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이 정말 존재한다면 똑 그와 같은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유령처럼 들어서는 광경을 본 제 영혼이 먼저 눈물을 흘렸습니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것만 같은 입을 열어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넷 에움 모두 숨죽이는 듯했습니다.


그는 10대 초반부터 우울증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귀신이 씌웠다고 하면서 그를 골방에 가두었습니다. 아버지는 사이비 개신교 목사였습니다. 아버지는 안찰기도 한다며 온몸을 두들겨 팼습니다. 그는 네 차례나 도망쳤습니다. 그때마다 잡혀 들어와 더욱 모질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숨겨두었던 얼마간의 돈을 들려서 제게 보냈습니다. 헐떡임조차 나지막한 숨 사이로 더듬더듬 기어가던 그의 이야기는 얼마 못 가 멈추었습니다. 말할 기력도 부치거니와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연들이 겹겹 쌓인 고개를 넘어가기 무서웠던 것입니다. 저는 그를 잠시 누워 쉬게 했습니다. 한참 뒤, 저는 처방을 내렸습니다. 하얀 종이에는 큼직한 글자 두 개가 쓰여 있었습니다.


“가출”


심신이 극도로 피폐한 상황에서도 그는 단호히 결단했습니다. 이튿날 가방 두 개를 들고 한의원에 나타났습니다. 두 명의 친구 집에서 하루씩 묵은 뒤 한의원으로 돌아왔기에 ‘마침 봄이기도 하니 한의원에 머무르면서 갈 곳을 찾아보라.’ 일렀습니다. 밥도 사먹고 영화관도 가고 책도 사 볼 수 있게 얼마간 용돈을 쥐어주었습니다. 사흘 지나 그는 꽤 여러 날 지낼 수 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저는 그를 데리고 가까운 음식점으로 갔습니다. 음식을 앞에 놓고 그가 말했습니다.


“시력이 떨어져 제대로 볼 수 없었는데 이젠 파란 나뭇잎이 보여요. 집중이 안 돼 책을 읽을 수 없었는데 이젠 내용이 머리에 들어와요. 식욕이 없어 도통 먹을 수 없었는데 이젠 맛있어요. 이거 다 먹을 거예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그는 밥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행복하며 그렇게 존엄한 식사를 그날 이후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작별인사를 하는 그에게 한약과 용돈을 건네며 말해주었습니다.


“부디 자기 자신의 연인으로 사세요. 스스로 연애를 걸지 않는데 누가 있어 프러포즈를 해오겠어요.”


그는 또 다시 눈물을 흘리며 돌아섰습니다. 어름어름 잊힐 만한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완전히 탈출했음을 알렸습니다.


“선생님, 이제 제 걱정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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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암이 발병해 그만두었다가 ‘구름에 달 가듯이’ 교인들과 노닐겠다며 새 교회를 여는 친구 목사 초대로 창립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어떤 부부와 반가운 해후가 이루어졌습니다.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제가 도리어 감격에 겨워했습니다.


그들은 그때로부터도 몇 년 전 10대 초반 아들을 데리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이는 ‘뚜렛증후군’이었습니다. 이 질병은 틱 장애가 1년 이상 치료되지 않는 중증 상태입니다. 안 가본 데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중에는 우리나라 최고권위자-무슨 근거에서 하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도 있었답니다. 3년 이상 그렇게 헤맸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습니다. 애를 끓이던 차에 우연히 한 선배한테 제 말을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 선배가 바로 이 해후를 가능케 한 제 친구 목사였습니다.


상황 설명을 간략하게 들은 다음, 저는 부모를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아이와 단 둘이 마주앉았습니다. 아이는 질병에 시달려 낯빛이 검었습니다. 제대로 자라지 못해 몸이 전체적으로 아주 작았습니다. 저는 아이와 눈을 맞추려고 납작 엎드렸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이 병이 왜 생겼는지 알지?”


아이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또렷하게 대답했습니다.


“네! 알아요. 근데 아무도 묻지 않았어요!”


