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일생 동안 겪는 불행의 최소치는 있지만 최대치는 없다.’ 이치에 닿는 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는데, 들으면서 떠오른 얼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그중 하나입니다.


처음 제게 왔을 때 그는 4살짜리 아이 하나를 두고 이혼한 상태였습니다. 아이 양육권은 상대방이 가졌고 그는 월 1회 아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이른 파국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도 일찌감치 이혼해서 그는 계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와도 계모와도, 그리고 낳아준 어머니와도 친밀하지 못했습니다. 근본적인 친밀감 결함을 안은 채 20대 초반에 지르듯 혼인했으니 당최 제대로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에게 벌어진 아프고 쓰린 이야기를 하던 그가 제게 저녁식사를 대접해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습니다. 식사자리에서 그는 뜻밖의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제 아버지가 돼주실 수 있나요?”


앞서 했던 수많은 말보다 이 한 마디가 그의 모든 병리를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 겪는 일도 아니고 해서 별 망설임 없이 그러마고 대답해주었습니다. 그 뒤로 그와 저는 부모자식처럼 삶의 구석구석을 이야기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른 사람을 만나 재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아이 건강에 문제가 생겨 천신만고하는 모습도 지켜보았습니다. 온갖 갈등을 겪다가 다시 이혼하는 풍파도 지켜보았습니다. 문제는 제가 계속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게 원한 아버지 노릇이 이런 것은 분명 아니었을 텐데 그는 미리 도움을 청해서 실수와 실패를 예방함으로써 삶을 바꾸는 길을 택하지 못했습니다. 일이 터진 뒤에 ‘왜 자꾸 이러는 걸까요?’ 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후에 내린 제 처방조차 실행에 옮기지 못 했습니다. 한 동안 소식을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연락해서 약속을 잡으면 꼭 무슨 일이 생깁니다. 약속은 미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핍이 낳은 그리움 때문에 타인이 자기 경계 넘어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백발백중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그리움으로 타인의 경계를 넘어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자신의 삶을 바꿀 기회를 번번이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아직도 저를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가 그 날 이렇게 질문했더라면 삶은 좀 달랐을 것입니다.


“선생님, 제가 아버지로 모셔도 될까요?”


물론 저는 아직도 그 질문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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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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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은 그리스도의 살이고, 포도주는 피입니다. 빵도, 포도주도 성체입니다. 기도가 끝나면 먹습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눠 받는 거죠.”(176쪽)


·······성서 낭독을 들으면서 묵묵히 토마토 수프와 채소 스튜를 먹고 있는데, 앞줄에 있던 수염이 덥수룩한 매부리코 수도사의 사제복 호주머니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뭔가가 보였다.

왠지 불길해 보이는 것이 손잡이 부분에 있었다.

설마 하면서도 목을 빼고 뚫어지게 쳐다보니, 그 매부리코 수도사는 그게 걸리적거리는 바람에 제대로 앉기가 힘들었는지 호주머니에서 쑥 빼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탁에 툭 올려놓는 게 아닌가! 검게 빛나는 권총이었다. 옆에 앉은 수도사는 곁눈으로 보고도 놀라지 않고 채소 스튜를 볼이 미어지도록 먹는다.·······코소보 수도원 중에는 알바니아인 이슬람교도의 습격이 두려워서 권총을 소지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종교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다. 성스러운 빵과 권총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178-179쪽)


스스로 장자長子 교단이라 일컬으며 콧대 높이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이 교단헌법 개정안을 내놨다. 목사는 30세 이상 남성만 가능하다. 목사는 동성애자를 출교시킬 권한을 가진다. 명실상부 ‘개독교’다. 그 ‘개독교’를 지키기 위해 새로 장만한 권총이 교단헌법 개정안이다. “그렇게 하면서까지 종교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나는 알” 만큼 안다.


심오하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이명박이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이유와 같다. 전혀 그렇지 않은 목사가 몇 있다는 사실로 이 진실은 전복되지 않는다. 이 진실의 경계 밖으로 나오려면, 전혀 그렇지 않은 목사 몇은 지금 당장 ‘개독교’ 혁파에 나서야 한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버려야 한다. “검게 빛나는 권총”을 찬 채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눠 받는” 짓을 멈춰야 한다. 그리하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의 주님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는 것이다. 종교를 지키려고 종조를 죽이면서 “볼이 미어지도록 먹는” 아귀 같은 삶을 언제까지 계속할 셈인가.


