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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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품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물이 돈과 같은 가치를 가진다. 사물의 주된 속성은 그 ‘값어치’, 즉 추상적 속성이다. “언제든 딴 것으로 사면 그만”이라는 말·······이 얼마나 각 개인, 장소, 사물이 고유하고 특별한 물질세계와는 거리가 먼, 반물질주의를 조장하는 말인가?(59쪽)


육체를 매개로 하는 정신의 추상성은 돈의 신탁 가치와 매우 유사하다. 존재의 물질적 본질과 무관한 정신 개념은 비물질적 의식,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라는 현대의 관념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간 발전해왔다. 사물의 ‘값어치’가 그 물질적 속성보다 더 중요해진 것처럼, 정신이라는 추상적 개념도 세속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육체라는 매개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60쪽)


  “물론 경제 개혁도 중요한 대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 의식의 개혁”이라는 생각도 정신을 우위에 두는 정신·물질 분리의 증후 중 하나일 뿐이다. 의식과 행동, 궁극적으로는 정신과 물질의 그릇된 이분법에서 비롯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돈과 의식은 깊은 수준에서 서로 뒤얽혀 있다.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61쪽)


육체를 매개로 하는 정신의 추상성은 돈의 신탁 가치와 매우 유사하다.” 이 말부터 톺아야 옹골찬 논의가 시작되겠다. 매우 유사하다는 표현은 어정뜨다. 적어도 반물질주의를 비판하는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수미일관한 논조로 보자면 이 말은 함량 미달이다. 단도직입으로 묻는다. 돈의 신탁 가치의 발견이 정신의 추상성 관념을 추동했나, 그 반댄가?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수미일관한 논조로 보자면 답은 자명하다. 나는 그것이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논리가 아니고 세계 구조와 운동의 이치라고 생각한다.


정신과 물질의 그릇된 이분법”은 정확히 물질에 대한 정신 우위의 상하 또는 수직 분리다. 정신과 물질의 올바른 관계는 어떤 것인가? 근원적인 바탕은 “존재의 물질적 본질”이다. 그 물질 존재가 각기 고유성을 지닌 채 다른 존재와 수평적 상호관계를 맺어가는 무한한 과정이 세계 구조며 운동이다. 상호관계 운동의 찰나마다 생성되는 다양한 신호·반응·해석·합의·변화가 바로 정신이다. 물질 사건인 정신을 물질과 분리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수평적 구별은 가능하나 물질에 대한 정신 우위 분리는 터무니없다. 동아시아 전통, 무엇보다 원효 어법으로 정리하면 불이이불(수)일不二而不(守)一이다.


현재 돈은 물질적 본질이 거의 완벽하게 결락된 “의식”으로 존재한다. “돈의 형상을 한 신”(60쪽)으로 군림한다. 돈은 본디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하여 마침내 다른 물질 존재와 같이 소멸에 접어들어야 한다. 그 과정을 유쾌하고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이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통찰이다. 군데군데 고수의 칼끝이 흔들리기는 하지만 이 또한 그의 물질적 본질에 터한 현상 아니겠나. 나는 내 물질적 본질이 지닌, 그와는 다른 흔들림에 주의를 기울이면 된다. 누구에게든 인연에 따른 천명이 문제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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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 푸른푸른 창비청소년시선 14
김선우 지음 / 창비교육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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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라는 말이 낯설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가슴이 막혀온다. 어린 별들이 떴다. 울고 또 운다. 비참하고 끔찍한 일을 참사라고 한다. 이 말은 행위의 주체를 숨긴다. 다시 쓴다. 세월호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용산의 망루에서 사람들이 살해당한 것처럼, 세월호에서 승객들이 집단으로 수장 당했다. 침몰 당시 승객들은 ‘목숨 가진 존재’인 생명이 아니라 화물 취급을 당했다. 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생명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마비된 자들에 의해 사람들이 죽었다.


