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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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성이 과연 우리의 지고한 목표일까?·······우리가 지속하려는 것이 무엇이고 그에 따라 무엇을 새로 만들어야 할지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수많은 아름다운 것, 필수적인 것들은 지속가능하지 않다.·······최근 들어 지속가능성의 사고방식에서 전환의 사고방식으로 바뀌고 있·······다.(275쪽)


예컨대 출산 과정을 촉발하는 것은 스스로를 강화하는 호르몬이 연쇄적으로 분비되는 양의 피드백 작용이다. 출산은 너무 오래 끌면 산모가 죽을 수도 있는 지속 불가능한 과정이지만, 목적만 달성되면 산모는 항상성을 되찾는다. 이렇게 양의 피드백 과정은 유기체나 생태계를 과거의 정체 국면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기능을 한다.


  돈에 관해서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돈은·······지속 불가능한 과정에 있는 우리를 새로운 국면으로 몰고 가는 메타유기체의 핵심‘호르몬’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이자가 붙는 빚을 통해 기하급수적 증가를 계속하고 있다. 이 과정을 너무 오래 끄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비정상적이다. 양의 피드백 과정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우리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기하급수적 성장곡선은 사실 국면전환곡선의 일부다.(278쪽)


이미 우리는 큰 충격 없이 전환할 기회를 놓쳤다고 본다.·······

  분리의 시대가 더 깊어질수록 전환의 충격은 더 커지고 지속가능한 기준으로의 하락은 더 급작스럽다.·······남은 공동체 향유자원을 최대한 보호하는 것, 성장을 제한하고 전환의 충격 속에서도 삶을 지탱해줄 진정한 부를 보존하는 것, ‘착륙을 서둘러 충격을 줄이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연착륙 시도하기에 아직 때가 늦지는 않았다.(283-284쪽)


30대 초반 청년과 상담하고 있다. 10년 넘게 향정신성 약물을 복용중이다. 여전히 환청에 시달리는 것으로 보아 양의洋醫 진단과 처방이 정확했는지 의심스럽다. 이 시점에서 무슨 이유로 내게 왔을까. 본인 의사라기보다 부모나 친척의 권유로 마지못해 한 번 와본 듯하다. 시종일관 정작 말해야 할 고통의 진실을 은폐한 채, 자신의 이해 틀에서 벗어나는 내 말을 끊어내는 데 집중한다. 아무리 끊어내도 배어드는 언어의 치유력 때문에 일어나는 일련의 변화를 자신이 노력한 결과로 해석하는 데 꿋꿋하다. 올 때마다 상담이 무슨 소용 있느냐며 표정에 그늘을 두텁게 깔아놓는다. 이런 증후 전체가 그의 병임은 물론이다. 나는 그에게 양의 피드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종래 방식의 지속은 아무리 곡진했을지라도 당신을 죽을 때까지 병의 노예로 만듭니다. 병을 대하는 자세를 일대전환해야만 할 때가 왔어요. 상담은 당신의 그런 상황을 의학적으로 정확히 알게 해줍니다. 그 과정은 불가피하게 혼란과 고통을 수반합니다. 혼란과 고통이 무서워 전환을 거부한다면 당신의 인생은 이대로 붕괴할 것입니다. 붕괴와 연착륙, 선택은 둘 중 하납니다.”


그가 내 말에 십분 동의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상태로 일어서 나갔다. 수많은 사람들과 상담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또 얼마나 애쓰며 견디는지 목도해왔다. 함부로 포기할 자격 없는 이상으로 그 한계를 깨지 못하는 무력함이 크다. 저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 인류 대다수의 모습이지 싶으니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착륙을 서둘러 충격을 줄이는 것의 중요함을 뉘 모르랴. 문제는 누가, 아니 내가 어떻게 이 중요한 일에 참여할 수 있는가 하는 데 있다. 의자로서 아픈 사람 하나를 연착륙시키는 일에 이리도 무력하다면 인류문명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연착륙시키는 일에는 얼마나 유력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내게는 아득하고 아득하다.


“한 사람이 정신병에 걸리는 일은 드물지만 한 집단 전체가 광기에 휩싸이는 일은 흔하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이던가. 같은 이치로 한 사람보다는 한 문명의 전환이 연착륙에 쉽게 이를 수도 있으리라. 스스로 했든 사회적 강요로 그랬든 익명의 삶을 살아온 나로서는 여기에 기대는 것이 나을는지도 모른다. 비관과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고 고요히 연착륙을 기다리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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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경제학에서 ‘보편적 수단’과 ‘보편적 목적’에 상응하는 말은 ‘교환수단’과 ‘가치저장수단’이다. 이 두 가지 기능을 분리하는 것이 역이자의 효과며, 이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돈의 기능을 교환수단과 가치저장수단으로 정의하지만, 이 두 기능을 하나의 대상에 결합시키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교환수단인 돈은 순환을 요구하지만, 가치저장수단인 돈은 순환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모순이 수세기 동안 개인의 부와 사회적 부 사이의 갈등을 유발해왔다.

