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을 샀다. 책 내용이 좋아 덥석 사느라 그랬는지, 앞 면지가 심하게 접히고 구겨진 채로 날개 속에 숨어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 생각 않고 반품하면 그만이지만, 비록 일부 하자는 있더라도 정성들여 만든 600쪽 가량의 책이 폐품 처리 되어버린다면, 이만저만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싶어, 출판사에 전화를 했다. 책도 살리고 면지를 깔끔하게 손보는 길이 있는지 문의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죄송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현재 상태에서 내 힘으로 손보아 소장하기로 마음먹고 통화를 끝냈다.



우선 접히고 구겨진 부위를 손으로 펴는 일부터 시작했다. 손가락 머리와 손톱을 써서 가급적 반듯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에는 자와 칼로 삐져나온 부위를 잘라냈다. 거친 부분들은 소형 가위로 다듬었다. 접히면서 잘려나가 모자란 부위는 어쩔 수 없으므로 그대로 두었다. 그 결과, 일부러 들추지 않는 한 하자를 알 수 없는 겉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작업을 하는데 간호사가 들어와 묻는다. 반품하지 왜 그런 수고를 하느냐? 나는 되물었다. 이 책 한 권을 만드는데 목숨을 바친 나무가 몇 그루 쯤 될 것 같으냐? 애쓴 사람이 몇 명 쯤 될 것 같으냐? 간호사가 고개 끄덕이다 나가며 이의 한 자락을 남겨둔다. 그렇긴 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내 이런 자세를 보통은 ‘사물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해둔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대부분 비웃을 테니 말이다. 더 나아간 내 속말은 ‘신을 경외하는 것’이다. 신을 경외함으로 삼가 옷을 꿰매던 손이 오늘은 책을 고쳐 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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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코는 관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뇌와 통한다.


시각은 각막, 청각은 고막이라는 관문을 거쳐 뇌에 전달되지만 코의 후각은 관문 없이 직통으로 뇌에 전달된다. 다른 감각과 달리 시상을 거치기 전에 후각 수용체가 자리 잡고 있는 변연계부터 거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코는 최전방의 뇌다. 후각은 뇌각惱覺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뇌는 본디 후각세포가 부풀어 진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후각의 이런 특성은 아마도 인류의 시원적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맹수나 적이 눈에 띄지도 않고 소리 내지도 않고 다가올 때 공격하거나 도망치기 위해서는 후각을 통한 즉각적 반응 말고 다른 길이 없다. 후각은 생존을 위한 가장 은밀하고 빠른 정보 전달자이므로 냄새-공포반응을 코-변연계감정 뇌의 직접 연결로 시스템화한 것이다. 일단 살고 나서 나중에 해석하고 평가하는 분별절차가 진행된다. 코에서만 정석으로 인정되는 생명의 수순이다.


⑤ 코는 마음, 특히 감정의 안테나다.


후각 수용체가 있는 대뇌 변연계는 감정중추다. 후각에 대한 즉각적 반응에서 인간의 감정이 생겨나 다양한 켜와 결의 감정으로 분화하였다. 다양한 감정들은 거꾸로 코의 느낌을 날카롭게 벼려 냄새로 그 상태를 드러내거나 조절하는 길을 열었다. 코와 대뇌 변연계는 이런 상호작용으로 감정 현상과 감성 퍼텐셜의 선순환을 이끈다.


양자 사이에 악순환도 일어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감정 뇌에 이상이 생기면 코에 그 이상이 반영·증폭된다. 코에 이상이 생기면 감정 뇌에 그 이상이 반영·증폭된다. 예컨대 우울장애 환자가 비염이나 후각 이상을 동반하는 경우는 거의 필연에 해당하는 일이다. 비염이나 후각 이상은 우울증을 더욱 악화시킨다.


후각과 직결되어 있는 감정은 이성과 의지보다 먼저 발생한 마음의 층위다. 그 에너지가 다른 것을 압도한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무엇보다 감정을 움직여야 한다. 인간의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무엇보다 감정을 가라앉혀야 한다. 이 진실은 그리스 고전 수사학으로 증명된 바 있다. 그럼에도 근대 철학 이후 심리학은 물론 정신의학조차 감정을 이성과 의지 아래 둔다. 비인간적이다. 진실에 반한다. 감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코로 돌아가야 한다.


⑥ 코 점막은 발기조직이다.


우리 몸에는 발기조직이 있다. 성기性器가 그렇다는 사실은 우리가 익히 다 아는 바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이 모르고 있는 중요한 발기조직이 있다. 바로 코 점막이다.


일상의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는 길이 있다. 달리기 같은 운동을 하면 코가 뚫려 상쾌하다. 같은(?) 운동인데 섹스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코가 막힌다. 보통의 운동은 교감신경 자극 상태이므로 혈관이 수축되어 막힘이 풀린다. 섹스는 정반대로 부교감신경 자극 상태, 그러니까 충혈 상태가 유지되어야만 하는 운동이다. 그것이 곧 발기다. 코가 막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거의 늘 막힘 상태에 있는 신혼부부의 코를 이비인후과 임상에서는 신혼여행 코 증후군honeymoon nose syndrome이라 부른다고 한다.


