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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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로운 투자는 돈에 신성한 제의sacred vestments를 입히는 일이다.(410쪽)


신성한 견제의 투자는 부를 나누려는 행위다.(411쪽)


  많은 세월이 흘러, 돈이 돈으로 인식되지 못할 만큼 지금과 달라진다 해도, 기본적인 투자 개념은 사라지지 않고 남을 것이다. 우주의 근원적 풍요와 인간의 무한한 창의성 덕분에, 당장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풍족한 선물의 흐름을 이용할 기회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 공동의 노력과 지구와 맺은 동반자관계를 통해 경이로운 일을 창조하기 위해, 돈과 같은 수단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한마디로 신성한 투자란 이렇게 넘치는 풍요를 창조적인 목적에 사용하는 것이며, 필요에 부응하는 투자에서 점차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투자로 나아갈 것이다.(411-412쪽)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물론 좋아하지 않아서다. 나쁜 기억과 관련이 있다. 생애 첫 커피의 기억은 고등학생 때 어느 날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밤을 꼬박 새고 시험공부를 한 뒤 굶은 채 등교를 막 하려던 참이었다. 어머니가 부엌에 가면 먹을 것이 있다고 말했다. 끼니를 거르는 게 일상이었던지라 따스한 죽이라도 있을까 하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전혀 다른 종류의 냄새가 확 끼쳐왔다. 동그란 뚜껑이 덮인 연탄불 위에 누런 양재기가 놓였는데 거기 갈색 액체가 들어 있었다. 말로만 듣던 커피였다. 탁하지 않고 속이 들여다보였다. 요즘 말로 하면 아메리카노 쯤 될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그것을 내게 왜 주셨는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끼니를 거르는 집에 어떻게 커피가 있는지도 이해지 못했다. 얼핏 드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집을 나서는데 등 뒤에서 들려온 이 말 한 마디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일등 하라고 투자한 거야.”


어른이 되어 그때 어머니 나이가 되어서는 받아들일 수 있었던 말이지만 십대 아이로서는 투자라는 말에 걸려 우당탕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험 전 커피 말고 공부 전 죽 한 그릇이기만 했어도 충격이 덜했을 텐데·······. 커피와 연동되어 투자라는 말은 내게는 오랫동안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이익만 남기면 되는 비정한 도모 행위’ 쯤으로 인식되었다. 지금 화폐시스템에서 보자면 여지없이 정확하지만 내 인식은 성찰 자체가 결락된 화인火印 같은 것이었다. 내 삶을 의도된 빈곤으로 몰아간 상처의 트리거로 작동했음에 틀림없다.


트리거는 “가난이 곧 선이 아니며, 비 축적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409쪽)는 깨달음의 반대편을 조준하도록 기회마다 상처를 격발시켰다. 내 진욕進辱의 사상은 “신성한 투자란 이렇게 넘치는 풍요를 창조적인 목적에 사용하는 것이며, 필요에 부응하는 투자에서 점차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투자로 나아갈 것”이라는 능동적 진실 전체를 간취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내 영성의 지분은 여전히 청록색 바다에 더 많이 잠겨 있었다.


정색하고 파도를 넘는다. 다홍색 지붕 집이 펼쳐진 바닷가에 닿는다. 정좌한다. 지나온 바다의 세월을 돌아본다. 어린 시절 ‘환갑 진갑 다 지난 노인’이란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아득한 낯섦에서 화들짝 놀라 깨어난다. 아, 내 시간은 벌써 환갑 진갑이 다 지난 뒤다. 그 세월 동안 축적된 것은 부가 아닌 부채다. 신성하다 여겼던 내 투자는 순환 저 너머로 사라진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흐름은 적막에 휩싸인다. 정지된 이 시간 속에서 나는 천천히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신다. 40여 년 전, 내게 그것을 건넨 어머니가 네 번째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네 번째 어머니는 내 인생을 결정적으로 일으켜 세우고 결정적으로 쓰러뜨렸다. 나를 낳은 어머니에 버금가는 영향을 미쳤다. 여태까지 내 해석은 결정적 쓰러뜨림 중심이었다. 정지된 시간 다홍색 해변에서 나는 해석을 바꾼다. 결정적 일으켜 세움도 동등한 또 하나의 중심에 놓는다. 두 중심이 그려내는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태극 원의 진실 속에서 신성한 투자를 ‘끼적거린다, 되작거린다, 집적거린다, 자꾸 덤벼본다’(스리니 필레이의 개념을 차용함). 넘치는 풍요와 아름다움을 두 팔 벌려 안아본다. 사위는 이제 자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리라. 후천개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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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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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결핍이 유도하는 화폐시스템과 축적문화 속에 살면서 비 축적을 실천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남들도 다 같이 실천한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는 한 스스로를 보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지극히 타당한 생각이며 합리적으로 반  박할 수도 없다. 다만·······당신의 마음이 이성 너머 무언가에 이끌리는 것을 알아차리기만 바랄 이다. 이성, 현실성, 안전함의 추구가 이끄는 대로 살아온 지금의 결과를 보라. 이제는 다른 무언가에 귀 기울일 때인지도 모른다.(401-402쪽)


