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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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와 내 것의 논리에 갇힌 채, 분리된 자아와 자아의 연장, 즉 돈과 재산을 지키고 확대함으로써 잃어버린 부의 작은 일부라도 회복하려고 애쓴다. 자아를 경제적으로 확대할 수단이 없는 사람들은 대신 육체적 자아를 확대한다. 이는 빈곤층의 비만율이 불균형적으로 더 높은 이유 중 하나다. 쇼핑, 돈, 취득에 대한 중독도 근본 원인은 음식 중독과 같다. 그 모든 중독이 외로움, 즉 본래 자아 대부분과 분리된 채, 간신히 존재하는 고통에서 비롯한 것이다.(74쪽)


유대와 감사의 마음이 커질수록 소유 충동은 줄어든다. 내 노동력이 실은 내 것이 아니며 내가 만드는 것도 실은 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그런 깨달음 속에서는, 내가 존재하도록 도와주고 삶이라는 선물을 허락해준 모두에게 내가 만든 것을 나누어주고 싶어진다.(76쪽)


소유 충동은 결핍의식에서 온다. 남이 가져서 내 것이 없거나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새로 가지거나 이미 가진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싶다. 소유 충동은 상실의식에서 온다. 남이 내 것을 가져가서 없거나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되찾아오고 싶다.


그렇다 치자. 그렇게 소유하고 확대하면 결핍과 상실이 해결되나? 그럴 리가. 왜 그런가? 결핍·상실의식은 분리에서 왔는데 분리를 놔두고 그 프레임 안에서 치고받으니 되지 않는다. 분리 프레임을 깨야 한다. 남의 것, 끝내는 남 자체를 빼앗거나 없애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남의 것: 내 것, 남: 나의 분리를 허물면 해소될 일이다.


분리를 허무는 기초가 “유대와 감사의 마음”이다. “삶이라는 선물”을 명확히 인식하고 자기 삶을 선물로 “모두에게” 기꺼이 나누어줄 때, 분리는 허물어진다. 분리가 허물어진 땅에 소유 충동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간결한 이치다. 이치를 구현하는 현실은 간결하지 않다.


이 대목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자아를 경제적으로 확대할 수단이 없는 사람들은 대신 육체적 자아를 확대한다. 이는 빈곤층의 비만율이 불균형적으로 더 높은 이유 중 하나다.


경제적 자아 확대와 육체적 자아 확대는 같은 자아 확대라는 말을 쓰지만 전혀 다르다. 수단 없는 사람들, 빈곤층이란 말에 이미 함축되어 있듯, 전자는 지배의 기반이 되고 후자는 피지배의 근거가 된다. 현실로 존재하는 계급문제를 환기시키는 말이 아니라면 육체적 자아 확대란 표현은 기만이거나 조롱이다. 게다가,


쇼핑, 돈, 취득에 대한 중독도 근본 원인은 음식 중독과 같다.


이 말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빈곤층 비만을 음식 중독과 연결한 점. 설혹 비만의 원인이 음식이라 하더라도 가령 값싼 정크푸드 섭취 등에 따른 영양 불균형 같은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중독이라 규정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둘째, 쇼핑, 돈, 취득에 대한 중독과 음식 중독의 차이를 간과한 것. 설혹 중독의 원인이 같다 하더라도 부유층이 쇼핑, 돈, 취득에 중독되는 것과 빈곤층이 음식에 중독되는 것을 ‘근본’이란 말로 묶어 하나로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중독이 외로움, 즉 본래 자아 대부분과 분리된 채, 간신히 존재하는 고통에서 비롯한 것”이라 하더라도 부유층의 고통과 빈곤층의 고통이 어찌 같겠나.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이런 나이브함은 사유와 실천의 주체를 보편화한다. 주체의 보편화는 결국 주체의 실종을 낳는다.


지금의 위기는 우리가 아는 식의 문명이 끝나간다는 징후이며, 지금보다 더 유연하고 포괄적인 자아의식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 상태로 회복되려는 징후다.”(75쪽)


징후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분위기다. 징후는 천시다. 인사, 곧 사람의 실천이 없으면 서로 열어주어 변화를 일으키지天時人事兩相催 못한다. 징후를 읽은 자리마다 다른 결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결의 실천을 해야 한다. 30번째 희생자가 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해야 할 일, 해고를 저지른 회사가 해야 할 일, 그리고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각기 다르다. 뭉개면 안 된다. 분명히 해야 한다. 서야 할 자리에 서야 한다.



