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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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나 지금이나 나는 늙어가는 사람, 노인이 감당해야만 하는 비참한 운명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사회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이런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고결하고 귀중한 노력이 아마도 약간의 아픔을 덜어주기는 하겠지만, 말하자면 무해한 진통제와 같다는 의견을 여전히 고집하고 싶다. 다시 말해서 그런 노력은 늙어감이라는 비극적 불행에 있어서 어떤 근본적인 것도 바꾸거나 개선할 수 없다.(11쪽)

 

유한한 생명으로서 인간에게 죽음은 불가피하다는 이치로 보면 늙어감이란 그 이치를 따라 일어나는 당연한 과정입니다. 이 진실을 모를 리 없는 장 아메리가 구태여 늙어감에 대하여 “비참한 운명의 짐” 또는 “비극적 불행”이라는 어두운 규정을 내리고 거기 터하여 추상같은 사유를 벼리는 연유가 무엇일까요? 이 의문은 책이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늙어감이 개인의 생물학적 층위에서만 진행된다면 아마도 문제는 훨씬 더 간단명료했을 것입니다. 사회문화적 정치경제학적인 층위에서 소외와 불평등, 심지어 수탈의 형태로 진행되므로 문제에는 복잡한 주름이 잡히고, 다단한 결절이 맺힙니다. 이런 주름과 결절은 생물학적 늙어감에 비참함과 비극성을 더 깊이 새겨 넣어 “근본적인 것”을 형성합니다.

 

근본적인 것”은 처음부터 사회 또는 국가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사회 또는 국가가 바로 그 “근본적인 것”을 야기하고 강화한 원죄의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정치도 법도 제도보장도 그 원죄를 덮고 가려는 장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효과는 당연히 “진통제” 수준입니다. 설혹 그 장치에 “고결하고 귀중한 노력”이 깃들어 있다 하더라도 본질은 동일합니다.

 

근본적인 것”이 사회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지님에도 사회가 풀 수 없는 문제라면 대체 그 “근본적인 것”이란 무엇일까요? “근본적인 것”은 개인과 사회의 경계에서 일어난 경험사건이 해체 변화를 일으킬 때 나타나는 외상外傷적traumatic 상실입니다. 사는 동안 상실은 불가피합니다. 문제는 외상 상황입니다. 장 아메리의 심장은 늘 여기서 뛰고 있습니다.

 

“나는 나치에 맞서 싸우는 레지스탕스 전사다. 잡힌다. 죽음의 수용소에 갇힌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받는다. 탈출한다. 다시 잡힌다. 다시 죽음의 수용소에 갇힌다. 다시 고문을 받는다. 나치가 패망한다. 나는 내 자신의 이름을 버린다. 다른 이름으로 살아간다. 지금의 삶은 지난날의 삶과 정녕 같은 것일까. 나는 과연 내 자신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장 아메리의 현재에 대한 질문은 늘 과거의 극한 경험과 연동되어 일어납니다. 시차는 없습니다. 오직 삶의 차이가 극한의 질문을 이끌어냅니다. 그는 자신을 의학의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외상을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치유를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매순간 격정emotionalism 상태를 살았습니다. 격정은 삶의 모든 순간을 근본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결국 삶 자체가 근본적인 것이므로 그는 단 한 순간도 “근본적인 것”에서 떠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나치 패망 이후 삶의 한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외상적 상실, 그러니까 늙어감이라는 “근본적인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본적인 것”에 대하여 근본적인 자세를 취하면 취할수록 아픔이 심해집니다. 그렇게 장 아메리는 아픔의 사람이었습니다.