후각과 성호르몬 조절 부위는 발생학적 기원이 같다. 후각은 성의 감각과 긍부肯否 양면으로 모두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다. 후각 상실과 성 또는 생식능력 상실이 맞물리는 경우는 성폭행을 당해 이른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나 우울장애를 겪는 여성들에게서 실제로 확인되고 있다. 대기 오염을 포함한 여러 가지 원인으로 다양한 형태의 코 질환 환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성과 생식의 문제로 이어질 것이다.


성과 생식의 문제는 인류의 사활이 걸린 근본적인 문제다. 여기에는 후각이 개입해 있다. 코로 돌아가야 할 마지막 또 하나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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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죽지 못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우울증 환자에게서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어온 제게 한 바퀴 구른 이 말은 정서적 현기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수없이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두 번 죽음 맛을 보기는 했으나 ‘아쉽게도’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에게는 아무 의미 없이 어렵기만 한 무엇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우물우물 말했습니다.


생애 초기부터 그에게 어머니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5세 때 마침내 어머니는 머나먼 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일을 계속했으므로, 어머니 부재상태는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사실상 그를 버렸듯, 그는 사실상 자신의 삶을 버렸습니다. 20살 이후, 단 한 순간도 삶에 애착을 품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찾지 못한 따스한 인간관계를 찾으려고 연애를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병든 연애였으므로, 그는 거기서도 언제나 버려졌습니다. 헌신할수록 비참하게 ‘차였습니다.’ 차일 만큼(!) 헌신하는 데도 트라우마가 작용했습니다. 중학생 때 그를 좋아하던 여학생이 자신을 만나러 오다 눈앞에서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깊은 죄책감의 또 다른 진원지였습니다. 그런 취약점을 간파한 여성들은 가차 없이 포식자가 되어주었습니다.


상호작용으로서 따스한 삶을 그는 마침내 포기해버렸습니다. 어느 날부터 그는 여성의 속옷, 액세서리, 소지품 따위에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절도를 해서라도 지니려 시도했습니다. 정서적 충동이 격렬히 휘몰아칠 때는 거의 발작 수준이라 의식이 소실되기도 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파출소에 잡혀와 있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닫혀만 갔습니다. 삶은 그저 시간에 밀려 떠내려가는 맛도 영양도 없는 건더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저 또한 우물우물 그에게 제안 하나를 했습니다.


“음·······기왕 없어진 김에 맛이 없다, 영양도 없다·······뭐 그런 생각조차 거두면 어떨까요?”


말하자면 그냥 ‘함 살아보기로’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없는 건데, 그걸 애써 있다, 있다 하는 것만큼이나 없다, 없다 하는 것도 거시기하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물끄러미 저를 봤다, 멍 하니 허공을 봤다, 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음 주에 와서 그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우물우물 하던 말에 살짝 속도가 붙었습니다.


“선생님, 해보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만세!


그는 얼마 뒤,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해보고 싶은 일을 하러 떠난 것이었습니다. 돌아오면 찾아온다, 어쩐다, 따위 약속은 없었으니 그 다음 그의 삶은 모릅니다. 다만 저와 함께 일으킨 종자 변화를 간직하고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우물우물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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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 인간이면 누구나 행복 추구를 천부인권으로 여긴다. 대한민국헌법 제10조가 보장하는 것은 말할 나위조차 없고, 철학과 종교의 난사람들 입에서 매순간 쏟아져 나오는 말이 행복 추구다. 진실은 다르다. 행복 추구는 역사적·정치적 개념이다.


행복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행복은 행복감으로 실재한다. 행복감은 개별적인 것이다. 설혹 함께 향유한다손 치더라도 각자가 느끼는 바는 다르다. 개별적 존재로서 인간을 자각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 자각이 자연스럽게 일어나 연착륙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어떤 계기에 폭발적으로 자각이 일어나 경착륙되었다. 경착륙은 전쟁·차별·학대·착취·파괴를 결과하면서 도리어 행복 추구를 억압하는 정치체제로 공고히 되었다. 이 억압의 정치에 저항하여 일어난 혁명운동이 비로소 평등한 개인의 행복 추구를 천명하였다.


18세기부터 일어난 민주주의 혁명이 거의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면서 마침내 20세기 말에는 민주주의 진면모가 미증유의 모습을 드러냈다. 드러나는 찰나 그 민주주의는 즉각 퇴행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지금은 다시 민주주의가 거대한 위기를 맞고 있다.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와 정략적으로 결합하면서 야기한 행복의 파편화 때문이다. 행복의 역설이다.


행복은 개별적이다. 끝내 개별적이어서는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이 이율배반의 진리가 고통스럽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섰다. 이제 어찌 할 것인가. 개별자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행복은 없는 걸까. 있다. 숭고다. 숭고는 개별자의 경계를 넘어서는 공적 참여다. 공적 참여가 장엄을 향해 탱탱 느슨한 연대의 고리를 이룰 때, 숭고와 진정한 행복은 하나가 된다. 바야흐로 숭고의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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