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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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한 것은 신성한 경제로 이행하는 일이 우리의 정신적 전환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흔히 인접한 지역이나 단순한 네트워크를 의미하는 말로 쓰이는 공동체는 본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의 유대관계를 의미한다. 공동체는 자기 자신의 확장이자 존재를 함께하는 것이다. 공동체에 속하는 것은 개인적이자 상호의존적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독립과 의무 해제의 환상을 포기해야 한다. 양쪽을 다 가질 수는 없다. 공동체를 원한다면 의무·의존·유대·애착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돈으로 살 수없는 선물, 다른 곳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459쪽)


공동체는 세계 구조·운동의 비대칭적 대칭이 현현하는 이상이다. “공동체는 자기 자신의 확장이자 존재를 함께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공동체는 공적자아의 확장이자 사적자아의 소거 구조·운동이다. “공동체에 속하는 것은 개인적이자 상호의존적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공동체에 속하는 것은 상호의존적일수록 더욱 신성함으로 옹골차지는 개체 운동의 총화에 포함包涵되는 것이다. 공동체는 “양쪽을 다 가질 수” 있는 구조·운동이다. 이 모순의 지평융해를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아직 실감하지 못한 듯하다. 그에게 열린 프리미엄의 문 맞은편 문은 닫혀 있는 게 비대칭적 대칭 이치에 맞다. 그 덕을 보는 건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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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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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을 포기하는 일은 어리석으며, 어떤 면에서 가식으로 느껴지는 무의미한 일이다. 그것은 참된 필요에 부응하는 방식이 아니다. 예컨대 ‘이 나무판자는 테이블 톱으로 한 시간 안에 자를 수 있지만, 두 사람이 작은 톱으로 이틀 동안 자르자. 그래야 상호의존적 관계를 만들 수 있으니까.’ 라고 말하는 것은 기만적이다. 인위적 상호의존은 지금 우리가 겪는 인위적 분리의 해결책이 아니다. 해결책은 채워진 필요를 덜 효과적으로 채우면서 억지로 서로 돕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채워지지 못하고 있는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455쪽)


인류가 망쳐놓은 자연 생태계를 복원하려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더 이상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것이다. 뭔가 수단을 동원해 인위를 보태면 보탤수록 일은 어그러진다.


분리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본래의 전체성과 분리되지 않고서는 절대 이룰 수 없었을 놀라운 기술적·문화적 수단을 발전시켜왔다. 이제는 그 수단을 통해 전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470쪽)


이 말은 반만 맞다. 수단이 더는 통하지 않는 지점이 있는 법이다. 지금 인류가 봉착한 위기 속에서는 한결 더 그렇다. 수단을 내려놓고 고난을 각오한 결단을 해야 할 일이 차고도 넘친다.


고난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함은 물론이다.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실은 더 중요하다. (더 중요한 까닭은 많은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이다.) 구원은 그 경계에서 온다. (경계는 중간이 아니다.) ‘적실히’ 아플 때 깨닫는다. 공동체적無我 순환無常(의 회복)이란 태아는 아픔痛의 산도를 통과해 탄생한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의 긍정과 낙관은 나이브함이라기보다 미국이라는 거대조건이 떠받쳐주는 프리미엄 아닐까 싶다. 그것은 과학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느낌의 문제이기도 하다. ‘신식민지’ 대한민국에서도 변방 사람인 내게는 문제가 훨씬 더 부정과 비관의 느낌을 던져준다. 그가 향수할 수 있는 수단과 내가 향수할 수 있는 수단 중 무엇이 더 위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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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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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해리뷰를 쓰기 전, 『녹색의학 이야기』 끄트머리 글 세 개에서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이야기를 이미 했다. 주로 인용된 본문도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거의 마지막 부분인 <선물 속에서 일하기> 후반이다. 녹색의학 이야기 68, 69, 70은 녹색의학의 경제학 버전 또는『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의 의학 버전일 것이다. 그 글을 차례로 옮겨온다. 이번 글은『녹색의학 이야기』70. 녹색의학은 예술이다: It came to me.(2018. 6. 6.) 전문이다.


