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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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람의 관점에서 핵심 문제는 고통이다. 사회가 아픈 사람의 고통을 인간의 공통적인 조건으로 인정하고자 하는가?(182쪽)


아픈 사람의 권리를 생각하다 보면 결국 아주 단순한 질문에 도달한다. 우리를 인간으로서 하나로 묶는 경험의 핵심은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에 고통이 포함된다면, 우리 각자는 바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만큼 강인한가? 만일 인정할 수 있다면 그 사실을 어떻게 존중할 수 있을까?·······가장 현실적인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인간으로서 생산할 수 있느냐다. 인간인 우리를 생산하는 일은 질병이 가져오는 고통을 목격하고 공유하는 데서 시작한다. 또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고통을 공유함으로써 배우고, 이 배운 바에 따라 살아가는 데서 시작한다.(192-193쪽)


요즘 하루 3만 번이나 움직이는 중요한 몸 부위 살의 통증을 겪으면서 지낸다. 통증 제거를 삼가고 정좌한다. 통증의 원인과 진행 과정을 찬찬히 톺아본다. 통증이 어떤 양상을 지니는지 세밀하게 느껴본다. 찌르다, 에다, 끊어지다, 찢어지다, 쥐어뜯다, 뻐근하다, 빠개지다, 쏘다, 튕기다, 후려치다, 베다, 자르다, 아리다, 얼얼하다, 쑤시다, 욱신거리다, 들먹거리다, 뜨겁다, 따끔거리다, 시리다, 차갑다, 울리다, 띵하다, 무지근하다·······. 통증의 갈래는 이리도 다양하다.


통증을 갈래마다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면서 느지막한 깨달음에 부끄러워한다. 내가 지난 10여 년 간 혼신의 힘을 기울인 일은 마음 치유였다. 마음의 다양한 격정 갈래에는 유념했으나 몸의 다양한 통증 갈래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음이 분명하다. 몸 아픈 사람들이 와서 통증을 호소할 때 저 다양한 갈래를 살피지 않은 채 진단 기준이 되는 정도만 질문하고 넘어간 경우가 많았다. 갈래대로 병리가 각각 존재하고 그에 걸맞은 치료 방법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아픈 느낌을 표현하여 공유함으로써 “인간의 공통적인 조건”을 성찰하는 시공을 열어야 했다. 그 인간의 공통적인 조건을 성찰하는 동안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인간으로서 생산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유념했을 테니 말이다.


우리가 자신을 인간으로서 생산하는 문제의 근원 범주는 마음만이 아니다. 마음 맞은편에 태초의 몸이 있다. 몸 이전에 태초의 살이 있다. 살의 통증을 공통적인 조건으로 한 내러티브 공동체에서 인간은 생산된다. 인간을 생산하려면 살의 통증을 이야기해야 한다. 살의 통증을 이야기하려면 살의 통증을 살아내야 한다. 살의 통증을 살아내려면 서둘러 진통시키는 백색의학을 거부해야 한다. 백색의학이 해체한 통증의 공동체를 복원해야 비로소 인간 생산의 기초가 놓인다.


전인으로서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살아내는 삶의 운동 과정 자체다. 그 과정에서 아픔은 필연이다. 아픔은 분리 (혹은 타락) 문명 이후 대부분 괴로움을 수반하므로 이 또한 필연에 버금간다. 결국 고통은 우리가 인간이려 할 때 필수 불가결한 깨달음의 방편이다. 깨달음이 희락에서 오는 진리란 없다. 진리를 살아내려고 나는 이 순간 살의 통증을 응시한다. 내가 내 살의 통증을 응시할 때 시선은 내 통증의 경계를 넘는다. 너머 남의 통증에 가 닿는다. 유마 힐의 몸과 마음으로 배어든다. 소소하게 배어들고 다대하게 배어난다. 다대하게 배어나서 무량수의 배움을 생산한다. 대승이다.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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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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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두려워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병들은 언제나 성격에 관련된 이론으로 설명되었다.(174쪽)


이 이론은 아픈 사람을 자기 안에 가두고 죄책감 안에 가두며, 아픈 사람이 진짜 위험을 지속시키는 사회를 겨냥해 행동하지 못하게 한다.(181쪽)


어디 병뿐이랴. 개인의 성격에 문제가 있어 일어나는 일이라고 치부되는 것은 가난, 실패, 게다가 평범함, 마침내 죽음까지 포괄한다. 그래. 그렇다 치자. 대체 그 성격이란 무엇인가. 대체 그 성격은 어디서 오나. 과연 개인의 것인가. 과연 불변하는 무엇인가.