 

아픈 사람에게 당장 좋기로는 “진통제”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통제”는 그 자체로 무해해도 결국은 유해합니다. 아픔이 가닿는 “근본적인 것”을 외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외면이 죄악이란 것을 온몸으로 깨친 장 아메리는 “진통제”를 거절합니다. 그는 “진통제” 공동체 사회 저 너머 어떤 새로운 아픔의 공동체를 꿈꾸었는지 모릅니다. 근본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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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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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 일반이라는 보편적 문제에 지성이 등을 돌리는 시대에, 그리고 오로지 체계와 기호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시대에, 나는 ‘살아본 구체적 경험’le vécu만을 철두철미하게 고집했다.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이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근접하게나마 충실하게 그리려는 노력은 ‘성찰’이라는 방법으로만 감당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여기에 주의 깊은 관찰과 공감 능력이 덧붙여져야 한다.······

  불안했던 시절의 자기 체험을 아무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저자는 없다. 있는 힘을 다해 절제하려 노력하면서도 극히 개인적인 면모를 밝혀두는 이유는 그게 나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그치지 않고 역사의 일반적 교훈으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희망에서다. 그래도 이런 개인적 면모를 밝히는 두려움은 더욱 크기만 하다. 책은 저마다 그 운명을 가질 뿐만 아니라, 또한 누군가의 운명을 정해줄 수도 있다.(6-9쪽)

 

저를 포함한 먹물 끼 있는 부류들은 책이다 하면 으레 일련번호 매겨진 두세 층위의 제목, 역시 일련번호 매겨진 각주, 불문율로 전제된 그리스 고전수사학, 기승전결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구조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하여』가 어려운 것은 이 관성을 흩뜨려놓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어디서 읽기를 시작해도 거기가 그냥 시작이고 어디서 읽기를 끝내도 그냥 거기가 끝입니다. 단도직입으로 이야기를 꺼내고 그 상태에서 닫습니다. 독자를 설복시키기 위한 증거 제시도 없습니다. 모든 순간 자신의 성찰을 도저하게 밀어붙일 따름입니다.

 

“대체 무슨 책이 이래?”

 

시종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A에 실어 저자는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있는 힘을 다해 절제하려 노력하면서” 꺼내놓습니다. 익명의 보편인간인 A의 허다한 에피소드 가운데 랜덤으로 뿌리는 방식입니다. 드러냄과 감춤 사이의 칼 날 위에서 장 아메리의 개인적 체험은 순간순간 역사가 되어갑니다. 이 책의 운명입니다. 그 운명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인연을 타고 흘러 이역만리 조선 땅 무명의 의자醫者 앞에 와 닿았습니다. 그 의자, 마침 이순耳順의 문턱을 넘어섰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이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뼈 시린 지금 어떤 운명 지움이 일어날지 궁금합니다.

 

“대체 이 무슨 운명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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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

산 자가 죽은 자에게 기대는 거대한 욕망체계가 종교입니다.

이게 과연 인간다운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삶은 죽음과 죽음 사이, 한 찰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은 앞뒤로 죽음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에 서서 내일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에게 진실은 똑 이 하나입니다.

 

'죽음이 삶을 이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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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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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암벽과 나무들이 병풍처럼 드리워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화가처럼 살았다.

그 틈 사이로 보이는 호수의 정경을 그리려

붓을 들었다. 그러나 이미 밤이 찾아와

그릴 수 없었으며, 체념한 사이 낮은 다시 밝아왔다!

 

프루스트Proust 『되찾은 시간』Le Temps retrouvé

 

 

서시입니다.

 

시간 속으로 배어든 모순이 공간 이미지로 펼쳐지며 장 아메리의 고뇌는 극적인 비장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려 붓을 들면 이미 어둠이고 체념하면 다시 빛인 이 도저한 어긋남. 발끝 태우는 희망의 덜미를 잡아채 절망의 아득한 심연에 빠뜨리고야 마는 인간 한계. 프루스트의 눈부신 서정 저 너머 아메리는 더욱 시퍼런 칼날을 딛고 서 있습니다.