찰스 아이젠스타인 이야기를 끝으로 한다.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가 내게 준 마지막 선물은 바로 이 것이다.


예술가는 그냥 일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일을 신성하게 여긴다는 것은 곧 일을 받아들이고 그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고 다소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창조물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창조물이 물질적이든 인간적이든 사회적이든 이미 존재하나 아직 구현되지 않은 무언가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에 경외심을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447쪽)


살면서 입버릇처럼 내가 했던 말이 ‘다시 태어난다면 예술 할 꺼다.’다. 예술이란 문학, 음악, 미술, 연극들을 말함은 물론이다. 예술적 감수성을 지녔다는 뜻뿐만이 아니다. 삶을 대하는 자세 자체가 다른 일을 해서 ‘대박’나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자각에서 연유한다. 아픈 사람 치료하는 일을 하면서도 늘 예술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치료행위에 예술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딱 여기까지가 내 수준이었다.


전적全的은 아니더라도 내가 주체적인 어떤 작위로 예술인 치료행위를 한다고 생각했다. 아픈 사람과 함께 아픔과 삶을 숙의하는 과정에서도 “자기 창조물의 도구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미 존재하나 아직 구현되지 않은 무언가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행위가 아니었다. 나는 내 “일을 신성하게 여긴다는 것”에 다다르기 전에 예술가인 양 했다. 신의 길을 가지 않으면서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랐다. 아, 참람함이여.


일을 받아들이고 그 도구가 된다는 것”은 마치 나사렛 예수가 골고다의 길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십자가를 진 것과 같다. “자신의 작품에 경외심을 갖는 것”은 빈 무덤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마라.’ 한 것과 같다. 치료, 그것이 내게 왔을It came to me 때, 나는 의자로서 받아들이고 도구가 되면 그만이다. 나는 죽어 마지막 거점조차 지우는 일로 경외를 표하면 그만이다. 의자는 치료 속으로 배어들고, 아픈 사람의 변화된 삶에서 배어나는 것으로 그만이다. 이것이 치료의 예술이다. 예술이 아니면 녹색의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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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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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해리뷰를 쓰기 전, 『녹색의학 이야기』 끄트머리 글 세 개에서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이야기를 이미 했다. 주로 인용된 본문도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거의 마지막 부분인 <선물 속에서 일하기> 후반이다. 녹색의학 이야기 68, 69, 70은 녹색의학의 경제학 버전 또는『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의 의학 버전일 것이다. 그 글을 차례로 옮겨온다. 이번 글은 『녹색의학 이야기』69. 녹색의학은 사랑의학이다(2018. 6. 5.) 전문이다.


찰스 아이젠스타인 이야기를 다시 한다.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이 것이다.


사랑은 익명으로 할 수 없다.”(446쪽)


이 말은 내 폐부 깊숙한 곳을 뒤흔든다. 그 동안, 차마 가 닿을 수 없었던 진실이다. 60년 남짓한 생애 기조가 익명성이었기 때문이다. 내 익명의 삶은 시원적 방치에서 시작되어 사회적 강권을 거쳐 마침내 자발적 중독으로까지 나아갔다.


있으나 불리지 않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의 누적은 나를 익명성 밑바닥에 납작하니 개켜 넣었다. 부피를 상실한 내 이름은 어디에 있어도 잘 드러나지 않았다. 무엇을 해도 내 이름은 거의 질문되지 않았다. 스스로 이름을 크게 외칠 때는 듣는 이가 없었다. 많은 사람 속에서는 이름 부를 목소리가 사라졌다. 익명성은 커다란 흐름이 되었다. 흐름에 맡기면 언제나 익명이 보장되는 가장자리로 나아갔다. 어쩌다 중심으로 흘러들면 익명은 돌연 요구가 된다. 그 요구에 속절없어진 나는 이름을 가리고 선사膳賜에 배어든다. 선사에 배어든 나는 무색투명해진다. 무색투명한 자가 건넨 선물이 연대의 고리가 될 리 없다. 연대 바깥에 선 자는 공동체 일원이 아니다. 나는 초월자연하는 국외자였다. 거대신의 헛된 그림자를 여전히 밟고 있었다. 나는 오만을 흉내 냈다. 나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인색에 빠져 있었다. 인색은 자기 착취다. 자기 착취는 이내 그 경계를 넘어간다. 경계 너머 남에게도 내게도 이름 자체가 선물이며 사랑이라는 진실을 느지막이 깨닫는다. 그렇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름을 건다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2018년 1월 5일에 쓴<익명의 시대를 건너다>를 조금 고쳐 가져왔음.)


