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결의 삶을 살아갑니다. 비범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해서 오래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평범해서 오히려 뇌리에 깊이 박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범함이 비범함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오랜 인습을 버리면, 평범함에 깃든 은은한 숭고를 목도할 수 있습니다.


그는 평범함의 화신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말투도 웃음도 울음도 직업도 모두 평범함이라는 인감을 찍어놓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그의 우울장애조차도 평범하다 고백하는 듯했습니다. 그와 숙의하는 과정도 똑 그와 같았습니다. 그 스스로도 그렇게, 저 또한 그렇게, 평범하게, 나직나직, 우울과 삶을 이야기해 나아갔습니다.


우수 서린 눈, 허스키한 목소리, 느릿느릿한 말투에서 이미 그의 내면 전경이 배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애초기부터 똑똑하지 못 해서, 잘생기지 못 해서 공공연히 비교 당하며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인정해주는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계신 것 자체만으로 상처를 덧나게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대부분 아무런 존재감이 없거나 소외된 채로 지냈습니다. 대학에 와서는 우울증 상담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과정도 그리 순탄하는 않았습니다. 교사가 되고 나서도 자신의 능력에 늘 불안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아이들과 상대하는 것도 어렵기만 했습니다. 새 학년도나 새 학기가 시작되면 우울은 어김없이 깊어졌습니다.


저와 상담을 하면서도 그는 여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그것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눈에 띄게 좋아지지 않는다고 실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제가 민망할 정도로 담담하게 숙의를 계속했습니다. 그 신근한 평범함이 그를 나직나직 높은 곳으로 이끌어갔습니다. 어느덧 그는 자신의 행복 설정치가 한 뼘 높아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저와 맺은 인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연애하고 혼인하고 아이 낳고 양육하는 긴 과정 내내 그는 가족과 함께 잊지 않고 저를 찾아옵니다. 극적인 감동과 보람을 안겨준 어떤 환우보다 제게 그는 보석 같은 존재입니다. 보석의 가치는 스스로 빛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소중히 간직해주는 데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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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우 오랫동안 기조우울증(서구 정신의학에서는 쓰지 않는 용어다.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만성적인 우울장애를 지칭하기 위해 내가 만든 용어다.)으로 고통 받았다. 고통의 다양한 양상이 있지만, 그 가운데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 바로 아침지옥이다. 졸저 『안녕, 우울증』68쪽에 소개한바, 잠에서 막 깨어나 일어나기 전까지 시간에 맛보는 정서의 지옥 상태는 형언할 수 없는 불편함으로 온 영혼을 짓이겨버린다. 삶의 무의미감, 혐오감, 곤혹감, 그리고 아뜩함 때문에 하루 생활이 시작되기도 전에 심신은 파김치가 된다.


아직까지 드러내어 말한 적은 없지만, 자려고 잠자리에 누워서 잠들기 전까지 시간대도 본질이 같은 불편함으로 영혼이 무너져 내린다. 아침지옥과는 달리 이 시간에는 물 먹은 솜 같이 주저앉는 고단함, 는적는적 해체되는 느낌, 끝날 것 같지 않은 생의 피로감으로 깊은 신음을 토해내게 된다. 내일 아침 다시 눈 뜨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속절없이 젖어든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이렇게 맞으면 그 날 전체가 송두리째 지워진다. 본디 이 두 시간대는 농밀하고 은밀한 자기신뢰의 본진이다. 틈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다시없이 소중한 ‘자기 허니문’이다. 우울증 앓는 사람은 자기부정의 덫에 걸렸으므로 이 자기 허니문은 지옥으로 변해버린다. 이른바 ‘건강한 사람’은 이 자기 허니문의 소중함을 모른 채 덧없이 흘려보내고 만다. 아파봐야 깨닫는 인간숙명을 알아차리고서야 이 자기 허니문의 애용 이치를 증득한다.



