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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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돈과 인간의 경제를 우주 만물과 마찬가지로 신성한 것으로 만들고자 씌어졌다.(4쪽)


신성神聖이란 말처럼 그 위상이 급전직하 곤두박질친 것도 드물다. 신이 없는데 무슨 거룩함이 있으랴. 적어도 거대유일신 체계가 만든 신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서구 지성사가 맺은 의기양양한 결론이다. 이 결론으로 서구의 종자논리는 절대 위기를 맞는다.


거대유일신이 탄핵된 옥좌에는 무신론의 거미줄이 드리워지는가? 형식논리로 보면 그래야 맞다. 그 논리에 충실하게 신 없는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가? 형식논리 자체를 깨뜨리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아이러니다. 현실에서 이 불가능한 가능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거대유일신은 가짜 신의 가면을 쓴 아바타였다. 아바타를 없애는 것은 다만 가짜 신의 가짜 신성을 걷어내는 것뿐이다. 가짜 신의 가짜 신성을 걷어내면서 서구 지성은 진짜 신의 진짜 신성을 걷어낸 것이라 착각했다. 결국 이중으로 오류를 범하게 된다. 1. 가면 벗은 가짜 신을 알아차리지 못 한다. 2. 진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가면 벗은 가짜 신은 다름 아닌 (기존의) 돈이다. 거대유일신의 신성에서 인간을 해방하였다고 환호작약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돈의 무색투명한 주사액에 중독되기 시작한다.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더는 성취할 것이 없다고 굳게 믿는다. 이 오만 무지는 종자논리를 성찰하지 않은 데서 오는 참담한 실패다. 그 실패 위에 참 신의 은총은 내리지 않는다. 그 실패 위에 참 신성의 빛은 비치지 않는다.


이제 실재the Real로서 신과 신성을 찾아나서는 여정이 시작된다. 돈과 인간의 경제가 신성해질 수 있는가? 어찌 하면 그럴 수 있는가? 답이자 힌트가 이미 나와 있다.


우주 만물과 마찬가지로


그렇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인 존재의 향기를 따라 발맘발맘 나아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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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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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문명을 건설한 이른바 주류 인간이 비주류 인간과 자연에게 가한 백색테러로 말미암아 인류는 물론 지구 생태계 전체가 멸절의 가파른 내리막길을 질주하고 있다. 이대로만 간다면 가차 없다. 기계론적 문제도 묵시록적 문제도 결코 아니나 멸절의 근거와 증후는 차고 넘친다. 낙관과 비관의 차원에서 논할 일이 아니다. 사실과 당위 사이에서 팽팽히 밀고 당기며 살아남아야 하는 일이다. 어찌 할까?


『녹색의학 이야기』 맺음말을 조금 바꾸어 가져온다.


인류의 고대적 삶은 녹색이었다. 타락(스티브 테일러) 또는 분리(찰스 아이젠스타인) 이후 인류의 삶은 백색이다. 백색문명의 폐해를 극복하고 이제 인류가 꽃피워야 할 삶은 고대적 녹색의 복원이 아니다. 문명이 일깨운 지혜를 폐기할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지혜를 거룩하게 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거룩한 삶은 녹색 품은 자색(보랏빛)이다. 자색은 장엄이다. 신의 장엄은 거대한 군림이 아니다. 소소한 존재로서 소소하게 배는 만휘군상의 무한한 신-사건이다. 신-사건은 자유 저항, 공유 평등, 치유 박애의 네트워킹이다. 이 네트워킹은 애당초 우리가 제시한바 녹색의학의 지평이다. 녹색의학은 자색 장엄의 속살이다.


과도한 의료화 사회에 녹색 품은 자색 장엄이 구원이듯 과도한 경제화 사회에도 녹색 품은 자색 장엄이 구원일 수밖에 없다. 자색경제학의 다른 이름이 신성한 경제학이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쓴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를 나의 주해리뷰 형식에 담아 음미한다. 미상불 꽤나 긴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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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시인이 새로 펴낸 청소년시집 <댄스, 푸른푸른>을 보내왔다. 세월호사건이 우리사회에 일으킨 변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 축을 이 시집이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필 왜 청소년 250명을 잔혹한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 그 질문과 대답 속에 우리사회의 성격과 수준이 담겨 있다. 청소년의 정서적 몸, 그 몸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더 이상 부끄럽지 말아야 할 이 땅 어른들의 필수 과제다.