작고 적은 존재의 이름을 묻지 않는 것도, 이름을 짐짓 가린 채 초월자적으로 시혜하는 것도 모두 백색문명의 분리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폐해며 허상이다. 나는 피해자임과 동시에 부역자였다. 이제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작은 이름을 당당히 넉넉히 걸고 분리의 벽을 넘어가는 것이다. 선물로서 이름膳名을 번져가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 사랑이 백색문명을 치유한다. 백색문명을 치유하는 것이 녹색의학이다. 녹색의학은 사랑의학이다. 사랑의학은 이 시대 천명天命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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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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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해리뷰를 쓰기 전, 『녹색의학 이야기』 끄트머리 글 세 개에서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이야기를 이미 했다. 주로 인용된 본문도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거의 마지막 부분인 <선물 속에서 일하기> 후반이다. 녹색의학 이야기 68, 69, 70은 녹색의학의 경제학 버전 또는『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의 의학 버전일 것이다. 그 글을 차례로 옮겨온다. 이번 글은 『녹색의학 이야기』68. 녹색의학, 신성한 경제‘의’학의 시대를 열다(2017.12.1.) 전문이다.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라는 책에서 통합사상가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역이자 화폐, 경제적 지대의 제거·공유자원 고갈에 대한 배상, 사회·환경 비용의 내부화, 경제·통화의 지역화, 사회배당금, 경제 역성장, 선물문화와 P2P 경제를 골간으로 하는 신성한 경제가 분리문명, 그러니까 백색문명을 극복하고 재통합 세계를 여는 중요한 요소라 주장한다. 얼핏 들으면 허황한 낙관론 같지만 매우 근원적인 문명비판이면서도 당장 개인적 실천까지 가능한 톡톡한 담론이다.


저자의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면서 나는 의학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 한다. 이미 <녹색의학의 경제적 기치>에서 개론 수준의 이야기는 했다. 분리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게 분리의학은 몸의 병과 마음의 병, 병과 병 있는 사람, 병 있는 사람과 치료자를 포함한 병 없는 사람, 병 있는 사람과 사회정치, 병과 자연, 병 있는 사람과 자연을 철저히 갈라놓았다. 진단 기준과 치료(?) 약물의 보편성을 통해 병 있는 사람의 고유함과 관계적 존재성을 제거했다. 이렇게 병과 병 있는 사람을 클론으로 찍어낸 다음, 값을 매김으로써 불멸의 화폐가 다스리는 영원한 수탈제국에 의료 봉토를 헌정했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의 내용 전반을 관류하며 이야기하는 것이 선물 개념이다. 선물 경제 복원 문제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제21장 「선물 속에서 일하기」가운데 <신성한 직업>이라는 부분이 나온다.


선물 모델은 무형의 가치를 전달하려는 직업에 특히 자연스럽게 적용된다. 음악인, 화가, 성판매자(매춘부로 번역된 것을 인용자가 바꿈), 치유자, 카운슬러, 교사. 이 모두가 값을 매김으로써 가치 저하된 선물을 제공하는 일들이다. 우리가 제공하는 것이 신성하다면, 그것을 명예롭게 제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선물로 주는 것뿐이다. 아무리 높은 가격도 무한한 것의 신성함을 반영할 수는 없다. 내가 구체적인 강연료를 요구한다면, 내 선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셈이다. 만약 당신이 위의 직업들 중 하나에 종사한다면 선물 모델을 한 번 실험해보아도 좋다.”(445쪽)


한의사지만 하고 있는 일의 내용으로 따지면 나는 치유자, 카운슬러, 교사다. 나아가 인터뷰의 전설 오리아나 팔라치가 한 ‘인터뷰는 사랑 이야기다. 섹스다. 너를 홀딱 벗기고 나를 홀랑 들이붓는 싸움이다.’라는 말에 인터뷰 대신 숙의치유를 집어넣어 바꾸고, 숙의 또한 예술인 측면을 감안하면, 나는 위 모든 직업에 해당한다. 나는 그 동안 숙의치유에서 선물 모델을 꾸준히 실험해왔다. 물론 성공한 경우보다 실패한 경우가 더 많았다고, 여태까지는(!), 생각하고 있다. 실패(했다고 생각)한 결과는 “값을 매김으로써 가치 저하된 선물을 제공하는” 관습으로 정착되었다.


