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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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이자 화폐, 경제적 지대의 제거와 공유자원 고갈에 대한 배상, 사회·환경 비용의 내부화, 경제·통화의 지역화, 사회배당금, 경제 역성장, 선물문화와 P2P 경제로 요약(358-378쪽)되는 찰스 아이젠스타인 표 신성한 경제학을 분권화, 자기조직화, P2P, 생태적 통합(215쪽)으로 트랜스버전하면 찰스 아이젠스타인 표 신성한 정치학이 된다.


이 신성한 정치학을 나는 <59. 신성 유물론①>에서 저마다 중심, 자발적 내부창조, 평등한 개체끼리의 직접 닿음, 소요고요의 생명 연대로 트랜스버전해서 신성한 신학에 갈음했다. 신성한 신학은 그대로 신성한 자연학이다. 신성한 자연학은 그대로 신성한 인간학이다. 신성한 인간학은 그대로 신성한 미학이다. 신성한 미학이 아름다움을 복원한다.


아름다움을 복원해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지향해야 할 지상의 가치며 열반이며 구원이다. 아름다움은 나의 품에 그득히 남을 안고 살아감으로써 펼쳐내는 갸륵함의 느낌이며, 알아차림이며, 좇음이다. 한 아름 더 되면 허영이다. 한 아름 덜 되면 퇴영이다. 아름다움은 최대한과 최소한이 일치하는 한 아름의 경계에서 피는 꽃이다.


한 아름은 절묘한 균형이자 규모다. 이 균형과 규모로 인간, 자연, 신의 신성성을 담보하는 공동체가 구성된다. 한 아름 공동체의 네트워킹에서 정치경제학의 신성성이 완성된다. 신성한 정치경제학은 평범한 존재들이 평등한 연대로 평화를 향수하는 역동적 과정이다. 이 역동적 과정은 영원을 약속하지 않는다. 찰나마다 영원의 보랏빛 섬광을 선물할 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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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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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 마음은 지나치게 좋은 것을 꿈꾸기 두려워한다. 이런 얘기가 분노와 좌절과 슬픔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누구나 지닌 상처, 즉 분리의 상처를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꿈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우리 내면의 앎은 억누를 수 없다. 이제 우리 내면의 앎을 믿고 서로 의지하고 그런 삶을 꾸려나가자. 낡은 세계가 무너져가는 지금,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을까? 신성한 세계보다 못한 세계에 안주할 것인가?(482쪽)


박완서의 소설 『창밖은 봄』(1977)을 <MBC베스트극장>에서 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한 적이 있다(1984). 줄거리 많은 부분을 잊어버렸지만 오랫동안 기억하는 한 장면이 있다. 식모 일을 하던 길례(서갑숙 분)와 막노동을 하는 정씨(이대근 분)가 어렵사리 부부의 연을 맺어 살아가는 어느 겨울. 일이 잘 안 되다 그날은 운이 좋았던지 조금 큰(?) 돈을 손에 쥔 남편이 생선 한 손 사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한다. 생선을 받아들고 반색하던 아내의 얼굴에 갑자기 어둠이 깔린다. 남편에게 말한다. (바로 그 문장은 아니지만 이런 내용임에 틀림없다.)


“여보, 우리 이렇게 잘 살아도 되는지 겁이 나요.”


무슨 말인가. 행복한 시간이 덧없이 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랄 수 있겠다. 전혀 달리, 섬광처럼 찾아온 행복을 한껏 기림으로써, 불행을 생의 기조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이 자신의 불행한 운명에 곡진히 헌사를 바치는 것이랄 수도 있다.


불행한 운명에 바치는 곡진한 헌사는 분리문명 깊숙이 던져진 평범한 사람이 추구할 수 있는 실재the Real의 미학이다. 현행 화폐시스템 속에서 행복의 예찬과 축원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언어 착취며 조롱인지 경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지 않나.


20대 후반, 참된 삶의 지향과 각성·구원 문제로 깊이 고뇌하고 있던 내 가슴에 이 장면은 육중하게 각인되었다. 내가 각성·구원 문제를 인간 지평에서 떠나지 않는 것으로 닻 내리게 만든 예리한 한 순간이었다. 여적 내 사유의 정수리에는 쪼그만 질문 구멍이 뚫려 있다.


“그대, 황홀한 행복이 삶의 지향이며 의미인가?”