아침 허니문은 거대 의식, 그러니까 자각·통제 가능한 의식을 가꾸는 데 쓴다. 아침에 일어나 고요히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하루의 삶을 담담히 펼쳐본다. 이것을 소리 내어 말한다. 그렇게 하루를 연다. 거대 의식을 앞세우고 걷는다. 밤 허니문은 소미 의식, 그러니까 자각·통제가 불가능한 무의식을 가꾸는 데 쓴다. 잠자리에 들면서 고요히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하루의 삶을 담담히 정리해본다. 이것을 소리 내어 말한다. 그렇게 하루를 닫는다. 소미 의식에 맡긴 채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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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코의 문화철학


인간의 사유는 언어적 표현 안에서 가능하다. 언어적 표현을 통해 사유가 이끌려 나오기도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반 현상은 사유의 결과가 언어적 표현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쓰는 언어적 표현들을 보면 주의하고자 하는 대상에 관한 그 시대의 사유를 알아차릴 수 있다.


코에 대한 언어적 표현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은 아마도 ‘개 코’일 것이다. 냄새를 아주 잘 맡는다는 뜻으로 쓰는데 이 말이 주는 어감은 애당초 그리 좋지 않다. 나중에는 욕설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만다. 코에 대한 부정 언어학은 비단 이뿐이 아니다. 코 묻은 돈. 코 빠뜨리다. 코 꿰이다. 코가 석 자다. 코 떼어 주머니에 넣는다. 코 아니 흘리고 유복하랴. 콧구멍 같은 집에 밑구멍 같은 나그네 온다.······ 다른 감각기관에 비해서 긍정적인 표현이 현저하게 적은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코에 대한 이런 인식은 아마도 냄새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냄새, 또는 냄새 맡는 기능이나 행위에 대한 평가가 그대로 코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냄새란 말 자체가 이미 좋지 않은 느낌을 간직한 채 사회문화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향기”라는 한자어와 기능이 수직 분화되어 정착된 것을 보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냄새난다.”는 표현도 당연히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른다. “향기롭다.”와 대조하면 대뜸 알 수 있다. “냄새 맡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범죄자들의 직감을 표현하는 비유로 동원한다. 이처럼 냄새는 좋은 수식어, 예컨대 “엄마”가 붙지 않으면 좀처럼 좋은 뜻으로 읽히지 않는다.


이것은 순 우리말에 대한 우리사회 특유의 자학현상만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냄새 자체에 대한 사회문화적 태도가 반영된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말을 보면 들어보다, 맛보다, 만져보다, 맡아보다, 와 같이 모든 다른 감각 위에 시각이 있다. 시각만은 못하지만 청각 역시 매우 중요한 감각으로 인식해온 것이 우리의 사회문화적 전통이다. 경청傾聽/敬聽이란 표현도 그렇고, “귀가 보배다.”라는 속담도 그렇다.


물론 우리보다 서구사회가, 근대 이전보다 이후가 훨씬 더 치우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성독재”의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 이성은 감성(감성은 감정을 퍼텐셜의 측면에서 이해한 것으로 여기서는 감정과 동의어로 씀)을 계몽 대상으로 발아래 둔다. 감성은 동물적, 원시적, 여성적 본능의 영역으로 비하된다. 여기서 이성에 속하는 것은 시각, 청각, 촉각이다. 감성에 속하는 것은, 당연히 후각과 미각이다. 그런데 미각의 80% 이상이 후각이므로, 결국 이성독재의 시공간에서 희생양이 된 것은, 실질적으로 오직 후각, 그러니까 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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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흔히 겪는 코와 직접 관련된 문제 두 가지만 더 말하겠다. 비염에는 거의 필연적으로 동반되지만 다른 이유로도 코는 막힌다. 불편할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 코 막힘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혀로 입천장을 강하게 밀어주면서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눈썹 사이를 눌러준다. 이렇게 하면 서골鋤骨, 즉 머리와 코가 연결된 빈 공간을 가로지르는 코뼈가 앞뒤로 흔들리게 되면서 코 막힘이 풀린다.


