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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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병이 제공하는 기회를 붙잡으려면 질병을 적극적으로 살아내야 한다. 질병을 생각해야 하고 이야기해야 하며·······질병을 주제로 써야 한다. 생각하고 말하고 씀으로써 우리는 개인이자 사회로서 질병을 받아들일 수 있다. 또 그때야 질병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다. 아프다는 것은 그저 다른 방식의 삶이고, 질병을 전부 살아냈을 즈음에 우리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질병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도 자명하지도 않은 이유는 질병이 우리를 다르게 살도록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팠던 동안 나눈 대화와 편지에서 시작되었다.·······대화를 하면서 질병은 내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되었다. 나아가 친구, 친척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내가 더 큰 ‘우리’의 일부가 되었다는 감각이 자라났다.·······결국 다른 모든 경험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것’과 ‘내가 남을 통해 살아낸 것’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은 없다.(10-11쪽)


질병이 질병 있는 사람에게 다만 고통일 뿐이고 기억으로 남을 상처일 따름일 때, 그것은 정말 인생으로 들어와서는 안 될 저주다. 이런 저주가 너무나 자주 너무도 태연히 들락거리는 게 인생이라면, 인생을 다시 생각해야 할까, 질병을 다시 생각해야 할까?


이 질문에 다른 답을 내는 사람도 있을까 의아해하는 사람 대부분이 틀린 대답을 한다. 그들은 질병을 “적극적으로 살아내”지 않아서 질병 전후의 삶이 달라지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질병에 ‘걸렸을’ 때, 밖으로는 아니지만 안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만 아프다.”


자기 말고 아픈 사람이 또 있음을 알았을 때, 밖으로는 아니지만 안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더 아프다.”


폭발(타락)한 자아, 분리된 자아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질병을 삶에서 떼어낸다. 떼어내진 질병은 “특별한 것”이 된다. 그 특별한 것은 귀중해서가 아니라 무관해서 격리시킨다. 격리시킨 사물과 주고받을 것은 없다. 주고받지 않는 데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른바 ‘치료’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처럼 살아가면 그뿐이다. 땡!


질병이 제공하는 기회”를 이렇게 날려버린 사람은 결국 자신의 인생을 다시 생각한 것이다. 어리석은 쪽으로 말이다.


질병을 적극적으로 살아내면 질병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다. 그 그리 특별하지 않은 것은 하찮아서가 아니라 당연한 일부이기 때문에 인생에 귀속한다. 질병을 끌어안아 하나가 되었으므로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다른 삶은 너른 삶이다. 너른 삶은 영토가 확장된 삶이 아니라 서로 배고 배는 삶이다. 서로 배고 배는 삶이기 때문에 “질병은 내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된다. “더 큰 ‘우리’의 일부”인 나를 깨닫게 해준 질병을 통해 마침내 지상의 진리에 가 닿는다.


‘내 것’과 ‘내가 남을 통해 살아낸 것’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은 없다.


질병은 인간 존재의 전제다. 불가피하므로 겸허히 받는다. 겸허히 받을 때 비로소 백색문명 백색의학에 맞서는 극진한 저항이 된다. 극진한 저항으로 생명은 다시 궁극연대를 이룬다. 궁극연대를 이루려면 “질병을 생각해야 하고 이야기해야 하며·······질병을 주제로 써야 한다.” 이제.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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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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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이 질병의 이상적인 결말이라고 보는 견해에는 문제가 있다. 어떤 이들은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만일 회복이 이상적으로 여겨진다면 계속 만성으로 남아 있는 질병이나 죽음으로 결말나는 질병을 앓는 사람들의 경험에서 어떻게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답은 회복보다는 ‘새롭게 되기’에 초점을 맞추는 일인 듯싶다. 계속 아프다 해도, 심지어는 죽어간다 해도 질병 안에는 새롭게 될 기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9-10쪽)


회복이란 무엇인가? 질병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가?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가령 위염을 앓다 치료 받고 염증이 사라진 경우처럼 ‘더는 아무 문제없는’ 상태를 회복이라 한다면 대체 얼마만큼의 병에서 그런 회복이 가능한가?


회복이라는 말은 분명한 소원을 품고 있다. 그 소원이 대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 같은 것이라 문제다. 예컨대 생애 초기 엄마를 잃은 아기가 자라나 청소년기에 우울장애를 앓는다 하자. 우울장애를 낳은 그 상실을 회복시키는 치료가 있는가?


