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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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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양은 통증을 일으켰고 생명을 위협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일부였다. 변화를 주지 않으면 내 몸은 얼마 못가서 기능하지 못하게 될 것이었지만, 이 몸은 여전히 나 자신이었고 종양은 바로 이 몸의 일부였다. 내 몸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두 편으로 나눌 수는 없었다.·······내가 여전히 하나의 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마음이 편해졌다.

  몸이 살려면 종양이 없어져야 하지만 이것은 몸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였다. 내 의식이 종양을 발생시키지 않았듯 사라지게 할 수도 없었다. 내가 의식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은 몸에 경이로워하고 몸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살기를 욕망했지만 삶 자체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이었다. 자신과 싸우기를 포기하고 몸 나름의 지혜에 따라 몸이 변하도록 내버려두자 마음이 훨씬 평화로웠다.(135-136쪽)


  ·······나라는 존재는 신체과정이지만 또 의식이기도 해서, 의지와 역사를 가졌고 생각과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신체과정과 의식은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질병은 그 둘이 하나임을 가르친다.·······통증을 겪으며 나는 몸에 사고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사고가 변화하면서 사고는 다시 통증을 변화시켰다. 몸과 정신은 이렇게 끊이지 않는 원을 그리며 순환한다.(140쪽)


만일 아서 프랭크가 심각한 우울장애로 자살을 기도해 사경을 헤매다 기적적으로 되살아난 뒤 이런 유의 글을 썼다면 어떤 식으로 논지를 펼쳐갔을까 생각해본다. 궁극적으로 같은 지점에 도달하겠지만 출발은 “몸에 사고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가 아니라 사고에 몸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였을 것이다. 종양과 몸, 신체과정과 의식의 분리를 거부하는 일관성의 한가운데 박힌 “내 의식이 종양을 발생시키지 않았듯 사라지게 할 수도 없었다.”는 모순성 발언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든 의문이었다.


이는 모순이라기보다 질병 경험의 구체성에서 나온 우선순위의 차이 문제다. 서구 사유 전승 속에 있음에도 분리 프레임과 맞서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경험 행로를 따라간다. 우선 종양과 몸의 일치를 명토 박는다. 종양을 떼어내 박멸하고자 하는 이종의학 치료와 무관하게 그는 마음에서 ‘종양과의 전쟁’을 거부한다. “몸에 경이로워하고 몸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 “몸 나름의 지혜에 따라 몸이 변하도록 내버려두자”는 몸 주도권을 인정한다. 몸 주도권을 인정하니 마음의 평화가 깃든다. 마음이 평화로우니 통증에 변화가 일어난다. 결국 “질병은 그 둘(, 그러니까 몸과 마음-인용자 부가)이 하나임을 가르친다.”를 거쳐 “몸과 정신은 이렇게 끊이지 않는 원을 그리며 순환한다.”에 이르게 된다.


이런 우호적 이해는 그가 종자논리에서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지만 서구 사유의 훼방을 뚫고 여기까지 온 것은 인정받아 마땅하다. 개인적 감수성이나 능력도 있겠거니와 지속적으로 동아시아 지혜가 그와 함께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 선불교와 도가 사상의 영향은 서구 사유 한계를 찢는 데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좀 더 웅숭깊은 표현이 가능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이 책이 번역되어 우리에게 읽히는 것을 보면 동아시아인인 우리가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듯하다.


이제 근본적인 의문 해소를 시도한다. 종양에서 해방되는 데 그의 의식은 과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종양이 사라지는 데 그의 의식이 직접적인 작용을 했다는 증거를 현대과학 수준에서 제시할 길은 없다. 현대의학 요법만으로 종양이 사라졌다는 증거는 그러면 가능한가? 그 또한 아니다. 과학 너머에 몸의 경이가 있다. 몸의 경이는 마음의 파동과 맞물린다. 마음의 작용만으로 종양이 사라지지 않았을 것임과 꼭 마찬가지로 마음의 작용 없이는 종양이 사라지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일극에 쏠린 진리는 사이비다. 이 각성이 명징하게 자리 잡지 않아서 가끔 아서 프랭크는 흔들린다. 그 흔들림에서는 안타까움뿐 아니라 감동도 배어나온다. 그 감동은 설혹 그가 종양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르지 않는 감동의 샘은 강철 같은 의지가 아니다. 환희에 찬 긍정이 아니다. 종양 따윈 없다는 초탈이 아니다. 죽으면 그뿐이란 체념이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 도저한 내맡김이다. 내맡김은 몸 전체를 향해 펼친 은유다. 은유는 자아 거점을 지워 소소함으로 소소하게 반야 진리에 배어든다. 반야 진리는 분리를 뿌리친다. 분리를 뿌리치면 망상이 사라진다. 분리 망상 없는 평화에 깃들 때, 질병도 죽음도 특별한 무엇이 아니게 된다. 평범한 삶 이야기로 걸러내면 내맡기는 마음은 한결 고슬고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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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을 깨뜨리고 정의를 드러내다]


