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 의학적 철학적 치유적 관점에서 본 고통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지음, 공병혜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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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는 제 젊은 시절의 열정 한 자락을 거머쥐고 있었던 해석학의 거장입니다.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가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그가 오랜 세월 동안 극도의 통증에 시달리며 살아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추정컨대 그의 해석학은 아마도 이런 그의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2. 그가 100세 되던 2000년 통증에 관한 강연을 한 내용을 토대로 작은 책이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의자醫者로서 극진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목과 독일어 원어를 대조하는 순간, 아, 이거 무언가 길을 잘못 들고 있는 책이로구나, 싶었습니다. ‘고통’이라 번역한 Schmerz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고통이나 고뇌로 번역할 수 있지만 책의 전반을 흐르는 논지를 감안하면 ‘아픔(통증)’이라 번역해야 맞습니다. 적어도 독일어에 그 맞은편 짝, 그러니까 psychischer Schmerz로서 Leid가 있는 한 이런 번역은 그 자체로 논점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3. 우리가 흔히 쓰는 고통은 엄밀히 보면 괴로움(苦)과 아픔(痛)의 합성어입니다. 이런 이분법이 마뜩치는 않으나 구태에 선을 긋는다면 아픔은 육체적인 것이고 괴로움은 정신적·심리적인 것입니다. 이 책은 고든 통이든 화학합성약물을 투여하여 신속하게 없애려 드는 것이 과연 바른 의학적 자세냐, 하는 문제를 주된 관심사로 다룹니다. 하지만 감춰진 논점이 하나 있고 실은 그게 더 근본적입니다. 이 문제는 문맥상 자연스럽게 드러나기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4. 우선 이 문제에 제대로 접근하려면 고통의 의학적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치밀하고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합니다. 서구의학도 가다머도 이 부분에서 자신의 전통에서 오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다머는 의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서구의학의 패러다임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 약점 자체를 지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구의학의 패러다임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 약점은 무엇일까요? 고통과 관련해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면 고통으로 나타나는 증상을 그대로 병이라고 인식하고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빨리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얼토당토않은 무지의 소산입니다. 증상, 특히 고통 가운데 아주 많은 것들은 그 자체로 병이 아니라 자연치유반응입니다. 스스로 치유하려는 노력을 병으로 매도하여 ‘잡으려’ 덤벼드는 것이 서구의학의 어리석음입니다. 진통제와 증상억제제를 치료제라 철석같이 믿는 ‘신앙’은 바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류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이런 패러다임을 바로잡지 않는 한 서구의학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어떤 의학 연구가는 서구의학은 1975년 이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고통은 물론 대단히 불편합니다. 불편하면 없애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통과해야만 병이 낫는다면 불편함을 제거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고통이, 불편함이 인생 전체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어떤 메시지를 주느냐, 이런 거창한 이야기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병을 스스로 낫게 하려는 노력이라면, 만일 그 자연치유반응만으로 모자란다면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의학이지 어떻게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의학일 것입니까.

 

감기를 예로 들겠습니다. 열이 오르고 두통이 있다 하면 내과 양의사는 진리에 입각한 것인 양 해열진통제를 처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발열·두통은 자연치유반응입니다. 따라서 한의사들이 처방하는 갈근탕 같은 한약들은 오히려 열을 조금 더 올려준 뒤 스스로 알아서 떨어지게 해줍니다. 자연치유력을 북돋아주는 것입니다. 해열진통제는 궁극적으로 체열관리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갈근탕은 궁극적으로 체열관리 시스템을 강화해줍니다. 자명하지 않습니까.

 

우울장애를 예로 들겠습니다. 슬픔에 휘감기고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하면 정신과 양의사는 진리에 입각한 것인 양 항우울제를 처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슬픔·허무감은 자연치유반응입니다. 따라서 저는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스스로 접힌 기억을 펼쳐 풀어내게 합니다. 자연치유력을 북돋아주는 것입니다. 항우울제는 궁극적으로 감정관리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자기 수용적 상담은 궁극적으로 감정관리 시스템을 강화해줍니다. 자명하지 않습니까.

