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서울시청에 갔다. 

세월호 아이 둘의 이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조은화. 

허다윤.


그리운 친구들에게로 보낸다.


촛불혁명 힘으로 범죄자는 감옥에 갔지만

진실은 여전히 바다에 잠겨 있다. 


이대로 보낼 수 없어서 

차마 보낼 수 없어서

그리운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온다.


얘들아

하늘의 신화가 될 수는 없다.

땅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


25일 8시까지 이별식은 계속된다.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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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09-24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녀오셨군요.. 붉은 장미꽃이 아름다워서 더 슬퍼보이네요

bari_che 2017-09-25 09:40   좋아요 0 | URL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현실을 보고 흘리는 피눈물 같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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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 사회에서 시각독재tyrannis visifica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극한을 넘어 날조 이미지로까지 드러내고 극한을 넘어 환각으로까지 탐시貪視하느라 미쳐가는 세상에서 눈은 본의 아니게 자본의 총아며 타락의 상징이 된다. 눈은 잘못이 없다. 있다면 오징어 눈만도 못한 불완전성을 지닌다는 것뿐이다. 문제는 백색 시각이다.


백색시각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시각은 중심시각에서 형성된다. 중심시각은 선택한 개체에 시종일관 집중한다. 집중시각은 전체에 주의하지 않는다. 전체를 희생해서 개체를 비대하게 만들 때, 불평등 구조가 탄생한다. 불평등 구조의 종착지가 바로 포르노다. 포르노는 거대하게 발기한 자아, 지식, 돈, 권력 잔치다.


백색시각을 전복하는 시각 혁명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중심시각의 타파다. 비-중심시각으로 전체성을 복원한다. 집중의 일관성을 무너뜨리고 전 방위로 시선을 개방한다. 모든 것에 주의하여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않는다. 집중하지 않으면 크고 작음의 차별이 없어진다. 차별이 사라져 텅 빈, 텅 비어서 멍한 눈길에 무한한 자비가 배어든다.


눈의 모습에 주의하면 다음 길이 보인다. 눈은 왜 상하 아닌 좌우로 길쭉할까? 눈은 넓이의, 그러니까 수평의 감각을 기본으로 한다. 높이와 깊이의 감각은 부차적이다. 수평 감각은 랭크rank 아닌 링크link, 그러니까 상하차별 아닌 평등연대, 고매·심오 아닌 수수·평범의 감각이다. 끊임없이 좌우를 돌아보는 눈길에 따스한 사랑이 스며든다.


녹색시각의 혁명은 시각독재의 일극구조를 무너뜨릴 뿐, 중심시각 자체를 폐하지 않는다. 중심시각과 비-중심시각이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어 개체와 전체의 균형이 ‘일렁고요’ 사건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일렁고요’는 그냥 오지 않는다. 시중時中의 특이점마다 비폐비개非閉非開의 눈으로 성찰해야 한다. 중도中道의 정도正道다.


혁명의 마지막 한 순간에는 결연히 눈을 감기도 해야 한다. 실재 악의 멱을 딸 때 그것이 전시하는 포르노를 감상할 필요는 없으니까. 혁명의 마지막 한 순간이 오기 전에 정색하고 어떤 순간 결연히 눈을 감는 제의 또는 놀이를 할 필요도 있다. 필연이 우연의 옷을 입고 도둑 같이 올 수 있으니까. 깨어 있는 일이 은총만은 아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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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 경험을 통해 제가 이름 붙인 병이 더러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서울대증후군>입니다. 서울대 학부 또는 대학원에 입학한 (직)후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 일이나 사람을 대할 때 느끼는 두려움, 힘없음, 의욕 없음, 관심사 없음, 즐거움 못 느낌, 지쳤다는 느낌, 쉽게 피곤해짐·······우울장애 범주에 넣을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학생들이 의외로 드물지 않습니다. 대뜸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아니, 서울대씩이나 갔으면서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다니?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 싸고 있는 거 아냐?’


대체 왜 이런 생각과 감정에 휘말릴까요? 상식적으로는 성공 뒤에 오는 허탈감 등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모든 성취 뒤에 이런 증상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본디 모습을 되찾는 게 맞습니다. 치료를 받아야 항 정도로 심각하다면 여기에는 다른 요소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문제와 맞닥뜨렸던 어떤 서울대 학생과 숙의를 진행했습니다. 그는 먼저 명문 사립대 두 곳에 합격한 상태에서 최종적으로 서울대에 합격 통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때 감정 상태를 물으니 별다른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왜 그랬는지 설명해보라 하니 막막한 표정을 지으며 한없이 머뭇거립니다. 제가 웃으며 물었습니다.


“무조건 서울대로 가야 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그가 무릎을 쳤습니다.