 

『늙어감에 대하여』를 꿰뚫고 흐르는 자각은 모순의 경계에 노루 사슴 뛰노는 비무장지대 따윈 없다는 진실에 대한 것입니다. 단 한 치의 안일도 허락하지 않는 이율배반에 자신의 사유와 삶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장 아메리의 고뇌는 “균형을 깨뜨리며, 타협을 폭로하고, 통속화를 짓밟으며, 싸구려 위로를 깨끗이 쓸어버리는 그 어떤 일”(211쪽)로 한사코 달려가고야 맙니다. 균형과 타협과 통속화, 그리고 싸구려 위로를 온통 뒤집어쓰고 사는 우리가 장 아메리를 더없이 불편해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 할까요? 서시의 느낌을 보고 바로 책을 덮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밝아왔다 하니 나중에 뭔가 있지 않을까 하고 발맘발맘 따라 나설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도 저도 아니었습니다. 장 아메리는 모순, 그러니까 이율배반을 어찌 한다는 것인가, 그 궁금증 때문에 이 책을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과연 장 아메리한테서 모종의 답을 얻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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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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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몸은 어차피 썩어문드러진다. 품위 있는 인생, 곧 존엄으로 빛나는 삶을 원한다면, 정신을 갈고 닦을 노릇이다.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하여』는 이를 위한 가장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216쪽)

 

옮긴이의 말, 마지막 부분입니다. 옮긴이 또한 철학자입니다. 철학자로서 철학자의 문장 하나하나를 살점 같이, 뼈마디 같이 여기며 옮겼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의제할수록 마지막 세 문장은 독자의, 아니 어쩌면 저자의 뺨을 후려갈긴다는 느낌을 줍니다.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하여』, 아니 장 아메리에게 바치는 최고의 헌사처럼 보이는 이 단정이 제게는 도무지 해량불가海諒不可의 모독으로 들립니다.

 

이 세 문장 앞에 인용한 헤겔의 말이 헤겔철학 전체에서 어떤 위상을 지니는가와 상관없이 옮긴이 자신이 이 세 문장의 말을 하기 위해 선택한 것인 만큼 그 어떤 헤겔 이해에 관해서도 완전한 알리바이를 대기 어려울 것입니다. 헤겔은 유대인을 인류문명 바깥에 있는 열등한 존재로 공공연하게 규정한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헤겔의 절대정신, 국가정신은 나치가 원용하여 자신들을 정당화한 개념입니다. 헤겔 이후 계몽철학을 연구했다는 옮긴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헤겔의 그 정신을 갈고 닦는 일의 최고 자리에 유대인 레지스탕스 전사로서 나치한테 잡혀 참혹한 폭력을 당했던 장 아메리를 올려놓았을까요? 나치에게 고문당할 때 장 아메리는 열등한 유대인임에도 헤겔의 그 우월한 정신을 갈고 닦았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품위 있는 인생, 곧 존엄으로 빛나는 삶을 지탱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요?

 

물론 옮긴이는 전혀 다른 의도에서 이렇게 연결하고 결론지었을 것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필 헤겔을 인용한 것조차 옮긴이의 선의에서 비롯했다고 양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것입니다. “과연 장 아메리가 육체와 정신을 수직으로 분리하고 상위의 정신만을 갈고 닦아 품위 있는 인생, 곧 존엄으로 빛나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는가?” 단도직입으로 제 견해를 말씀드립니다. “아니다.” 그 결정적 근거가 다름 아닌 장 아메리의 자살입니다.

 