 

고통은 원칙적으로 적군이 아니고 아군입니다. 이 근본적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이 책에서 가다머가 힘주어 말한 것도 그 반대편에서 질문한 사람이 “환상적”이라고 비판한 것도 도저함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리 되풀이해 읽어도 이 책은 모호한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번역자가 첨부한 말미의 자기 논문도 여전히 모호하고 원칙론적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5. 이제 고통이라는 말 속에 담겨 있는 언어 관습적 측면을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겠습니다. 무엇보다 통고痛苦라는 말이 없지는 않으나 고통이란 용어가 일반화된 것이 논의의 단서이자 근거가 됩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단순 합성어라면 통痛보다 고苦가 앞선 것으로 보아 고를 중시하거나 더욱 문제라고 판단하는 인식의 반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심신心身이란 말의 순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한자말의 단어는 거의 예외 없이 남성과 정신의 가치 우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심지어 불교 사상의 번역·전승 과정에도 나타납니다. 삼특상三特相으로 알려진 무상·고·무아無常·苦·無我의 고苦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기 고苦가 붓다의 원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경전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후인들이 그렇게 바꾸었거나, 중국어 번역 과정에서 그리 되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붓다의 원음이라면 이는 붓다 사상 자체의 한계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통痛이 아닌 고苦를 일차적·근본적 범주로 삼음으로써 세계의 실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관념성으로 기울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현실 불교의 위상과 행태를 보면 이런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를 돌이키거나 바꾸지 않는 한 불교는 영원히 구름 위를 떠도는 거대담론에 머무를 것입니다.

 

단순 합성어가 아닐 경우 가장 자연스러운 어의는 괴로운 아픔이니, 곧 ‘통증은 괴로운 것이다.’ 라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증에 대한 부정적 판단은 ‘통증은 무조건 없애야 한다.’는 실천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것은 고통이란 한자 어휘의 문제를 떠나 인류가 과학이랍시고 만든 주류의학이 대증요법으로 통증을 억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로 확산됩니다. 특히 서구의학은 진통제일주의 의학입니다. 정신조차 뇌로 환원하여 정신적 장애에도 진통제적 성격을 지닌 증상억제제를 투여합니다.

 

의학의 진통제를 물리적 토대로 한 이런 사조는 다른 방면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무엇보다 이른바 긍정주의 심리학에는 치명적인 감염을 일으켰습니다. 통증을 없애는 길이 통증이라는 부정적인 것을 없다고 믿는(!) 긍정 마인드에 있다고 설파함으로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도리어 절망의 나락으로 내몰았습니다. SLE(전신성홍반성낭창)에 걸려 수많은 통증에 시달렸으나 그 해법을 긍정주의에서 찾다가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거둔 ㅊ씨의 비극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6. 바야흐로 고통을 직시할 때가 왔습니다. 고통은 많은 경우, 아니 본질적으로 병이 아닙니다. 자연치유반응입니다. 무조건 없애려 하는 것은 의학이 아닙니다. 고통을 없애려면 고통을 북돋아주어야 한다는 역설을 모르는 한 의학은 반생명적 살인기술일 뿐입니다. 고통을 북돋우는 과정에서는 불편함을 견디는 전인격적 감응response 문제가 개입합니다. 전인격적 감응은 결코 관념의 문제가 아닙니다. 관념을 넘어서 실재의 세계로 가려면 몸의 아픔, 그러니까 통증의 위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통증은 일차적·근본적·범주적입니다. 무통의 전략과 편의의 전술로 승승장구하는 자본의 의학에 맞서 몸의 아픔을 화두로 들어야 합니다. 그게 괴로움의 함정을 벗어나는 바른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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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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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러니까 275번째 2014년 4월 16일 저녁에 이은희가 인사차 한의원에 왔습니다. 이은희는 이번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서 2관왕(서울신문과 세계일보)이 된 역량 있는 신인작가입니다. 문학의 스승도 아닌데 제가 진심으로 잘 썼다 하니 진심으로 그 인정을 고마워했습니다. 이은희는 자리에 앉자마자 티슈를 통째로 달라 했습니다. 저녁 식사하러 간 음식점에서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물론 눈물을 닦기 위해서입니다. 이은희는 특히 세월호사건 이야기를 하는 내내 눈물 마를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찌 이은희뿐이겠습니까. 문학적 감수성이 변변치 못한 저조차도 세월호사건 앞에서는 늘 붉은 눈으로 글 쓰고 말하니 말입니다. 아마도 2014년 4월 16일 이후 대한민국에는 딱 두 부류가 살고 있지 싶습니다. 세월호사건 떠올리면서 눈을 붉히는 사람과 눈을 부라리는 자.

