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 암스트롱, 자비를 말하다 - TED상 수상자가 제안하는 더 나은 삶에 이르는 12단계
카렌 암스트롱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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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자비로운 인간이 되려는 시도는 평생에 걸친 프로젝트다.(238쪽)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안다. 책은 이렇게 끝나지만, 우리 과제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240쪽)


박근혜 탄핵심판 선고일이 내일로 박두했다. 탄핵정국을 지나오면서 나는 인간이란 과연 무엇일까 새삼 정색하고 생각했다. 박근혜 범죄 사건이 터져 나왔을 때 숨죽였던 박정희교 신봉자들이 지금은 나라 말아먹은 제 주군을 지키려고 온갖 협잡질을 서슴지 않는다. 저들의 난동 한가운데 김문수, 인명진, 서경석 따위 인물이 있다. 과거 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경력으로 명망가가 된 뒤 다시 독재정권의 품으로 돌아간 자들이다. 김문수, 인명진, 서경석은 과연 어떤 본성을 지닌 인간일까?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본성이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통속하게 접해온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는 본성 논쟁은 진실에 닿지 못한 조야한 담론이다. 선악은 범주 이항이 아니다. 선은 실재하되 실체가 아니다. 악은 실재하되 실체가 아니다. 대립하고 공존하고 혼효된다. 순수 선은 관념일 뿐이다. 순수 악은 관념일 뿐이다. 무한히 다른 맥락에서 각기 다른 생명 감각으로 살아가는 동안 선의 인연지음과 악의 인연지음이 소장을 거듭하다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 잡는다. 경향은 바뀌기도 한다. 바뀌는 본성은 없다. 인간은, 인간이라서 본성을 지니지 않는다.


김문수, 인명진, 서경석은 어떤 계기에 왜 그렇게 경향이 바뀌었는지 나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저들이 자비의 반대 방향으로 인연을 짓는다는 사실이다. 공동체 전체를 사적 소유의 대상으로 삼은 매판독재분단세력의 개가 되어 짖고 날뛰니 말이다. 저들의 무자비한 삶은 치열한 프로젝트다. 함께 살자는 자비의 삶 또한 프로젝트다. 더 치열한 자비 프로젝트여야 무자비를 넘는다. 프로젝트인 삶은 본성에서 자연히 나오는 결과가 아니다. 프로젝트로 본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인간의 삶이다.


이제 내가 속한 공동체 대한민국은 기로에 섰다. 나 물론 그러하다. 그 누구도 이대로는 살 수 없다. 오늘밤도 내일 밤도 모레 밤도 나는 광장으로 나간다. 나의 개인 프로젝트를 공동체 전체의 프로젝트에서 분리해내지 못한다.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제2기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커다란 내러티브 안에 나의 작은 제2기 프로젝트 에피소드가 시작된다. 60년에 걸쳐 진행된 나의 제1기 프로젝트 경향은 김문수, 인명진, 서경석과 정반대다. 갈수록 날카로워진다. 앞으로 펼칠 나의 제2기 프로젝트는 전체 자비 경향은 그대로되 나의 경험을 우선순위에 놓는 시대, 그러니까 우울의 피안을 여는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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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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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마음을 세심하고도 충분히 깊게 살펴보려 애써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적의 슬픔을 헤아릴 줄 알게 된다.(232쪽)

공유하는 고통과 동정심은 각자의 증오를 초월하게 하며 적이 지니는 비밀스러운 신성을 보게 한다(236쪽)


원수, 그러니까 적의 슬픔을 헤아린다, 적이 지니는 비밀스러운 신성을 본다, 할 때 왜 적을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가 묻기 전에 대체 적이 누군가부터 물어야 한다. 검토 없이 이미 상정된 관념상의 적은 사유를 왜곡한다. 나: 좋은 사람, 적: 나쁜 놈, 이렇게 규정하고 사유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인 내가 나쁜 놈인 적을 사랑하는 것이 지니는 도덕적 우월성을 깔고 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다시없이 육중한 위선이다.