옮긴이의 마지막 말이 끼치는 영향도 그렇거니와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문단 하나, 나아가 책 전반에 걸친 오역의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없지 않습니다. 사소한 프랑스어 번역 문제를 뺀다면 이 부분의 검증은 제 능력 밖이라 번역본을 권위 있는 텍스트로 전제하고 최선을 다해 장 아메리의 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 아메리의 진실은 모름지기 칼날 위에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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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3 1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2-24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희상 2015-02-24 0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선,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각별하신 관심에 토를 다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헤겔은 유대인을 인류문명 바깥에 있는 열등한 존재로 공공연하게 규정한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는 말씀의 근거는 무엇인지요? 과문한 탓인지 저는 헤겔의 그런 육성을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법철학에서 고대그리스와 유대교를 비교하는 대목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의 정신을 강조하려고 ˝벌을 내리는 야훼˝를 말하는 히브리 신앙, 곧 바리새인의 믿음을 언급한 것일 뿐입니다. 헤겔 자신이 유대인을 폄하하는 표현은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나치스가 헤겔의 철학을 도용해 체제 정당화에 악용했다고 해서 그게 헤겔 자신의 잘못인지요? 헤겔은 절대정신을 국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절대정신이 객체화한 하나의 형태가 국가일 뿐입니다. 절대정신은 표현의 방식으로 예술에, 주체화의 방식으로 종교에, 주객합일의 방식으로 철학에 관계할 따름입니다. 나치스가 편리한대로 왜곡하고 오염시킨 책임을 한 세기 전의 헤겔이 떠안아야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아메리는 물론 육체와 정신을 수직으로 갈라 상위의 정신만 강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택한 자유죽음은 자신의 존엄한 인생을 지키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굳이 본인이 자유죽음이라는 표현을 고집하는 마당에 그건 자살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례가 아닐런지요? 비판과 평가에는 먼저 글에 내재하는 논리의 정확한 이해가 선행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역의 가능성은 물론 없지 않습니다. 아니, 틀림없이 오역이 있을 겁니다. 아메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십분 다 옮겼다고 한다면, 그것은 저의 오만이나 무지함입니다. 그러나 절절히 아파하며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음은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bari_che 2015-02-25 14:08   좋아요 0 | URL
0. 철학 저서를 보유하고 있는 철학자이자 66권이나 되는 책을 번역한 프로 번역가가 아마추어 독자들이 노니는 판에 직접 글을 남겨주셔서 적잖이 놀랐습니다. 정중한 인사에 갈음합니다. 김 선생님이 쓰신 글을 찬찬히 읽은 결과 금세 내리실 것으로 판단해서 대응을 삼가고 있었습니다. 이성적 퇴고를 하지 않으시니 직접 나누어주신 대로 세 가지 논점에 대해 몇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제가 이 글에서 헤겔의 유대인 폄하를 언급하기 전까지 지니고 있었던 개관적 지식은 헤겔을 전후한 유럽, 특히 독일의 지적·문화적 전승에서 반유대인정서가 상당히 보편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과관계를 정확히 따질 수는 없으나 이 전승에 칸트·피히테·헤겔이 끼친 영향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만큼 큰 것입니다. 여기서 헤겔의 육성 여부를 묻는 것은 마치 조선 후기 이익·홍대용·정약용 등의 이른바 실학운동에 중화주의 이데올로기 극복을 위한 자주사상이 깔려 있다는 말을 듣고 정약용의 육성 여부를 묻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요구하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 헤겔의 경우 다음 책들이 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Phenomenology of Spirit, A. V. Mille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7.
* Hegel on Tragedy, ed. A. and H. Paolucci. Westport, CT, and London: Greenwood Press, 1978.
* Introduction to the Lectures on the History of Philosophy, ed. and trans. T. M. Knox and A. V. Miller.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또한 다음 책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Rose, P. L. Revolutionary Anti-Semitism in Germany from Kant to Wagner.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
* Yovel, Y. Dark Riddle: Hegel, Nietzsche, and the Jews. London: Polity Press, 1998.

김 선생님이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하여』옮긴이의 말 말미에 reference 제시 없이 큰 따옴표 처리만으로 헤겔의 말이라고 독자에게 건네주신 것에 비하면 저로서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었다고 생각합니다.

2. 나치가 편리한 대로 왜곡하고 오염시킨 책임을 왜 헤겔이 떠안아야 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논점을 놓친 질문입니다. 제가 글에서 책임을 물은 것은 왜곡·오해당한 헤겔이 아닙니다. (만일 왜곡·오해가 사실이라면 그런 정황을 알면서) 왜 하필 헤겔과 장 아메리를 연결하여 독자에게 정신주의적 지향을 제시하였는지 옮긴이의 책임을 물은 것입니다.

