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은 가을로 불타고

꽃은 봄으로 불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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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둑놈이다

다람쥐 밤 한 톨과

도토리 세 알을 훔쳤다

나는 용서 빌지 않으련다

내 죄 땅 깊이 묻을 거다

언젠가 봄 되어, 내 죄가

무럭무럭 자라나


오늘 굶주린 다람쥐, 그 아가들에게

밤 열 톨로

도토리 서른 알로

떨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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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직립 보행할 수 있도록 진화하면서 뇌가 커져 미숙한 상태로 태어난다. 미성숙기가 오래토록 지속된다. 윤리 뇌가 다 자라는 것을 마지막이라고 보면 여성은 25년가량, 남성은 30년가량 자라야 한다. 전인격적 성숙까지 고려할 때, 사실 인간의 대부분은 평생토록 다 자라지 못하고 살다 죽는다. 직립보행이 인간에게 가져다준 축복의 이면이다. 비대칭의 대칭이란 진리는 여기서도 예외를 허하지 않는다.


인간이 태어나 자라가는 과정은 단계적인 몸짓 변화로 이루어진다. 몸짓이야말로 존재론이며 근원의학이다. 소미한 이야기는 다른 기회로 넘기고 큰 몸짓 이야기만 한다. 아기가 가장 먼저 하는 몸짓은 뒤집기다. 뒤집기는 눕혀진 상태에서 엎드린 상태로 바꾸는 몸짓이다. 이 몸짓은 살아 있는 생명체를 스스로 만드는 최초 행동이다. 배가 위로 향해 있으며 움직이지 못하는, 그러니까 죽어가는 물고기와 움직이지는 않지만 배를 아래로 향하고 잠든 물고기를 비교하면 그 이치를 금방 알 수 있다.


뒤집은 다음 아기가 하는 몸짓은 몸을 좌우로 흔들어 전진하는 배밀이다. 이것은 명백히 물고기, 그러니까 어류의 생명 운동이다. 그 다음에는 손발을 쓰면서 진행되는 엎드려 기기다. 배가 여전히 땅에 닿아 있는 양서류 단계부터 시작해 파충류 단계를 거쳐서 이윽고 배가 땅에서 완전히 떨어져 생활하는 포유류에 이르기까지 자라간다. 그러다가 주위 사물을 의지하면서 서고 발걸음을 떼면서 영장류로 변화해간다. 최후로 걷기가 시작되어 능숙해지고, 게다가 달리기로 나아가면 비로소 인간의 몸짓이 완성된다. 이 일련의 과정은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어류는 어류대로, 양서류는 양서류대로, 파충류는 파충류대로, 포유류는 포유류대로, 영장류는 영장류대로,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우주 이치에 맞는 생명을 살다 간다. 그들의 삶에는 심신 분열도 없고, 자아와 우주의 분리도 없다. 문제는 인간이다. 인간의 걷기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이다. 걷기의 진리를 미처 자각하기 전에 인간은 자아폭발(스티브 테일러)이란 분리를 겪으면서 걷기에서 스스로 소외되었다. 걷기에서 소외된 장구한 역사를 우리는 문명이라 부른다. 문명이 이제 인간을 인간이지 못하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 어찌할 것인가?


걷기의 진리를 복원해야 한다. 걷기를 되살려야 한다. 걸을 수 있음에도 걷지 않는 사람은 무조건 당장 걸어야 한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기어야 한다. 기지 못하는 사람은 배밀이해야 한다. 배밀이도 못하는 사람은 뒤집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시작해서 걷기를 복원하면, 구구한 설명 필요 없이 인간이 왜 인간인지 알 수 있다.


