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제약회사 - 거대 제약회사들의 살인적인 조직범죄
피터 괴체 지음, 윤소하 옮김 / 공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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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약을 이렇게 많이 먹게 된 주된 원인은, 제약회사가 약을 파는 게 아니라 약에 대한 ‘거짓말’을 팔기 때문이다.(21쪽)


내 개인진료소에는 70세 넘은 노인이 많이 드나드신다. 양약을 전혀 복용하지 않는 분은 없다. 서너 종류는 기본이다. 그 분들에게 나는 빠짐없이 양약의 해로움을 설명해 드린다. 내 말을 듣고 양약을 줄이거나 끊는 분은 물론 없다. 대개 반응은, 일류 대학병원 박사님이신데 아무려면 한의사인 네가 아는 걸 모르겠느냐, 잠자코 침이나 놔라, 식이다.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 패배의식 속에서 받아들였으므로 서양의학을 종교적으로 맹신하는 것이다. 양의사들이 사실은 양약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양의사들도 제약회사가 건네주는 가짜 정보에 의존한다는 사실까지 그들이 알 수는 없기에 말이다. 구미보다 우리 처지가 더 절망적이다.


이 문제는, 그러므로 매우 중첩적인 정치성을 띤다. 뿌리 깊은 매판세력과 개발독재세력이 결탁해 만든 수탈체제의 한 고리이기 때문이다. 수탈체제의 유지 수단 가운데 거짓말만큼 쉽고 좋은 게 없다. ‘어떻게 저런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와 ‘어떻게 저런 거짓말을 믿을 수 있는가?’는 어이없이 상식을 망가뜨리며 서로를 고양시켜서 대중을 의도된 무지 상태로 몰아간다. 그 이전 시대는 차치하고라도 당장 눈앞의 박근혜와 추종자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제약회사와 양의사의 거짓말은 박근혜보다 더 ‘완벽’하다. 과학의 옷을 두 겹으로 입고 있기 때문이다. 변방의 무명 한의사 한 놈이 떠든다고 바뀔 세상 아님은 확실하나, 내가 입 닫으면 돌들이 일어나 소리치지 않겠나.


엄밀히 따지면 백색제약회사나 백색의사들은 거짓말을 한다기보다 개소리bullshit를 지껄이고 있는 거다. 해리 G. 프랭크퍼트가 『개소리에 대하여』에서 밝힌바, 개소리는 진위 판단에 아랑곳 하지 않고 다른 목적을 위해 상대방을 기만하려 지껄이는 말이라 죄의식 없이 함부로 대놓고 지르기에 안성맞춤인 쓰레기 덩이다. 백색제약회사나 백색의사들뿐만이 아니다. 백색문명 전체 담론의 90%는 개소리다. 이 개소리는 자본교 떡고물 앞에 엎어진 광신도의 훤화다. 이 훤화에 주눅 든 노인 하나 오늘도 내게 와서 암 공포를 호소한다. 대장내시경 하러 가는데 혈압 치솟을까 두렵다며 침 치료를 청한다. 저들의 개소리를 까밝혀주었으나 끝내 듣지 않는다. 아, 불가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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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남성보다 통증을 효과적으로 설명하지만 그것을 참아내는 능력은 남성에 비해 떨어진다. 뿐만 아니라 여성은 더 많은 부위에서 더 오래, 더 강한 통증을 느낀다.(300-301쪽)


남성이 폭력에 준하는 신체 접촉 행위를 한 뒤, 아프다 소리치는 여성에게 엄살떤다며 놀리는 일은 거의 한평생 이어지는 우리의 경험이거나 목격담이다. 이런 풍경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무감각이 결코 사소할 리 없다. 여성의 산통에 가 닿는 감각이 남성에게 끝내 생기지 않는다는 진실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세는 통증 일반에도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사실 통증은 근원적 문제다. 통증은 인간에게 숙명의 무게를 지닌다. 인간인 한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종교와 정치, 그리고 의료가 비롯한다. 인류가 통증을 이종異種으로 인식한 문명을 건설하면서 모든 종교와 정치, 그리고 의료에는 통증을 적대시하는 전통이 자리 잡는다. 적대시는 전략적 악용을 포함한다. 무통을 미끼로 온갖 수탈이 이루어진다.


백색문명이 무통 마케팅으로 타락의 극한으로 치닫고 있을 때, 인류의 큰 스승들은 통증을 열린 문으로 알아차리는 전복의 진리를 제시했다. 동종同種 인식의 지평에서 통증 문제는 해결 아닌 해소, 축출 아닌 연대의 길을 연다. 통증의 진리 역시 비대칭의 대칭구조로써 전체상을 드러낸다. 통증의 진리는 의자와 환자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 존재의 문제다.


존재 차원의 문제로 다시 묻는다. 통증에서 왜 여성은 남성과 다른가? 이론과 사색이 아닌 경험의 깨달음 하나만 꺼내 답에 갈음한다. 젖먹이는 일 말고 모든 육아 활동을 전담하면서 1년 여 동안 나는 딸아이 곁을 지켰다. 이 때, 아기 키우는 사람은 아기보다 여름에는 더 덥게, 겨울에는 더 춥게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전 방위 유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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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그 때 소미신은 알았다, 촛불이 무엇을 이뤄낼 줄.


