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 섯달 그믐 23시 59분에서 병신년 정월 초하루 0시 1분 사이

하늘과 땅이 맞닿는 깊고 푸른 언저리에서

250꽃별들과 마주하고 선다

역사와 신화를 바꾼다

다음 순간

가 닿은 바닥은

'나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마이클 애플)

배는 이미 뒤집혔으며 참된 진실조차 서로 모순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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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병신년 새해, 차마

축하로 맞을 수 없습니다.

비원悲願으로 손 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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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 순수 경직성이 불러오는 병······· - 강박과의 공존

  ·······우울증 환자가 강박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 얼핏 생각하면 앞뒤가 안 맞는 상황 같지만 우울증과 강박장애의 공통 지점에는 변화에 대한 부적응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변화를 못 견뎌 불변하는 법칙으로 시간을 공간화하려는 것이 강박장애라면 다양한 변화에 짝하는 정서적 순환이 안 돼 슬픔과 같은 하나의 정서에 고착되는 것이 우울증입니다.

  이런 우울증과 강박장애가 공존 또는 결합할 경우 예리하고 깊은 가치 의식에 사로잡혀 방법론적 과정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향점이 좁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에서 소외됩니다. 지나치게 순수해서 경직되는 것이지요. 이 경직이 현실적 타협 능력을 위축시키고 사회적 수완을 차단합니다. 결국 무력과 고립이라는 어둠이 기다리는 곳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타협과 수완이라는 사회적 기술은 다양한 방편을 구사하여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지켜내려는 사회 행위이자 전략입니다. 말하자면 변화의 결에서 불변을 봐 알아차리는 역설의 연금술인 셈이지요. 지나치게 넘치는 사람이 사기꾼인 것처럼 지나치게 모자란 사람은 벽창호가 됩니다. 벽창호인 강박-우울증 환자는 결국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힙니다.(84-85쪽)


통속 드라마를 보면 선한 주인공이 악인 앞에서 분노 가득히 던지는 공통된 말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죄 밝혀내고야 말 거야!”


실제로 대부분의 주인공은 아무런 ‘수’도 쓰지 못합니다. 우연히 등장하는 흑기사의 몫인데 주인공이 언제나 공허한 의지 어법으로 전유하는 것뿐입니다. 이런 드라마는 대중에게 허위의식을 심어줍니다.


“순수하고 올곧은 정의의 사람, 착한 주인공은 끝내 승리한다.”


이 허위의식은 현실에서 그런 승리의 화신이 실재한다고 믿거나 그런 영웅을 대망하도록 꼬드깁니다. 거꾸로 그들을 괴롭히고 착취하여 결국은 최후 승리 이전에 모두 죽여 없애는 악인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믿거나 그런 악한을 미워하는 자신이 의롭다고 착각하도록 부추깁니다. 결국 대중은 의로운 영웅의 가짜 영혼이 덧씌워진 상태demon possession에서 병식病識 없는 강박-우울증 환자가 되고 맙니다. 고착과 무능을 천형으로 짊어진 채 실재하는 악인 매판독재분단세력에게 수탈당하며 한 생을 살아갑니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37%는 이미 이른바 ‘불가역적’ 질병 또는 광신 상태입니다. 이 37%가 해자垓字 되어 절대 악의 철옹성을 구축하고 수호하고 영속화하고 있습니다. 37% 밖 사람들 대부분도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불가역적’ 질병 또는 광신 상태로 미끄러져 내려갈 것입니다. 마침내 대한민국은 상위 0.0001%의 V-society 사이코패스와 99.9999%의 ‘불가역적’ 강박-우울증 환자가 수용되어 있는 거대 병동으로 변해갈 것입니다.


병동 국가를 향해 질주하는 오늘 우리 눈앞에 총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모든 총선이 그러했겠지만 이번 총선은 치명적 특이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야권 분열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일본을 후행하며 급전직하 멸망의 길로 들어설 것입니다. 깨어서 우리 자신의 고착과 무능을 통렬히 알아차리지 않으면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냉엄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선에는 면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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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 갈등을 피하는 병······· - 불안과의 공존