그렇습니다. 아이는 여태껏 누가 물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3년이나 지나도록, 그의 부모는 그렇다 치고, 수많은 의사들조차 단 한 번도 묻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아이는 모를 거라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마음 상태와 무관한 병이라는 잘못된 의학적 판단 때문입니다. 아이가 제게 들려준 사연을,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부모가 들려준 이야기와 결합해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아이가 아직 아기였을 때 아버지는 교회 전도사였습니다. 한국 교회가 대개 그렇듯 새벽기도회는 늘 전도사 몫이었습니다. 전도사 부부는 아이가 곤히 잠든 모습을 확인하고 집을 나섭니다. 어느 날 아기가 우연히 잠에서 깨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본능적으로 더듬어 엄마를 찾습니다. 엄마가 없습니다. 공포가 들이닥칩니다. 아기는 울음을 터뜨립니다. 아무리 울며불며 엄마를 불러도 엄마는 오지 않습니다. 울다 지쳐서 잠이 듭니다. 돌아온 부모는 여전히 잠들어 있으니 별일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는 시나브로 숨을 크게 몰아쉬는 행동을 반복하기 시작합니다. 부모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갑니다. 아이가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자 비로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이미 병의 뿌리가 깊어진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제가 아이에게 ‘얼른 낫고 싶으냐?’ 물었습니다.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아이를 진단 베드로 안내했습니다. 반듯이 눕힌 다음 ‘하루라도 빨리 고쳐줄게. 그 대신 문제 하나 풀어볼래?’ 하고 아이가 누운 침대로 다가가 우뚝 섰습니다. 갑자기 두 팔을 벌려 올리고 손을 맹수 앞발 모양으로 만들며 ‘어흥!’ 소리를 냈습니다. 재빨리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너를 잡아먹으려고 이렇게 호랑이가 달려들 때 넌 어떤 마음이 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겠니?”


어른 같으면 이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습니다.


“당근, 공포죠.”


아이가 제 의중을 간파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공포랑 친구 먹을 수 있어?”


아이는 힘차게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이에게 ‘공포랑 친구 먹는’ 이치를 설명해주었습니다.


엄마가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순간, 아이에게는 숨 막히는 공포가 덮칩니다. 공포로 말미암아 살아남기 위한 첫 방어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숨을 크게 몰아쉬는 것입니다. 숨을 크게 몰아쉬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격정 상태에서 이 동작을 계속 반복하면 통증이 생깁니다. 통증은 점점 더 강해집니다. 극렬한 통증은 다시 공포를 부릅니다. 이 악순환은 통증을 없앤다고, 숨 크게 몰아쉬기를 없앤다고 해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공포가 지니는 양면성을 직시해야만 끊어집니다. 공포는 누구라도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어둠임과 동시에 생명을 지켜내려면 없어서는 안 될 날카로운 빛의 감정입니다. 이 이치를 알아차린 아이에게 제가 제안했습니다.


“자, 숨 크게 몰아쉬기가 닥쳐온다고 상상하고, ‘친구야, 어서 와!’ 하면서 두 팔 벌려 숨을 더 크게 몰아쉬어보자.”


아이는 ‘상상하는 거 말고 진짜 해볼게요.’ 하면서 잠시 저를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합니다. 제가 나가는 즉시 그 증상이 재현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밖으로 나와서 잠시 부모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이가 ‘됐다.’며 손짓합니다. 아이 얼굴엔 웃음이 가득합니다. 의미와 재미를 동시에 담은 웃음입니다.


부모는 매우 놀라워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누군가와 단 둘이서 5분 이상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날, 심지어 첫 만남이었는데 무려 40분이나 함께 대화를 했지 뭡니까. 더군다나 아이가 웃기까지 했으니·······.


그 날부터 꼭 한 달 동안, 아이는 한약 두 제를 먹고 상담을 세 번 더 했습니다. 3년 동안 전혀 변화 없던 아이는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남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 치료를 종료했습니다. 도리어 불안해하던 부모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부모는 제게 경이로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학교를 갈 수 없어 홈스쿨링으로 견디던 아이가 미국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축구선수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전교 회장이라는 것입니다. 아, 아이와 저는 그렇게나 짧은 시간에 그렇게도 놀라운 삶을 함께 준비해갔던 것입니다.