괴물의 탄생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유신시대 이후 개발독재의 광풍을 거치며 ‘경제 부흥’이 기득권층의 만능열쇠가 된 이래 이제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거의 언제나 땅에 뿌리박고 사는 민중의 몫일 뿐이다. 이윤의 추구와 권력의 유지보다 중요한 게 없는 이 나라 기득권자들의 행보가 현실세계를 점차 지옥도로 만들고 있다.


언제나 말할 때는 지금이며, 행동할 때는 지금이다. 선거하고 세금 내는 머릿수에나 국민이 필요할 뿐 정작 국민의 안위에 관심 없는 ‘그들의 국가’ 따위가 필요한가. 필요 없다. 필요한 건 생명이 귀하게 존중받는 안전한 사회다. 사람이 행복해지는 ‘우리들의 나라’다. 무기력해지지 말자.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자. 울고 있는 옆 사람과 손잡자. 붉은 밤하늘에 새로 생긴 어린 별자리. 옹기종기 손잡은 노랑리본자리에서 우리 아이들이 내려다보고 있다.


2014년 5월 한 일간지에 김선우 시인이 쓴 글이다. 그 노랑리본자리 아이들이 한 시인의 삶과 문학관을 바꾸어 놓았다. 시인은 말한다.


청소년으로 연령대를 특정한 시집은 내 몫이 아니라고 여겨왔다. ‘청소년 시’라는 이름으로 시집이 나와도 괜찮다면 그 주체는 청소년 당사자이가나, 청소년과 함께 일상의 희로애락을 나누는 교사들, 혹은 청소년기 아이를 둔 부모들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그랬던 내가 청소년시선‘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청소년시집을 내게 되다니. 이 변화를 만든 것은 약속 때문이다.

  안산 단원고 교정에서 약속을 했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텅 빈 운동장에 아주 많은 목소리들이 떠다녔다. 떠나고 없는 아이들과 친구들의 부재를 감당하며 학교에 다녀야 하는 아이들이 모두 아팠다. 잃어버린 아이들과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아이들 모두를 위해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무엇부터 해야 하나.

  그해 봄 이후, 내 일상의 동선에 비교적 큰 변화가 생겼다.

  이전에는 웬만하면 피하던 게 중고등학교 강연이었다.·······

  더는 피하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아이들을 만나러 와달라는 요청이 오면 다른 어떤 곳보다 먼저 일정을 잡았다. 노랑리본자리 아이들에게 한 약속 때문이었고, 스스로에게 부과한 숙제이기도 했다.

  그렇게 삼년이 흐르는 동안, 내 생애에 가장 많은 십대들을 만나면서, ‘청소년과 함께 읽을 시집’을 써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110-112쪽)


받아들인 결과가 『댄스, 푸른푸른』이다. 『댄스, 푸른푸른』은 다만 한 권의 시집이 아니다. 한 시인의 변화된 인생이다. 한 시인이 온 몸으로 살아낸 한 시대의 사건이다. 한 시대의 사건으로 빚어낸 역사의 길목 하나다.


이 『댄스, 푸른푸른』이 나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오늘, 광화문 교보 신간 수평 진열대에서는 볼 수가 없다. 서가 식 수직 진열대 속 녹색 띠 하나로 숨죽이고 있다. 내 책들이 그렇게 됐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천하시인 김선우가! 아니! 그보다 김선우가 만일 성인시집을 냈어도 이랬을까?


나는 이 대목에서 소름끼치는 한 장면을 떠올렸다. 『중용416』의 <제8장: 사소한 것이 위대하다>(2016.4.25.) 일부를 가져온다.


그러면 대체 무엇은 작으며 무엇은 클까요? 우리의 구체적 현실에서 좀 더 결곡하게 따져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결정적 중요성을 지닌 주제입니다.


세월호사건, 이것으로 국가가 목숨을 앗은 사람은 304명입니다. 그 가운데 250명, 그러니까 대부분이 만 열일곱 살의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입니다. 이런 질문을·······던져보겠습니다.


