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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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이 70cm쯤 되는 커다란 양철 쟁반에 수북이 쌓인 브리야니(볶음밥)와 밧(흰 밥)에 식욕이 솟아올랐다. 한결같이 뼈에 붙은 닭고기와 양고기들이 듬뿍 쌓여 있다.

옆에서는 녹색 선향 대여섯 개가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브리야니는 4타카(1타카는 약 15원이다.-옮긴이), 밧은 5타카·······다. 이렇게 적은 돈으로 먹을 수 있다니, 신이 난 나는 비싼 쪽을 주문했다.

방글라데시에서 첫 번째 식사다.·······


쌀 문화는 역시 좋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두 입, 세 입 잇따라 먹었다. 그리고 뼈에 붙은 고기를 입으로 가져가려고 할 때였다.

“잠깐!” 갑자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먹다 남은 음식이에요.”

·······자세히 보니 고기에는 분명 베어 문 자국이 있었다. 밥도 이미 누군가의 오른 손에 짓눌린 듯했다. 선향은 썩은 냄새를 없애려고 피운 것이다.

욱! 내가 접시를 내려놓았다. 그 순간 마치 말린 고기처럼 가느다란 팔이 옆에서 불쑥 들어오더니 접시를 빼앗아 갔다. 열 살쯤 되는 소년이다. 돌아보니, 쩍 벌어진 입으로 뼈에 붙은 고기를 덥석 뜯어 물며 주위는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내게 충고한 사람은·······말했다.

“다카에는 부자들이 남긴 음식을 파는 시장이 있어요. 음식 찌꺼기 시장이죠. 도매상, 소매상도 있어요.”

입에서 신물이 줄줄 솟아올라 나는 연신 침을 뱉어냈다.·······(29-30쪽)


“안 먹을 수 있다면 좋잖아요? 그런 음식······.”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은 18세기 프랑스의 미식가로 유명한 브리야시바랭이 『미식 예찬』에서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짐승은 먹이를 먹고, 인간은 음식을 먹는다. 교양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먹는 법을 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도 가끔 짐승과 똑같이 ‘먹이를 먹는다.’

‘교양 있는 사람’, 돈 있는 사람은 우아한 모습으로 먹이를 먹을 뿐이다. 먹다 남은 음식을 먹는 사람, 대량 수입한 음식을 먹고 남기는 사람, 음식의 신이 있다면 틀림없이 전자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후자에게는 언젠가 배고픔과 목마름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하지 않을까?(35쪽)


1960년대 도시빈민 아이로 성장했던 내게 아뜩한 기억 가운데 하나가 아버지의 장기 실직 상태로 말미암은 기약 없는 굶주림이었다. 끼니를 건너뛰는 일은 항다반사였고 며칠을 내리 굶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럴 때는 학교를 가지 못했는데 담임선생님의 지시로 급우가 찾아오면 차마 굶어서 그랬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쩔쩔맸던 기억이 남아 있다.


요즘 세태라면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도 모를 터이나 그 시절만 해도 앞뒷집 정도는 내색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차리곤 했다. 다들 사정이 고만고만했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이 다들 ‘남씨 아주머니’라고 부르는 분이 바로 뒷집에 살고 계셨다. 여느 날처럼 굶은 채로 휑한 아침 시간을 견디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살며시 문을 열더니 나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영문 모른 채 따라나섰더니 당신 댁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안방에는 밥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부담스러워하지 말아라. 먹다 남은 밥이다.”


숟가락 자취 선명한 쌀밥이 반짝이고 있었다. 다스운 기운이 여전한 것으로 보아 아저씨가 출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아주머니와 내 이야기를 나누신 뒤 아저씨께서 일부러 밥을 남기셨음이 분명했다.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아주머니가 가만히 내 등을 다독여주셨다. 10살짜리 아이는 그 밥 다 먹도록 눈물을 멈추지 못 했다.