코피가 날 때는 어찌 할까?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 코피를 멈추게 하는 방법이 있다. 코 바로 밑의 윗잇몸에 솜을 약간 끼우고 아주 세게 누르면 된다. 대부분의 코피는 격막, 즉 코를 양쪽으로 나누는 연골 부분의 앞부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이 부분을 누르는 것이 코피를 멎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제 호흡을 치유하는 문제에 관해 말하겠다. 코의 지정학에서 코가 호흡하는 근본 방식과 이를 역으로 이용한 교호호흡 이야기를 했다.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이야기이므로 다시 치유의 관점에서 말하도록 하겠다. 교호호흡은 그 자체로 치유다. 치유의 본질은 다름 아닌 알아차림이다. 호흡의 근본 방식은 물론 그 이전에 호흡 자체를 알아차린 상태에서, 그러니까 “유심히”호흡하는 것이 바로 치유의 요체라는 말이다. “유심히” 하는 상태가 되는 순간, 호흡은 깊어지고 길어진다. 깊고 긴 호흡이 치유된 호흡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겠다. 기왕에 알아차린 상태에서 깊고 길게 호흡할 것이라면, 꼭 복식호흡을 해야 한다. 들이마실 때에는 배꼽 아래 배를 한껏 부풀리고, 내쉴 때는 반대로 배꼽 아래 배를 한껏 등 쪽으로 오그려 붙이는 방식으로 하는 호흡법이다. 이렇게 해야 횡격막과 복근이 긴장· 이완을 교차적으로 반복하면서 호흡다운 호흡, 건강한 호흡이 이루어진다.


코의 냄새 맡는 능력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어찌해야 할까?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맞닥뜨리는 감기, 부비동 질환, 알레르기비염, 물혹과 같은 원인에 따른 호흡성 후각 장애일 경우 당연히 그 원인질환을 치료하면 된다. 그 이치는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유전질환이나 사고에 따른 비가역적 뇌(신경)손상을 입은 경우, 현재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런 경우를 보면서 귀중한 시사를 받을 수 있다. 가령 후각상실이 나타나는 대표적 유전질환인 칼만 증후군Kallman syndrome(시상하부 성선을 자극하는 호르몬 생산 기관이 손상된 병으로서 정자· 난자·생성도 불가능하다. 사춘기·성장 지체·무월경·불임이 나타난다.)을 통해 성· 생식 기능과 후각 기능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른 원인을 찾을 수 없다면, 여성의 경우 후각 기능 이상이 나타날 때 성적학대(성폭행은 물론 지속적인 젠더gender적 억압) 여부를 확인해보아야 한다는 통찰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확인되면 심리 치료가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 가지 정신장애가 후각 이상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이다. 후각이 정서와 직결된 만큼, 다른 감각보다 훨씬 더 이 문제에 관한 한 주의· 집중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해야 할 코 의학 이야기 주제는 코를 통한 치료다. 먼저 호흡을 통한 치료다. 앞서 말한 교호호흡은 호흡 자체를 치유할 뿐만 아니라, 그 치유된 호흡을 통해 인간의 심신 전반을 치료할 수 있다. 교호호흡 말고도 수많은 호흡법이 있는데, 특수한 기능 강화를 목표로 한 것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치료 지향적이다. 심장 박동 조절을 필두로 자율신경 실조를 치료한다. 자율신경 실조가 치료되면 면역계와 내분비계, 나아가 정신계의 치료도 가능하다.