 

 

붉은 눈의 두 사람은 밤늦도록 “우리가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할 사상적 좌표축”(서경식)인 이 사건과 우리의 ‘남은’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어떤 내용으로든 붉은 눈의 사람들은 이 사상적 좌표축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사상적 좌표축은 붉은 눈의 사람들에게 ‘남은’ 삶이 인문人文 전쟁임을 환기시키고 각자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알리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이은희에게는 문학이, 제게는 한의학이 인문人文 전사입니다. 당장은 한 줌의 유격대로, 언젠가는 강대한 혁명군으로, 마침내는 새로운 인문人文 대한민국 정규군으로 그 전사는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수행할 것입니다. 전쟁에 임하는 자세는 다행히도 전쟁을 먼저 일으킨 자들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구태여 사족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파부침주破釜沈舟!

 

 

생각은 날뛰되 글재주가 모자라 끙끙거리던 차에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가 홀연히, 아니 필연처럼 나타나 제 내면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경전canonical text 구실을 해주었습니다. 두 달 보름 동안 사제의 자세로 주해annotation 리뷰를 하면서 영혼의 깊은 향기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그 향기가 이웃에게 번져가서 야젓한 체취로 자리 잡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체취 함께 나누는 이가 늘어나고 또 늘어나 남에게 고통을 주고도 희희낙락 살아가는 악마-인간들이 뿜어내는 악취를 몰아냈으면 좋겠습니다. 이 희망을 실재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프리모 레비의 문제의식과 통찰을 잊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2014년 4월 16일을 본디 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그날까지 250위 바리데기 영령들의 가피加被가 함께하시기를!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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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6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16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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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시자들과 SS대원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평균적 인간이었고, 평균적 지능을 가졌으며, 평균적으로 악한 사람들이었다.·······그들은 괴물이 아니었으며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교육을 받았다.·······모두가 크든 작든 책임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독일 국민들 대다수는 정신적 나태함 때문에, 근시안적 타산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국민적 자부심 때문에 애초에 히틀러 대장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였다. 히틀러에게 행운이 따른 동안에 그를 추종했고 아무런 가책 없이 그를 지지했다. 그러다 히틀러의 파멸이 그들을 휩쓸어버렸고, 그들은 죽음과 비참함, 회한으로 괴로워하다가 몇 년 뒤 부도덕한 정치놀음의 결과로 재활했다. 바로 그런 독일 국민들 대다수의 책임도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251-252쪽)

 

대한민국 헌법의 시작은 이렇게 장엄합니다.

 

제1조

①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한 국가 원수 및 대표에 의하여 국정이 운영되는 나라인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이 요즘처럼 섬뜩하면서도 우습게 다가온 때가 일찍이 없었습니다.

