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병은 아무리 하찮아도 병으로 인정하고 신속하게 치료합니다. 마음의 병은 아무리 심각해도 병으로 인정하고 신속하게 치료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게 우리사회의 일반적인 질병 인식 수준입니다. 누가 우울증이다 하면 정신력이 나약하다느니 호강에 겨워 그렇다느니 입찬소리 쉽게 해버리는 풍경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합니다. 요즘은 조금 다른 버전으로 마음의 병을 홀대합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다, 약만 먹으면 금방 낫는다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협공 탓에 우리사회에서 우울장애 환자가 상담치료 받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50대 중반의 매우 위중한 우울장애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누군가에게서 저를 소개 받았는데, 자신이 인터넷을 통해 찾아서 꼭 한 번 가봐야겠다 메모해둔 사람하고 일치해서 놀랐다며 좋아했습니다. 저는 초군초군 우울장애 전반과 통합치료 계획을 설명했습니다. 그는 희망에 부풀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금방이라도 무슨 결단을 내릴 듯 했던 첫날과 달리 다소 힘 빠진 표정으로 다음 날 나타났습니다. 당분간 침 치료만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감했습니다. 그 다음 날 와서는 배우자가 시골로 이사 가자 말했다고 했습니다. 제가 놀라서 물으니 그제야 상세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우울증은 조용하고 공기 맑은 시골로 내려가 평화로운 전원 생활하면 낫는 병이라고 우깁니다. 상담하고 한약 복용하겠다고 했더니 돈이 남아 도냐며 펄펄 뜁니다. 아무래도 선생님께 통합치료 받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긴 한숨을 내쉬는 그에게 저는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여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침마저 맞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정말 이사를 갔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나중에 우연히 안 사실은 가벼운 어깨 근육통 때문에 신근히 침을 맞으러 오던 초로 한 분이 있었는데 바로 그가 그의 배우자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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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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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무척 활달한 문옥주 할머니는 사실 살아 있는 ‘슬픈 백과사전’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전의 한 쪽 분량도 글로 쓰지 못한다.

1942년 2월부터 3년 동안 미먄마 각지에서 강제로 위안소 생활을 했다. 할머니 말로는 하루에 병사를 50명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잊을 수 없는 맛도 있다. 랑군의 위안소에 있었을 때다. 사단 사령부의 창고계 병사가 꽁치 통조림을 가져왔다. 달랑 통조림 하나에 채소와 소금을 곁들여 여자들 열 명이 나눠 먹었다.

“맛있었어. 최고였어.”(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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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이 늦었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문옥주 할머니의 명복을 빈다(1996년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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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길러주신 할머니는 조선이 거의 다 스러질 무렵 강원도 완고한 잔반의 딸로 태어나 교육을 전혀 받지 못 했다. 당신의 이름 석 자조차 제대로 쓰실 수 없었다. 타고난 슬기와 수완으로 집안을 일으키고 아들 둘과 딸 둘을 홀로 키워내셨다. 오동나무 장 같은 성품을 지니셨으며, 몸으로 익힌 현명함을 한 평생 단단히 유지했던 분이다. 노년에 이르러서는 작은 딸의 영향으로 동네 자그마한 교회를 다니셨다. 소박한 신앙의 이로를 지니신 한편 통속한 교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의 판단대로 자유롭게 움직이셨다.


청년 초기 시절 대부분 나는 집을 떠나 살았다. 그러다 한 동안 불우의 시간을 할머니 곁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른 오후 나른한 산동네 적막 속에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할머니께서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가셨다. 20분가량 지났을까. 파전 두 장, 소주 한 병을 쪼그만 쟁반에 담아 들고 들어오셨다.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할머니는 한쪽 눈을 찡긋하셨다.


“맥 빠지는 날은 소주가 책보다 낫느니라.”