당연히 없다. 절대로 없다. 이 경우 무엇을 "이상적인 결말"로 삼을까? 그러니까, “계속 만성으로 남아 있는 질병이나 죽음으로 결말나는 질병을 앓는 사람들의 경험에서 어떻게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질병이 계속되고, 심지어 그 때문에 죽어가는 상황에서 대체 어찌 하면 “새롭게 되기”가 가능한가?


새롭게 되기는 바뀌기다. 바뀌려면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려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려야 한다. 있는 그대로 현실이란 순수사실의 집합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질병에 처한 자신의 삶을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해석하고 평가하지 않은 채 ‘망연한 눈으로 지그시 바라볼’ 때 보이는 현실이다. ‘전경을 품고 각각의 풍경을 지나 걸어감으로써 아픔을 대할 때에만 얻어지는 각성’된 현실이다. 이렇게 각성된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이 진리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진부하기까지 하다. 이 진부한 진리가 내 삶의 진실이 되는 게 관건이다. 관건이 관건일 수밖에 없는 것은 “계속 아프다 해도, 심지어는 죽어간다 해도” 이 각성이 정녕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아프다 해도, 아니 계속 아프기 때문에 새롭게 되어 간다. 심지어는 죽어간다 해도, 아니 심지어 죽어가기 때문에 새롭게 되어 간다. 이 각성이 절망을 “기회”로 전복시키며 내 삶을 숭고로 이끈다. 숭고는 눈물과 익살을 양손에 잡고 장엄의 길을 걷는다. 늘 아파서 나날이 죽어가서 내내 새롭다.


현재의 질병 상태에서 놓여나지 못한 채, 한평생 살다 죽으면 어쩌나 하는 아뜩함으로 주저앉곤 하는 한 청년이 있다. 정작 아뜩함을 느껴야 할 것은 회복의 신화에 매달려 질병을 증오하기만 하는 유태幼態보존적neotenic 자기애다. 여기를 짚고 일어나지 않는 한, 그의 삶에는 새로움의 빛이 영영 찾아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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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맡김과 있는 힘 다해 애씀은 같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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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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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고 난 후에는 예전에 있던 곳으로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변화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고통을 보았고, 특히·······건강한 사람은 갖기 어려울 수도 있는 어떤 관점에서 고통을 보았다. 삶이라는 게임을 이전과 같은 조건으로 계속할 수는 없었다. 예전의 나를 회복하기보다는 앞으로 될 수 있는 다른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9쪽)


통이지지痛而知之. 아픔으로 알아지는 바가 있다는 말이다. 이때 안다는 말은 어떤 지식을 지닌다는 말과는 다르다. 전인격적 깨달음을 뜻한다. 좀 더 핍진한 해석은 ‘아픔으로써만 깨달아지는 진실이 있다.’일 것이다. 이 진실은 차마 형언할 수 없는, 언어 저편의 비밀을 지니고 있다. 신비라고 표현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아픈 사람 자신에게조차 곡진한 주의를 기울일 때에만 틈을 내주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극한의 아픔은 죽음의 공포마저 부숴버린다. 목숨을 삼키는 아픔도 있다는 사실에는 두 개의 경고가 붙는다. 아픔과 맞닥뜨릴 때 눈감지 마라. 아픔과 맞닥뜨릴 때 도끼눈 뜨지 마라. 자연히 똑 한 개의 격려가 남는다. 아픔과 맞닥뜨릴 때 망연한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라. 망연한 눈에는 전경이 들어온다. 지그시 바라보면 풍경이 흘러간다. 비로소 아픔답게 대할 길이 열린다.


전경을 품고 각각의 풍경을 지나 걸어감으로써 아픔을 대할 때에만 얻어지는 각성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고유할 뿐만 아니라 새롭다. 새로움에서 솟아오르는 경이가 앓고 난 사람의 인격에 기품을 부여한다. 그 기품을 일러 거룩함이라 한다. 거룩함은 단독자의 실체 아닌 상호 의존하는 존재의 관계를 눈부시게 드러낸다. 관계의 눈부심이 바로 신이다. 신의 길을 여는 것이 아픔이다.


아픔으로 여는 신의 길이 아픔 이전 삶으로 돌아가는 길인 경우는 전혀 없다. 신의 삶은 고착된 경지를 허하지 않는다. 돈오는 무한히 점오를 낳으며 늘 걷는다無常. 늘 걷는데 자아가 있으랴無我. 無常無我의 걸음에는 신도 부처도 이름을 내려놓는다. 이름 없는 소소小少한 파동으로 소소소 번져간다. 함께 배고 서로 밴다. 아픔은 거대와 고립을 녹여 자그마하게 주고받는 무한 네트워킹의 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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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을이나

코타키나발루 노을이나

모두 처연히 아름답다

처음과 끝이 닿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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