대한문 쌍차 분향소 설치를 방해하는 매판독재분단교 신도들. 징후 뒤로 숨을 수 없다는 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징후의 낙관은 가장 아픈 사람들의 피맺힌 유대와 감사로써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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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돈에서 시작해 돈으로 되돌아간다.(66쪽)


‘모든 것’은 변화다. 변화는 새로운 관계 맺기다. 새로운 관계 맺기의 ‘시작’은 분리다. ‘되돌아가’는 두 번째 새로운 관계 맺기는 재통합이다. 재통합은 단순히 본디 모습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다. 재통합은 분리의 경험과 지혜를 포함한다. 분리의 경험과 지혜를 포함하기에 재통합의 관계는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이 나선형 전진의 변곡점이자 경계선이 바로 돈이다. 돈은 원조 트릭스터다. 이 트릭스터를 정면으로 끌어안지 못했기 때문에 온갖 종교와 철학과 사상은 실패했다. 실패를 만회하려면 이제라도 돈을 제대로 대해야 한다. 돈을 제대로 대하자면 종교와 철학과 사상은 휴먼스케일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휴먼스케일에서 추상·보편·무한은 작고 적은 존재들의 네트워킹 과정일 뿐이다. 작고 적은 존재들의 네트워킹 과정을 조절하는 합의 내러티브가 재통합의 돈이다. 새 돈이다. 새 돈이 인도하는 ‘구원’은 천상의 낙원도 아니고 극락 열반도 아니다. 소소한 일상의 재미와 공적 참여의 의미가 일치하는 평범하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지상의 공동체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모든 것은 이어진다. 변화하고 순환하는 삶은 아프기 마련이다. 아파서 늘 경이로움으로 열린 세계가 바로 우리의 오늘이자 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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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상적인 돈의 성질이 이론상 무한히 돈을 소유하게 만든다.·······숫자가 증가하는 데 무슨 한계가 있겠는가? 우리는 추상성에 도취되어, 이런 성장에 대한 자연과 문화의 수용 한계를 무시한다.·······이 세계가 숫자만큼 무한하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돈의 무한성은 또 다른 무한성을 그 안에 담고 있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영역이 무한하다는 생각이다.(68-69쪽)


오랫동안 마음 아픈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수도 없이 들어온 말이 ‘죽을 만큼 ~~하다.’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지 않는다. 그 이상의 묘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죽음을 거론한다. 공감하면서 한 발 물러나 생각해본다. 죽음은 누구에게도 경험 밖의 일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삶의 마지막 찰나뿐이다. 직관도 가 닿지 못하는 세계다. ‘죽을 만큼 ~~하다.’는 말은 이치상 허구며 허영이다. ‘죽을 만큼 ~~하다.’는 말은 ‘죽고 싶을 만큼 ~~하다.’는 뜻일 뿐이다.


죽음이 산 자에게 그러하듯 무한 또한 유한한 자에게 허구며 허영이다. 인간의 실제 경험은 마지막 찰나까지 지속되는 유한이다. 무한 증가하는 숫자인 돈이 가르쳐준 무한이란 언어에 이끌려 불안, 우둔, 탐욕을 한사코 지속할 따름이다. 세계도 유한하고 소유도 유한하다.


이야기가 이런 깨달음에서 멈춰진다면 인간사 간단하다. 간단하지 않아서 인간의 문제가 종말론적 상황까지 오지 않았나. 돈의 소유에서 유한과 무한의 차이가 무의미해지는 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 임계점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결코 휴먼스케일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자신이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처분소득 수준을 넘어서 쌓이는 돈은 자기 돈이 아니다. 여기가 유한과 무한의 구분이 없어지는 지점이다. 무한의 세계로 들어선다. 유한 세계의 감각과 윤리, 그리고 성찰이 무화된다. ‘뽕’ 무한이다.