다시 정색하고 물어본다.


“종교란 무엇인가?”


스티브 테일러를 잠시 부른다.


“타락한” 종교들은 세상을 내려다보고 지배하는 의인화한 신들에 대한 숭배에 바탕을 둔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대표적이다. 세상을 내려다보고 지배하는 가부장적 남성 권력자가 자신의 아바타로 세운 것이 전지전능한 거대 신이다. 전지전능한 거대 신은 가짜다. 스티브 테일러를 다시 부른다.


“타락하지 않은” 종교들은 세상과 세상 모든 사물에 들어 있는 영적인 힘에 대한 인식과, 세상은 수많은 개별적인 영으로 충만하며, 이것들은 종종 자연현상과 결합한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다.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종교가 대표적이다. 세상과 같은 눈높이에서 작디작은 것에 작디작게 배어들고 배어나오는 사람들이 지니는 영성의 네트워크다. 소미심심小微沁心한 신이 진짜다.


진짜 신은 자신의 신봉자들에게 다른 신의 신봉자를 공격하라 명하지 않는다. 진짜 신은 자신의 사제에게 권총 차고 목숨, 아니 종교를 지키라고 명하지 않는다. 진짜 신은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기 전에 경전 읽으라, 찬송하라, 기도하라 명하지 않는다. 진짜 신의 살과 피 그 자체가 경전이며 찬송이며 기도다. 경전이며 찬송이며 기도인 신의 살과 피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유산균이며 이름도 잘 모르는 푸성귀며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좁쌀이다. 유산균 하느님에게 텍스트 없는 경전을, 푸성귀 하느님에게 소리 없는 찬송을, 좁쌀 하느님에게 말 없는 기도를 바치며 거룩하고 신나게 먹는다. 식탁 위에 권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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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하고 깔끔해 보입니다. 똑 떨어지는 서울말을 구사합니다. 경위가 바르다는 인상을 줍니다. 함부로 끼어들거나 헤프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맑은 정신일 때 그가 그려내는 최상의 풍경화입니다. 막상 아프고 슬픈 내면 풍경으로 들어갈라치면 마치 내면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반응합니다. 기억도, 기억에 붙어 있는 감정도 일절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중증 알코올중독입니다. 시설에도 들락거렸으나 나아지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지친 가족이 손을 놓아버렸습니다. 그는 영악하고 치밀하게 술만 ‘흡입하는’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몸도 마음도 붕괴되어갔습니다. 이대로 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가족이 마지막 힘을 내어 제게 데려왔습니다.


저는 일단 그가 병과 생을 숙의할 힘이 남아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 깍듯한 페르소나에 말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얼마 가지 못 했습니다. 그는 오직 껍데기로만 존재하고 껍데기로만 말할 뿐이었습니다. 더는 속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드러낼 속이 본디부터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대화 지속은 무의미했습니다. 잠깐 동안의 퍼포먼스 외출을 끝내고 그는 이내 옛 생활로 복귀했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정말 그에게 내면은 없는 걸까? 사실 우리가 쉽게 내면이라는 말을 쓰지만 외부 세계와 절연된 내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내면은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형성되는 기억·감정·각성·의지의 흐름입니다. 결국 내면의 내용은 관계의 내용입니다. 내면에 어떤 문제가 있다면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로 본다면, 마치 내면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은 그가 접촉은 하지만 실질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의 결과입니다. 실질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까닭은 미상불 상처일 터. 그 상처를 각성하지 못하는 한 이 악순환의 고리는 끊을 수 없습니다. 그의 경우 상처는 즉자적 상태, 그러니까 몸으로 들어간 상태이기 때문에 각성 이전의 아득한 곳으로 퇴행했습니다. 퇴행의 막강한 후원자가 바로 술입니다. 술은 모성의 이미지로 그를 감싸 각성의 서늘함을 차단합니다.