“맞습니다. 언제나 제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이 지속되었거든요. 모든 게 이미 정해져 있었죠. 그게 절 숨 막히게 했고, 한없이 공허하게 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삶에서 그 자신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국가가 만든 입시제도, 사회적 분위기, 학교와 부모의 집착 등이 일사불란하게 강요하는 편향된 가치가 그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박탈해버린 것입니다. 입시가 끝나고 해방되었을 때, 해일처럼 들이닥친 수치심과 무기력감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것입니다.


숙의 초반에 확인해보니 그는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신속하게 결정을 내리는 힘이 부족하며, 안정적으로 계획하고 조직하는 힘이 떨어지는 경향성을 보였습니다. 타고난 것일 수도 있지만 생애 초기에 입은 트라우마 탓일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는 만 2살 이전, 어린이집(종일반)에 보내졌습니다. 양육의 주요 부분에서 부모, 특히 어머니가 결락된 사고였습니다. 10대 초반, 크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수술을 받고 2개월 동안 입원해야 했습니다. 실은 마취·수술·입원도 사고입니다. 10대 후반, 진학·전학을 둘러싸고 겪은 스트레스 때문에 6개월 동안 우울장애 약물치료를 받았습니다. 우울장애 첫 치료를 약물로 하는 것 또한 사고입니다. 이런 일련의 중대한 사고들이 그의 심리 전반을 왜곡하였을 것입니다.


왜곡의 갈피를 찾아가며 우리는 2차례 15개월에 걸쳐 고통과 삶을 숙의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느낀다, 문제를 문제 삼는다, 내 자신에게 예의를 지킨다, 나만의 콘텐츠를 고민한다, 나만의 삶 그 너머를 본다, 절박함·절실함의 감각을 터득한다, 반걸음 앞을 보고 한걸음 내디딘다, 이 순간을 알아차린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내 스타일로 받아들인다, 근원에 육박한다, 전복하고 또 전복한다, 나 자신에게 기도한다,·······. 그러는 동안 그는 늘 어렵기만 하던 아버지와 대화를 통해 휴학 동의를 얻어냈습니다. 외국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자신과 삶을 보는 눈이 천천히 빠르게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가 어느 날 설거지한 사기그릇 같이 반들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여전히 느릿느릿 머뭇머뭇 살더라도 자신의 삶에서 스스로를 우선순위에 두고 타인에게 배어들 수만 있다면 족하다 싶습니다. 그럴만한 그에게 신뢰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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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하라 요시토시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인간은 포유류 가운데 청각우위뇌형이라고 한다. 듣는 인간homo auditus인 것이다. 말하는 인간homo narrans과 대칭을 이루고 있는 진실이다. 들어 소통하지 못하면 아무리 정교하고 현란한 말인들 무슨 소용이랴. 언어 진화 자체도 구강을 포함한 발성 기관에서만 비롯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말을 정확히 듣는 청각기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듣기 사건은 말하기 사건에 선행한다. 아기는 엄마에게서 들려오는 모(국)어를 듣고 그때로 따라 함으로써 말의 세계에 들어선다. 듣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 이런 차서의 이치는 비단 생애 초기에만 통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인간은 먼저 듣고 나중 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많이 듣고 적게 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귀는 두 개고 입은 하나다. 남은 다수고 나는 단수다. 나는 남 속에 있다.


인간이 말을 발달시켜온 까닭도 남들이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이냐 아니냐는 말하기 자체의 능력에서 판가름 나는 게 아니다. 듣는 사람이 못 알아들으면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말하는 사람으로서는 젬병이다. 남들이 잘 알아듣도록 말하려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부터 잘 들어야 한다. 듣는 능력 뛰어난 사람이 말 못 하는 법은 없다. 말은 귀 사건이다.


청각은 기능을 넘어 자세다. 청각 기능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상 유무를 살피는 일은 개인 건강 차원을 넘어 공동체 소통과 공존을 향한 열린 자세의 표지다. 백색문명은 청각에서 자세를 누락시켰다. 백색 학문과 문학은 알아들을 수 없는 난해 포르노를 쏟아낸다. 백색 음악은 8hz 지구 조화 장場과 불화하는 괴벨스의 440hz를 연주한다. 백색청각은 소통 아닌 소비만을 향해 속절없이 열린다.


수탈적 소비를 향해 열린 청각은 막무가내 확증 편향으로 진실의 문을 닫는다. 듣고자 하는 것만 듣는다. 그리 들은 것만 진리라 우긴다. 우기는 것을 우월의 증표로 삼는다. 증표 받고 떡고물 떨어뜨려주는 백색언어세력이 1500년 동안 떠들어온 나라가 여기 있다. 떠드는 소리를 듣지 않고 백성이 기어이 그 수괴의 멱을 딴 나라가 또 여기 있다. 이 나라 백성으로서 가만히 녹색 귀를 만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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