그러면 걷기란 무엇인가? 이미 <녹색의학은 여성이 남성과 다름을 인정하는 의학이다-『이브의 몸』(14)>에서 대강을 밝혔다. 걷기는 우주 진리를 몸 사건으로 일으키는 인간의 존재 양태다. 두 발과 다리는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며 움직인다.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미는 동작을 교차 반복한다. 찰나적으로만 땅에서 서로 연속되고, 나머지 모든 시간 동안은 서로 단절된다. 이것이 연속과 단절의 본령이다. 연속될 때는 단정하게, 단절될 때는 기우뚱하게 균형을 이룬다. 이것이 연속과 단절의 하모니다. 걷기는 정확하고 절묘하게 우주 운동을 담는 인간 행위다. 몸짓으로서 인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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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제약회사 - 거대 제약회사들의 살인적인 조직범죄
피터 괴체 지음, 윤소하 옮김 / 공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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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약의 유해성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임상의는 심각한 유해반응을 당국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1% 정도만 보고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의사들은 바쁜데다, 유해반응이 약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무시해버리곤 하는데, 그러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유해반응을 보고하는 의사는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을지도 모른다. 제약회사에서 계속 사람을 보내 환자에 대해, 그리고 환자가 복용하는 다른 약 등에 대해 온갖 질문을 하며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약의 위해성에 진짜 관심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피해자를 제외하고는 말이다.(217-218쪽)


  약을 안전하게 처방하는 데 필요한 모든 약 정보를 임상의가 알아낼 수 없으므로, 당연히 의사들은 의학적 오류를 많이 범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규제당국이 약을 하나하나 별개로 볼 뿐, ‘의사들이 자기가 사용하는 약들에 관한 모든 경고를 다 알 수는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규제당국에 중요한 건 이뿐이다. ‘우리 잘못 아님. 우리는 경고했음.’(233쪽)



의사에게 신약을 설명·소개하는 제약 회사의 신약 정보 담당 영업 사원을 detail man이라 한다. 악마는 detail에 있다는 말과 미묘하게 어울린다. detail을 놓칠 수밖에 없는 임상의의 조건과 이것을 악용하는 제약회사와 규제당국의 detail은 비대칭의 대칭을 이룬다. 제약회사와 규제당국은 악마 짓도 이렇게 야비하게 한다. 의사는 돈에 낚여 자의 반 타의 반 저들의 악마 짓에 부역한다. 그 틈에서 환자가 죽어간다.


이 틈은 환자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벽이나 다름없다. 환자에게는 무섭도록 큰 허방이다. 왜냐하면 의사를 신뢰한 결과 빠져드는 죽음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죽음의 순간까지 환자들은 의사, 그러니까 제약회사, 그러니까 규제당국이 악마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죽이는 자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채 죽는 일보다 더 참담한 일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병으로 죽는 사람이 겪는 이중고다.


제약회사와 규제당국이 한통속이라는 것의 실상은 단순한 부패동맹을 넘어선다. 자본이 권력을 먹어 권력을 사적 형태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러다가는 기업이 정부를 통째로 사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내용적으로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우리사회의 경우 삼성이 권력의 일정 부분을 매수한 측면을 두고 ‘삼성 장학금’이라 표현한다. 공동체 전체가 거대 기업의 독점 망에 걸리는 일이 꼭 상상만은 아니다.


종교적 권위를 지닌 의사가 처방하는 약으로 인간의 정신을 지배한다면 이외로 상상은 간단하게 현실이 된다. 사실상 SSRI나 ADHD 약은 이미 이런 기획을 진행시키고 있다. 이른바 양극성장애에 일단 포획되면 한평생 저들의 백색화학합성물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이 광경을 가까이서 목도한 바 있다. 앞으로 속수무책 당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자꾸 떠드는 거다. 부디 경고의 소리가 널리 퍼져가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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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판전. 추사가 와병 중 무심의 경지에서 쓴 고졸한 현액이 세월 따라 낡아간다. 그 아래 구복 의식 집전하는 승려의 명품 운동화와 기이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예술은 무엇인가. 종교는 또 무엇인가. 가을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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