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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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으로 가는 과도기의 두 번째 특징은 시련이다. 옛날 부족문화에서는 성인이 되기 위한 다양한 통과의례와 시련이 존재했다. 고립, 통증, 단식, 환각식물 등의 수단을 통해, 일부러 작은 자아를 무너뜨린 뒤 개인을 초월한 더 큰 자아로 재통합시키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인류도 그와 같은 시련을 겪는 중이다. 오늘날의 복합적인 위기는 우리 정체성을 시험하는 과정이자, 우리가 이겨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시련이다. 이 시련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능력을 이끌어내고,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몰아간다. 민감한 사람이 위기 앞에서 느끼는 절망도 그러한 시련의 한 부분이다.(177-178쪽)


시련은 형벌이 아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데 어찌 형벌이 필요하겠나. 필요한 것은 아이의 프레임을 깨는 것이다. 프레임 깨기가 시련이다. 그것이 시련인 까닭은 깨는 과정에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류가 겪는 고통은 과연 시련인가? 시련이려면 범죄가 전제되지 않아야 한다. 범죄는 분명히 저질러졌다. 범죄의 대가는 형벌이 틀림없다. 인류는 지금 형벌을 받고 있다. 문제는 범죄자라기보다 피해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형벌을 뒤집어쓴다는 데 있다. 뒤집어쓴 형벌은 형벌에서 시련으로 가로질러 간다. 이 진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시련을 통과해 어른이 된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노모패스는 성실무비의 노예로 살다 비참하게 죽는다.


범죄자면서 형벌을 피해자에게 전가한 사람은 물론 시련도 당하지 않는다. 승승장구 호의호식 지상천국을 구가한다. 그 구가의 대가는 영성 몰수다. 영성이 몰수된 소시오패스는 자신이 지닌 돈 말고는 모든 존재를 부정하다가 결국 돈 이야기의 허구 속에서 허무로 사라진다.


자아 이야기와 세계 이야기의 허구를 알아차린 “민감한 사람이 위기 앞에서 느끼는 절망”, 곧 우울은 나와 우리를 함부로 허무에 내어주지 않는다. 허무에 던져지는 사람은 우울에 사로잡혀 무심코 살아서 그렇다. 무심코 살지 않는 사람은 우울에 감응한다. 감응하면 벗어난다. 우울증에서 벗어나 우울의 실재를 증득한 사람은 자기 삶을 신뢰한다. 신뢰하면 맡긴다. 맡기면 자유롭다. 자유로우면 풍요해진다. 풍요를 함께 누리는 삶이 선물의 삶이다. 선물을 주고받는 사람이 어른이다.


요절할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이겨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시련이 날카로운 위기로 우리 옆구리에 깊숙이 찔러 넣어져 있다. 생멸 여하는 깨달은 사람의 신성 네트워킹이 빚어내는 비인과적 동시적 대변혁 여부에 달렸다. 대변혁의 생화학은 형벌과 시련 사이 모순에서 일어난다. 형벌과 시련의 이율배반에는 목적론적 낙관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찰나마다 곤두서는 거룩한 놀이 감각으로 반걸음 앞을 내다보고 한 걸음 내디디는 몸-사건이 있을 따름이다.


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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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가량 입은 한복 바지다.

서툰 솜씨로나마 기워서 입고 다닌다.

삼가 대하고 함부로 없애지 않음으로써 사물을 경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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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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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인류의 천명이라 할 때, 사랑은 그 보편성 안에 개체성을 매몰시킬 수 있다. 다시 사랑 문제를 말하는 소이다.


사랑의 개체성은 사랑의 겹과 결을 칼같이 톺는다. 사랑의 보편성이 그 주체를 추상화하여 사랑을 studium에 널어놓을 때, 개체성은 그 punctum에 비수를 찔러 넣는다. 누가 누구를 왜 어떻게 사랑하는가.


사회역사적 당위로 각성하기 훨씬 전에 사랑은 자본의 전략에 따라 편만하게 소비되었다. 이미 그 통속함은 극에 달해 있다. 아니 할 말로 개나 소나 사랑을 입에 담는 세상이다. 이 매끈함 속에서 역사적 맥락의 구불구불함과 사회적 지평의 울퉁불퉁함을 찾아내야 한다.


위기에 처한 나라 팔아먹고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는 매판집단이 해야 할 천명의 사랑과 항일의병에서 독립군에 이르기까지 나라 지키기 위해 희생해온 민초들이 해야 할 천명의 사랑이 어찌 같을 수 있나. 개인 토지 97.6%를 소유한 상위 10%가 해야 할 천명의 사랑과 고작 2.4%를 소유한 나머지 90%가 해야 할 천명의 사랑이 어찌 같을 수 있나.