단돈 45만 원에 가사도우미를 고용하려고 필리핀 여성 여권까지 빼앗았다는 한진가 안주인을 보라. 임계점이 딱 거기다. 그 이상 쟁여진 부는 인간성 말살을 부른 ‘뽕’에 지나지 않는다. 한진은 2018년 기준 재계 서열 제14위다. 그보다 높은 서열에 있는 부자들은 수준이 더 높을까. 그럴 리가. 세계 최고 부자 빌 게이츠라면 그래도 수준이 상당히 높지 않을까. 어림없다. 그가 공익사업에 투자하고 기부하는 막대한 돈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지만 재단 설립으로 포탈한 세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무한하지 않은데 무한을 전유해 살아가는 ‘뽕’ 맞은 인간들 손에 지구가 결딴나고 있다. ‘뽕’ 무한의 숫자놀이를 멈추어야 한다. 멈추고 그 숫자를 큼큼 맡아보라. ‘뽕’ 무한의 언어유희를 멈추어야 한다. 멈추고 그 언어를 톡톡 건드려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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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 보편적 목적 같은 것이 있는지는 전혀 확실치 않다.·······종교에서는 온갖 좋은 것들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구원이나 깨달음 같은 궁극적인 목적을 추구한다. 이 얼마나 돈이라는 끝없는 목적을 닮았는가.·······돈과 마찬가지로 깨달음도 한계를 모르는 목적이라서, 그것의 추구는 우리를 노예로 만들 수 있다. 돈과 깨달음 모두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것들의 그럴싸한 대체물일 뿐이다.(65-66쪽)


아무리 돈이 많아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돈으로 진정 채울 수 없는 욕구를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68쪽)


돈에서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을 간파한 인간이 거대종교를 만들었다. 돈의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이 “그럴싸한 대체물”이므로 거대종교의 구원도 깨달음도 그럴싸한 대체물이다. 그럴싸한 대체물은 함량 미달의 유사품이다. 함량 미달의 유사품은 질 다른 가짜다. 가짜는 ‘아니다’인 무엇이다.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을 전제한 구원과 깨달음은 구원과 깨달음이 아니다. 참 구원과 깨달음은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을 전제하지 않는다.


참 구원과 깨달음은 그 목적에 한계가 있다. 그 한계란 다름 아닌 각기 고유한 물질들의 네트워킹 과정 하나하나를 초탈하지 않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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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추상화는 방대한 메타 역사적 맥락에 맞춰 전개되었다. 언어와 숫자로의 추상화라는 토대가 없었다면 돈을 이렇게까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숫자와 상표를 보는 순간 이미 실제 세계와 거리를 두고 추상적으로 사고할 준비가 된다. 하나의 명사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많은 것들의 동질성을 사용하는 것임을 의미한다.(61쪽)


현대문명의 요체는 돈의 추상성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금융자본주의다. 금융자본주의를 끄는 황금마차의 두 바퀴가 바로 “언어와 숫자”다.


언어. 찰스 아이젠스타인에게는 이런 홈 어드밴티지가 있다. 우리는 그냥 언어라고 하면 안 된다. 여기서 언어는 영어며, 인도유럽어며, 명사 중심 언어다. 명사 중심 언어는 추상성이 극대화된 언어다. 추상 언어는 추상 화폐의 아들이다. 추상 화폐는 추상 언어의 부양과 공경을 받아 신이 된다. 돈 신의 대제사장 자리에 추상 언어의 패자覇者인 영어권 미국이 오른 것은 이치에 맞다. 추상 언어의 향연인 거대종교가 돈에 아첨하는 것은 내재적 본질을 지닌다. 이 내재적 본질을 실체로 보이게 하는 도구가 추상 논리의 결정판인 형식논리, 형식논리가 만들어낸 거대한 이분법 세상이다. 허구다.


숫자. 수. 수학. 수학은 불가결한 특성으로 추상성을 지닌다. 구체적 사물이 각기 지니는 이질적 속성을 모두 제거할 때 최후로 남는 동질성을 추상성이라 한다. 추상성이란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고, 듣고, 볼 수 있는 물리적 세계나 그 세계에 대한 우리 경험이 아닌 마음속 관념의 구성체다. 관념의 구성체는 강고한 초월의식을 제공한다. 초월의식은 전지전능의 세계를 열어준다. 수의 인지를 물질의 인지로 착각하게 한다. 수의 지배를 물질의 지배로 착각하게 한다. 허영이다.


현대문명은 언어가 만든 허구, 숫자가 만든 허영 위에 지어진 집이다. 허구를 부수려면 동사 중심 언어로 바꿔야 한다. 허영을 내던지려면 육감肉感의 숫자로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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