우리가 꿈꾸는 신성한 세계는 결코 궁창에 둥실 떠 있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우리가 구태여 “믿고 서로 의지하고” 꾸려가야 할 신성한 세계는 분리시대의 아프고 슬픈 기억을 제거해 몰아넣는 망연한 환희 도가니가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우리가 지향해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신성한 세계에는 분명히 선물이 필요한 사람과 선물을 주려는 사람이 각각 존재한다. 그냥 주어야 하는 사람과 감사를 표하며 받아야 할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 서로 견딤을 주고받으며 기다린다. 그 과정마다 희로애락을 두루 실감한다. 우리의 신성한 세계에 천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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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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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를 탄생시키고 인류가 성년이 되기 위한 시련의 시기는 다소 혼란스러울 것이다. 경제적 붕괴와 파시즘, 소요사태, 전쟁까지 수반되는 혼란일지 모르지만, 그런 암흑기는 우리 예상보다 훨씬 짧고 훨씬 가볍게 지나가리라 예상한다.

  그 이유는 내가 만나는 수많은 깨어 있는 사람들 때문이다. 인류는 지난 반세기 동안 많은 것을 학습하면서 의식 발전의 임계점에 이르렀다.·······가속화되고 있는 이 전환 국면은·······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시대 계승의 마무리 단계인지도 모른다. 특이점이 가까워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심오한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다.(475-476쪽)


강릉 거점 을미의병(1895)의 지도부 일원이었던 강무영은 원산에서 전사했다. 그의 가문은 당연히 쑥대밭이 되었다. 세 아들은 국권상실기 내내 왜경에 쫓겨 다녔다. 해방 이후에도 제대로 사회경제적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전쟁과 독재를 거치며 요동치던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그의 후손은 소외와 빈곤의 심연으로 점점 더 깊이 가라앉았다. 침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의 둘째 아들의 둘째 아들의 둘째 아들이 바로 나다. 증조부가 순국한 지로부터 60여년 뒤에 태어나 60여년을 살아온 내게, 이 “암흑기”는 과연 얼마나 짧고 가벼운 것일까.


대표적인 매판지식인으로 뜨르르했던 자 가운데 홍진기가 있다. 국권상실기에 법관으로 일제에 부역했다. 해방 후 이승만의 주구로 경향신문 폐간, 조봉암 처형하는 데 앞장섰다. 4·19혁명 당시 내무장관으로 발포를 명령해 민주시민 200명을 살해했다. 5·16쿠데타 세력에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병철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그 뒤 삼성과 인연을 맺어 화려하게 사후까지 복락을 누렸다. 중앙일보가 그의 가문에게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다. 그의 둘째 아들이 바로 CU의 주인 홍석조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 살아온 홍석조의 60여년은 과연 얼마나 길고 무거운 것일까.


찰스 아이젠 스타인이 간과하는 진실을 말하려 한다. 아메리카 프리미엄으로 누리는 저 짧고 가벼운 시련과 혼란과 암흑은 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얼마나 길고 무거운 것인지 그가 알 수 있을까. 그보다 먼저 아픔을 실감하고 그보다 나중까지 아픔에 잠겨 있어야 하는 수십억 사람의 살갗에 그의 손이 가 닿을 수 있을까. 그의 통찰과 낙관이 고마우면서도 내가 끝내 아뜩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차이 때문이다.


“CU의 주인이 홍석조인 줄 몰랐을 때, 나는 거기서 막걸리를 여러 통 샀다. 안 뒤, 나는 발길을 끊었다. 이것이 내 실천이다. 그러면 나의 그 시간 동안, 홍석조는 무엇에 깨어 있었으며, 무엇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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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경제학의 시대 - 한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해법은 무엇인가?
찰스 아이젠스타인 지음, 정준형 옮김 / 김영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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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식으로 지어진 고층 건물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추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수천 년의 기술 발전을 이룬 뒤 이런 추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놀랍고 화난다.(463쪽)


생명이나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대상의 본질에 닿아 있으며, 기능의 부수적 결과가 아니라 기능과 불가분의 관계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아름다워 보이지만 다른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는 역설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킨다.(465-466쪽)


  따라서 영혼이 담긴 물건, 더 풍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위한 물건을 만들려면, 생명력·자기지향·인간성을 투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을 담아 만들어야 한다.(467-468쪽)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 10년째 살던 어느 날, ‘낯선’ 아버지 손에 이끌려 서울로 온 것이 1965년이다. 시내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들이닥치는 문화충격은 실로 대단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건물의 높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2층 이상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골 소년에게 그 높은 건물은 ‘아름다움’ 자체였다. 그 뒤로도 꽤 오랫동안 내게 서울의 고층건물은 동경의 대상으로 군림했다.