  개인의 부와 사회적 부의 갈등은 이 시대를 지배하는 원자론적 자아 개념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갈등을 해결할 화폐시스템은 인간 의식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267-268쪽)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를 관통하는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두 기본 개념은 분리와 통합이다. 본디 하나로 연결된 존재를 서로 분리함으로써 빚어진 인류의 질곡을 살피기에 알맞은 한 쌍, 비대칭적 대칭 어휘다. 당연히 분리는 극복되어 다시 통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로 묶인다. 여기서는 다르다. 왜 그럴까?


돈이 교환수단과 가치저장수단을 모두 지니는 것은 필연적 귀결corollary이 아니다. 후자가 어느 순간부터 틈입해 들어왔다. 이를 결합이라 하지만, 엄밀히는 덧붙임이다. 이 덧붙임이야말로 분리 이데올로기다. 분리 이데올로기로 덧붙여진 의미·작용을 ‘떼어내’ 본디 모습을 되찾게 하는 것이 진짜 통합이다. 이 떼어냄은 분리 이데올로기의 분리가 아니다. 만일 저자가 동일한 단어를 썼다면 잘못이다. (물론 번역 문제일 가능성도 있다.) “두 가지 기능을 분리”한다는 중립적 표현도 어정뜨다. 두 가지 기능을 단순히 수평 분리하는 게 아니니 말이다.


순환의 요구와 기피의 모순 역시 마찬가지다. 기피를 떼어내야 순환을 통해 공동체의 풍요가 일어나 지속되기 때문이다. 누가 떼어내는 일을 하는가? 기피 집단이 스스로 할 리 없다. 도리어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 원자론적 자아 개념, 즉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유포해왔다. 각자도생은 공동체 붕괴의 원인이자 결과다. 공동체는 이미 붕괴될 만큼 충분히 붕괴되어 폐허의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폐허 위에 “고기를 형제의 뱃속에 저장하는”(269쪽) 순환의 사람들이 재난공동체(리베카 솔닛)를 건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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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모르는 것은 우리의 소비성향이 아니다. 한계를 모르는 욕망은 돈과 함께 생겨난다. 사람들은 소비할 것을 충분히 얻고 나면·······돈 그 자체를 욕망하게 되며, 이런 욕망은 한계를 모른다.·······우리가 돈을 선호하는 유일한 이유는 쌓아두어도 손해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돈은 그러한 불멸성 때문에 보편적 수단뿐 아니라 보편적 목적이 되었다. 돈의 불멸성이 제거되면, 돈을 목적 아닌 수단으로 유지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부의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다.(266-267쪽)


  오늘날 경제위기의 근본 원인이 불가피한 성장 둔화며, 지금 우리가 생태적으로 정상상태 경제로 전환해가는 과정임을 고려하면, 소멸화폐는 침체된 경제에 임시 해결책 이상의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즉, 영원히 성장하지 않는 경제의 지속가능하고 장기적인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253쪽)


욕망 제어는 유구한 화두다. 인류의 큰 사유 중 이 문제를 누락시킨 것은 없다. 무제한적인 욕망이 돈에서 말미암았다는 진실을 간파한 것 또한 없다. 물질적 본질을 도려내고 욕망을 사유하면 인간 본성에 천착한다. 인간 본성이 외부 조건과 무관한 내적 실체이기라도 한 듯, 비우라느니 내려놓으라느니 따위의 관념 처방을 내놓는다. 관념 수행의 가성비가 떨어지는 까닭이 여기 있다.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수평선이다. 무엇보다 웃지 못 할 자가당착은 욕망에서 해방될 불멸의 깨달음 운운하는 것이다. 불멸의 깨달음이 욕망의 한 갈래임을 모른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을 떨쳐낼 유일한 길은 불멸의 깨달음이란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한다. 불멸의 깨달음에 매달리는 대신 소멸화폐를 삶속에 옹골차게 들여놓으면無常 욕망은 기꺼이 스스로 단정해진다. 단정한 욕망으로 존재가 연결되니無我 성장 없는 경제에서 참된 풍요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풍요의 지속은 엔트로피와 부단히 마주서야 하니 힘들고 아프다痛. 힘들고 아프니 탱맑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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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과 존재의 깊은 관계가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정체성의 심오한 변화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돈이 새로운 자아, 연결된 자아, 상대방의 이익이 곧 나의 이익이라는 상호연결성의 진리가 실현될 세계에 어울릴까?·······


그것은·······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화폐다.·······역이자율을 적용받는, 소멸하는 화폐다.·······‘소멸’이라는 말을 잠시 짚고 넘어가고 싶다. 부정적 어감을 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왜 ·‘소멸’은 부정적으로 들리고 ‘보존’은 좋게 들릴까? 이런 사고방식은 자연을 초월하고, 엔트로피·혼돈·소멸을 극복하고, 질서정연한 과학적·합리적 세계를 만드는 것이 인류의 운명이었던 도약 이야기에서 생겨났다. 도약 이야기는 비물질적·영구적·신적 불멸 영혼이 물질적·비영구적·세속적 소멸 육체를 억압하는 분리 영성과 상보관계였다. 인류는 육체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하고 소멸 과정을 막고자 노력해왔다. 불행히도 그렇게 함으로써 소멸을 포함한 더 큰 과정을 가로막고 있다. 더 거대한 통합적 복잡성을 향해 재생·재활용·진화해가는 과정 말이다. 다행히 분리와 도약 이야기는 끝나간다. 이제 우리의 사고방식과 경제에 소멸의 아름다움과 필요성을 되살릴 때가 되었다.(232-234쪽)


보편적 순환의 법칙에서 돈만 예외라는 것은 자연에서 인간만이 예외라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다. 소멸화폐는 이목을 끌기 위한 전술이 아니라 진실의 인정이다.·······영원한 것은 없다는 우주 보편법칙에서 돈도 더 이상 예외가 되지 않을 것이다.(250쪽)


윤선애의 노래 <하산> 가사 일부다.


