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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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이 어떻게 몸을 치료하느냐는 질병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절대 이야기의 반 이상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나머지 반은 몸 자체다.········이 두 이야기, 즉 몸을 자신의 영토로 취하는 의학 이야기와 몸 자체에 경이로워하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는 같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질병은 두 이야기 모두이기 때문이다.(83-84쪽)


대화할 때 서로 사용하는 어휘들의 사전적 의미를 정확히 안다고 해서 소통이 제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제대로 소통하려면 말의 행간이나 그늘shade을 포착해야 한다. 말의 행간이나 그늘은 언어공동체가 삶의 경험을 함께 나누면서 품고 길러온 미묘한 느낌의 파동 같은 무엇이다. 미묘한 느낌의 파동 같은 무엇이므로 의식적으로 가르치고 배워서 감지할 수 없다. 이 감각의 장場에서 소외되면 사회생활은 무척 고단해진다.


바로 이런 고단함이 마음병과 교직된 한 사람과 숙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에서 행간이나 그늘을 감지하는데 매우 취약하다. 중요한 대목에서 외부로 드러난 말뜻의 일부만 취함으로써 충분히 소통하지 못한다. 환유의 언어 감각으로 자신이 다른 사람을 분리해내면서도 대화가 끝나고 나서는 오히려 당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후적 피해의식은 그가 거의 언제나 을의 위치에서 지니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그다지 폐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의도적으로든 무심코든 갑이 환유를 일삼을 경우다.


의자가 작성하는 진료부가 질병 이야기의 전부로 행세하는 백색의학 현실은 환유가 어떻게 권력, 아니 폭력인지 증언하고 있다. 진료부는 질병 이야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백색의자는 이 일부에 아픈 사람의 삶 전체를 우겨넣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 일부로써 아픈 사람의 존재를 전유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일부를 아픈 사람의 존재에서 떼어내 거기다 존재 전부를 환원한다. 그 외에는 알 바 아니고 알 수 없다. 그런 그들이 아래와 같이 훤화한다.



이 무슨 개소린가. 순서를 뒤집어 ‘환자가 아프면 의사도 아프다.’ 했다면 물색없는 위선이라도 ‘에구, 애깨나 쓴다.’ 해주지. 자신들이 갑이란 사실을 대놓고 드러냄으로써 장구한 세월 동안 환유의 폭력에 절어 살아온 내력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자신들에게서 아픈 사람을, 질병을 가차 없이 분리해온 자들이 이해관계가 가로놓이자 뜬금없이 연속성을 내세운다. 그나마 아재개그만도 못한 사이비 경구를 들고 나선다. 이들은 안와전두엽이 손상된 위너임에 틀림없다. 위너의 자기애성 분리의 오만증후군은 진부하지만 깨알 같다. 스스로는 의사醫師, 그러니까 치료하는 스승이고 아픈 사람은 환자 患者, 그러니까 앓는 놈이라니 말이다. 


그들이 나라와 환자 걱정 앞세우며, 급여비율을 높이려는 정책에 반대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돈이다. 돈으로 환원된 세상에서 갑으로 군림하면서도 끊임없이 결핍감에 껄떡거리는 자신들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는 수준이다.


이때 정녕 필요한 목소리는 아픈 사람들에게서 나와야 한다. 현재 백색의학의 식민지로 사는 사람은 물론 언제 어디서든 저들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몸 이야기를 들고 나서야 한다. 갑들이 3만이나 모였다니 을들은 30만, 300만 모여서 의료민중의 경이로운 몸 이야기를 하며 걸어야 한다. 걸으면서 길을 찾아야 한다. 백색의학의 환유독재를 혁명하려는 녹색의학 은유민주 촛불을 들 때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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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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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돌봄은 아픈 사람의 경험에서 다른 점이나 특별한 점을 인식하며, 그래서 돌봄을 받는 사람은 자기 삶이 귀중히 여겨진다고 느낀다. 우리에게 사람을 분류할 권리는 없지만 특권이 하나 있다. 바로 각자가 얼마나 고유한지 이해하는 특권이다. 돌보는 사람이 이 고유함에 마음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픈 사람에게 어떻게든 전할 때 아픈 사람의 삶은 의미 있어진다. 나아가 아픈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돌보는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이루는 한 부분이 되면서 돌보는 사람의 인생도 의미 있어진다. 돌봄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에서 분리할 수 없으며, 이해가 쌍방향으로 일어나야 하듯 돌봄도 대칭을 이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우리는 자신 또한 돌본다. 그렇지 않다면 소진되거나 좌절하고 말 것이다.(80-81쪽)