마음 치유하는 의자로 살면서 내가 경험을 통해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다. 마음병에 처한 모든 어른들이 정서적 병리를 지닌 청소년기 (또는 그 이전) 상태에 고착되어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치유자는 가장 먼저 그들에게 알맞은 정서적 몸을 만들어야 한다. 어른 생각, 어른 언어를 장착한 채 하는 훈계로는 치유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선우 시인은 시인으로서 예술의 맥락에서 이런 진실에 다가선 경험을 녹여냈다. 그가 하는 일이 내가 하는 일과 근원에서 하나임을 새삼 정색하고 알아차린다. 부디 이 시들을 많은 사람이 읽고 공유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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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是山 水是水

山不是山 水不是水

山是水 水是山

山是山 水是水


청원 유신 선사의 선화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같다. 겉보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익숙한 통속 논리에서 볼 때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므로 함의 또한 같다고 할 법하다. 청원 유신이 어찌 통속 논리 따위를 구사했겠나.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아니다.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은 부정不定이다. 부정不定은 모순 너머 역설 품은 무애자재다. 신이다.


인류의 고대적 삶은 녹색이었다山是山 水是水. 타락(스티브 테일러) 또는 분리(찰스 아이젠스타인) 이후 인류의 삶은 백색이다山不是山 水不是水 山是水 水是山. 백색문명의 폐해를 극복하고 이제 인류가 꽃피워야 할 삶은 고대적 녹색의 복원이 아니다. 문명이 일깨운 지혜를 폐기할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지혜를 거룩하게 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거룩한 삶은 녹색 품은 자색(보라빛)이다. 자색은 장엄이다山是山 水是水.


신의 장엄은 거대한 군림이 아니다. 소소한 존재로서 소소하게 배는 만휘군상의 무한한 신-사건이다. 신-사건은 자유 저항, 공유 평등, 치유 박애의 네트워킹이다. 이 네트워킹은 애당초 우리가 제시한바 녹색의학의 지평이다. 녹색의학은 자색 장엄의 속살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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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아이젠스타인 이야기를 끝으로 한다.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가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은 바로 이 것이다.


예술가는 그냥 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일을 신성하게 여긴다는 것은 곧 일을 받아들이고 그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고 다소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창조물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창조물이 물질적이든 인간적이든 사회적이든 이미 존재하나 아직 구현되지 않은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경외심을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447쪽)


살면서 입버릇처럼 내가 했던 말이 ‘다시 태어난다면 예술 할 꺼다.’다. 예술이란 문학, 음악, 미술, 연극들을 말함은 물론이다. 예술적 감수성을 지녔다는 뜻뿐만이 아니다. 삶을 대하는 자세 자체가 다른 일을 해서 ‘대박’나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자각에서 연유한다. 아픈 사람 치료하는 일을 하면서도 늘 예술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치료행위에 예술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딱 여기까지가 내 수준이었다.


전적全的은 아니더라도 내가 주체적인 어떤 작위로 예술인 치료행위를 한다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과 함께 아픔과 삶을 숙의하는 과정에서도 “자기 창조물의 도구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미 존재하나 아직 구현되지 않은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행위가 아니었다. 나는 내 “일을 신성하게 여긴다는 것”에 다다르기 전에 예술가인 양 했다. 신의 길을 가지 않으면서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랐다. 아, 참람함이여.


일을 받아들이고 그 도구가 된다는 것”은 마치 나사렛 예수가 골고다의 길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십자가를 진 것과 같다. “자신의 작품에 경외심을 갖는 것”은 빈 무덤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마라.’ 한 것과 같다. 치료, 그것이 내게 왔을It came to me 때, 나는 의자로서 받아들이고 도구가 되면 그만이다. 나는 죽어 마지막 거점조차 지우는 일로 경외를 표하면 그만이다. 의자는 치료 속으로 배어들고, 아픈 사람의 변화된 삶에서 배어나는 것으로 그만이다. 이것이 치료의 예술이다. 예술이 아니면 녹색의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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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0 14: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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