  ·······개인사적으로든, 사회사적으로든 불안을 격심하게 겪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갈등을 회피하게 마련입니다. 갈등을 통해 삶의 기술이 체득되고 건강한 거래가 가능한 성인의 인격이 형성된다는 원리적 이론이 타당하다는 것과 갈등이 몰고 오는 모든 불안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제 경우 한때 공적 공격을 당하면서 생긴 두려움과 불안에 극심하게 시달렸습니다.·······저항이 불가능함으로써 각인되는 무기력은 두려움과 불안을 더욱 예리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빠르게 우울증과 결합하도록 몰아갑니다.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그런 공적인 갈등 앞에 당당히 노출되기 어려울 것입니다.·······대면 자체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갈등의 요인을 미리 제거하거나 갈등이 생기면 한사코, 무조건 무마하려 들겠지요. 이른바 회피반응입니다. 이것을 마주하면서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내면의 힘을 키우는 건강한 감응을 할 수 있으려면 아마도 적잖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동안 치료자의 위치에서 환우들의 고통을 공감할 때 우울은 그야말로 단도직입이었습니다. 불안이 심한 분들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런 일을 겪으면서 이 부분도 감응의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감사도 하고 있습니다. 환우와 공감하는 마음자리를 넓힐 수 있게 해주신 하늘의 선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한 쪽 문은 열리는 그런 것입니다. 갈등 앞에서 쪼그라져 주름 잡혔던 불안한 마음결이 다음 삶의 혜안을 머금고 있다면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니지 않을까요.(82-83쪽)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의 부모는 매우 상반되는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소녀는 그 둘 중 어느 쪽에 맞추는 것이 좋은지 전혀 판단할 수 없어 늘 불안했습니다. 격렬한 부부싸움이 잦았음은 물론입니다. 소녀는 그 때마다 공포로 얼어붙었습니다. 이러는 사이 소녀는 부모의 말에 무조건 ‘예’라고 대답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입을 다물고 견디는 습관이 붙었습니다. 누군가 싸움을 걸어오면 재빨리 눙치고 넘어가는 데 선수가 되었습니다. 양보 여왕, 배려 천사로 굳게 자리 잡을수록 소녀의 영혼은 파리해져갔습니다. 소녀는 그 흔한 사춘기도 겪지 않고 매끈하게 어른이 되었습니다. 한 남자 사람을 만났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해서 애걸하듯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돈 벌어다주고 그 대가로 몸을 취하는 수컷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감정의 교류란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고 자빠진 자의 넋두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여자 사람은 급기야 우울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치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가족들이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너, 아직도 고생을 덜했구나?!”


여전히 공포와 불안 때문에 갈등을 회피하고, 그럴수록 우울해지는 소녀가 내면에 오도카니 앉아 있지만 빠른 속도로 자라나 변해가는 중인 어느 여자 사람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그 동안 제가 겪었던 숱한 상담에서 이 여자 사람처럼 “네 네 네 네, 맞아요, 선생님!” 소리를 반복했던 사람은 다시없습니다. 들을 때마다 아프고 아렸습니다. 그가 살아온 세월이 한눈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고비를 넘어가며 힘들어하는 모습이 가엾고도 장했습니다. 네 네 네 네가 네 네 네로, 네 네 네가 네 네로, 네 네가 네로 줄어드는 현장을 지키며 그와 함께 저도 공포와 불안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거래, 나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어떠한가요, 그대는? 그대 생의 공포와 불안, 거기 맞물리는 우울, 견딜만한가요? 그것을 정색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요? 네, 맞아요, 선생님!, 똑 이렇게 말입니다.


머리가 하얘진 밤, 욕망에 둔해진, 그러니까 그렇다면 서로 넉넉해질 수 있는 어느 시각, 흔들리면서 우리는 또렷이 공포와 불안에게 질문합니다. “정녕 네가 내게 들이닥치면 무엇이 어찌 되는 것인가?” 


무섭지 않다고 단언하지 못합니다. 다만, 이 순간 후후 입김을 불면서 멸치국수 한 그릇 나누어 먹을 수 있다면 서로의 무서움을 함께 이야기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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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우울증 - 남성한의사, 여성우울증의 중심을 쏘다
강용원 지음 / 미래를소유한사람들(MSD미디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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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 진지한 삶의 자세에서 나온 병·······

  돌아보면 저는 또래들이 어울려서 하는 놀이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가령 구슬치기, 딱지치기, 술래잡기, 다방구, 비석치기는 대개 구경하는 편이었지요. 그래서 어린 시절을 거치는 내내 뭐 하나 잘하는 놀이가 없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지나는 동안에도 각종 구기운동을 포함해 놀이를 하는 데는 거의 백치에 가까웠습니다.