이런 전경 앞에서 의자는 겸허와 절망을 동시에 느낍니다. ‘신약성서의’ 예수 그리스도일 수 없는 한, 고통 받는 그가 가는 길을 빤히 보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저는 그를 데리고 온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족의 내면을 보듬어 잘 견디게 하는 일이 저로서는 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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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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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레브 중심부에서 네오고딕 양식 첨탑으로 하늘을 찌르고 있는 성슈테판대사원.

이 사원도 유고 출신 가톨릭교 수녀인 마더 데레사의 내방을 기념해, 주로 거지나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무료 급식소를 두고 있다.

1991년 세르비아 측과 전쟁 상태로 들어가기 전에는 하루에 두세 명이 올까 말까 했는데, 지금은 급식 인원인 80명을 넘는 굶주린 사람들이 찾아온다.

·······나는 주린 배를 안고 불안한 발걸음으로 언덕을 오르는 남자들 틈에서 급식소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고 겨우 5분 만에 사람들로 꽉 찼다. 문이 닫혔다.·······

어딘가에서 수프 냄새가 난다 했는데, 수녀가 “여러분, 이걸 들어야 식사할 수 있습니다.” 하고 운을 떼더니 성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식사가 보류되었다. 누군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 다음에는 기립해서 찬송가를 부른다. 숟가락을 꽉 쥔 남자들이 노래를 부른다. 악에 받친 듯 숟가락을 휘두르면서 노래하는 남자도 있다.

아니, 입만 뻥긋거리는 사람이 많다. 다리를 떠는 사람도 있다. 오로지 의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훌륭한 자선이지만 좀 잔혹하다. 바로 음식을 나눠주면 안 될까?·······

찬송가가 끝났다.

아아, 그 뒤에 이어지는 남자들의 식욕은 대단했다.

다양한 민족의 피를 받은 각양각색의 얼굴들이 똑같이 맹렬하게 달라붙었다.·······

정직하구나. 왠지 성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도 빵이 왔다. 받을 수가 없었다.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의 손이 창밖에서 뻗쳐왔기 때문이다.(154-156쪽)


대학원에서 신학 공부를 함께하며 친하게 지냈던 목회자가 찾아왔다. 외과수술 후유증으로 극심한 두통, 구토, 현훈(어지러움)이 있는데 서양의학으로 해결이 안 된다고 호소했다. 수술 이후 회복 과정에서 보여주는 몸의 자연 치유, 자율신경 증상, 피부 신경 지배, 정보로서 의학 이야기를 소상히 해주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왜 양의사는 해주지 않느냐며 분개했다. 이야기 나누고 간단한 침 치료를 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그를 동네 백반 집으로 안내했다. 그는 언제 아팠느냐는 듯 즐겁게 식사를 했다.


밥집에서 대화하는 중에 내가 숙의로 마음치료를 한다 했더니 그는 적잖이 놀랐다. 돌아가면서 그는 내가 쓴 책을 모두 다 구입했다. 사나흘 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새 책을 전부 읽었다면서 매우 감명 깊었다고 했다. 기독교 신학에 갇혀 있다가 모처럼 마음이 활짝 열렸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긴 시간 동안 이런저런 질문을 통해 내 논리와 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감사를 표하더니 향후 자신의 목회와 접점이 많을 것 같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했다. 통화를 끝낸 뒤 내 생각은 좀 미묘해졌다.


60대 중반의 목회자가 지녀온 오랜 보수 신학에 단박으로 금을 내어버린 것, 무엇보다 붓다와 원효에 마음을 열게 한 일은 ‘사건’이다. 그러나 그의 마무리는 여운을 남긴다. 붓다도, 원효도, 비대칭의 대칭도, 내 숙의치유도 그의 사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기독교 선교의 방편으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 굶주린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면서도 성서를 듣게 하고 찬송가를 부르게 하는 것이 기독교의 선교주의 세계관이니 말이다. 기독교의 어떤 “훌륭한 자선”도 “잔혹”함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말이다.