250명이나 되는 생때같은 아이들을 물에 빠뜨려 죽인 2014년 4월 16일 이전의 사랑과 그 범죄 이후 4년도 훨씬 지나 국가의 책임 대부분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 내린 사법이 준동하는 오늘의 사랑이 같을 수는 없다. 4대강사업 벌여 국토를 유린한 이명박의 사랑과 그에 반대하여 소신공양 단행한 문수 비구의 사랑이 같을 수는 없다.


사죄하는 것이 한 사랑이면 사죄를 요구하는 것도 또 다른 한 사랑이다. 불의하게 모은 재산을 포기하는 것이 한 사랑이면 불의하게 모은 재산을 환수하는 것도 또 다른 한 사랑이다. 살인까지 저지르며 국정을 농단한 통치자를 몰아내는 것이 한 사랑이면 산업농을 거부하고 묵묵히 자연농에 귀의하는 것도 또 다른 한 사랑이다.


보편적 사랑의 저 로맨틱함만으로 시대를 전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대를 전환할 사랑은 독한 것이기도 해야 한다. 독한 사랑은 수탈당하는 사람, 슬픈 사람, 소수인 사람에게 아프디아픈 천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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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거미줄꽃

살아 있으되 길들여진 진실을

단칼에 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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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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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인생이 청소년기에서 끝나지 않듯이, 문명의 진화도 성장이 끝난다고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말하자면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과도기에 있다. 육체적 성장이 끝나면 인간의 생명차원은 내면으로 향해 다른 영역의 성장을 돕는다.(175쪽)


과학시대 인류는 추상적 사고가 가능한 ‘형식적 조작기’로 알려진 인지발달 단계를 마치고, 데카르트적 과학을 통해 극단적 분리, 완전히 발달한 자아, 지나친 합리성을 지닌 십대로 접어들었다.·······극단의 분리는 재결합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청소년기에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자아 경계가 사랑하는 사람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완벽하게 이기적이던 세계도 무너져 내린다.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기도 하고, 함께 창조하기도 하는 새로운 종류의 애정관계가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타자와 완전히 분리될 때 비로소 타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고, 본래의 결합보다 더 위대한 결합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분리의 여정을 다 끝내고 이룬 결합이기 때문이다.(176쪽)


인류사를 한 인간의 일생에 빗대어, 아니 그 틀로 설명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어딘가 나이브해 보인다. 게다가 목적론적 해석의 냄새도 풍긴다. 심지어 요절을 염두에 두지 않은 듯 전개하는 이야기는 무근의 낙관론처럼 보인다.


이렇게 다시 물어보자. 한 인간의 일생을 틀로 썼다 할 때, 그 틀에는 해석이 없나? 없을 수 없다. 임의의 틀은 불가피하다. 4. 신성한 경제학이란 무엇인가? ④에서 쓴 틀도 결국은 마찬가지다. 문제는 ‘맞나 틀리나’가 아니다. 점을 치는 게 아니니까.


문제는 해석의 틀이 기술description뿐만 아니라 처방prescription도 낳는다는 데 있다. 처방은 당위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누락시키면 해석 틀은 운명론이나 예정론으로 영락한다. 자, 이제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간단명료하다.


사랑에 빠진다.


이상하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연Sein 아니던가. 한 인간과 한 사회는 이 지점에서 갈라선다. 한 사회는 한 사람이 아니다. 한 사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집합이 아니다. 한 사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네트워킹이다. 네트워킹에서 순수한 자연Sein은 없다. 필경 누군가의 당위Sollen와 마주 엮인다. 위기가 닥친 사회일수록 당위가 향방을 결정한다. 이때 당위는 영적 본질을 지닌다. “인간의 생명차원은 내면으로 향해 다른 영역의 성장을 돕는다.” 이것이 당위로서 사랑이다. 천명으로서 사랑이다.


사랑이 천명이라면 천명은 시대를 따르니 사랑은 역사적 실재다. 고정불변의 영원한 사랑은 없다. 지난 수천 년 간 철저히 처절히 타자와 분리되어온 우리는 이제 “비로소 타자와 사랑에 빠질 수 있고, 본래의 결합보다 더 위대한 결합”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 사랑은 다른 사랑이다. 이 다른 사랑은 언젠가 천명을 따라 또 다른 사랑으로 변해갈 것이다. 변화의 결에 맡기고 우리 여정을 계속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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