“만일 그 250명이 어른들이었다면 그렇게 죽였을까?”·······


아이들·······이니 그들의 생명 가치를 ‘작은’ 것으로 여겼음이 분명합니다. 이 ‘작은’ 것을 희생시켜 ‘큰’ 것을, 그러니까 정권을 보위해야 한다는 계산이 섰으므로 실행하였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서울의 뜨르르한 어느 교회 목사는 대놓고 그런 취지로 설교하여 공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 떨리게 떠올릴 수밖에 없는 또 다른 한 사건이 있습니다.


  “호송열차를 타고 방금 도착한 사람들이 가스실에 빽빽이 들어찬 뒤 죽임을 당했다. 특수부대는 매일같이 하는 끔찍한 일을 하고 있다. 얽히고설킨 시체들의 몸을 풀어 호스의 물로 씻기고는 화장터로 시체들을 운반한다. 그러나 맨 밑바닥에서 그들은 아직 살아 있는 소녀를 발견한다.·······

  의사가 불려오고 주사를 놓아 소녀를 소생시킨다.·······그 순간, 죽음의 시설을 담당하는 SS대원들 중 한 명인 무스펠트가 다가온다. 의사가 그를 한쪽으로 불러 사건을 설명한다. 무스펠트는 망설이다 결정한다. ‘안 된다. 소녀는 죽어야 한다. 나이가 좀 들었다면 일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녀는 좀 더 분별력이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침묵하도록 그녀를 설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겨우 열여섯 살이다.’ 결국 그녀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제 손으로 죽이지 않고 자신의 부하를 불러 소녀의 목덜미를 쳐서 죽인다.”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 국적의 유대인으로 나치의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 위 내용은 그가 경험한 사실을 토대로 쓴 책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63-65쪽 일부를 인용한 것입니다. 두 번 죽임당하는 이 소녀 이야기는 참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이게 합니다. 이 감정은 같은 또래 소녀와 소년 250명의 죽음을 지켜보던 2014년 4월 16일, 그 때의 것과 그대로 포개집니다.


우리는 정색하며 다시 묻습니다.


“이 국가는 저 어린 국민 250명을 왜 죽였는가?”


물론 국가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건 자체를 부정합니다. 단순 교통사고라고 우깁니다. 그러나 그 배는 ‘국가 보호 장비’로 등록된 배였습니다. 국정원의 지시 감독을 받았습니다. 명백한 국가의 판단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나치의 대답으로 우리 국가의 대답 일부를 대신합니다.


“안 된다. 소녀와 소년들은 죽어야 한다. 나이가 좀 들었다면 일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좀 더 분별력이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침묵하도록 그들을 설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겨우 열일곱 살이다.”


것이 죽인 이유라면 실로 엄청난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은, 하찮은, 사소한 생명이어서 대놓고 죽였다는 표면적 판단의 심층에 오히려 더 큰, 위험한, 무거운 증거능력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국가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는 데 어른 보다 이 아이들이 훨씬 더 감당하기 힘든 상대라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국가는 분명한 기억을 지니고 있습니다. ‘분별력이 없어’ 침묵하지 않았던 저 2008년 촛불소녀들 말입니다. 그 때 국가는 그 소녀들이 분별력이 없어 낭설에 휘둘리는 것이며 북한의 지령과 자금을 받아 움직였다고 마녀사냥을 자행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아침 세월호사건, 그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아이들도 ‘철없어서’ 나오지 못했다고 국가는 다시 뒤집어씌웠습니다(세월호청문회에서 해양경찰이 한 말). 그 때 죽이지 못해서 아쉬웠는데 마침 잘됐다는 식의 대응입니다. 물론 철없는 아이들이므로 침묵하지 않고 자기들이 한 짓을 증언·고발할 것이기 때문에 죽였다는 사실을 그렇게 은폐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이 위대합니다. 이 아이들의 죽음이 위대한 것으로 길이 남으려면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진실마저 바다에 빠뜨리고서야 어찌 우리 어른이 ‘큰’ 사람일 것입니까.