내가 하는 일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보이는 가장 흔한 반응은 이 두 가지다. 마음 아픈 사람들과 허구한 날 함께 있으면 너도 아파지지 않느냐? 네가 아프면 누가 고치냐? 내 대답은 이 두 가지다. 나도 아프다. 아픈 사람들이 고친다. 내 대답을 들은 뒤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백색의학은 부정하겠지만 우울병의 근원적 치유에 숙의는 불가결하다. 숙의의 터전은 공감이다. 공감의 본령은 전염이다. 전염의 경로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연결고리로 환자와 의자의 삶은 함께 짜인다. 함께 짜이는 과정에서 환자와 의자의 삶은 ‘다로 또 같이’ 달라진다. 달라짐, 이것이 다름 아닌 치유다.


치유는 치료와 돌봄을 포괄하는 너른 개념이다. 돌보는 사람을 겸하므로 숙의로 치유하는 의자는 의학 너머 삶을 산다. 의학 너머 삶을 사는 의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끊임없는 깨침의 계기다. 어느 한 깨침에 머무를 수 없다. 머무를 수 없는 까닭은 그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이 고유한 아픔이기 때문이다.


각기 고유한 아픔을 치유하는 일의 성패를 칼 같이 판단할 수는 없지만 어떤 경우라도 깨침은 일어난다. 아픔의 사람, 사람의 아픔을 마주하는 일은 그 자체로 아픔이므로 즐거울 리 없지만, 웃을 일 구태여 찾지 않아도 삶이 싱그러운 것은 바로 전천후 깨침 때문이다. 전천후 깨침에 뭘 보탠들 사족 아니랴.


60년 남짓한 생의 여정을 돌아보면 참으로 훼절이 많았다. 극단의 고통, 극단의 결핍, 극단의 이별, 극단의 모멸, 극단의 실패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그 훼절을 뚫고 나아가기 위한 저항 또한 극단이었다. 극단들의 어름에서 숙의치유, 그러니까 돌봄의 숙명이 드러나 오늘에 이르렀다. 고유 우주들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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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병은 상실을 불러온다. 상실은 통증처럼 몸 안에서 시작되고, 그 다음엔 밖으로 이동해 나가서 몸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62쪽)

  미래와 과거의 상실,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느낌의 상실, 평범한 기대의 상실은·······모두 애도되어야 했다. 아픈 사람이 무엇을 상실하느냐는 각자의 삶과 질병에 따라 다르다. 아픈 사람이 애도하기로 택한 것에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상실했다고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상실은 실재하며 존중받아 마땅하다.(66-67쪽)

  사람들이 애도와 관련해 겪는 문제는·······상실한 사람이 그만 슬퍼하길 주변에서 바라기 때문에 생긴다.·······사회는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이 상실을 그리 대단치 않은 일로 정리하고 잊은 다음, 건강한 보통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라고 압력을 가한다.

  전문가들은 적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나는 애도가 ‘긍정하는 일’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질병이나 죽음 때문에 애도하는 일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정한다. 상실이 그저 뒤돌아 나오면 되는 사건인 양 단순하게 다룰 때만 ‘신속한 적응’을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상실한 무언가를, 상실한 누군가를 존중하지 않는다. 아픈 사람이 그때껏 함께 살아온 자기 몸과 헤어질 때, 돌봄을 주던 사람이 돌봄을 받던 사람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울 때 시간을 두고 충분히 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충분히 애도한 뒤에야 한 사람은 상실을 통과하여 다른 편에 있는 삶을 발견할 수 있다.(68-69쪽)