부모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저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혹시 내가 갈 천국이 있기는 하다면 저 아이를 치료한 덕분이 아닐까·······.’ 농담만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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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도 모르는 채 아등바등 하다가 스러지는 게 거개 인생입니다. 사랑 또한 같은 운명이 아닐까 합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랑과 그 이야기가 인간사를 수놓지만 정말 사랑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요. 의미를 꼭 알아야 삶도 사랑도 가능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모를 때 빚어지는 어긋남이 생각보다 큰 비극이기에 화두로 들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청소년 티를 아직 벗지 못한 한 청년이 사랑 깊고 품 넓어 보이는 어머니와 함께 왔습니다. 귀여움을 잔뜩 머금은 얼굴 어디에도 고통의 그림자는 얼씬거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현재 상태와 자초지종을 대략 설명하는 동안 그 ‘청(소)년’은 미소를 띤 채 원장실 풍경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나가자 분위기가 아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태의 근원은 아버지였습니다. 10대 초반 그는 아버지의 외도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으로 치를 떨 때 보인 어머니의 반응이 급기야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니까 도리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공부 열심히 해서 성공하면 된다, 엄마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 아버지가 가출해서 나쁜 일을 벌일 때마다 어머니는 수습해주고 집에 들였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가출해서 사고치고 어머니한테 손을 벌렸습니다. 그야말로 악무한이었습니다. 이를 견딜 수 없었던 그는 거식과 폭식을 교차 반복하는 상황으로 급속히 빠져들었습니다. 폭식의 대상이 소주가 되고 하루 음주량이 깜짝 놀랄 만큼이 되자 허겁지겁 치료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제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세요?”


그는 망설이지 않고 건조하게 ‘고마우신 분’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저는 즉각 질문을 보충설명으로 바꾸었습니다.


“머리에서 하는 판단 말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을 물었어요.”


예상대로 그의 입에서는 ‘그런 거 없다.’는 답이 흘러나왔습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 아니기 때문에 놀라지 않고, 저는 일단 문제의식을 발효시키기로 했습니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 숙의를 잠시 멈추고 가능하면 길게 홀로 여행을 떠나도록 했습니다. 그는 휴대폰을 놔두고 어머니 카드 한 장만 쥔 채 여행을 떠났습니다. 열흘 채 안되어 느닷없이 그가 나타났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왜 갑자기 돌아왔나요?”


잠시 망설이던 그의 입에서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컥 눈물이 났다.’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정작 충격적인 말은 바로 그 다음입니다.


“태어나서 처음 든 느낌이었습니다.”


아뿔싸! 이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저는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어머니를 오시라 했습니다. 어머니는 이 말을 전해 듣고 목 놓아 울었습니다. 한참 울더니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세상 어느 엄마보다 사랑으로 키웠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했습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당연한 의문이 눈빛을 타고 들이닥칩니다. 제가 이어서 말했습니다.


“그것은 뒤치다꺼리입니다. 어머니 아니라도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다시 울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뭔가 잘못했음을 직감으로 느꼈기 때문일 터. 한참 울더니 너무나 중요해서 너무도 진부한 질문을 제게 던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랑인가요?”


저는 짐짓 큰 소리로 화를 냈습니다. ‘그게 지금 엄마 입에서 나올 소리냐.’며 꾸짖었습니다. 어머니는 ‘모르겠는 걸 어찌하느냐.’며 다시 오열했습니다. 제가 나지막이 말해주었습니다.


“아이의 감정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동참하지 않고서는 결코 사랑을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이의 감정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동참하려면 어찌 해야 하느냐.’고 묻는 어머니에게 저는 ‘자꾸 질문하시라.’고 답해주었습니다. 결국 묻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머니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우여곡절 끝에 그는 안정을 찾았습니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도 만났습니다. 청년 초기 이런 경험을 통해 그가 체득한 사랑이 그의 생을 이끌 힘으로 작동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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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함께 밥 먹는 것을 숙의 과정에 포함시킵니다. 당사자의 허락을 전제로 함은 물론입니다. 또 당사자의 허락을 조건으로 술잔을 기울이도 합니다. 대부분 한의원 근처 소박한 백반 집에서 합니다. 그 집은 인공조미료를 거의 넣지 않은 음식 대부분을 주인이 직접 만듭니다. 주인 내외가 제 또래라 친구 삼아 마음 편히 드나들며 이따금 함께 소주도 한 잔 씩 합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을 데리고 저녁밥을 먹으러 들어섰습니다. 안주인이 예의 그 시원스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습니다.


