인적으로는 안정적이고 평온하며, 심지어 특권을 누릴 수도 있는 삶을 살 가능성이 있음에도 관대함·······으로 투쟁에 투신하는 지도자들이 혁명을 이끈다. 기념물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자신의 무거운 사슬을 끊는 노예의 상像은 수사적인 것이다. 그의 사슬은 좀 더 가볍고 느슨한 구속에 메인 동료들에 의해 끊어진다.

  ·······모든 진정한 봉기들·······의 원동력인 분노와 의분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물론 억압이 존재해야 하지만, 적당한 정도이거나 비효율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라거에서의 억압은 극단적 수준의 것이었고·······포로는 고갈의 한계에 와 있었다. 굶주리고 쇠약하며 상처로 가득했고·······해진 넝마 같은 인간이었다.·······현실세계에서 혁명은 넝마들로는 되지 않는다.(194-196쪽)

 

에베레스트 등정 과정에서 조난당해 동사한 경우 벌거벗은 시신이 있다 합니다. 극한의 추위를 도리어 더위로 인지하는 방어 '오작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고 잠시 먹먹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마음병 치유를 하다보면 본질상 이와 동일한 현상을 만나게 됩니다. 마음의 고통이 극한에 달할 경우 그것을 쾌락으로 전도시키는 병리적 방어 적응입니다. 이를 “고통체”라 이름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고통이 극에 달할수록 그 고통에 격렬하게 저항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인간에 대한 과대하거나 안이한 평가의 소산일 따름입니다. 이유도 의미도 모른 채 더해만 가는 고통을 끝없이 감내해야 한다는 당위의 근거도 모호하지만 극한에 이르면 마침내 저항하고야 말 것이라는 기대의 근거는 더더욱 모호합니다. 이 모호함의 틈새로 당위보다 먼저 절망이, 기대를 뒤엎으며 무기력이 들이닥치는 것이 인간 현실입니다.

 

우울증에 대한 ‘바깥사람들’의 경박한 인식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한 여고생이 엄마한테 우울증이라고 말하자 이렇게 일갈했다고 합니다.

 

“이년아, 네가 우울증이면 엄마는 벌써 자살했겠다!”

 

이 반응의 핵심은 물론 딸의 우울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를 품고 있습니다. 우울증의 극한에 자살이 있다는 바로 그 오해 말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니 가히 그럴만하다 싶지만 죽을 마음조차 일으키지 못하는 깊은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바깥’ 소리일 뿐입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죽음이란 관념 자체가 아득해서 생각조차 형성되지 않는 우울증 환자가 있습니다. 죽을 마음 일으키는 것도 에너지인데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우울증 환자가 있습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망연히 널브러져 있는 우울증 환자가 있습니다. 그는 살아 있으나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 무슨 죽음을 어떤 힘으로 택할 것입니까. 자살이란 산 사람이 스스로 죽음의 강을 건너는 것 아니던가요.

 

적어도 이 자발성에 관한 한 자살은 저항이며 반란이며 혁명입니다. 저항이, 반란이, 혁명이 불가능한 상황을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억압은 극단적 수준의 것이었고·······포로는 고갈의 한계에 와 있었다. 굶주리고 쇠약하며 상처로 가득했고·······해진 넝마 같은 인간이었다.·······현실세계에서 혁명은 넝마들로는 되지 않는다.

 

넝마”! 이보다 신랄한 표현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아뿔싸! 넝마에게 반란을 질문하다니. 이 질문은 그러므로 질문자에게 되돌아가야 합니다.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경우든 간에 가장 억압받는 개인들은 운동의 선봉에는 결코 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오히려 보통은 대담하고 편협하지 않으며 개인적으로는 안정적이고 평온하며, 심지어 특권을 누릴 수도 있는 삶을 살 가능성이 있음에도 관대함·······으로 투쟁에 투신하는 지도자들이 혁명을 이끈다. 기념물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자신의 무거운 사슬을 끊는 노예의 상像은 수사적인 것이다. 그의 사슬은 좀 더 가볍고 느슨한 구속에 메인 동료들에 의해 끊어진다.

 

그렇습니다. 답은 자명해졌습니다. 저항의, 반란의, 혁명의 주체가 누구인지. 누가 넝마의 발목에 채워진 사슬을 끊어야 하는지. 이들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오히려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아직도 고생을 덜했구나!”

 

이들이 바로 저, 그리고 그대가 아닐는지요. 대담하지 못한가요. 편협한가요. 안정적이고 평온하지 못한가요. 관대하지 못한가요. 그러면, 그렇다면, 대체 어찌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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