남이 먹다 남긴 밥인 줄 모르고 저자가 사먹는 풍경 자체에 우리가 꽂힐 필요는 없다. 그가 그 체험을 통해 증언한 참담한 ‘먹는 인간’ 문제에 직면하는 일이 필수다. 참람한 ‘먹는 인간’과 날카로운 대립구도부터 세워야 한다. 참람한 ‘먹는 인간’이 참담한 ‘먹는 인간’을 만들어내고 지속적으로 수탈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먹다 남긴 밥을 빼앗아 먹은 열 살 쯤 되는 소년과 이웃집 아저씨가 남겨준 밥을 울면서 먹은 10살짜리 내 처지는 개인적 측면에서 많이 다를 것이다. 사회정치적 측면에는 분명히 같은 점이 있다.


1971년 파키스탄에서 독립한 방글라데시는 정치적 불안정이 심각한 나라다. 오래토록 내전에 시달렸으며, 군부 쿠데타도 4번이나 일어났다. 공식적으로 1990년 군부 통치가 막을 내리고 1992년부터 민주정부가 통치를 시작했다. 불안과 빈곤은 여전했다. 소년이 저자가 남긴 밥 접시를 빼앗아 먹은 것은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1945년 일본에서 독립한 대한민국은 정부수립 2년 뒤 내전이 일어났다. 이승만의 장기독재는 1960년 4·19혁명으로 막을 내렸지만 이듬해 박정희가 일으킨 쿠데타로 다시 독재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1965년 서울로 와서 도시빈민으로 살기 시작했고 남씨 아주머니 덕분에 먹다 남긴 밥이나마 얻어먹은 것은 그 직후였다.


먹다 남은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그가 그런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도 아니고 부모가 무능·무책임하기 때문도 아니다. 전쟁, 불평등, 수탈을 토건으로 일으키는 극소수 지배층의 탐욕 때문이다. 참람한 ‘먹는 인간’이 “우아한 모습으로 먹이를 먹”고 남기면 참담한 ‘먹는 인간’은 그것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다. 이제 한 그릇 밥 앞에서 불현듯 생각해보자.


“이것은 과연 먹다 남은 밥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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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에서 온 것 아니면 그 무엇도 참으로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지만, 경험하지 않으면 제대로, 아니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진실입니다. 몸으로 알아야 할 것이 무엇보다 그러합니다. 몸에 가까운 앎일수록 경험은 육중한 표지입니다.


인간의 감정은 근본적으로 직접적인 몸 느낌의 파동정보입니다. 그 직접적인 몸 느낌에서 비롯하여 겹과 결이 다양하게 갈라져 나갈 뿐입니다. 공포-불안-공황은 가장 직접적인 몸의 감정에 속합니다. 병리적 공포-불안-공황은 간접 경험이나 이론으로는 전혀 앎이 일어나지 않는 감정입니다.


한숨과 한숨 사이로, 나직나직 속삭이듯, 재빨리 말하는 청년과 띄엄띄엄 몇 달 동안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출생 직후부터 10대 초반까지 어머니 아닌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연속과 인정, 그리고 수용으로 이어지는 모성은 그에게 그리움과 원망으로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단절과 부정, 그리고 거부가 몰고 온 공포·불안, 고립, 무력감에 휘말려 버둥거리고 있었습니다. 학령기 이전부터 시작된 정신장애는 청년 초기 정점을 찍었습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고야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족은 그의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소심하고 무능해서 그러니 다 제 팔자지 어쩌겠나, 정도로 방치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나는 버려졌다, 나는 (사회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나는 남들이 무섭다, 남들은 나를 모른다, 남들은 나를 (모르면서도) 비난한다, 나는 순수하고 진실한데 세상은 부조리하다·······. 저는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면서 조목조목 딱 하나의 같은 질문을 반복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처음에는 화를 내며 아, 정말이라니까요, 하더니 점차 그는 제 질문의 실체를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아닌 거 다 압니다. 그런데 아는 대로 움직일 수가 없네요,”