“아유, 원장님! 오늘은 배우를 모시고 오셨네!”


그는 배우 지망생이었습니다. 단연 출중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단연 심각한 내면의 고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만큼 말입니다. 그의 검고 커다란 눈망울에는 언제나 쏟아질 준비가 돼 있는 눈물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그를 짓누르는 가장 육중한 말은 그의 할머니와 아버지, 특히 어머니가 노래 후렴구처럼 내뱉는 바로 이 말이었습니다.


“네가 성공해야 우리 집안이 일어선다!”


그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일어선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본디 뜨르르했는지 전혀 공감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릴 적부터 그는 이 말에 귀가 닳아버렸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것은 그런 말 뒤에 아무 것도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투자, 그러니까 재정적 지원, 뭐 이런 것 말입니다. 생활이 그다지 넉넉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벌거벗겨 벌판에 세워놓고 대박 나서 돌아오라 손 비비는 꼴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개나 소나 가는 무슨 연극영화과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알바 뛰어 번 돈으로 사설 연기학원에 다니면서 공부하고 오디션도 보며 정신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돈이 모자라면 학원 등록도 거른 채 아등바등 견뎠습니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그의 눈에서는 소리 없이 하염없이 눈물이 굴러 내렸습니다. 제가 화장지 박스를 통째로 밀어주며 말했습니다.


“엉엉, 소리 내며 우세요.”


찰나, 그에게 웃음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더니, 이내 대성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뭐, 하도 자주 있는 일이라 밖에 있는 간호사는 고요한데 침 꽂고 누워계신 어르신들이 나지막이 혀 차는 소리가 스며들어 왔습니다. 통곡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제가 손뼉을 치며 그에게 말했습니다.


“매우 감동적인 연기였습니다.”


그의 눈빛에서 순간적으로 칼날이 번쩍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해묵은 억압을 빠듯이 뚫고 올라와 온몸으로 운 사람한테 연기라니요. 조금 뜸을 들였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치를 말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것을 보고 현실보다 훨씬 과장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음성도 발음도 어휘도 표정도 몸짓도 웃음도 울음도 모두 현실에는 없는 무엇으로 여깁니다. 정반대입니다. 명배우의 연기야말로 고스란한 현실입니다. 이래저래 병든 우리 일상이 우리로 하여금 접히고 찌그러지고 꼬이고 뒤틀리고 토막 난 음성·발음·어휘·표정·몸짓·웃음·울음을 내게 합니다. 치유는 명배우의 연기처럼 펼치고 펴고 풀고 바로잡고 이어주는 음성·발음·어휘·표정·몸짓·웃음·울음을 내는 것입니다. 마음 아픈 사람에게 삶은 그 자체로 치유입니다. 그러므로 연기입니다. 제대로 된 옹골찬 연기가 자신의 아픈 삶에 예의를 갖추는 정중한 자세입니다.


저는 안성기 같은 배우는 아닙니다. 저는 마음 아픈 사람과 숙의하는 과정에서 치유 연기를 직접/시범 하고, 또 가르치는 배우입니다. 저는 그와 함께 그 자신의 상황을 그때그때 정확하게 연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숙의했습니다. 밥 먹을 때도 소주 한 잔 할 때도 이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알바를 할 때도 심지어 연기학원에서 연기를 배울 때도 삶의 한가운데서 연기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유념하도록 당부했습니다.


그는 숙의 초기에 우느라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심히 살펴보니 울 상황이 아닌 데서도 울곤 했습니다. 제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왜 울지요?”


생전 처음 받은 질문이기라도 한 듯 놀라며 찰나적으로 그는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나지막이 ‘그러게요.’ 합니다. 저는 다른 감정으로 표현해야 할 것을 모두 눈물로 몰아버리도록 억압되어 그렇다는 이치를 일러주었습니다. 한 동안 울지 않을 상황에서 울지 않는 ‘연기’를 숙의했습니다.


과다하게 우는 그 이상으로 그는 과다하게 웃었습니다. 마치 반드시 웃어야만 한다고 결심한 사람처럼 말을 꺼내기 전부터 웃기 시작해서 중간에도 연신 웃고 끝내고 나서도 웃었습니다. 제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왜 웃지요?”