 

섬뜩한 까닭은 이리 장엄하게 선언하고도 일거에 헌법조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어두운 힘이 엄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스운 까닭은 헌법의 선두에 다섯 번이나 등장하는 ‘민民’의 무게가 이 조문을 전혀 감당하지 못한 채 산산이 부서져 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손으로 세운 권력이 주인 행세를 하는데도 종 취급당하는 민이 속수무책인 이 민주공화국은 대체 어떤 민주공화국입니까. 종 취급당하면서도 요지부동인 민은 "정신적 나태함 때문에, 근시안적 타산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국민적 자부심 때문에" "애초에" 이 반 헌법 세력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였"으며 "추종했고 아무런 가책 없이·······지지했"던 것입니까. 적어도 결과만 놓고 보면, 작금의 현상만 놓고 보면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선거 때만 주권자라 하더라도 이렇게 제 발등을 찍고도 괴괴하기만 하니 여기에 대한 책임 문제가 불거질 때도 미상불 아무 생각 없이 나태함으로 또는 타산으로 또는 어리석음으로 또는 자부심으로 눙치며 지나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주권자로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지켜 나아가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상위 1%가 악의를 가지고 구사하는 전략전술에 “평균적 지능을 가졌으며, 평균적으로 악한” “평균적 인간”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가히 필연에 가까울 것입니다. “평균”을 가지고 저들과 맞서는 것 또한 필연이니 의당 어려움을 견뎌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 까요? 프리모 레비를 따라 ‘나머지’ 99%의 약한 고리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에서 실마리를 풀어보겠습니다.

 

[정신적 나태함, 국민적 자부심] 얼핏 이 둘은 상치되는 정신적 가치처럼 보입니다. 발맘발맘 따져 가면 이 둘은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납니다. 거기에 이르려면 의학적 안목이 필요합니다. 나태함의 사전적인 뜻은 게으르고 느림이지만 이는 전형적인 우울증상입니다. 우울증의 본령인 자기신뢰 결핍으로 말미암아 망설이고 미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부심은 자기신뢰와 동의어가 아닙니다. 반의어입니다. 자기신뢰가 무너진 사람이 맞은편에 세워놓은 허구적·이상적 자아에 걸어놓는 애착입니다. 이 또한 우울증의 신랄한 증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렇게 만나는 이 둘은 공포·불안에 대한 자기 파괴, 그러니까 자기를 죽여 가는 병리적 반응입니다. 불의한 권력이 전천후로 일으키는 공포·불안의 실체를 직면하지 않으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99%의 문제입니다.

 

[근시안적 타산] 이것은 잘 알다시피 알량한 탐욕입니다. 불의한 권력은 99%를 공포·불안으로 뒤흔드는 전 과정에 교묘히 서푼도 안 되는 떡고물을 매복시켜 놓습니다. 때로는 장밋빛 약속으로. 때로는 확실한 현찰로. 때로는 눈물겨운 보상으로. 이 매복에 걸리면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한 돼지를 즐길 수 있습니다. 돈이 가져다주는 편리함, 가족을 보고 느끼는 뿌듯함, 남 앞에서 세워지는 ‘폼’에 중독되기 때문입니다. 중독은 옆에서 누가 죽어가도 관심 없어지게 만들어줍니다. 신경 거슬리는 자는 ‘근본 없는 것 따위’로 무시해버리면 그만입니다. 사회고 역사고 말짱 부질없는 것입니다. 일단 오늘 나만 살면 그만입니다. 전후좌우 따지지 않고 떡밥에 낚시 덜컥 무는 단세포적 탐욕의 실체를 직면하지 않으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99%의 문제입니다.

 

[어리석음] 이에 대한 긴 설명은 도리어 사족일 것입니다. 진실에 대한 무지입니다. 불의한 권력이 던져주는 거짓 정보만 가지고 세계는 투명하다 믿는 맹목입니다. 불의한 권력은 교육과 언론을 통제함으로써 불투명성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진실들을 유언비어로 몰아 죽입니다. 권력은 신비화됩니다. 권력의 정상은 초월적 권위를 획득합니다. 사이비종교의 교주에게 꿇어 엎드린 자처럼 스스로가 얼마나 어떻게 무지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는지 직면하지 않으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99%의 문제입니다.

