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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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서면 삶이란 선물에 눈이 뜨이고 경외감을 느낀다(32쪽)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꾼다.


“삶이란 선물에 눈이 뜨이고 경외감을 느끼면 실체도 모른 채 일으키는 죽음에 대한 발화를 멈추게 된다.”


인간의 삶과 죽음 문제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포지션은 빛의 입자와 파동 문제에서 취할 수 있는 것과 다르다. 죽음 자체를 실험·관찰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 죽음이 확정된 이후 나타나는 결과적 현상을 죽음 자체라고 할 수 없다. 육체의 생명 활동이 멈추고 부패가 진행되는 과정 전체는 물론, 분리라 하든 소멸이라 하든 정신 현상이 사라진 것을 죽음 자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무슨 실체를 논할 근거가 있는가.


종교나 정신수련 집단이 거의 예외 없이 주장하는 이른바 사후세계 이야기도 본질적으로 마찬가지다. 삶과 죽음에 적용하는 이원론과 정신과 육체에 적용하는 이원론이 서로 충돌하는 줄도 모르면서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현상, 이를테면 유사체험에 죽음의 이름을 붙여 다양하고 번쇄한 훤화를 남겨 놓은 것들이 경전이란 이름으로, 지혜서란 이름으로, ‘천국이 있습니다.’ 따위의 감언이설로 준동하고 있다. 모두 가짜다.


진짜는 선물인 삶에 눈 뜨고 경외감 느낀 이야기를 곡진하고 결곡하게 하는 것뿐이다. 제대로 살고, 그 삶을 실감하는 일이 멈추는 찰나 시간 위에 죽음의 실체는 카이로스적으로 존재한다. 나머지 우수마발은 살아 있는 타자의 췌언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실체를 말할 때 건너편 가장자리에서 일으켜지는 침묵으로써만 죽음의 실체에 접근이 가능하다. 요컨대 죽음을 아는 길은 삶을 아는 데 있고, 그 삶을 아는 길은 삶과 죽음의 가장자리에 있다.


파커 J. 파머의 말은 삶의 끝자락에 가까이 다가서면 삶이란 선물에 눈이 뜨이고 경외감을 느낀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상식 수준의 교훈에서 멈춘다. 퀘이커 교도임을 감안해 영성적으로 이해하면 그의 사회적 삶과 결합해 한결 기품 있는 고백으로 자리매김할만하다. 이것은 그의 인연이며, 그 인연에 그는 최적화된 감응을 하고 있다.


나는 나로서 내 인연에 감응한다. 내 인연은 바리다. 바리인연에서 삶으로 죽음을 말할 때, 나는 오직 눈물로 시작한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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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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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보건대 모든 것(올바르게 이해한 것과 잘못 이해한 것)을 끌어안으면 전체성의 은총이 임하는 과정에 대해 경외감을 느낀다.(30쪽)


  온전함이란 완전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서짐을 삶의 총체적인 부분으로서 끌어안는다는 뜻이다.(31쪽)


자연스러운 의미 연계를 위해 인용문 순서를 뒤집는다. 문장들의 번역 일부를 의미의 선명성을 고려해 바꾼다.


  온전함이란 완벽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서짐을 전체 삶의 일부로 끌어안는다는 뜻이다.


  돌아보건대 모든 것(바르게 포착한 것과 그르게 포착한 것)을 끌어안으면 전체성의 은총이 임하는 과정에 경외감을 느낀다.


자신이 종사하는 업계에서 그 이름 석 자 뜨르르하게 떨쳐온 중년의 여자 사람이 공황과 강박을 호소하며 찾아왔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완벽주의자였다. 완벽주의가 그를 그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완벽주의란 무엇인가? 모자라거나 잘못한 것이 없는 상태가 있다는 전제 아래 전천후의 평가를 거치며 그 목표에 이르려 하는 삶의 태도다. 이 당위Sollen는 고도한 집중을 요구한다. 집중 대상은 모든 것이다. 모든 것에는 쓸데없는 것도 포함되기 마련이다. 쓸데없는 것에까지 고도로 집중하다 완벽주의자는 소진된다. 소진된 완벽주의자는 결국 헛똑똑이다. 이 헛똑똑이를 양산하기 위한 거대 음모가 분리문명이다.