김선우로도 세월호 아이들로도 청소년 시, 아니 청소년 무시, 아니 청소년 무시 살해의 벽을 넘어설 수 없는 거냐고 물으면 억지인가, 무리인가.


김선우 시인은 『댄스, 푸른푸른』을 보내주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한의원에 치료 받으러 오는 청소년들 있으면 한편씩 적절한 시 읽어주시길·······. 아픈 아이들 너무 많아 아픈 어른이 쓴 청소년시집이니·······.”


아픈 아이들이 너무 많아 아픈 어른이 쓴 시에 아픈 아이들이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은 얼마나 참담한가. 바로 이 순간순간 아이들은 다시, 거듭 살해당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리뷰가 아니다. 이런 글을 쓰게 되리라 꿈에도 그려본 적이 없다. 『댄스, 푸른푸른』이라는 시집 자체를 위해 아픈 마음을 펼쳐본다. 부디 이 땅의 아이들이 너무 아프지 않기를! 부디 이 땅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더는 무시하지 않기를! 부디 이 땅의 어른들이 아이들을 더는 살해하지 않기를!


『댄스, 푸른푸른』이 들불처럼 번져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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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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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은 동전들 간의 물질적 차이와 무관하게 (액면가만 같다면) 돈으로서 동일하다는 점에서 균질적이다.·······돈의 힘은 순도와 무게의 다양성을 지워버리는 표준화된 표지에서 나온다. 질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오직 양이다. 돈은 온갖 다른 것들로 전환 가능하기에, 그 온갖 것들을 상품-일정 기준에만 맞으면 똑같이 여겨지는 물건-으로 바꾸면서 균질적 성격을 전파한다.·······돈으로는 어떤 것도 살 수 있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똑같다.(59쪽)


재벌집 사람들이 파렴치 범죄와 ‘갑’질을 저지를 때 보여주는 기탄없음의 근거는 물론 돈 하나다. 돈만이 저들의 ‘근본’이다. 근본 없는 ‘물건’들에게 하는 짓이라면,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든 가죽장갑 끼고 패든 물 컵을 던지든 쌍욕을 하든 아무런 죄의식도 가지지 않는다. 가진 돈에 제곱비례로 안와전두엽이 망가진 때문이다. 사유도 성찰도 사라지고 돈이 이끄는 대로 불안·우둔·탐욕을 적나라하게 과시한다.


사유도 성찰도 사라지고 돈이 이끄는 대로 불안과 우둔, 그리고 탐욕을 적나라하게 과시하는 재벌집 사람들을 욕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지금은 당장 돈이 없어서 욕할 뿐이다. 그 정도 돈만 있으면 다를 이 누군가. 돈 앞에서는 어떤 다양성도 있을 수 없다. 닥치고 균질이다. 절/교회도 드나드는 신도 숫자와 시주/헌금 액수로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 설법/설교의 질적 차이는 무의미하다. 병의원도 드나드는 환자 숫자와 매출 액수로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 진료의 질적 차이는 무의미하다. 누구든 언젠가 재벌집 사람들처럼 파렴치 범죄와 ‘갑’질을 저지를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산다.


누구든 언젠가 재벌집 사람들처럼 파렴치 범죄와 ‘갑’질을 저지를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나는 어떤가. 결 다른 의자라고 자부하다가도 빚 갚느라 허덕이는 가난 앞에서 목이 꺾인다. 똑똑한 딸아이 자랑하다가도 휴일 아침 일찍 알바 뛰러 먼 길 가는 뒷모습 볼 때 콧날이 시큰거린다. 흔들리는 결결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으로 남에게 배어들며 삶을 맡김으로써 나는 돈과 씨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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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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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나 상징은 한 사회가·······해석을 공유하는 정도만큼 사회적 힘을 가진다. 고대 그리스에서 출현한 새로운 종류의 돈은 동전의 표지가 나타내는 사회적 합의에서 그 가치를 이끌어냈다. 그런 합의가 바로 돈의 본질이다.(57쪽)


마음병 숙의 치유 과정에서는 이른바 객관적 사실과 질환의 인과관계가 문제되는 일이 매우 흔하다. 이런 예가 자주 등장한다.