뒤적거려보자. 나쁜 놈인 내가 좋은 사람인 적을 사랑하는 경우라면 어떤가. 정녕 내가 나쁜 놈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허공에 대고 지르는 소리일 뿐이다. 둘 다 좋은 사람일 경우는 적대관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테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전혀 불필요한 말이다. 둘 다 나쁜 놈일 경우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이미 말이 아니다.


결국 남는 것은 좋다, 나쁘다가 섞인 불순물인 나와 너의 경우다. 마치 허무 개그처럼 들리는 이런 결과에 허무해할 일 없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선악을 가리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진실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선악 이전, 나의 인식에 가로놓인 너에 대한 무지의 문제다. 더 근원으로 들어가, 나의 무지 너머 절대 신비인 너의 존재 문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통찰 기저에 닿는다. 인간이 인간에게 쓰는 가장 극한의 대척 언어와 사랑이라는 언어를 결합함으로써 사랑은 역설이 된다. 역설의 실천은 칼날 위에 서는 것보다 어렵다. 사랑은 만만하지 않다. 통속기독교가 사랑의 진실 앞에서 일패도지 한 까닭은 사랑을 전유했다는 부박한 자기기만 때문이다. 그 통속기독교의 실패가 지난 세월 대한민국 민주주의 실패를 견인했다. 3월 10일 11시 심판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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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문제를 맞닥뜨릴 때 줄곧 “그렇다면,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항상 어떤 사건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정신을 더욱 확장해 스스로가 비슷한 조건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느낀다는 것을 상상하도록 한다. 그러한 과정에는·······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자각하며 이해 한계를 경험하는 일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198쪽)


증오나 적대감에서 벗어나

무한한 호의가 무제한으로 온 세상에 번져가기를!

서든 걷든, 앉든 눕든,

우리가 깨어 있는 한,

마음속에서 이런 사랑을 길어 올려야 한다.

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삶의 방식이다(숫타니파타1.18).(202쪽)



고등학교 동창 하나가 찾아왔다. 구십 줄 노모와 육십 줄 아내의 건강 문제 때문이다. 이야기는 결국 소통이란 화두로 흘러간다. 어머니는 주로 근거 없는 불안에서 비롯한 불신을 이유로 아들과 소통이 잘 안 된다. 아내는 주로 서양 의학적 단편 지식에 터한 불신을 이유로 남편과 소통이 잘 안 된다. 어머니와 또 다른 그의 불안, 아내와 또 다른 그의 무지가 개재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맺힌 곳을 자분자분 풀어준다. 끝으로 대화 방식을 조언해준다.


친구의 격을 넘어선 감사 표시와 함께 그가 일어선다. 그의 눈시울에 깨달음의 붉은 빛이 은은히 서린다. “알면 받아들인다.”


안다와 모른다, 이 비대칭적 대칭은 범주 대립이 아니다. 스펙트럼이다. 100% 안다는 없다. 100% 모른다는 없다. 안다와 모른다가 뒤섞인 흐름이 있을 뿐이다. 어느 쪽으로 더 기울어진 상태인가, 정확히 알 수 없다. 좀 더 정확히, 그러니까 전체 진실에 터한 안다 쪽으로 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뿐이다.


어찌 하면 좀 더 정확히, 그러니까 전체 진실에 터한 안다 쪽으로 갈 수 있는가. 맥락을 살피는 일이다. 진부한가. 진부하다며 진실에서 멀어지는 것이 더 진부하다. 맥락은 개체가 전체의 바다로 나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배다. 그 배를 저어가면 전체의 바다에 기어코 닿는다는 말이 아니다. 결코 닿지 못 할 전체를 끝없이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이다.