 

위 셋은 99%의 약한 고리이므로 불의한 권력의 무기가 됩니다. 99%가 절대 불리합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영웅적 용기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멈칫거리면서 나아가는 “평균적” 용기만으로 감사합니다. 연대가 필요합니다. 위대한 통일전선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손잡고 함께 나아가는 “평균적” 연대만으로 감사합니다. 각성이 필요합니다. 고결한 경지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런가, 질문하는 “평균적” 각성만으로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평균적” 용기와 “평균적” 연대와 “평균적” 각성만으로도 99%는 저 사악한 “대장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장의 “파멸이 그들을 휩쓸어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죽음과 비참함, 회한으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도덕한 정치놀음의 결과로 재활”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 프리모 레비에 기댄 지금-여기의 성찰은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프리모 레비는 우리 앞에 결곡한 모습으로 앉아 있습니다. 히틀러 대장을 따랐던 독일 국민에게 아우슈비츠의 책임을 묻는 바로 그 음성으로 오늘 박근혜 대장을 따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세월호의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잊으면 안 됩니다. “평균적” 용기. “평균적” 연대. “평균적”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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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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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으로부터는 폭력이 나올 뿐이다.·······히틀러의 독일에서 지배적이었던 바로 그 폭력에서 갈라져 나오는 오늘날의 폭력의 계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절망에 빠진 유대인 생존자들은 거대한 난파 후 유럽에서 도피하여 아랍 세계의 내부에 서구 문명의 섬을, 즉 유대주의의 경이로운 부흥을 만들어냈고, 한편으로는 또 다른 증오의 구실을 만들어냈다.(249-250쪽)

 

오늘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원주민에게 가하는 무자비한 폭력을 보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자신들이 나치한테 그렇게 처절하게 당했으면서 어떻게 그와 똑같은 짓을 하는가, 나치와 다른 게 뭔가?”

 

이 질문의 연장선에서 프리모 레비의 글을 데면데면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주위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되묻습니다.

 

“일제가 우리한테 가한 잔혹한 폭력을 비판하는 입으로 어찌 우리가 베트남에 가한 잔혹한 폭력은 모르쇠 하는가?”

 

이런 식의 주고받음은 사실상 무한히 계속되는 순환논법의 한 토막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범죄를 저지른다고 해서 나치가 유대인에게 저지른 범죄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베트남에게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일제가 우리에게 저지른 범죄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악무한의 고리를 누가, 어떻게 끊느냐, 에 초점을 맞추어야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문제를 풀려면 문제의 실재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일까요?

 

우리 속담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매운 시집살이한 며느리가 매운 시어미 된다.”

 

좀 더 보편적인 버전은 이것입니다.

 

“흉보면서 배운다.”

 

좋지 않은 것인 줄 알면서 모방하게 되는 현상을 맛깔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 말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습관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학습이 되는 것에 대한 경험적 통찰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국가적 차원에서도 이런 설명이 가능할까요?

 

프리모 레비는 “폭력의 계보”라는 용어에 터하여 “가르쳐주었다”(250쪽) “배웠다”(249쪽)라는 교육적 관계로 설명하였습니다. 이는 폭력이 의도적·계획적·체계적으로 전수되어가는 기술이며 문명임을 간파하였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폭력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권력 집단의 탐욕이 작동하며 그것은 반드시 자기 조직적으로 체계화되고 공유되고 계승되기 마련임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프리모 레비의 통찰은 마지막 지점을 관통합니다.

 

절망에 빠진 유대인 생존자들은 거대한 난파 후 유럽에서 도피하여 아랍 세계의 내부에 서구 문명의 섬을, 즉 유대주의의 경이로운 부흥을 만들어냈고, 한편으로는 또 다른 증오의 구실을 만들어냈다.