  아마도 이런 성향은 놀이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즐거움을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다고 판단하는 인지 도식 탓인 듯합니다. 그렇다고 남들이 노는 시간에 죽어라고 공부를 한 것도 아닙니다. 아마도 겉으로 보기에 공부 행위에 근접하는 ‘책상놀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어머니와 화목한 가정에 대한 그리움, 억압과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망, 누군가를 정당하면서도 자애롭게 보살피고 싶은 욕망, 계속해서 파괴되는 무질서한 가정생활에 대한 반감들이 담긴 생각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는 행동이 제 주된 ‘유사 놀이’였습니다.

  결국 놀이를 통해 확보했어야 할 삶에 대한 유희적 감수성은 둔해지고 진지함에 압도되는 엄숙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지요.·······놀이를 낯설어하는 과잉된 진지함, 이 엄숙주의는 우울증이 삶의 기조로 자리 잡는데 인과관계를 주고받으며 짝패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의 우울증을 스스로 치유하며 잡은 큰 화두가 바로 ‘어찌하면 삶을 놀이로서 살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삶을 즐거움과 쾌감으로 체득하지 못하고 버거운 과제로 떠맡은 어린 날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원 없이 깔깔거리고 손뼉 치며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노니는 삶에 어찌 우울증이 깃들겠습니까. 설혹 우울함이 온다 해도 가치로 뿌리내릴 테지요. 관계의 미학, 그 배려와 양보, 그리고 눈부신 희생으로 자라나겠지요. 이를 엄숙함으로 받들지라도 놀이와 하나 된 것이 아닌 한 가식일 따름입니다. 아, 부디 엄숙주의는 가라!(80-81쪽)


대략 나이 육십 즈음인 사람들은 그 부모를 세상에서 떠나보내고 자식을 슬하에서 떠나보냅니다. 장례식장과 혼례식장에 드나들 일이 잦습니다. 사실 어디를 가든 서로 다른 두 상념의 경계를 가로지르기 마련입니다. 장례식이라고 해서 마냥 슬픈 것만은 아닙니다. 혼례식이라고 해서 마냥 기쁜 것만도 아닙니다. 예식이라고 해서 마냥 엄숙한 것만은 아닙니다. 술잔이 오가는 식사 자리라고 해서 마냥 떠들썩하고 어수선한 것만도 아닙니다. 만감 교차 그 자체입니다.


나오는 음식은 장례식에 육개장, 혼례식에 갈비탕이라는 차이를 빼면 거의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육개장과 갈비탕의 차이가 얼마나 의미심장한지는 알 수 없거니와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차이는 기원의 동시성을 지닌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상징적인 지표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손님, 그러니까 제3자에게 두 예식의 차이는 육개장과 갈비탕 정도로 귀결됩니다. 슬픔과 기쁨, 종말과 시작, 죽음과 삶의 차이란 ‘손님’ 눈으로 보면 이와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삶은 엄숙한 의례와 질탕한 연희, 진지한 노동과 즐거운 놀이가 전후좌우로 엮이면서 영위됩니다. 영유아 때는 놀이로만 살아갑니다. 놀이가 노동입니다. 학습이 시작되면서 놀이와 노동은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직업을 가지면 놀이와 노동은 완전히 분리됩니다. 직업을 떠난 마지막 도정에서 인간은 다시 놀이의 삶으로 돌아옵니다. 놀이와 노동은 삶을 구성하는 필수불가결의 두 요소입니다. 놀이만이라면 삶은 광기입니다. 노동만이라면 삶은 우울 장애입니다.


놀이는 재미를 낳습니다. 재미는 삶을 달굽니다. 달구어진 삶은 삶을 부풀게 합니다. 부풀어진 삶은 삶을 높이 띄웁니다. 노동은 의미를 낳습니다. 의미는 삶을 식힙니다. 식혀진 삶은 삶을 든든하게 합니다. 든든해진 삶은 삶을 나지막이 가라앉힙니다. 뜨고 가라앉는 유연한 역동의 흐름이 탱탱한 균형미를 빚어낼 때 비로소 삶은 건강해집니다. 우리는 뜨지도 가라앉지도 않는 적요를 향하지 않습니다. 떠도 미치지 않고 가라앉아도 우울하지 않는 참된 자유를 원합니다.


지난 달 중순 <416가족의 밤> 행사에 갔다가 우연히 근처 식당에서 유족 몇 분이 식사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다가 누군가 농담을 던졌습니다. 일동은 구김 없이 웃음 밭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식탁에는 서너 개의 술병이 놓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 풍경의 변방에서 작지만 포근한 안도의 힘으로 혼자 막걸리 잔을 기울였습니다. 아, 피눈물로 새끼를 가슴에 묻은 저들도 흔연히 웃어야 한다. 살아내야 하니까. 살아내야 덜 미안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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