성격은 실체가 아니다. 유전으로 주어진 경향성까지 부인할 필요는 없으되 그것은 한 개인의 특질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후천적인 기질 또한 삶의 제 조건과 일으키는 상호작용의 과정 혹은 잠정적 결과일 따름이다. 개인 고유의 품성으로 규정하는 순간, 성격은 그 개인에게서 변화 가능성을 박탈할 뿐만 아니라 삶의 공과를 귀속시키는 궁극적 거점이 된다. 한 개인의 정체성과 일치하거나 그 소유로서 성격은 사회정치적 기획일 가능성이 높다.


그 기획이란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분할통치의 기본으로서 피치자 연대를 끊는 초 간단 계략이다. 소통이 봉쇄된 피치자는 각자도생을 꾀하느라 분골쇄신 죽어간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촛불정부 들어서면서 희망의 일단이 전진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은 대다수가 병들고 가난하고 평범한 실패자로서 “자기 안에” 갇혀, “죄책감 안에” 갇혀, 는적는적 스러져가는 풍경을 그린다. 매판 과두는 여전히 이들에게 빨대 꼽아 금고를 채운다.


공공의 이익을 사유화함으로써 “진짜 위험을 지속시키는” 매판 과두는 정치인, 관료, 언론인, 학자, 종교인, 교육자 이름으로 사계 정상에 앉아 자신의 정신 병리를 ‘아랫것’들에게 투사한 채 파멸이 턱에 닿은 줄 모르고 낄낄댄다. 그거야말로 너희 성격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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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아이젠스타인이 날카롭게 내 폐부를 찔러온다.


“사랑은 익명으로 할 수 없다.”


차마 가 닿을 수 없었던 진실이다. 60년 남짓한 생애 기조가 익명성이었기 때문이다. 내 익명의 삶은 시원적 방치에서 시작되어 사회적 강권을 거쳐 마침내 자발적 중독으로까지 나아갔다.


있으나 불리지 않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의 누적은 나를 익명성에 깊숙이 접어 넣었다. 부피를 상실한 내 이름은 어디에 있어도 잘 드러나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내 이름은 거의 질문되지 않았다. 스스로 이름을 크게 외칠 때는 듣는 이가 없었다. 많은 사람 속에서는 이름 부를 목소리가 사라졌다. 익명성은 커다란 흐름이 되었다. 흐름에 맡기면 언제나 익명이 보장되는 가장자리로 나아갔다. 어쩌다 중심으로 흘러들면 익명은 돌연 요구가 된다. 그 요구에 속절없어진 나는 이름을 가리고 선사膳賜에 배어든다. 선사에 배어든 나는 무색투명해진다. 무색투명한 자가 건넨 선물이 연대의 고리가 될 리 없다. 연대 바깥에 선 자는 공동체 일원이 아니다. 나는 초월자연하는 국외자였다. 거대신의 헛된 그림자를 여전히 밟고 있었다. 나는 오만을 흉내 냈다. 나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인색에 빠져 있었다. 인색은 자기 착취다. 자기 착취는 이내 그 경계를 넘어간다. 경계 너머 남에게도 내게도 이름 자체가 선물이며 사랑이라는 진실을 느지막이 깨닫는다. 사랑은 이름에서 출발한다.


비로소 이름을 찾아 나선다. 이름은 은총이자 천명이다. 은총이자 천명인 이름은 명명백백 드러나 공유되어야 한다. 명실상부 공유의 삶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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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戌噛子

요키, 제리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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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홍으로 걸어

보라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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