 

이 부분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가 지니고 있는 모순성에 대한 고찰이 분명히 들어 있으나 기우뚱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듯 개운치 않기 때문입니다. 프리모 레비가 그 동안 여러 차례 진행된 중동전쟁을 몰랐을 리 없고, 그 전쟁의 성격이 무엇인지 몰랐을 리 없는데, 이스라엘의 건국은 “유대주의의 경이로운 부흥”이라고 명쾌하게 묘사하면서 전쟁은 “또 다른 증오의 구실”이라고 모호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세부 사항에 대한 근거 없는, 그러니까 프리모 레비의 정확한 견해를 모르는 상태에서의 쟁점화보다 문맥이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더 핵심적인 사항, 그러니까 나치가 인류역사에서 새로이 열어젖힌 “폭력의 계보”에 이스라엘의 폭력을 분명히 포함시켰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리모 레비로서는 당혹스럽고 심지어 부정하고 싶은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가해자가 폭력의 메커니즘을 피해자에게 “가르쳐주었”으며,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그것을 “배웠”습니다. 이보다 더한 희극은 다시없습니다. 이보다 더한 비극은 다시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입니다.

 

프리모 레비는 단언합니다.

 

폭력으로부터는 폭력이 나올 뿐이다.

 

폭력을 막는 폭력은 없습니다. 여기서 ‘폭력을 막겠다.’는 말은 ‘내 탐욕을 채우겠다.’는 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폭력 자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폭력을 포기하는 것은 그러므로 탐욕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탐욕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 존재와 삶 자체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 없이는 불가능한 결단입니다. 탐욕은 집중된 권력에 의해 자기조직화하기 때문에 네트워크로 평등하게 분산된 관계-권력으로 공존을 조직화하는 길만이 답입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신자유주의와 결합한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길입니다. 이 거대담론은 제 힘에 부치는 이야기입니다. 의학 이야기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이른바 베르테르효과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흔히 모방 자살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배워서 자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가해자한테 피해자가 배워서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희-비극보다 더 기막힌 일입니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거두는 사람한테서 그 마음을 스스로 배워 자기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거둔다니 말입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단도직입으로 저는 이것을 상처의 감염이라 합니다. 몸의 병만 감염이 일어나는 것 아닙니다. 교과서적 서구의학을 한 사람에겐 터무니없는 말로 들릴 테지만 우울장애도 감염이 됩니다. 특별히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지경까지 이른 경우는 그야말로 관통상의 감염입니다. 이를 비유, 그러니까 은유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 비유라 한다면 베르테르효과라는 이름은 얼마나 더 비유적인 것입니까. 무엇보다 아무리 과학이라 하더라도 언어적 표현은 궁극적으로는 비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 전달의 과정이 질병 차원의 침습이지 건강한 자발성에서 일어난 학습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울장애 앓던 연예인이 자살한 뒤를 따라 비연예인이 자살하는 것은 의학적 치료, 그 너머 인문적 치유의 지평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에게 폭행당하며 자란 아이는 대부분 커서 자기 자식한테 똑같은 폭력을 행사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근본 조건인 탐욕 문제가 개입되어 있음은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감염이 본질입니다. 치료/치유가 필요한 문제입니다. 치료/치유의 관점 또한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국가, 그리고 세계·문명의 차원으로 확대하여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어느 사회보다 폭력이 공공화해 있는 대한민국의 경우는 정말 심각한 상황입니다. 권력 최상층부의 ‘갑질’은 무한 연쇄의 ‘갑질’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갑질’은 동물에게도 심지어 땅과 물에게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 수천 명을 부당 해고함으로써 26명의 사람을 죽이고도 변하지 않고, 250명의 아이들을 배에 가두어 빠뜨려 죽이고도 변하지 않는 이 악마적 ‘갑질’ 또한 아우슈비츠에서 배워온 것일진대, 이 땅의 압제자들 책상 위에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놓여 있을진대, 바야흐로 99%의 을이 스스로 100%(서동진의 「변증법의 낮잠」)라고 선포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저는 그 바람 속에서 묵묵히 치료/치유로써 이바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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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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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필요하다는 추악한 이야기가 있었다. 인간은 갈등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함정이 있고 수상쩍은 이야기들이다. 악마는 필요치 않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전쟁과 폭력은 필요치 않다. 선의와 상호 신뢰가 있다면, 탁자에 둘러앉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248-249쪽)