어느 순간 서울을 몸처럼 느끼기 시작하면서 내게는 다른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커다랗고 높은 건물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고 심지어 아파왔다. 산동네 작은 집과 골목이 폐허로 변할 즈음 나는 쫓겨났고 얼마 뒤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재개발이니 재건축이니 하는 서슬에 민초의 애환과 사연을 품은 소소한 풍경은 무참히 스러져갔다. 변두리 대로변조차 빌딩 숲으로 바뀌었으니 종로나 명동 일대는 말할 나위가 있으랴. 무교동 낙지집, 청진동 해장국집, 피맛골 생선구이집, 명동 막걸리집도 죄다 사라지고, 어느 평론가의 표현처럼 ‘고층 폐허’만이 우글대는 세상이 와버렸다. 광화문 네거리에 서면 저절로 이런 정서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현대식으로 지어진 고층 건물을 볼 때마다, 나는 그 추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수천 년의 기술 발전을 이룬 뒤 이런 추한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놀랍고 화난다.


고층 폐허는 추할 뿐 아니라 비인간적이다. 위압감만으로도 웬만한 사람은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으니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은 불의하기까지 하다. 부자들이 비겁한 축재 수단으로 써먹는 전가의 보도기 때문이다. 이것에 누가 “생명력·자기지향·인간성을 투여”하겠나. 이것을 누가 “자신을 담아 만들어”내겠나. 이것에서 누가 “대상의 본질에 닿아” 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겠나.


신성 유물론은 인간이 빚는 물건을 사물화하지 않는다. 그 물건은 자기 자신의 연속이다. 그것에 자신이 배어든다. 신비주의가 아니다. 신성하게 예우하는 결곡한 삶의 기조다. 신성 유물론은 나 자신과 세상, 그리고 신을 삼가 가만가만 만지는 이야기다. 더 고매한, 더 심오한, 더 광활한 이야기는 허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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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영적spiritual’이라는 말을 쓸 때는 ‘물질적’이라는 말과 대조적인 의미로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물질 영역의 초월을 추구하는 철학이나 종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영혼과 물질의 분리는 우리가 물질세계를 이토록 악랄하게 다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성한 경제학은 세계를 지금보다 더 신성하게 대하며, 지금보다 더 유물론적이다. 따라서 내가 영적인 욕구를 충족한다고 말할 때는 지구 파괴적인 물건을 계속 쏟아내면서, 천사와 영과 신에 대하여 떠들고 기도한다는 뜻이 아니라, 관계와 순환과 물질적 삶 자체를 신성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그것들은 실제로 신성하기 때문이다.(461쪽)


유럽 어디든 그 중심에 자리 잡은 찬란하고 견고한 기독교 건축물이 내게 주는 느낌은 이중적이다. 아름다움에 찬탄을 쏟아내다가도 문득 천국의 영생을 역설한 기독교가 왜 허탄한 지상의 건축물에 이리도 공을 들였을까 의심을 품는다.


수준이 떨어지긴 해도 오늘날 우리사회 기독교, 특히 대형 개신교를 보면 건물에 공들이기는 옛 유럽과 다를 바 없다. 혹시 교회 지도자들은 천국의 영생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죽기 살기로 건물, 돈, 권력에 집착한 것 아닐까?


이 의문을 끝까지 밀고 가면 영혼과 물질을 분리한 이데올로기가 궁극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진실에 가 닿는다. 창조주니 영성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 물질세계를 수탈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최악의 통속 유물론이다. 통속 유물론은 “지구 파괴적인 물건을 계속 쏟아내면서, 천사와 영과 신에 대하여 떠들고 기도한다.


관계와 순환과 물질적 삶 자체를 신성하게” 대하는 신성 유물론은 물질과 분리된 영혼의 존재를 기각한다. 영혼은 관계 속에서 순환 가운데 일어나는 물질의 직접적 실감이다. 물질의 직접적 실감이 빚어내는 감사와 사랑을 우리는 영성이라 부른다. 영성을 신이나 견성이 매개하면 틀림없이 가짜다. 가짜라고 내다버리고 마는 무신론도 가짜다.


진짜 영성은 “실제로 신성하기 때문”에 관계와 순환과 물질적 삶 자체를 신성하게 대한다. 물질과 물질에 직접 닿음과 닿음이 주는 실감과 실감이 피워내는 감사·사랑의 무한 네트워킹이 유물론적 신 사건이다. 유물론적 사건 신은 통치하지 않는다.


통치하지 않는 유물론적 사건 신은 저마다 중심이며, 자발적 내부창조며, 평등한 개체끼리의 직접 닿음이며, 소요고요의 생명 연대다. 이것이 바로 신성 유물론이 건설한 공화국의 정치학이다. “분권화, 자기조직화, P2P, 생태적 통합”(215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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