네 살 바기 아기가 둘 있다. 한 아기는 엄마를 생이별로 잃었다. 다른 한 아기는 엄마가 갑자기 가벼운 사고를 당해 병원에서 치료받고 한 시간 만에 돌아왔다. 두 아기가 자라서 우울장애를 앓는다. 앞 아기 얘기를 들으면 누구나 그럴만하다고 말한다. 뒤 아기 얘기를 들으면 누구나 그럴 리 없다고 말한다.


마음병은 이른바 객관적 사실 그 자체에서 생기지 않는다. 해석에서 생긴다. 네 살 바기 아기에게 두 사건은 하나의 해석을 낳는다.


해석 인간이 인간이다. 그 너머, 인간은 해석이다. 해석의 공유, 곧 사회적 합의가 이데올로기요 체제요 문명이다. 사회적 합의로서 문명은 내러티브다. 그 내러티브의 고갱이가 돈이다. 돈 이야기, 이야기인 돈을 직면하고서야 인간과 인생, 그리고 공동체를 직면할 수 있다. 이 직면은 바야흐로 종말론적 문제다.


돈과 관련된 위기 앞에서 현실의 토대가 흔들리고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낙관론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돈은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사회적 구조물이기 때문이다.”(55쪽)


지나간 역사가 그랬듯 다가올 미래도 결국은 어떤 사회적 합의로 돈을 구조화할 것이냐가 관건이다. 새롭게 재구조화한, 그러니까 신성의 표지로 삼은 돈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한다. 이것은 낙관이 아니다. 비관의 반대말은 무관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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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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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결핍의식은 자기충족예언이며, 결핍이라는 환상을 구체적 현실로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돈이다.

  돈은 풍요를 결핍으로 바꾸면서·······수천 년간 우리의 문화적 자아의식, 무의식적 신화, 자연과의 대립적 관계를 구현·······하고 있다.(53쪽)


결핍의식과 분리, 그리고 돈 이야기로 이어지는 이치 사슬을 차례로 따라가 본다는 것은 선형적 인과관계를 구성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태가 번져가는 과정을 경험칙에 따라 재구성해본다는 것이다. 대개 이런 작업은 통속한 지식 획득 절차를 뒤집기 마련이다.


선물이 순환하던 태곳적 삶에서 인류가 필요와 선물을 더 풍요롭게 이어줄 매개체로 고안해낸 것이 다름 아닌 돈이다. 매개체는 본령 상 무한소無限小의 특수성으로 무한대無限大의 보편성을 구현하는 수단이다. 수단이 지니는 추상성·보편성으로 말미암아 매개체는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조종 주체가 된다. 보이지 않는 조종 주체는 보이는 대리자, 곧 거대국가·거대종교·거대논리를 내세운다. 거대국가·거대종교·거대논리는 세계를 상하로 분리한다. 상하로 분리된 세계는 결핍의식으로 통치된다. 지배자의 결핍의식은 수탈의 동력으로 작동한다. 피지배자의 결핍의식은 지배자의 탐욕을 내면화하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세계는 불안·우둔·탐욕에 휘감긴 크고 작은 수탈적 거래에 힘입어 한껏 부풀어 오른다. 화색禍色박두.


지난 수천 년간 인류가 쌓아온 업보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나. 돈과 분리가 지닌 비대칭적 대칭의 진실을 간파하지 못해서다. 결핍의식, 불안·우둔·탐욕에 깃든 정치경제학을 간과해서다. 전체 진실에 유연하게 터하되 전복적 실천을 더없이 앙칼지게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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