부가 안전을 보장한다는 믿음은 기만일 뿐이다. 삶의 고통은 부의 성벽 너머로 침투해 들어와, 누구나 겪는 사회적 병폐를 왜곡된 형태로 겪고 있는 부자들도 결국 그 고통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응급 상황에서는 부가 목숨을 구해줄 수 있다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무슨 차이일까? 얼마나 더 오래 살든 어차피 우리는 죽게 돼 있다. 지나온 삶이 섬광처럼 짧게 느껴지면서, 삶의 목적이 최대한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베푸는 것임을 깨닫는 시간이 올 것이다.(403-404쪽)


이미 우리의 영적 직관은 다가오는 시대의 진실을 알아차리고 있다. 소유는 짐이라는 진실, 참된 부는 나눔에서 온다는 진실, 남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라는 진실 말이다.(407쪽)


『댄스, 푸른푸른』에 이어 김선우 두 번째 청소년 시집『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나왔다. <시인의 말> 일부를 가져온다.


“드디어 숙제를 끝냅니다. 누가 하라고 한 것이 아니건만, 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스스로에게 부과한 숙제였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기에 힘들어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집을 만나 힘을 얻는 벗들이 있다면 그때마다 노랑리본 자리가 조금씩 더 환해질 것입니다. 지상의 별들과 하늘의 별들이 서로를 응원하며 날마다 조금씩 더 생동하기를 기도합니다.”




김선우야말로 “삶의 목적이 최대한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베푸는 것임”을 알고 실천하는 참 사람이다. 그의 인생 요목은 “이성, 현실성, 안전함”이 아니다. 감성, 창조성, 경이로움이다. 이들로 말미암아 축적이 불가능·불필요한 신성인생이 가능하다. 내가 김선우를 ‘천하시인’이라 부르는 소이다.


천하시인 김선우는 나를 ‘이심전심 쌤’이라 부른다. 이심전심은 유래origin가 같아서 가능하다. 그 유래는 “통속한 시간적 유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마음에서 유래했다는 특별한 의미로 쓴 것”(350쪽)이다. 신의 마음은 “소유는 짐이라는 진실, 참된 부는 나눔에서 온다는 진실, 남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알아차리는 “영적 직관”으로 현현한다. 김선우의 영적 직관은 시로, 내 영적 직관은 숙의로 펼쳐지거니와 양육과 치유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같다. 다른 점은 김선우가 탱맑은 선명으로 살아가는 데 반해 나는 는적거리는 익명 속에 침륜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내가 손위나 삶은 김선우가 윗길이다. 오늘도 나는 끝내지 못한 숙제를 끌어안고 김선우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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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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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심을 버리고 성인군자가 되라는 얘기가 아니다. 선물문화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선물문화의 속성을 돈에 부여할 때, 우리는 선물의 영역이 순수하게 이타적인 영역이 결코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380쪽)


  사회적 유대를 전혀 만들어내지 않는 공짜 선물이라는 종교적 이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돈을 매개로 하는 거래와 매우 유사하다. 일단 돈을 내고 물건만 받으면 그뿐, 어떤 의무감도 어떤 유대관계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화된 공짜 선물은 예외일 뿐, 선물은 그런 거래와 다르다. 보통은 당신이 내게 뭔가를 선물하면 나는 고마워하며 당신에게 또는 사회 관습상 규정된 누군가에게 선물하려고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선물은 의무감을 낳고 공동체 내의 경제적 순환이 계속되게 만든다. 그러나 익명의 선물은 그런 유대를 만들어내지도 공동체를 강화하지도 못한다. 받는 사람은 고마워할지도 모르지만 대상이 없는 추상적 보편적 감정일 뿐이다.(381-382쪽)


받기보다 주기를 즐기는 자신이 이타적이고 도덕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은 주기보다 받기를 즐기는 사람만큼 인색한 태도다. 선물을 받지 않으면 결국은 우리가 주는 선물의 원천이 말라붙기 때문이다. 받지 않는 태도는 인색할 뿐만 아니라 오만하다.·······그것은 삶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영적 교만,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종교적 망상, 자연을 지배하고 초월한다는 과학적 야심과 일맥상통하며, 점점 천국이 아니라 지옥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무 집착, 자립, 초월의 허구에서 깨어나, 우리의 진정한 자아, 확장된 자아와 결합하고자 한다. 우리는 공동체를 갈망한다.·······진실은 우리가 자연에, 서로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의지하고 받고 사랑하고 잃어가며 살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선물은 합일된 존재의 사회·물리적 현현이다.(388-389쪽)


궁핍에 절은 20대 법학도 시절, 경기도 어떤 종교시설 방 한 칸을 빌어 공부한 적이 있었다. 옆방 대입수험생과 안면을 터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제법 시간이 흘러 개인사 이야기도 나눌 만큼 친밀해졌다. 어느 날인가는 그의 어머님이 아들 챙기러 오셨기에 인사드리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와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다음 날 늦은 아침이 되어서 일어났다. 씻으려고 나가는데 방문 앞에 하얀 낯선 물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편지봉투였다. 집어서 열어보니 10만 원 권 자기앞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갑자기 망연한 심정이 되어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이윽고 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를 돈과 함께 넣어 옆 방 아이에게 주었다. 며칠 뒤 내 방문 앞에는 다시 하얀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돈과 함께 이런 짧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청년의 맑은 마음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자존심은 남한테서 무엇을 받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다른 남에게 베푸는 마음입니다.”