10년 이전이나 지금이나 한의사가 숙의로 마음병을 치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숙의 1회에 90-120분, 심지어는 식사까지 해가며 5-6시간 넘게 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 이른바 ‘상담료’ 문제가 초기부터 지금까지 가장 큰 고민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 있다. 지난주에도 상담료에 부담을 느낀 어떤 사람이 예약을 취소했다. 좀 더 세밀하게 선물 모델을 연구해서 다시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아무 준비 없이 무조건 선물로 제시했다. 그러니까 숙의를 진행하고 나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만큼 사례하고 가도록 했다. 그냥 가는 사람, 5천원 내는 사람은 그렇다 치고 ‘그까짓 대화하고 나서 무슨 돈이냐?’며 도리어 화를 내는 사람까지 있었다. 감사를 느끼며 성의껏 내는 경우도 대개 5만원을 넘지 않았다. 아무래도 무모했다.


그 다음부터는 설명을 붙였다. 상담치료의 본질과 가치, 상담치료의 일반적인 풍경, 역술인의 예, 의료인 아닌 상담사의 예, 정신과 양의사의 예, 외국의 예, 상담 시간의 비교 들을 간략하게 했다. 공감하고 수긍하면서 내고 가는 돈은 대략 5-10만 원 선이었다. 희귀한 예외가 없지는 않았다. 30만 원 선뜻 낸 사람이 더러 있었다. 심지어 100만 원을 내며 ‘이런 상담은 처음 받아본다.’ 한 경우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이 상담해보지도 않고 먼저 값을 물어보는데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화로 예약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상담치료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지 못한 채, 많은 사람들이 비용 문제 때문에 포기했다. 반대로 돈깨나 있는 강남 사람들 가운데는 한 번에 몇 백만 원 씩 카드로 긁고 가는 패키지 상품을 원했다. 그 상황을 타개하려고 홈페이지에 상담료 문제로 공개 글을 써 올리기까지 했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적절한 금액을 원칙으로 분명히 제시하고 경제적인 상황을 포함한 조정 요건을 설명해주는 정도로 타협을 보았다. 지금도 이 문제는 표류 중이다.


찰스 아이젠스타인도 현실의 고충을 잘 알고 있다.


남들도 다 같이 실천한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는 한 스스로를 보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타당한 생각이며 합리적으로 반박할 수도 없다. 다만·······당신의 마음이 이성 너머 무언가에 이끌리는 것을 알아차리기만 바랄 뿐이다. 이성, 현실성, 안전함의 추구가 이끄는 대로 살아온 지금의 결과를 보라. 이제는 다른 무언가에 귀 기울일 때인지도 모른다.”(401-402쪽)


고백건대 선물 모델 실패 의식에는 저평가된 내 선물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과 더불어 기천 만 원대에 이르는 치료비를 받지 못한 기억이 작용하고 있다. 기존의 분리 모델에서 자유롭지 않은 자아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서성거리는 거다. 문제는 새 국면을 맞고 있다. 나는 내 선물을 눈물의 포옹으로, 자신의 삶을 전복함으로 받아준 사람들에 새삼 정색하고 감사한다. 나는 내가 받은 고귀한 선물을 감동과 함께 기억한다. 무엇보다 내가 참으로 막다른 길로 몰렸다는 섬뜩한 느낌에 시달릴 때, 기적으로 찾아온 선물469 앞에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선다. 이성 너머로 나를 이끄는, 그 다른 무언가에 귀 기울인다. 신성한 경제‘의’학의 시대를 열어가는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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