지난 5월 18일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의 리뷰로 쓴 <슬픔의 ‘슬픔’에서 혁명이 시작된다>는 애도를 왜곡·억압하는 권력의 파렴치보다 애도를 오해하며 허투루 대하는 지식인의 피상성 문제를 지적했다. 애도는 어느새 유행어처럼 되었지만 여전히 그 의미가 제대로 새겨지지 않은 채 흘러 다닌다. 이 어두운 실재는 오늘 아서 프랭크의 본문에도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충분한 애도를 힘주어 말하는 저자의 의도에 누가 무슨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상실을 슬퍼하는 것이 애도의 내용이라는 사실로부터 그 애도가 상실한 사람의 삶 전체에서 무엇인가 하는 질문의 답이 도출되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정”하는 일이라고 한다. 저자가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으므로 내가 쟁에 부친다.


원문 단어를 모른 채 하는 일이라 조심스럽긴 하지만 일단 “긍정”이란 번역이 옳다고 전제하자. 긍정은 부정의 반대말이다. ‘틀리다(그르다)’에 맞서는 ‘맞다(옳다)’의 뜻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정한다는 말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맞다’고 평가한다는 말이다. 과연 애도가 ‘맞다’는 평가일까?


아니다. 특정 부분 불균형을 제외하고 저자는 일관되게 질병과 통증과 상실의 발생이 성격 또는 윤리적 판단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애도가 ‘맞다’는 평가라면 ‘맞게 살아온 삶에 왜 이런 상실이 발생했을까?’ 하는 질문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그 질문에 답하는 일은 실증적인 차원을 물리고 심리적 차원을 불러들인다. 이는 저자의 뜻과 배치된다.


생각건대 저자의 전체 논지로 보아 애도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부 평가 없이 그대로 “인정認定”하는 일이라 함이 타당하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좋다 싫다 구별하지 않은 채 현실 자체를 내 삶의 일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이 바로 애도다. 질병과 통증과 상실을 내 삶에서 분리해내고서는 애도가 성립할 수 없다. 애도 없이는 “다른 편에 있는 삶”에 가 닿을 수 없다. 애도는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의 삶을 잇는 연속의 고리다. 애도는 질병과 삶, 나와 너, 개인과 사회를 잇는 연속의 고리다. 그 연속의 고리는 “인정”이 피워내는 꽃이다. “인정”이 피워내는 꽃은 슬프기 때문에 아름답다.


저자가 미처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번역자가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서구 사유가 이런 부분에 취약하며, 그 서구의 자장 안에 있는 우리사회 주류 역시 그렇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세월호사건 유가족은 애도를 금지 또는 유보당한 채 잠 못 이루는데 지겹다 애도 따위 그만하고 적응하라 종용하는 무리가 훤화하고 있다. 촛불이 세월호사건 수괴를 권좌에서 끌어내려 감옥에 넣었지만 진실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 아이들을 가슴에 묻은 채 1332일째 진실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애도 길이 하루빨리 열리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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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을 바라보는 동안 그 아름다움은 내 안에서 짧은 시가 되었다.


  나뭇가지 뒤 가로등이

  서리 낀 창 위에

  무늬를 던진다

  유리를 닦지 마라

  사람들이 깨어날라


  ·······이야기되어야 한다. 표현되어야 한다. 형편없는 시구일지는 몰라도 나는 다시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다. 표현할 수 없는 통증 속에서 아픈 사람은 고립되며, 입을 다물면서 추방된다고 느낀다.·······표현함으로써 아픈 사람은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온다.·······

  ·······질병과 통증은 삶을 조각내지만, 사는 이유를 모두 빼앗겼다고 혹은 사는 이유가 막 사라질 참이라고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다시 조화를 발견하곤 하며, 그렇기에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창에 비친 아름다움을 본 그 밤에 통증은 덜 중요했다. 내 몸에서 나를 떼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몸 밖으로 나를 연결했기 때문이다.(58-61쪽)


원문을 보지 못했다. 그냥 그 상태에서 위 번역을 다시 번역한다.