생전 처음 받은 질문이기라도 한 듯 놀라며 찰나적으로 그는 웃음을 멈추었습니다. 나지막이 ‘그러게요.’ 합니다. 저는 그 웃음이 눈물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라는 이치를 일러주었습니다. 한 동안 웃지 않을 상황에서 웃지 않는 ‘연기’를 숙의했습니다.


울음과 웃음을 일상으로 돌려놓는 것만으로도 마음 상태는 훨씬 좋아졌습니다. 그는 여전히 스스로 뒷바라지를 하며 힘들게 연기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와 함께한 시간이 실제로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알지 못합니다. 다른 어떤 배우 지망생도 알지 못하는 연기의 진실을 알고 있는 한 언젠가는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으리라는 신뢰를 그에게 보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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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한가한 오후 전화벨이 울립니다. 간호사가 뭐라 뭐라 통화하더니 “원장님, 내일 오후 5시, 우울증 상담 예약 잡혔습니다.” 합니다. 메모하고 30분쯤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립니다. 보통 때는 그러지 않는데 홀연히 제가 먼저 수화기를 듭니다. 마음 치료를 오래 하다보면 생기는 직감이지요.


“저기요, 조금 아까 예약한 사람인데요. 나중에 다시 하려고요·······.”


우울증 환자가 이러는 경우, 비일비재합니다. 공감하고도 남는 일입니다. 죄송하다며 황급히 전화를 끊으려 하는 지극히 짧은 시간,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오시기 쉽지 않다는 거 충분히 이해합니다. 괜찮습니다.”


40분쯤 뒤 한의원 문이 열립니다. 바로, 그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런 경우, 거의 대부분 다음 예약을 잡기 위한 영업적 멘트를 날립니다. 훈련 받지 않은 직원이면 ‘네, 그러세요.’ 정도로 시큰둥하게 끊습니다. 물론 두 경우 다 환자는 오지 않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이 사람이면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겠구나, 했어요.”


이게 뭐, 절정고수의 초식인가요? 아닙니다. 그저, 그대의 마음에 공감합니다, 정도의 평범한 표현일 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정도 공감조차 못 하고 산다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마음병 치료한답시고 나선 이른바 전문의들이 공감은커녕 되도 않는 분석에다 ‘지적 질’이나 하고, 약 몇 알 떨어뜨려주는 짓을 하면서 ‘공감 따위로 병을 치료할 수 있겠느냐?’ 훈계하지 않습니까.


그는 유난히 초롱초롱한 큰 눈망울을 지녔습니다. 그 큰 눈망울에서 쏟아내는 눈물은 제가 통째 내밀어주는 화장지 박스가 다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상담을 끝내고 나간 자리 바닥에는 똘똘 말린 화장지 조각들이 봄날 아카시아 낙화처럼 흩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순응적이었습니다. 제가 하는 말마다 크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습니다. 동시에 “네. 네. 네. 네.”를 재빨리 반복했습니다. 1년가량 아픔과 삶을 숙의 과정에서 고개 끄덕임은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만큼 작아졌습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거절하고 싸우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네. 네. 네. 네.”는 “네. 네. 네.”로, “네. 네. 네.”는 “네. 네.”로 “네. 네.”는 “네.”로 줄어들었습니다. 급기야 그 “네.”는 “.......”로까지 줄어들었습니다. 본인은 미처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니 그는 어린아이마냥 신기해했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를 그토록 순응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그의 인생 40여 년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제1기는 어머니 시대. 이 시기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만들어간 시기입니다. 어머니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배하고 관리했습니다. 어떤 이의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생각과 행동은 오류 없는 신의 사랑과 같은 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에 칭칭 묶여 온 영혼이 검푸르게 멍들고 말았습니다. 여전히 어머니는 시시콜콜 그를 조종하려고 들며 끝마무리는 늘 이렇습니다.


“얘, 그렇지 않니?”


물음표가 있다고 해서 이 문장이 의문문인 것은 아닙니다. 동의 구하기를 가장한 명령, 그러니까 “그렇다고 말해!”가 포함된 허위의문문입니다. 언젠가 그 어머니가 제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제게도 똑같은 의문문을 구사했습니다.