“영원히 산다면 세상은 이리 아름답지 않아.

스스로 간절한 줄 모르는 빛일 뿐이지.

세상을 포옹하는 늦은 하산.

발걸음은 어둔 산에 묻히고,

삶이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으로 이어진다.”


하산은 스스로 간절한 줄 모르는 빛을 떠나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은 “소멸의 아름다움”에서 비롯한 “더 거대한 통합적 복잡성을 향해 재생·재활용·진화해가는 과정”이 이루어지는 “진실”의 세계다. 진실의 세계는 “상호연결성의 진리가 실현”되는 사건의 네트워킹이다. 이 네트워킹의 결절에서 어김없이 작동하는 것이 돈이다. “돈은 우리 문명을 결정하는 너무나도 근본적인 요소이기에, 돈의 근본적 전환 없이 진정한 문명 전환을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다.”(241쪽)


더는 순진함으로 불멸 이야기에 현혹당할 수 없다. 불멸의 화폐에 편승한 불멸의 영혼은 얼마나 추한가. 아름다운 소멸을 ‘살’로 지닌 돈이 우리를 구원한다. 돈 구원은 소멸을 숭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멸 숭고가 장엄이다. 장엄은 소멸하는 존재의 재생·재활용·진화 과정이다. 그 과정의 찰나마다 낭자하게 번지는 살 냄새며 맛이며 소리며 모습이며 닿는 느낌이다. 모든 동등한 존재의 직접 닿음peer-to-peer에서 일어나는 느낌이야말로 전환된 문명의 경이 감각이다. 경이 감각은 소멸만이 빚어낼 수 있는 존엄이다.


존엄한 발걸음, 어둔 산에 묻히리니.

신성한 삶,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으로 이어지리니.


이제 우리 손잡고 하산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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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버리는 물건으로 가득 찬 삶은 풍요로운 삶이 아니다. 경제 활동의 대상, 즉 사람들이 창조하고 교환하는 것들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신성한 경제를 이룰 수 있겠는가?(228쪽)


소시민의 소심한 감각임을 모르지 않으나 어쩌다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에 갈 때마다 나는 묵시록적 의문에 사로잡힌다. 


대체 누가 얼마나 필요로 하기에 이 많은 물건들을 만들고 팔아대는 걸까? 이게 인류가 파멸하는 징조 아닐까?


나 같은 가난뱅이 집에도 한두 번 쓰고 처박아둔, 사실상 버린 물건이 적지 않다. 연필에서 옷까지 실로 다양한 물건들이 이런 처지에 놓인다.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제대로 쓰지도 않고 버리는 것이다. 아니. 제대로 쓰지 않는다는 것은 버린다는 것이다. 온갖 곳에 쟁여진 그런 물건들만 재활용해도 인류가 생산을 전면 중단한 채 몇 십 년은 충분히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이자 기반 화폐시스템 자체가 ‘제대로 쓰지도 않고 버리는’ 낭비 시스템이다. 전 세계 산업설비의 40%가 멈춰 서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된다. 무엇보다 돈, 특히 부자들의 금고 속에 모셔진 돈은 버려진 돈이다. 그 돈이 그들의 부라 하자. 그 부의 실재는 뭔가? 없다. 굶어서 죽어가는 아이의 우유 값으로조차 쓰이지 않는 저 빳빳한 현금은 버려진 물건일 뿐이다. 돈은, 대체 얼마나 쓰고, 아니 쓰지 않고 버리는 우스운 것이어서 무서운 악인가 말이다.



내게는 10년 훨씬 넘게 쓴 가방이 하나 있다. 버리라고 아무리 말해도 버리지 않자 아내는 새 가방을 하나 사왔다. 나는 주말 나들이 때 한 번 새 가방을 쓸 뿐 여전히 그 가방을 들고 출퇴근한다. 이리 오래 쓸 만큼 잘 만들었고, 낡았으나 본디 기품을 잃지 않은 가방을 버리는 것은 “경제 활동의 대상, 즉 사람들이 창조하고 교환하는 것들을 존중하지 않”는 신성 모독이라 생각한다. 내 작은 신념과 실천이 생산, 유통, 폐기의 포르노를 얼마나 저지할 수 있을까만 열이 되고 백이 되면 신성한 경제 이룰 그 날을 희망 속에 놓을 수 있지 않겠나. 그 희망을 품은 헌 가방이 진정한 풍요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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