상상하는 나만이 참 나다. 참 나는 상상하는 너가 있어 참 나다. 상상으로 너를 알아간다. 알아감으로 받아들여간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안다, 받아들인다, 전에 몸에서 먼저 느낀다. 느낀다는 안다보다 몸에 가깝다. 몸에 가까워서 모른다에 가깝다. 모른다에 가까운 느낀다는 안다, 받아들인다, 과정이 진행되는 내내 고요히 흐른다. 마침내 모두 받아들였다는 오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살짝 덥석 잡아준다. 알면 받아들인다가 휴먼스케일 안에 살아 움직이려면 느낀다를 떠나서는 안 된다. 붓다의 회향,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차마 장엄을 선포하지 않고 왜 숭고에 머무르는지 잘 보여준다.


느낀다의 겸허가 배어든 상상으로 나가 너를 안다는 것은 지식 너머 지혜를 짓는다는 것이다. 지식 너머 지혜를 짓는다는 것은 지혜 너머 살아 움직이는 실재를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실재를 함께 나누는 것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비다.


친구가 문 앞에서 손을 내민다. “오늘 치료 고마웠네,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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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땅에 이방인이 너희와 함께 살 때에, 너희는 그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이방인을 너희와 같이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해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 살 때에는 이방인 신세였다(레위기 20:33-34).(181쪽)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이 평택 시청 한 공간을 얻어 집단 상담으로 심리치료를 받을 때 나는 복도 귀퉁이에서 자리를 펴고 침 치료를 했다. <와락> 공간이 만들어진 뒤 치과 치료가 행해질 때도 귀퉁이 작은 방에서 개별상담과 침 치료를 했다.


치료 받는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나는 평택으로 향할 때도 평택에서 떠날 때도 이방인 정서 상태에 젖어들곤 했다. 가장자리에서 중심을 기웃거리는 자의 쓸쓸함이라 표현하면 조금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당치 않은 생각이라 여겼다. 얼마 뒤 나는 그 정서가 정확하다고 판단했다. 사실이 그러하다. 그 동안 내가 떠돌았던 이 땅 수많은 어둠 자리의 중심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중심은 그런 장을 마련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방인이 맞다. 변방의 떠돌이 신세가 틀림없다. 이방인, 변방의 떠돌이로 사는 것이 그저 쓸쓸한 것만은 아니다. 이들에게는 ‘인식론적 특권’이 주어진다. 이방인, 변방의 떠돌이 경험이 남을 나와 같이 여기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감수성을 안겨준다.


3월 5일 오후, 416연대 정기총회가 있었다. 회의 내내 나는 한 귀퉁이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머물렀다. 회의장을 떠나는데 깨달음 하나가 어깨를 툭 친다. “생애 중심에는 남을 세우고 생명 감각일랑 내 경험에서 자아올리는 것이 참된 자비다.”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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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친절하고 자비로운 태도로 진행되어야 한·······다.·······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하며,·······다른 사람의 생각에 공감하고 경청해야 하며, 자신의 확신이 흔들리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상대방은 더 많은 것을 알고자 마음을 열고 기꺼이 변화한다.(164-165쪽)


자주 보면 쉬워 보인다. 마음을 열어라, 대화해라, 쉬워 보여서 정작 하자면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마음 여는 일이 얼마나 드문 인간인가. 대화하는 일이 얼마나 드문 세상인가. 기꺼이 변화하는 일이 얼마나 드문 인간 세상인가.


변화야말로 길이며 진리며 생명이다. 박근혜가 스스로 변화하겠는가. 아니다. 이재용이 스스로 변화하겠는가. 아니다. 조용기가 스스로 변화하겠는가. 아니다.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 저들을 엄히 변화시키는 일이 바로 민중의 자비다.


민중의 자비는 트인 광장에서 베풀어진다. 트인 광장은 대화 그 자체다. 민중이 대화를 온 나라에 번지게 한다. 태극기 속에 일장기 숨긴 패거리가 한사코 마음을 닫는다. 성조기 흔드는 떨거지가 대화를 대결로 비튼다. 화 있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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