 

제 선친은 몇 가지 특이한,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괴이한 신념을 지녔던 분이었습니다. 자식은 반드시 때려서 키워야 한다는 소신이 그중 하나입니다. 해마다 봄이면 낫을 파르라니 갈아들고 산에 오릅니다. 하루 종일 싸리나무 덤불을 뒤져 당신의 새끼손가락 굵기의 매를 만듭니다. 수백 개의 매를 가져와 응달에 말립니다. 때릴 때에는 미리 물에 불려둡니다. 그 많은 매들은 이듬해 봄이 오기 훨씬 이전에 사라지고 맙니다. 매가 없으면 손과 발이 그것을 대신했음은 물론입니다.

 

자식을 때리기 위해 싸리나무를 낫으로 베면서, 응달에 말리면서, 물에 불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 또한 아비가 되고 이순耳順이 된 오늘까지도 짐작이 잘 가지 않습니다. 체벌(폭력)이 사랑의 방법이라고 굳게 믿을 수는 있으되 그러면 어찌하여 대화는 그 굳은 믿음에 포함시키지 않았을까요. 매를 만드는 정성으로 “탁자”를 만들 수는 정녕 없었던 것일까요.

 

어찌 제 선친뿐이겠습니까. 인간이 탁자보다는 매 만드는 쪽으로 더 기울어진 진화를 해왔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게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구적 지식은 과대 진화하고 윤리적 지혜는 과소 진화했음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죽임의 기술에 비해 살림의 솜씨는 얼마나 누추합니까. 강고한 살해의 시스템에 비해 공생의 커뮤니티는 얼마나 허술합니까. 이런 진화를 이제 거절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진화와 맺은 인연을 저주로 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화란 말이 귀에 거슬리는 사람한테는 신의 창조와 섭리에 이와 동일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거절”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는 명백한 대상의 존재를 전제로 합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악마

 

그렇습니다. 진화의 선택, 그 끝에는 악마가 된 인간이 ‘낫’을 들고 서 있습니다. 악마는 그 ‘낫’으로 다듬어 아우슈비츠를 만들었습니다. 악마는 그 ‘낫’으로 걸어 당겨 세월호를 뒤집었습니다. 악마는 그 ‘낫’으로 국기문란을 벤다더니 국민을 베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단호히 거절해야 합니다.

 

악마는 필요치 않다.

 

우리가 남겨두어야 할, 또는 복구해야 할 것은 “선의”이며 “상호 신뢰”입니다. 함께 느끼는 온기입니다. 공존의 알아차림입니다. 상생의 의지입니다. 파괴의 규모는 전 지구적이고 멸절의 범위가 전 인류적인 지금 나라와 백성을 팔아 제 곳간을 채우는 자들의 악의와 상호 불신을 그대로 두고서야 어찌 이 생명공동체를 온전히 지킬 수 있겠습니까. 모두 제 인연에 맞는 “탁자”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탁자”를 잇대어 놓아야 합니다. 잇닿아 있는 “탁자” 앞에 “둘러앉아”야 합니다. “둘러앉아” “선의”로 “상호 신뢰”로 대화해야 합니다. 대화로 연대의 삶을 열어야 합니다. 그렇게 연 연대의 삶으로 기어이 장엄한 날을 맞아야 합니다. 원통히 죽어간 저 생떼 같은 목숨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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