대학교수들이 2017년 사자성어를 파사현정으로 정했다. 촛불혁명으로 일어난 정치 변화를 그대로 표현하는 한편, 좀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적폐청산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도 그 뜻을 담아 눈밭에 그려보았다. 손가락 붓이 의외로 유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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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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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픈 사람이 두렵고 비통한 마음을 잘 표현해서 칭찬받았다거나, 드러내놓고 슬퍼해서 칭찬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반대다.(104쪽)

  아픈 사람이 ‘명랑한 환자’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슬퍼진다.(106쪽)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 몸이 얼마나 취약한지 주변 사람들도 함께 인정하는 것이다. 그럴 때 아픈 사람은 정말로 용감해지고 명랑해질지도 모른다. 애써 유지하는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들과 공유하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모습으로서 말이다.(115쪽)


고급 장교 출신인 고교 동창이 있다. 입만 열면 자기 자랑이다. 친구들이 대놓고 핀잔을 줘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를테면 개천에서 나온 용이니 말이다. 그의 입에서 수없이 반복해서 흘러나온 자랑(!)은 고교시절 빈곤 이야기다. 그 옛날의 빈곤과 오늘의 부요가 대비되면서 한껏 성공신화를 돋을새김해주니 왜 ‘18번’을 바꾸겠는가.


그 시절 그가 겪은 빈곤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빈곤은 시대의 이름이었다. 내가 겪은 빈곤도 그의 것과 본질이 같았다. 차이라면 나는 그 가난을 말할 수 없었다는 점뿐이다. 50년 가까워오는 지금까지도 내 빈곤을 동창들은 전혀 알지 못 한다. 교통비가 없어 두 시간 이상 걸어 지각 등교하면 대학생 왔다며 그들은 웃었다.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수돗물로 배를 채우고 들어오면 매점에서 맛있는 것 혼자 사먹고 왔다며 그들은 웃었다. 그들의 그 웃음은 입때껏 계속되고 있다.


나는 왜 내 빈곤을 이야기하지 못 했을까? 이 의문은 아마도 왜 아픈 사람은 “두렵고 비통한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 하는가, 왜 아픈 사람은 “드러내놓고 슬퍼”하지 못 하는가, 왜 아픈 사람은 “‘명랑한 환자’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가, 하는 의문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빈곤을 대하는 자세에서 그 친구와 내가 달랐던 점이 답의 핵심 내용을 이끌고 있음에 틀림없듯, 질병을 대하는 자세가 답을 이미 머금고 있을 것이다.


백색의학이 공식적으로 통제하는 질병은 을의 질병이다. 을의 질병은 사회적으로 ‘죄’의 자리에 처해진다. 질병이 있는 을은 죄인이 된다. 죄인이 하소연하는 두려움과 슬픔에 누가 귀 기울이겠는가. 죄인이 그나마 대접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돌이켜 근신하며 견디는 것이다. 통제에 명랑하게 승복하면서 회복의 서사에 의연히 참여하는 것이다.


백색의학이 비공식적으로 부역하는 질병은 갑의 질병이다. 갑의 질병은 사회적으로 ‘악’의 위상을 지닌다. 질병이 있는 갑은 악인이 맞다. 악인이 거둔 사회적 성공에 눌려 백색의학은 그가 질병을 앓는다고 말하지 못한다. 악인의 질병은 도리어 권력과 돈을 거머쥐는 창구다.


백색의학은 을에게 강하고 갑에게 약한 전형적 마름으로 떡고물 챙겨가며 승승장구한다. 마름의 눈에 아픈 사람 을의 몸은 인정의 대상이 아니다. 수탈의 대상일 따름이다. 마름의 눈에 아픈 사람 갑의 몸은 인정의 대상이 아니다. 아부의 대상일 따름이다. 백색의학의 마름 노릇에 힘입어 을은 노예로 갑은 과두로 더욱 확고하게 분리된다.


아픈 사람 을의 감정 표현은 단순히 감정의 문제만도 아니고 표현의 문제만도 아니다. 정치경제학의 문제다. 문명의 문제다. 아픈 사람 을의 아픈 각성을 불러내야 할 때다. 아픈 사람 을의 몸은 그 취약함을 인정받을 권리가 있다. 을의 질병은 죄가 아니다. 죄의식으로 침묵하는 것이야말로 죄다. 죄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해방해야 을은 갑의 악에 맞설 수 있다. 아픈 사람 을의 당당한 감정 표현은 그 자체로 신성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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