저는 그렇지 않은 맞은편 진실을 단순명료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렇게 조금 씩 조금 씩 세상 쪽으로 돌아서는가 싶더니 어느 날부터 홀연히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돌아보면서 제게 부족한 점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사실 그 무렵까지 마음 치유하는 의자로서 제 관심사와 감각은 우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경험이 가져다준 알토란같은 앎으로 말미암아 우울은 훤히 들여다보였습니다. 아픈 사람의 체취만으로도 우울장애의 유형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픈 사람의 마음결에 스미듯 깃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길이 머무는 곳을 정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불안 쪽은 사뭇 달랐습니다. 가벼운 정도의 고소공포를 제외하고는 공포·불안 계통의 병리적 경험이 없었던 탓에 기본 감각과 공감능력이 우울장애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약물치료만 하면 되는 정신과 양의사라면 크게 문제될 게 없지만 상담,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상호소통을 하려는 저로서는 여간 답답한 노릇이 아니었습니다. 이론적 대응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터라 막막해서 두려운 상황이 그때그때 연출되었습니다. 이런 동요는 분명히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이 청년과 더 좋은 인연을 맺지 못한 자책감에 잠겨 있던 어느 날 제게 하늘이 주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제가 공적인 공격을 받아 제법 긴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공포·불안에 시달리는 사건이 터져버린 것이었습니다. 다수의 관공서를 드나들며 겪은 공포·불안은 어린 시절 가족 간에 겪은 그것과는 결이 달랐지만 그 뒤 공포·불안 스펙트럼 환우들과 마주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청년을 지금 만난다면 어떨까, 부질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때 저와 나눈 대화가 마냥 무용했다고 할 수는 없고 어떤 형태로든 효과를 나타냈으리라는 추측도 해보지만 여전히 그의 그 뒤 삶이 궁금 넘어 걱정됩니다. 지금이라도 조금이라도 평안의 땅으로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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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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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봄, 박근혜가 자행한 대학살 이후, 나는 줄곧 울보로 살았다. 눈물이 주책없지는 않아졌을 무렵 어느 날, 책 한 권에 인연이 닿았다. 누가 추천한 것도, 어디서 서평을 읽은 것도 아니다. 책은 다만 그 흑백의 얼굴을 하고 진열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나도 스치듯 지나다 문득 보고 손을 내밀었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 눈물이 주책없어지고 말았다.


‘내가 먹는 음식이 곧 나다.’라는 진부한 말에는 그 진부함을 골백번 받아 안고도 남을 진실이 있다. 논자마다 다른 말을 할 수 있을 테니 나는 그저 내 이야기를 하겠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이따금 육식도 한다. 홀로 일부러 육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전혀 없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를 내 생각에 말아 넣지 않으려고 흔쾌히 먹는다. 홀로일 경우는 국수에 얹은 쇠고기 고명조차 빼고 먹는다. 이런 경향성은 내 삶의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1950년대 중반 강원도 평창의 깊은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먹을거리를 포함한 삶의 조건 전체가 식물적이었다. 나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식물과 각별한 애착을 형성하고 있었다. 색깔, 모양, 냄새, 감촉, 소리 모두에서 민감했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연두 빛 아기 호박, 앙증맞게 허리가 휜 새끼손가락만한 오이, 석유 냄새 비슷하던 돌미나리 향, 까만 흙을 털어내면 드러나는 하얀 햇감자의 매끈한 피부, 바람에 서걱대는 옥수수 이파리·······모두 10살 이전의 기억인데 한사코 순도 99.99%의 선명함을 자랑한다. 이들을 내가 단순히 먹을거리라는 수단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여전히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식물들과 생명의 연속성에서 두텁게 이어져 있다.


