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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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와 경험은 내게 멘토링이 일방통행로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두 사람이 잠재력을 서로 일깨워주는 상호작용이다. 신학자 넬 모턴의 말을 빌리자면, 멘토링은 “서로 말을 듣는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멘토링은 우리의 취약함과 상호 필요를 존중하는 관계 속으로 서로를 초대하도록 기회를 열어준다. 멘토링은 멘토가 주는 만큼, 혹은 종종 더 많이, 멘티와 주고받는 선물이다.(58쪽)


지금은 감옥에 들어가 있는 두 전직 대통령이 저지른 죄악 가운데 가장 큰 것 하나를 대부분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말에 대한 ‘특수’강도다. 권력을 이용해 멀쩡한 시민의 말을 강취한 뒤 의미를 비틀어버린 범죄다. 예컨대 이명박은 도덕을 도둑으로 타락시켰고, 박근혜는 대포 폰을 대통령 폰으로 격상시켰다.


국민을 위해 기도하고 국가를 위해 우주 기운을 끌어온다는 이 두 절정고수 말고 말 강도 둘이 더 있다. 종교, 특히 ‘개독’이라 일컬어지는 개신교가 그 하나다. 이들은 예컨대 진리를 전리錢利로 타락시켰다. 다른 하나는 언론자본으로 대개 조·중·동이라는 환유로 통한다. 이들은 예컨대 얼척없는 땡추를 멘토로 격상시켰다. 혹은 멘토를 땡추로 타락시켰거나.


멘토는 이제 값싸디값싼 장사꾼으로 인식되고 있다. ‘국민멘토’라는 호들갑까지 등장한 마당이라 개나 소나 멘토 자리에 앉혀지고 심지어 자처한다. 이 언저리에서 어느 음식장사꾼은 졸지에 선생님이 되고 한물간 연예인이 사부가 되기도 한다. 언론의 탈을 쓴 자본이 짓이겨버린 멘토를 이대로 놔둘 순 없다. 복권을 넘어 시대에 맞게 변화시켜보자.


분리문명의 멘토는 일방통행 하는 교사였다. 분리문명을 극복하려는 거대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오늘날의 멘토는 멘티와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의 존재다. “우리의 취약함과 상호 필요를 존중하는 관계 속으로 서로를 초대하도록 기회를 열어”가는 존재다.


완벽하기 때문에 멘토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넉넉한 부분이 있어 멘토가 되었을지라도 모자란 점에서는 누군가의 멘티가 된다. 자신의 멘티가 멘토가 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훨씬 높은 것이 자연스럽다. 기회를 열었기에 멘토라 일컬을 따름이다. 멘토와 멘티는 상호 필요를 존중하면서 전체성으로 가는 공시적synchronic 공동체 운동 음악의 협연자다.


기회를 열 수 있었던 것은 대개 멘티보다 연륜에서 앞서기 때문이다. 연륜에서 앞서기 때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오늘 이전의 지혜와 지식에서다. 오늘 이후의 지혜와 지식에서 연륜은 별로 기여할 게 없다. 진취성에서 멘티가 앞서는 것이 자연스럽다. 멘토와 멘티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이루어가는 통시적diachronic 공동체 운동 음악의 협연자다.


내 인생에도 이런 협연자가 더러 있었다. 특히 최근에 만난 한 협연자는 내가 그에게 선물한 바리-원효 사상에 구체성을 부가하는 스티브 테일러, 찰스 아이젠스타인, 미셸 오당을 내게 선물했다. 물론 아직도 협연은 끝나지 않았다. 그와 내가 협연을 계속하는 한, 이 땅에서 그 누구도 멘토란 말을 강탈할 수 없으리라. 혹 자작극이라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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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과 함께 찾아오는 지혜


이파리는 많아도 뿌리는 하나

거짓으로 보낸 젊은 시절 동안

햇빛 아래서 잎과 꽃들을 흔들어댔지

이제 나는 진실을 향해 시들어가네


The Coming of Wisdom with Time

Though leaves are many, the root is one;

Through all the lying days of my youth

I swayed my leaves and flowers in the sun;

Now I may wither into the truth.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예이츠의 시는 내가 잊고 싶지 않아 하는 무언가에 이름을 지어준다. 나이 듦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면 “거짓으로 보낸 젊은 시절”을 넘어 “진실을 향해 시들어”갈 기회가 열린다. 시들어가는 것을 보톡스로 막으려는 유혹에 저항한다면 말이다.