내 인생 최고의 파전이었다. 내 인생 최고의 소주였다. 그 최고의 맛은 좌절과 정지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결코 잊을 수 없는 해후였다. 그땐 몰랐지만 내가 느지막이나마 삶에 종자신뢰를 지니게 된 데에는 이 해후와 엮인 힘이 작용했을 터. 그 뒤부터 나는 할머니 식 파전이 아니면 파전 맛을 모른다. 그 뒤부터 나는 비록 가짜지만 희석식 시중 소주를 소울 푸드로 여긴다.


문옥주 할머니의 슬픈 백과사전은 꽁치 통조림을 소울 푸드 목록 제1순위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오늘 저녁엔 문옥주의 통조림 꽁치를 내 할머니의 파전에 싼 안주와 함께 내 할머니의 소주를 마셔보면 어떨까 싶다. 내 입에서 이런 말이 터져 나오지 않겠는가.


“맛있었어. 최고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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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종 업계에서 이름 석 자 뜨르르한 사업가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의 성공은 극단적 프로세스 구사에서 비롯했습니다. 극단적 프로세스는 그가 지닌 극단적 세계관의 구체화였습니다. 그의 극단적 세계관은 생의 어느 순간 입은 깊은 상처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승승장구 사회경제적 성공가도를 달려 안정풍요를 구가할만한 시점에 다다른 어느 날 그는 충격적 공허와 마주쳤습니다. 그는 당황했습니다. 이 깊고 텅 빈 어둠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다가 이른바 영성 프로모션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기품 없으되 경영마인드 갑인 자기계발 프로젝트에 거금을 쏘아 공허감 극복을 시도한 것입니다.


당연히 효과는 있습니다. 문제는 효과가 반드시 단계별로 나누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 효과는 다음 효과를 위한 미끼여야 하니 말입니다. 높은 단계로 올라갈수록 요구하는 돈은 당연히 수직상승합니다. 어느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 자신을 발견하고서야 그는 혹시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반신반의 저를 찾은 이유였습니다.


상담을 진행하는 동안 그가 많은 가면을 쓰고 산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가면을 쓴다는 것은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자기 삶의 소중한 일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런 가면이 많다는 것은 그의 삶 도처에 있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억누르고 산다는 뜻입니다. 결국 그의 삶 전반이 거대한 자기부정증후군에 빠져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나직나직 말했습니다.


“이것을 의학에서 우울장애라고 이름 합니다.”


찰나적으로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흔들렸습니다. 아마 처음 듣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의 그 가면으로 능숙하게 눙치고 지나갔습니다. 저는 모르는 척, 무심한 어조로 처방을 내렸습니다.


“치료가 필요하지 프로모션은 가당치 않습니다. 프로모션이 메우는 것은 공허가 아니라 공허감일 뿐입니다. 공허가 실재임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려면 우울장애의 본진과 마주서야 합니다.”


수긍 여부와 무관한 표정으로 그는 심각하게 고려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얼마 뒤, 그가 자신이 참여했던 자기계발 프로젝트와 관련된 일에 거액을 투자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물론 그의 길은 그가 결정할 권리를 지닙니다. 저는 그 결정이 독선이 낳은 독단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화살은 이미 어긋난 방향으로 떠나버렸습니다.


마냥 휑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덕분에 잠시나마 속물근성 댕댕하게 불려 끌탕할 수 있었습니다. 아, 그 돈이 한없이 아깝게 느껴지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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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 메멘토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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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을 먹은 이 할머니가 인사하면서 참 아름다운 일본어로 말했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전에 김 할머니와 먹었을 때에도 똑같은 인사를 받았다. 일본인은 이미 잊어버린 식후 인사를 할머니들은 언제 어디서 익혔을까?

나는 깨달았다.