내가 채소를 먹는 것은 이른바 먹방에 출연한 연예인들이 고기를 먹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아니 그들이 채소를 먹는다 해도 그 또한 나와 다르다. 나는 적어도 포르노를 찍지는 않는다. 먹는 행위에 담긴 거룩한 제의와 흥겨운 놀이의 의미가 역설적 일치를 이루도록 하는 섬광 같은 순간이 전혀 배제된 경우란 내게 있을 수 없다. 그게 내가 체득한 강원도 산골 표 ‘먹는 인간’의 정체성이다.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10살 이후 겪은 도시빈민의 삶, 서서히 그러나 단단하게 자라난 사회정치적 각성, 그리고 의자로서 실천해야 할 과제가 결합된 ‘먹는 인간’의 정체성이다. 여기에는 대단히 선명하면서도 복잡한 판단 기준이 얽혀 있다. 먹는 행위를 가로질러 정치적 올바름, 반 향락적 절제, 산업농 비판은 한 끼 식사마저 무심코 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고뇌를 안고 있던 차에 고요히 닿은 『먹는 인간』은 지독한 가난의 기억에 연결된 내 소울 푸드 중용국수 한 그릇마저 부끄럽게 만들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눈물과 함께 읽었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계획 없이 몇 마디 적어보기로 한다. 출발점은 여기다.


“본디 도道는 먹는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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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수탈한 사람은 수탈당한 사람이 얻은 이득(이라 간주하는 것)을 들이미는 적반하장으로 합리화하기 마련입니다. 지주는 소작농이 자기 소유의 논두렁에서 콩을 수확했다고 주장합니다. 성폭행한 자는 상대방도 즐겼다고 주장합니다. 일제(와 그 부역자인 뉴 라이트)는 식민통치가 조선을 근대화했다고 주장합니다. 박정희와 유신잔당은 개발독재가 우리를 보릿고개에서 해방했다고 주장합니다.


부모, 특히 아버지한테서 학대당하고 적반하장의 합리화에 20년 이상 시달려온 청년이 한껏 피폐해진 영혼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 정체성이 아버지를 부정하는 에너지로 형성되어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배우자나 자녀를 대하면서 아버지 그림자가 드리워진 자신 모습에 진저리친 적이 많았습니다.


자신에게도 혐오 감정을 지닐 수밖에 없는 아버지‘표’ 현실이 죽도록 싫었습니다. 아버지‘표’ 현실은 힘이 매우 셌습니다. 어머니도 결국은 아버지의 부역자일 따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돈을 쥐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애면글면하지만 여전히 쪼들리는 생활 속에서 배우자도 자녀도 순간순간 미워지기 일쑤였습니다. 날로 까칠해지는 영혼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매우 이성적·논리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 그에 걸맞은 언어를 구사했습니다. 이 풍경은 그의 상처반응 또는 방어기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린 것이 제 실패였습니다. 그는 첫 상담을 마치고 나서 장문의 비판 글을 온라인에 올렸습니다. 의사가 공감은 않고 자기 틀로 분석만 하더라가 요지였습니다. 저는 심한 당혹 속에서 진심 어린 사과 글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제 글을 보고 자신의 글을 신속하게 내렸습니다. 저는 제 글을 그대로 두었습니다. 두고두고 보며 제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저의 정서적 공감과 지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뒤에도 그는, 공개 글은 아니지만 이런 사후 비판을 계속했습니다. 긴 호흡이 필요한 문제였습니다. 몇 번의 고비를 넘겨야 할 문제였습니다. 아직은 그에게 이 지구력을 요구할 시점이 아니었습니다. 수입은 멈춘 채 있고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이 어긋남은 끝내 우리의 만남도 어긋나게 하고 말았습니다.


수탈자는 피수탈자가 방어할 힘이 없을 때를 노려 덮칩니다. 당하고 난 뒤, 복원은 불가능합니다. 보상도 보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그때 맞서는 것만이 길입니다. 그때그때 맞서는 것이 계속 지체될 경우 피수탈자에게는 회한, 자책을 담은 상처반응, 방어기제가 쟁여집니다. 마음치유 행하는 자가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뼈아픈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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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어리석음은 무지에서 오지 않는다. 무지를 넘어서는 과정 가운데 불안과 탐욕이 개입해 맥락과 절연된 지식 포르노에 몰두하게 된 데서 온다. 지식 포르노는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무지를 끌어들인다. 그럴수록 지식 포르노는 극단으로 천착해 들어간다. 천착주의에 빠진 지식 포르노는 통제가 불가능하다. 통제 불가능한 꼭 그만큼이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은 결국 문명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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