분리문명은 부서진 것, 그르게 포착한 것을 거세함으로써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구성하려는 환유다. 환유는 완벽의 전형으로 국가와 돈, 그리고 유일신의 삼위일체 내러티브를 창작했다. 삼위일체 내러티브는 전체 진실, 그러니까 비대칭의 대칭을 은폐하고 이원론에 터한 일극집중구조를 영속화한다. 이원론에 터한 일극집중구조를 거절하고 전체성의 은총 앞에 무릎 꿇는 것을 온전함이라 한다.


온전함은 모자라거나 잘못한 것이 없는 상태가 있다는 전제를 세우지 않는다. 현재 상태를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반드시 이르러야 할 목표는 없다. 부서진 것, 그르게 포착한 것을 끌어안고 그때그때 세상과 마주할 따름이다. 이 자연Sein은 관대한 비非집중을 연다. 비非집중은 집중과 함께 작동한다. 소진될 일이 없다. 온전한 사람이야말로 참똑똑이다. 참똑똑이가 세상을 바꾼다.


완벽주의 그 여자 사람에게 말해주었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 섰다고. 삶의 자세를 전복해야 한다고.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 집중에 집착해온 사람에겐 어려울 문제일 터. 사지선다형으로 하면 어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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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 지나도록 선연해서 처연한 가을 잎새들



히스파니아 제9군단




라스트 모히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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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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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니 마틴의 「경외감과의 재결합」이라는 글을 읽었다. 16개월 된 딸 마야를 보면서 그 걸음마 배우는 아이의 눈을 통해 자신이 삶의 경이로움을 어떻게 볼 수 있었는가를 상세하게 묘사한 글이다.

  나는 코트니의 첫 문장에 사로잡혔다. “내 딸은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 있다.” 그것은 정확하게 내가 오늘 일흔아홉 살의 나이로 서 있는 곳이다.(28쪽)


코트니에 따르면 그녀의 딸은 “세상이 즐겁게 하리라는 크고, 분별없는 기대 하나만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간다.” 16개월짜리 마야처럼, 나도 여든 줄에 들어서면서 오직 하나의 기대를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고 싶다. 세상이 나를 즐겁게 할 수 있음을 알 만큼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내 기대는 세상이 아닌 나 자신을 향해 있다. 즉, 삶이라는 선물을 즐기는 것, 그리고 감사하는 것이다.(32-33쪽)


코트니 마틴의 글 첫 문장에 파커 J. 파머가 사로잡혔듯 나는 제목만 보고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를 샀다. 가장자리라는 말에 단도직입으로 꽂히는 감수성이 흔할 리는 없다. 내게 가장자리라는 말은 마주가장자리, 어름, 변방, 경계로 변주되면서 사유의 기조 목록어로 자리 잡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리의 삶과 사상의 자리, 그러니까 원효의 삶과 사상의 자리가 가장자리기 때문이다. 파커 J. 파머에게는 그만의 다른 감각이 있을 테지만, 이 책에서 꾸준히 드러나는 깨달음의 기조는 서로 다르지 않다.


깨달음이라 하지만 무슨 특별한 오의를 품어서가 아니다. 16개월짜리 아기가 지닌 “크고, 분별없는 기대”를 일흔아홉 살 노인도 지닌다 할 때, 차이는 오직 크고 분별없는 기대를 지녔다는 자기인식 여부뿐이다.


16개월짜리 아기는 매순간 모든 것의 가장자리를 넘어가면서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아니 한다. 인식의 주체로서 중심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중심자아는 분리의 산물이다.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세상이 두려울 것도, 불확실할 것도 없다. 즐거운 탄성을 지르며 아기는 나아간다.


일흔아홉 살 노인은 매순간 모든 것의 가장자리를 넘어가면서 그 사실을 인식한다. 인식의 주체로서 중심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분리의 시대를 통과하며 형성된 중심자아는 세상과 적대적 모순 관계에 있다가 마침내 역설로 달여 낸다. 두렵고 불확실한 세상이지만/이므로 선물인 삶에 감사하며 노인은 나아간다.