냄새 맡기를 통한 치료로써 코 의학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향기치료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전문지식을 갖추고 실제 ‘임상적’ 실천을 하고 있다. 향기치료는 향기를 맡게 하여 대뇌변연계를 직접 자극함으로써 질병을 치료한다. 대뇌변연계는 감정뿐만 아니라 자율신경, 면역, 내분비를 조절하는 곳이므로 치료 능력을 지닌 향기를 맡게 하면 심신 전체에 신속하고도 근원적인 치료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근원적인 치료는 각자마다 지닌 영혼의 냄새 또는 향기를 찾아 맡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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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코를 잘 치료하면 생명 전체가 쾌적해진다. 건강해진 코로 숨 잘 쉬고 냄새 잘 맡는 것, 이보다 귀한 인프라가 어디 또 있을 것인가. 이토록 중요한 코에, 호흡에, 후각에 문제가 생겼을 때, 과연 무엇이 치료다운 치료인지 생각해보겠다.


코에 염증이 생겼을 때, 특히 알레르기질환일 때, 서양의학에서 무조건 쓰는 것이 항히스타민제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이 또한 증상억제를 위한 차단제blocker다. 기술의 발전으로 부작용이 덜해지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는 방법이다. 우선 증상억제를 치료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아니다. 이는 혈압강하제가 고혈압 치료약이 아닌 것과 같다. 그리고 차단제 문제다. 차단제는 혈액의 스핀 작용을 방해한다. 결과적으로 생체진동수를 떨어뜨리게 한다. 생체진동수 저하는 곧 생명력 저하다. 치료는 하지 못하고 도리어 생명력만 저하시키는 화학물질을 약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항히스타민제는 히스타민이 과도하게 활성화하는 근본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므로 다음에 그런 환경이 조성되면 반드시 재발한다. 알레르기비염일 경우, 근본원인이란 면역체계 이상을 말한다. 따라서 면역체계 이상을 조절해야 하는데 항히스타민제 따위로는 면역체계를 조절할 수 없다. 항히스타민제는 이를테면 응급조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면역체계는 정신-신경-내분비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광범위한 조절이 필요하다. 꿈같은 이야기지만 정신-신경-내분비-면역계 전체의 협진이 필요하다. 우리 현실에서는 오직 하나의 길이 열려 있다. 이런 통합적 관점을 지닌 한의사.


그러면 제대로 된 관점을 지닌 한의사는 어떻게 접근할까? 무엇보다 그는 염증이든 알레르기든 모든 증상을 그 자체로 병으로 여겨 무조건 쫓아내려는 일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불편해 하는 여러 증상들은 기본적으로 자연치유반응이다. 자연치유반응은 말 그대로 스스로 치유하려는 노력이다. 이를 쫓아내는 것은 병을 은폐함으로써 결국 더 키우는 것이다. 도와주는 것이 이치에 맞다. 도와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체온을 올리는 것이다. 체온을 올리면 증상은 잠시 더 심해진다. 이것을 병의 악화로 오해하기 때문에 서양의학은 근본 치료에 이르지 못한 채, 증상 억제제와 진통제로 일관한다. 그러나 체온이 높아진다는 것은 자연치유력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더 한층 강해진 힘으로 치유 활동, 그러니까 전투를 하기 때문에 증상이 심해지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친 뒤에야, 이치를 따라 병이 물러가는 것이다. 따라서 증상 억제와 진통을 일삼는 지식은 의학이 아니다.


이렇게 체온을 올려주는 일과 함께 전체 진단으로 면역체계의 불균형 문제, 신경 특히 자율신경 실조 문제, 내분비 부조화 문제를 풀어주는 침과 한약을 쓴다. 침과 한약을 민간요법, 심지어 미신으로 폄훼하는 서양의학에서 보면 황당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게 황당하다면 5천 년에 걸친 동아시아문명 전체가 황당한 것이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침과 한약은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한의학의 이런 길은 증상을 자연치유반응으로 알아차리고(인정) 받아들임(수용)으로써 생명이 스스로 신뢰하고 문제를 풀어가도록 돕는다. 한의학의 이런 길에서는 돈 받고 정답 파는 장사가 행해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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