김 할머니도, 이 할머니도 맛의 기억을 담은 개인사를 오랫동안 천천히 이야기하면 할수록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러워졌다.(337쪽)


아끼는 후배 하나가 암 투병을 하고 있다. 발견에서부터 1차 항암까지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항암 받고 죽다 살아나자 이건 아니지 싶어 내게 연락을 해온 것이다. 나는 간략히 암의 본질과 서구의학의 범죄적 오류를 일러주었다. 무엇보다 암은 마음의 병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자신과의 화해, 결별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통전치유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식욕부진을 호소하기에 억지로 먹으려 애쓰지 말고 자연스러운 단식을 하도록 권했다. 가벼운 단식이 식욕을 불러오면 영양·치료 이런 요소를 고려해 이른바 ‘좋다’는 음식을 먹지 말고 우선 먹고 싶은 음식부터 시작하라 했다. 특히 이야기가 들어 있는 소울 푸드를 찾아 먹으며 자신과 대화하라고 했다. 그는 어머니의 기억이 담긴 떡국부터 먹겠다며 감격해했다.


먹는 것은 몸이 닿는 것이다. 몸이 닿아 일으키는 감각은 모습과 냄새와 맛과 소리의 소통으로 전방위화 된다. 이 소통은 생사의 마주 가장자리를 끊임없이 두드리며 떨고 흔든다. 소미한 에피소드들을 그 파장 따라 “오랫동안 천천히 이야기하면 할수록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러워”진다. 지옥의 물 한 모금에도 아름다운 감사가 솟아나온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모습과 냄새를 기억하지 못한다. 오직 기억나는 것은 어머니가 통무김치 씹을 때 나던 오도독 소리다. 어머니를 떠올리면 모든 기억이 빛바래 애증 한 줌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오도독 소리 하나가 탱탱한 그리움을 불러온다. 상처 없는 밥상이 상처 없는 태곳적 모자의 몸 닿음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부드러운 눈매 하고 비로소 불러본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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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가 정신장애에 더 많이 걸린다는 통계와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유한 계층 사람들 가운데 정신장애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는 통계는 공존합니다. 당연히 각기 다른 이유와 똑 같은 근거도 공존합니다. 먹고살기 힘들어 정신이 피폐해지는 증상과 가진 게 너무 많아 영혼이 파리해지는 증상은 물질에 휘말린 것이라는 하나의 본질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흔히 이렇게들 말합니다. 먹고살기 바쁜데 우울증 걸릴 새가 어디 있어? 뭐가 부족해서 우울증이냐? 다시없는 개소리입니다.


그는 유서 깊은 부자 동네 고급 아파트에 삽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법조인입니다. 단정하고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니 뭐가 부족해서 우울증일까요? 툭 치면 바로 울음을 터뜨릴 듯 위태로운 표정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리는 부가 자신에게, 자신의 삶에 무엇인지 생각해본 일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있었고 늘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기에 마치 자신의 몸처럼 자각 없이 부려왔습니다. 무심코 그것이 자신의 인격과 정신의 불가결한 일부라고 여겨왔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던 그 낙원 밖으로 나갈 일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지방으로 발령이 난 것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본가로 오기는 하지만, 낯선 지방도시 외곽에서 장기간 홀로 불편한 자취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이 갑작스런 분리(!)는 정신적으로 그에게 날카로운 금을 내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의 파고가 높아졌습니다. 불안이 덮치면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작게 느껴졌습니다. 삶의 의미도 재미도 사라져갔습니다. 쓸쓸함과 외로움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가족은 전혀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예의 그 전형적인 ‘뭣이 부족해서’ 식 반응을 보였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태가 악화되자 어머니는 ‘대한민국 최고 병원’으로 그를 데려갔습니다. 정신과전문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몇 가지 물어보더니 약을 처방해주고 2주일 뒤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릴없이 돌아서 나왔습니다. 약을 쓰레기통에 버린 뒤 수소문 끝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매우 초조해했습니다. 하루 빨리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도 없었습니다. 가족력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 특별한 요법을 쓸 수도 없기 때문에 저는 그에게 이치를 설명하고 차분한 상담이 정도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 터널을 잘 통과하면 전혀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현백해두었습니다.


그는 세 번째 상담시간에 오지 않았습니다.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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