붓다든 원효든 비대칭의 대칭이든 내 숙의치유든 기독교의 잔혹함을 완화하는 부드럽고 열린 힘으로 작용할 수만 있다면 마다할 것은 없다. 기독교의 일극집중구조에 금을 내는데 자체 내의 신학이 무력하다면 이런 외부사유의 도움을 받는 일이 무에 나쁘랴. 기독교 도그마 체제를 완파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즉각 일어나지는 않는다. 나는 흔쾌히 그를 존중하기로 한다. 밥집에서 식사 기도를 그가 내게 의뢰했을 때 나는 정중하되 단호하게 거절했고, 그런 나를 그가 담담히 수용하여 홀로 묵도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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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받던 학생 하나가 어느 날 밤늦게 전화를 해왔습니다. 저를 만나기 위해 이미 택시를 타고 한의원으로 출발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심경으로 집에 있기가 힘들어 며칠만이라도 밖에서 지내고 싶다며 당장 오늘밤에 재워달라고 하소연했습니다. 가족 간에 상처를 주고받아 매우 심각한 정도의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저는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었습니다. 배고픈 내색을 하기에 근처 치킨가게에 들어가 따뜻한 닭튀김을 먹이면서 부드럽게 대화를 계속했습니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함께 택시를 타고 그의 집을 향했습니다. 현관 앞까지 데려다주고 제 집으로 돌아오니 새벽 두시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문득,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질문이 솟아올랐습니다. 잠에서 억지로 깨어 졸린 눈을 비비며 아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얼른 대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의자醫者가 일반적으로 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혹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건 지나치다 싶은 생각, 누구라도 하겠지요. 애당초 그런 전화를 허용한 것부터 문제다, 전화를 받더라도 오라고 한 것이 문제다, 만나서 대화를 하더라도 데려다준 것이 문제다, 그렇게까지 하고나서 더럭 ‘이게 뭐지?’ 하는 게 진짜 문제다....... 어디까지가 의자의 행동반경인지, 어디부터는 넓은 오지랖 문제인지, 아니면 아예 자기 파괴적 희생에 지나지 않는지....... 판단하기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마음을 치료하는 일을 하겠다고 나선 의자인데 어찌 보면 다른 의자보다 이런 점에서 자상함과 대범함을 두루 갖추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 의료 현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매우 관념적이고 순진한 증거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돈으로 연결되지 않는, 전략 부재의 부질없는 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직업이 소득의 많고 적음으로 평가되는 현실 안에서도 의업만큼은 상대적으로 휴머니즘이라는 윤리적 기반을 더욱 든든히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소신을 지니는 한 이런 요청을 일소에 부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끝내 이런 딜레마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입니다. 성자 아닌 평범한 의자로서 지닐 수밖에 없는 숙명적 한계일 테지요.


“하필 내가 왜 이런 식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이 한 축을 이룹니다. 돈도 명예도 힘도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제 앞가림도 넉넉히 못하는 주제에 물색없는 짓을 하는 게 아니냐는 질타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런 질문이 다른 한 축에 있습니다.


“사실 나야말로 이런 식의 삶을 사는 게 제대로 된 길 아닌가?”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고친다는 깊은 이치로 따지면 이 질문은 구태여 답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자기 아픔 때문에 자기 내면 가장 깊숙한 곳을 향한 질문이 솟아오를 때 귀 기울이는 한 마디가 있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한 일곱 마디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이 말이 어떤 울림을 주는가와 무관하게 저는 제 방식대로 읽습니다. 누군가와 상담치유를 행할 때, 제 귀에는 아픈 사람의 저를 향한 절규가 그리 들립니다. 제가 하느님이냐고 물으십니까? 예, 저는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절규하는 이는 그럼 누구냐고 물으십니까? 절규하는 이도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아픈 이의 하느님이고 아픈 이는 저의의 하느님입니다. 무릇 모든 인간에게 그렇습니다. 나는 누군가의 하느님이고 누군가는 나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으로서 하느님을 극진히 모시는 곳이 하느님나라입니다. 하느님나라는 바로 지금 여기 있습니다. 의자로서 매순간 하느님나라를 실천하지 못했을 때,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날 밤 제가 그 학생에게 어찌 해야 하느님나라를 실천하는 것이었는지 지금도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참으로 모자람이 있지는 않았을까? 모자람과 맞닿은 헛된 넘침은 없었을까? 여보세요! 여보세요! 맘이 아파요! 소리가 계속 들리는 듯도 하니 혹 이게 직업병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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