한 걸음 양보해서 정말 제가 헤겔에게 책임을 물었다면 과연 나치가 헤겔을 편리한 대로 왜곡하고 오염시켰는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제가 제시한 근거에 따라 헤겔이 유대인과 그 문화를 폄하한 것이 맞을 경우, 왜곡도 오염도 사실이 아닙니다. 그 내용이 헤겔 사상의 핵심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대·학살에 헤겔이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동원된 이상 그 헤겔의 생각 일부를 가져다 장 아메리의 생각, 심지어 삶을 규정하는 준거점으로 삼은 것은 모독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3. 상대방의 글을 평가하려면 그 글에 내재하는 논리의 정확한 이해가 선행해야 한다는 김 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 글에 내재하는 논리에 장 아메리가 스스로 목숨 거둔 일을 “자살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흐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도리어 자살-그것을 자유죽음이라 표현하든 않든-할 수밖에 없는 곡진·결곡한 선택의 근거에 헤겔류의 정신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다는 논지를 펴고 있습니다. 이것은 프리모 레비부터 장 아메리까지 시종일관 유지한 제 생각입니다. 이는 제가 사람의 생명을 직면해야 하는 醫者이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논리이자 감각입니다. 다시 한 번 인용하겠습니다. 김 선생님의 이 말씀이 과연 혼신의 힘으로 나치와 싸운 레지스탕스 전사 장 아메리의 삶에 적합한 것일까요. 정신주의 전령 헤겔의 삶에 적합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몸은 어차피 썩어문드러진다. 품위 있는 인생, 곧 존엄으로 빛나는 삶을 원한다면, 정신을 갈고 닦을 노릇이다.”

0. 진료 시간에 쫓기면서 독수리타법으로^^ 이 글을 네 시간에 걸쳐 썼습니다. 제가 쓴 글 때문에 일어난 일을 수습하느라 들인 공이긴 하지만 허망한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제 쪽에서 보면 그닥 의미도 재미도 없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혹시 다음에는 더 좋은 인연으로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절절히 아파하며 최선을 다해 옮겨주신 장 아메리의 『늙어감에 대하여』를 경전 삼아 사제의 자세로 주해annotation 리뷰 하겠다는 약속 잊지 않겠습니다. 학문과 번역에 두루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_()_

김희상 2015-02-26 0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바쁘신 가운데서도 친절한 답 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로라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러나 글이라는 게 소통의 장이고 보면, 충분한 대화를 통해 오해의 여지를 줄여가며 서로 진솔한 공감을 나눌 수만 있다면 최선이라 믿어집니다. 외려 선생님의 곡진한 글을 접할 수 있게 된 게 저에게는 큰 행운입니다. 다시 한 번 정중히 인사드립니다.

먼저 괜스레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글을 달은 게 아니라는 점은 혜량해 주시기만 바랍니다. 제가 후기에서 헤겔의 글을 인용하며 아메리를 기린 이유는 뭐 그리 복잡한 게 아니었습니다. 아니, 저에게는 아주 분명한 함의가 있었습니다. 철학은 모름지기 진리를 사모함이 그 근본바탕입니다. 서양철학, 특히 칸트에서 피히테와 셸링을 거쳐 헤겔로 이어지는 이른바 ‘이데아주의’(Idealism이 관념론으로 옮겨지는 게 싫어 이런 표현을 씁니다)의 원동력은 자유의 갈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으로 참칭된 전제권력, 절대왕권에 맞서 프랑스혁명의 이상(Idea: 자유, 평등, 박애)을 실현코자하는 지난한 싸움이었습니다. 피바람을 부르고도 좌절한 혁명을 보며 철학자들은 더욱 절치부심해 이른바 ‘종이 위의 혁명’, 곧 사상의 혁명을 시도합니다. 칸트의 선험적 자아나, 헤겔의 절대정신 하는 따위의 개념이 다른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곧 자유의 기초, 곧 ‘생각하는 나’를 정립해 모든 잘못된 권위에 도전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아메리의 절절한 노력은 그 정점을 찍었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도저한 사유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몸과 정신을 나누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이분법이 아니라 모든 경계를 극복하려는 안간힘으로 생명의 존엄함을 기리는 게 아메리가 진정 시도한 작업이라고 봅니다. “자신을 없음에로 던지는 행위, 이게 역사를 끌고 온 원동력이었다.”(<자유죽음>) 집착과 안일의 유혹에 이끌려 굴종의 삶을 살기보다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자유의 경지, 이게 아메리가 갈망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헤겔 역시 진리 탐구의 자세를 이런 ‘자유 함’에서 찾았기에 저는 두 인물을 함께 묶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어차피 썩어문드러진다. 품위 있는 인생, 곧 존엄으로 빛나는 삶을 원한다면, 정신을 갈고 닦을 노릇이다.”