“선생님,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어머니가 당혹스러워하며 문맥을 끊지 못하는 사이 제가 먼저 저의 맺음말로 문맥을 끊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 비법(!)을 전수해주었습니다.


“맨 마지막 말을 그대가 함으로써 대화 자체는 물론 그 맥락 끊기의 주도권을 잡으세요.”


제1기 어머니 시대에 그는 단 한 번도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어머니의 “얘, 그렇지 않니?”에 따라 피아노를 배우고 학교를 가고 전공을 정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의 몸 안에는 그의 영혼이 없었습니다. 그 존재론적 공백, 부재는 단단한 자기부정증후군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자기부정증후군이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그는 저에게 비로소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제2기는 배우자 시대. 그에게 배우자는 대체된 어머니였습니다. 배우자는 그와 마음을 주고받지 않았습니다. 아이들과도 소통하지 않았습니다. 배우자의 관심은 오로지 돈이었습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는 삶을 왜 선택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배우자의 그런 뜻과 길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삶의 맥락, 처음과 끝은 언제나 배우자가 쥐고 있었습니다. 그의 삶에는 그가 없었습니다. 그의 자기부정증후군은 한껏 증폭되었습니다. 도저히 더는 견딜 수 없는 임계점에서 어찌 어찌 발견한 사람이 저였습니다. 그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함께 독립전쟁 시작해볼까요?”


어머니한테서 정신적으로 독립하는 일이 치유의 핵심임을 알려주자 그는 수긍하면서도 거기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지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어머니와 하나라고 생각하며 40여 년을 살았습니다. 어머니와 다른 생각, 다른 말, 다른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음은 당연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엄마를 어머니라고 불러보세요.”


그는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 크게 떴습니다. 40년 동안 엄마라고 부르다가 갑자기 어머니라고 쉽게 불러질 리 없습니다.


“어머니라고 부르는 순간이 독립선언의 순간입니다.”


잠시 후 그는 그 말뜻을 알아차렸습니다. 저는 그것을 ‘제2채널the 2nd channel’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제2채널을 통해 연속의 세계에서 단절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연속은 억압입니다. ‘엄마’라는 이름입니다. 단절은 자유입니다. ‘어머니’라는 새 이름입니다. 세계를 바꿀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말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름을 바꾸는 것입니다. ‘어머니’라고 힘들게 이름을 바꾼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그대와 엄마 사이에 금이 그어졌나요?”


그의 눈이 빛났습니다. ‘어머니’에서 시작하여 그는 저와 함께 독립전쟁에 돌입했습니다. 모든 말에 경어를, 모든 문장에 문어를, 모든 대화에 치밀한 수사학을 장착하고 예의바르되 단호하게 어머니 앞에 섭니다. 마지막으로 준비한 결정타가 바로, 조금 아까 말씀드린, 최후 일격으로 맥락 끊기였습니다. 이 전투가 배우자에게도 동일하게 치러졌음은 물론입니다.


어머니도 배우자도 일대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 배우자는 늘 그랬듯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어머니가 마침내 저를 찾아왔습니다. 어머니는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얘가 치료되고 있는 게 맞습니까?”


저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아주 좋아졌습니다.”


어머니는 그가 여기 와서 치료 받으면 더욱 착하게(!) 예전 모습으로 복귀할 거라 믿었을 것입니다. 저와 대화하는 동안 수긍하는 면모를 드러냈으나, 돌아가서 어머니는 끝내 그에게 말하더랍니다.


“얘, 제대로 된 의료기관에서 치료 받아야 하지 않겠니?”


그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제게 계속해서 치료받노라 선언했습니다. 독립된 삶을 숙의해가던 어떤 시점인가, 중대한 변곡점에 다다랐습니다. 하루는 제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그는 정색하고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선생님보다 제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직감했습니다. 숙의를 마칠 때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40여 년 동안 남의 말을 듣고 따르기만 해오던 삶을 내던질 욕구가 그에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얼마 뒤, 그는 스스로 일단 숙의 종결을 요청했습니다. 저는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스승의 날 그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왔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을 뵙고 제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볼 힘을 길러주셨습니다. 이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용기와 이정표도 주셨습니다. 선생님과 만난 것은 제 인생의 커다란 선물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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