그 날 그 때 소미신은 알았다, 오늘 또 다시, 촛불 들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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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제약회사 - 거대 제약회사들의 살인적인 조직범죄
피터 괴체 지음, 윤소하 옮김 / 공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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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을 중단하려고 하면 끔찍한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는데, 해당 질환의 증상과 유사한 것도 있고,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증상도 많이 있다. 가장 유감스러운 점은, 이것을 거의 모든 정신과 전문의가, 그리고 환자 자신도 약이 계속 필요하다는 징후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마약중독자가 헤로인이나 코카인에 의존하듯 그저 의존성이 생긴 것뿐이다. ADHD 약과 SSRI가 암페타민과 같은 효과를 내므로 이 약들은 의료용 마약으로 간주하고 가급적 적게 사용해야 한다.

  ·······대부분의 정신과 전문의들은 이렇게 하지 않고 평생 약을 복용하는 쪽을 택한다. 이는 여러 이유로 재앙이다. 환자를 환자 역할에 가두고, 약이 환자의 인격까지 변화시켜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도전에 대처하는 법을 익히지 못하게 만든다. 또 항정신병약뿐 아니라 모든 약이 영구적인 뇌 손상과 영구적인 인격 변화를 초래하여, 예를 들면 지연성 운동장애, 인지능력 감퇴, 정서적 둔감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인다.(346쪽)


언젠가 어디선가 말했던 적이 있다. 양의사한테 치료 받다 잘 안되면 ‘아, 내 병이 깊구나!’ 하던 사람이 한의사한테 치료 받다 잘 안되면 ‘아, 의사 잘못 골랐구나!’ 한다고. 같은 맥락에서, 한약 먹다가 뭔가 불편한 일이 일어나면 대뜸 ‘약이 잘못됐다.’고 단정하던 사람이 양약 먹다 그만두려 할 때 이탈증상이 나타나면 “약이 계속 필요하다는 징후로 해석한다.


일부 개신교가 천주교더러 사탄의 도라 한다. 일부 조계종 중들이 달라이 라마더러 덜 깨친 자라 한다. 같은 맥락이다. 종교는 그럴 수 있다 치자. 의학은? 과학이라며? 아, 한의학은 과학이 아니니까 그런다? 서구정신의학은 철두철미 과학이라 이탈증상을 필요성으로 인식한다? 아무렴, 그렇지. 서구정신의학이 얼마나 대단한 과학인가 말이다. “영구적인 뇌 손상과 영구적인 인격 변화”를 일으키는 완벽함이라니.


생명에 비가역적 손상을 입히는 독극물을 약이라 이름 하는 과학이 정녕 과학이라면 나는 그 과학을 거절한다. 차라리 육감과 주먹구구에 의지해 한 걸음씩만 더듬더듬 걸어가며 살겠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서구정신의학은 신흥종교다. 그 사이비성을 다시 한 번 톺는다. 속고 말고를 각자 몫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정신의학자들은 정신분석을 과거지사로 돌리고 난 후로, 생물학적 정신의학을 적극 받아들였다. 그럼으로써 정신의학이 내과만큼이나 과학적인 것으로 보이게 됐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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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피의 두께는 여성과 남성이 동일하지만, 태아 때 표피의 발달은 남성이 여성에 비해 더디다. 에스트로겐이 표피 성숙을 촉진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미숙아로 태어난 남자 아이가 여자 아이보다 더 약하고 생존하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274쪽)


미숙아로 태어나 생애 첫 2개월 동안 인큐베이터에서 양육된 여성 청년과 숙의치유를 진행하고 있다. 이 시기에 어머니와 주고받아야 할 접촉과 교감의 누락으로 말미암아 그의 심신 전체가 움푹한 상처를 입었다.


그는 좀처럼 이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무엇보다 상처가 구체적인 삶의 결함으로 나타나는 것을 못 견딘다. 자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근거 없는 높은 기준에 비추어 스스로를 학대한다.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여기는 사람 원망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한다. 주위 사람들한테 끊임없는 온정을 요구한다. 자신의 질병 상태를 통과하면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보다 끝없이 집착하는 유아적 태도에 얽매인 채다. 자신에게 있는 것은 팽개치고 없는 것을 향해 헛된 포옹을 계속한다. 그런 자신을 구질구질하다며 절규한다.


“진짜 구질구질한 사람은 이미 죽었다.”


내가 또박또박 그에게 해준 말이다. 그가 그렇게라도(?) 살아가는 것은 그만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남자 아이로 태어났다면 하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상처도 원망도 집착도 살아 있으니 가능한 일이다. 어느 중처럼 덮어놓고 감사하라는 얘기 하려는 거 아니다. 어느 철학가처럼 아프게 야단치려는 거 아니다. 진실의 전경을 보게 하려는 거다. 생의 한 쪽 문이 닫혀 있으면 또 다른 한 쪽 문은 열려 있다. 닫힌 문만 붙잡고 한탄하는 치우침에서 부디 놓여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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