40년 전 일인데 지금도 그 일련의 과정, 그리고 그 편지 글이 눈앞에 삼삼하다. 그 뒤 나는 나름대로 그분의 깨우침을 좇아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마음병 든 사람과 숙의치유를 함께 하는 의자의 삶 속에서 옛날 10만 원 권 자기앞수표 한 장은 수백 수천 만 원으로 불어나 그 어머님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 어머님도 나도 미처 깨닫지 못한 이치가 하나 있다.


익명 엄금.


돌이켜보면 나는 받을 때도 줄 때도 인색하고 오만했다. 받을 때 극진히 고마움을 표하지 못했다. 줄 때 겸손을 떨었다. 분리문명의 거대유일신 망념이 만들어낸 영적 허구를 간파하지 못한 채, 아가페와 절대 자비를 지어내고 있었다. 자발적 익명화와 강제된 익명화가 뒤섞이면서 내 삶은 공동체의 변방으로, 마침내 바깥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져갔다. 이제 정색하고 다시 직면한다.


익명 엄금.


그러면 무엇인가? 답은 오직 하나다.


선명膳名 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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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적인 욕구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유한한 자원에 대한 유한한 수요의 무한한 성장을 말하는 화폐시스템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질적인 욕구는 측정할 수도 없고 한계도 없다.·······

  측정할 수 없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비화폐적 순환이 필요하다.·······아름다움, 사랑, 관계 등을 돈으로 사려고 하면, 사는 사람은 진짜가 아닌 가짜를 받게 되고, 무한정 소중한 것을 한정된 가격에 파는 사람은 착취당하는 셈이다.·······

·······내 주장은 돈의 영역과 선물의 영역을 분리하자는 것이 아니다. 돈이 좀 더 선물의 속성을 띠고, 선물의 중개구조가 발전해 돈의 역할을 대신하는 복합적인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이다.

  돈을 포함하든 아니든 경제의 기본과제는 첫째 선물의 제공자와 그 선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둘째 선물을 관대하게 베푸는 사람들을 어떻게 인정하고 존중할 것인가, 셋째 개인의 필요와 선물을 초월하는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시공간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다.·······(346-348쪽)


지금처럼 방대한 규모의 사회에서 측정 불가능한 것들을 어떻게 순환시키는가는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이자, 기나긴 인류 역사상 새롭게 맞이한 문제다.(350쪽)


지나온 60여 년 동안 참으로 많은 선물을 주고받았다. 문제는 정색하고 다시 돌아보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을 만큼 그 선물들이 내 삶의 기조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상거래 시스템에 중독되어 살았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상거래 시스템의 배타성이 워낙 강고해 선물거래가 내 삶의 시스템으로 자리 잡지 못하게 차단했다고 할 수 있다.


1. “선물의 제공자와 그 선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 사이, “연결”을 차단했다.

2. “선물을 관대하게 베푸는 사람”에게 돌아갈, “인정”과 “존중”을 차단했다.

3. “개인의 필요와 선물을 초월하는 것을 창조”하는 “조직”활동을 차단했다.


거대사회일수록 선물 당사자 간 연결은 불가피하게 어려워진다. 기존 화폐시스템은 이 어긋남을 근원적·비가역적 상태로 몰아넣는다. 제공자는 선물을 허망하게 날려버린다. 필요한 사람은 선물을 받지 못한 채 죽어간다.


거대사회일수록 기꺼이 선물하는 사람은 익명으로 처리되고 빈곤의 모멸에 빠뜨려진다. 기존 화폐시스템은 이 익명과 모멸을 근원적·비가역적 상태로 몰아넣는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누구도 그를 흠숭하지 않는다.


거대사회일수록 개인의 필요와 선물 너머 공적 풍요·향수를 빚어가는 결집력이 떨어진다. 기존 화폐시스템은 이 해체를 근원적·비가역적 상태로 몰아넣는다. 개인은 원자화된다. 공동체적 향수를 위한 연대 고리는 끊어진다.


바로 이때, 불현듯, 아니 기어코 떠올린다.


지금처럼 방대한 규모의 사회에서 측정 불가능한 것들을 어떻게 순환시키는가는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이자, 기나긴 인류 역사상 새롭게 맞이한 문제다.


운명과 혁명의 조우.


맡김과 해냄의 조우.


이른바 이율배반의 지랄 같음을 부둥켜안은 채 찰나를 견딘다. 견딤은 오직 선물을 주고, 선물을 받기 위해서다. 그 관대함에 엎드린 헌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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