  나뭇가지 따라나선 가로등

  서리 안은 창, 그

  가슴에

  무늬 하나 살포시

  유리 얼룩 그대로, 그대

  곤히 잠자라


뭐, 그냥 유치한 변주다. 구태여 이런 퍼포먼스 하는 까닭이 있다. 내가 꽂힌 지점은 바로 “표현”이다. 나는 표현을 “묘사”라 묘사하고 싶다. 묘사가 더 감각적이다.


더 감각적이란 말은 더 정확하고 더 예술적이란 말이다. 더 정확하고 더 예술적인 묘사를 왜 해야 하나? 그렇게 묘사된 통증은 비상해지기 때문이다. 비상해진 통증은 자기 거점을 지운다. 이것은 역설이며 역설이 아니다. 붓다의 진리며 메시아의 진리다.


창에 비친 아름다움을 본 그 밤에 통증은 덜 중요했다.


아! 이 도저한 고요, 철저한 균형. 원효 냄새를 맡는다. 바리 살갗을 만진다. 삶의 전경을 본 거다. 그 전경에서 통증을 발효시킨 거다. 비로소 통증은 통증인 거다. 통증으로 말미암아 고립된 에고가 참 나, 그러니까 우리 사이 나로 돌아왔다. 우리 사이 나로 돌아온 것은 “내 몸에서 나를 떼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몸 밖으로 나를 연결했기 때문이다.” 내 몸 밖으로 나를 연결하는 것이 다름 아닌 예술이다. 예술의 비상으로 모든 뮤즈는 치유 신으로 등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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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밤, 조각나는 듯 느끼는 데서 빠져나갈 출구를 발견했다.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창에 비친 풍경과 마주쳤고, 멈춰 섰다. 진정 환영과도 같았다. 창밖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나무 바로 위쪽의 가로등이 나무 그림자를 서리 낀 창문에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곳에, 암흑과 고통밖에 없는 듯했던 한밤중의 창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아름다움의 얼굴을 볼 때 우리는 제자리에 있게 된다. 모든 것이 조화로워진다.·······


  질병에 얼굴이 있다면 그 가로등 불빛의 아름다움이 질병의 얼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밤에 창문에서 본 것은 질병의 얼굴이 아니었다. 진통제 약효를 뚫고 나온 통증이 악몽을 만들어냈을 때 악몽 속에서 질병의 얼굴을 본 것이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 밤의 창문은 신화도 상징도 아니었다. 창문은 오로지 창문이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홀린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통증 속에 있었지만 통증이 나를 그 자리로 데려갔기에 창에 비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조화가 다시 돌아왔다.(58-59쪽)


무엇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과 그 마음이 몸에 미치는 파장은 우리 삶에서 과연 무엇인가?


풍경은 전에도 있었다. 풍경은 전에도 보았다. 늘 그 자리에 있었고 늘 거기서 보았던 풍경이 홀연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어떨 때인가?


여전히 통증 속에 있었지만 통증이 나를 그 자리로 데려갔기에 창에 비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의인법을 소거하고 간명하게 말하면, 통증이 전환의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재앙은 특별한 순간, 즉 전환의 순간에 나타나는 것이다.”(『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278쪽)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출산을 예로 들며 이런 양의 피드백 과정은 정체 국면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산모가 신체 일부를 잘라낼 때와 똑같은 극한의 진통을 겪어내면서 새 생명을 낳는 이치는 아서 프랭크가 진통제도 뚫고 나오는 암의 통증을 겪어내면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에 그대로 적용된다.


아름다움의 발견은 무슨 전환을 가져왔나?


조화가 다시 돌아왔다.


단절에서 연속이 복원된 것이다. 이것은 실로 지상至上의 전환이다. 지상의 전환이 아름다움의 감각에서 오다니. 아름다움이란 그러니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름다움이란 실체가 있어 전환의 에너지가 전해진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풍경 속의 나무와 가로등, 그리고 창문이 있어 전환의 구조가 세워진 것이 아니다. 통증에 극진히 주의를 기울였을 때 전환의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아름다움은 소식이다. 그 소식을 듣고 아픈 사람은 돌아갈 길을 찾는다. 돌아갈 길 위에 선 사람에게 소식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이라는 품은 너르고 다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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