이 차이는 삶의 실재에서 과연 무엇인가?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지만, 우리가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지점은 일흔아홉 살 노인이 왜 하필 16개월짜리 아기의 가장자리 풍경에 온 영혼이 떨리는 현상을 일으켰을까, 바로 여기다.


에덴 회귀retrotopia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다만 근원성radicality을 급진적radical으로 소환할 따름이다. 인식 여부는 세상의 전체성, 그 전체의 모호성을 끝내는 알 수 없다는 자각의 여부다. 이 차이의 관건성cruciality은 딱 하나의 점을 영지로 지닌다. 겸허다. 세상과 삶의 경이로움 앞에 엎드릴 줄 아는 ‘노인’의 거처가 가장자리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는 오늘의 문명인류를 준엄하게 부르고 있다. 모두 ‘노인’ 목소리로 응답하라. 어라? 내 목에서 꼰대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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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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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단지 더 이상 잃을 게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할 뿐이다. 인생에서 공공선을 위해 더 큰 위험부담을 감수할 시간이다.

  가장자리를 넘어 레너드 코언이 ‘불굴의 패배invincible defeat’라고 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날들을 내다보건대,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그 길이 기나긴 내리막길이라는 사실이다. 날개를 펴고 날아갈 것인가? 바위처럼 말없이 떨어질 것인가?(15쪽)


본문의 일부를 인용할 때 파괴될 수 있는 논리의 흐름을 복원하기 위해 문단 순서를 뒤집는다. 뒤집을 때 맨 앞에 오는 문장의 번역과 원문 일부를 의미의 선명성을 고려해 바꾼다.


가장자리 너머 레너드 코언이 ‘불가항력적 패배invincible defeat’라고 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날들을 내다보건대, 내가 확실히 아는 바는 그것이 아뜩한 낭떠러지라는 사실이다. 날개를 펴고 날아갈 것인가? 바위처럼 떨어질 것인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단지 더 이상 잃을 게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할 뿐이다. 인생에서 공공선을 위해 더 큰 위험부담을 감수할 시간이다.


노동운동하다가 진보정치판 깊숙이 몸담았던 제자가 어느 날 술자리에서 내게 말했다.


“선생님께서 이제 사적 영역 안에서 편히 지내신다 해도 뭐랄 사람 없습니다.”


그의 충정과 무관하게 이 말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그 부끄러움은 즉각 또 하나의 파장을 일으켰다. 백세시대라고 말들 하지만 예순 남짓해도 어떤 면에서 나이 든 것이 분명하구나. 은퇴란 말과 연동될 때 현대사회에서 나이 든 것은 대접의 상대가 아니라 취급의 대상이다. 그래. 그렇다면 은퇴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단지 더 이상 잃을 게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할 뿐”이니 말이다. 단, 도리어 사적인 영역 안에서만 그렇다. “인생에서 공공선을 위해 더 큰 위험부담을 감수할 시간”이니 든 나이에는 공생애의 출사표를 던질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공생애가 마치 은퇴자를 위해 남겨진 삶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예수를 떠올리면 생각은 단박에 전복된다. 예수는 삼 년의 공생애를 위해 삼십 년을 준비했으니 말이다. 인간다운 인간이려 할 때, 가장자리를 향해 내공을 쌓아가는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내공은 사적 영역, 그러니까 소아小我의 거점을 지워가는 과정에서 쌓아진다. 소아의 거점을 지우면 노후의 안락 대신 공동체를 위한 위험한 짐을 기꺼이 진다. 그 위험한 짐을 지고 가장자리 너머를 향해 가는 나이 든 사람이 진정한 어른이다. 진정한 어른의 길을 우리는 신의 길이라 한다.


신의 길, 그 끝은 아래로 이어진 낭떠러지가 아니다. 광활한 허공이다. 신은 허공을 향해 비상한다. 비상은 새로운 창조를 일으킨다. 창조 비상을 위한 구름판이 바로 가장자리다. 가장자리는 죽음을 가리키는 이정표인 것 이상으로 장엄을 알리는 팡파르다. 팡파르 소리를 들으며 나는 지금 가장자리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겨드랑이가 근질근질하다. 날개가 돋으려나보다. 55kg밖에 안 되니 날개가 그리 클 필요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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