생명을 경시해서 이런 표현이 나온 게 아닙니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간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여기지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삶을 더욱 고양시키고자 하는 의지의 다독임으로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서로 바라보는 지점이 다르고, 제가 그리 적절하지 못한 표현을 고른 탓에 오해를 빚고 말았습니다. 거듭 혜량해주시기만 바랍니다.

다만, 한 가지 개인적으로 간청하고픈 게 있습니다. 헤겔은 유대인을 공공연히 열등한 존재로 규정한 대표적 철학자가 아닙니다. 수고를 아끼지 않고 찾아주신 자료는 저도 익히 아는 것들입니다. 이를테면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유대민족을 두고 선택 받은 은총을 누리나 구원의 문 앞에서 피안으로 넘어가기 어려워 지극히 혼란스러워한다며, 우리 인간의 운명을 말하는 메타포로 쓰고 있습니다.(<정신현상학>, 124쪽 – 이게 이 책을 통틀어 단 한 번 나오는 유대인 언급입니다.) 유대인을 경시했다면 인간 일반의 자리에 유대민족을 올려놓지는 않았겠지요. 물론 Paul Rose의 논제를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칸트에서 바그너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혁명적 반유대주의>에서 선보인 Rose의 진단은 반유대주의보다 오히려 혁명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당시 사회에 만연한 유대인 반감은 주로 유대인의 뛰어난 경제력에 겨눠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회 질서를 바꾸려면 기득권 구조를 손대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가 혁명적 반유대주의라는 Rose의 진단입니다. 그러나 Rose의 논의에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논거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결함으로 지적되곤 합니다. 자신의 패러다임에만 충실했을 뿐, 정작 당사자들이 정말 그런 주장에 부합하는 말을 했는지 근거 제시가 희박하다는 반론입니다. 실제로 벌어진 논쟁도 있더군요. Hans Liebeschütz라는 사람이 헤겔은 유대인을 동등한 자격을 가진 시민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쓴 글을 언급하자, 반대편 진영에서 그 의도는 유대인을 독일 사회에 동화시켜 아예 없애버리려 한 게 아니냐고 반박했다더군요.(Hans Liebeschütz: <헤겔에서 막스 베버에 이르기까지 독일 역사에 나타난 유대인 상Das Judentum im deutschen Geschichtsbild von Hegel bis Max Weber>, 튀빙겐, 1967.) 아무튼 이 논의는 소모적인 싸움으로 굳어진 모양입니다(2차 대전 후에 영미권과 독일의 견제와 다툼은 은밀하면서도 대단히 치열했습니다).

덕택에 많은 걸 배웠습니다. 진한 울림을 주는 글로 관점의 폭을 넓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닥 의미도 재미도 없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셨다니 죄송합니다. 그러나 매번 올려주시는 리뷰는 심장을 울리는 강한 힘을 자랑합니다. 다음번에 더 좋은 글로 인연이 이어진다면, 그것은 오로지 선생님 덕입니다. 하시는 일마다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 참, 제가 인용한 헤겔 문장은 <법철학> 30쪽에 나오는 것입니다. 역자의 소소한 감회를 토로하는 마당에 출전까지 밝히기는 면구해서 생략했던 것이니 헤아려 주십시오. 본문이 아닌 역자 후기에 출전 표기를 하는 것은 저자에게 갖출 도리가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