  내 젊은 시절의 거짓말들은 의도적인 게 아니었다. 사실인 즉, 나 자신과 세상, 그리고 그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 주제들에 관해 내가 했던 말은, 종종 내 에고라는 악명 높은 거짓말쟁이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내가 누군지에 대한 영적 진실 (즉, 어둠과 빛의 복잡하고 헷갈리는 혼합물)을 받아들이자면, 내 에고는 쪼글쪼글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이는 사람을 가장 쉽게 주름지게 만든다. 이 모든 주름은 그래서 생긴 것이다.

  이 정도나마 내가 다다른 진실은, 자신을 정직하게 직면할 용기를 내도록 하는 영적 훈련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패배를 인정하고 “그래, 나는 완벽과는 거리가 한참 멀지.”라고 말할 정도로 에고가 깨지고 삶에 의해 거름이 되는 경험에서 온 것이다.(40-42쪽)


머지않아 “진실을 향해 시들어 가기”는 죽음에서 끝이 나리라. 죽음은 시듦의 궁극적 형태이고 아마도 진실의 궁극적 근원일 것이다.(47쪽)


예이츠는 시에서처럼 미리 알아차리고 스스로 진실을 향해 시들어간 것일까? 모른다. 대신 파커 J. 파머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패배를 인정하고·······에고가 깨지고 삶에 의해 거름이 되는 경험”을 하고서야 “이 정도나마” 진실에 다다랐다고 고백한다. 에고가 “쪼글쪼글”해져야 “내가 누군지에 대한 영적 진실 (즉, 어둠과 빛의 복잡하고 헷갈리는 혼합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 셈이다. 요컨대, 시들어야 진실을 향한다, 다.


나는 “영적 훈련”으로 도달한 진실을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적 훈련이 “용기를 내도록” 하여 “정직하게 직면한” “자신”을 통해 도달한 ‘진실’은 기껏해야 ‘아라한’이기 때문이다. 아라한은 진정한 “영적 진실 (즉, 어둠과 빛의 복잡하고 헷갈리는 혼합물)”에 가닿지 못한 채, 자신의 알량한 경지를 타고 앉아 내려오지 않는 자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게서 “어둠”을 내몰고 빛만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유일한, 그러나 치명적인 거짓이다. 수많은, 아니 거의 모든 ‘영적 스승’은 이 함정에 빠져 있다. (이 문제는 나중에 토머스 머튼을 이야기할 때 자세히 다루겠다.)


함정 아닌 참 도량은 저잣거리의 평범한 삶이다. 평범한 삶에서 경험한 “패배”와 깨짐, 그리고 “거름”이야말로 진실을 향하게 하는 시듦이다. 시들면wither 흔들어대지sway 못한다. 요란한 거짓의 계절이 지난 뒤, 시들고 떨어지는 가장자리께나 진실은 고요히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맹렬한 강박에 포획된 우울증 또는 격심한 우울에 침륜된 강박증을 치료받고 나를 “생명의 은인”이라 부르며 십년 넘게 연락을 계속하는 사십대 중반 여자 사람 하나가 밤늦게 전화를 했다. 엄마가 느닷없이 쓰러져 돌아가셨단다. 그는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엄마가 당신 자신의 삶이 지닌 진실에 가닿지 못했을까봐 안타깝다고 했다. 죽음의 순간, 얼마나 살고 싶어 했을까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고 했다. 극단의 공포가 밀려온다고도 했다. 그의 이런 예민함은 그렇게 죽어가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본 트라우마에서 비롯한 것이다. 나는 목 놓아 한 번 울고, 그 울음을 위해 다시 한 번 목 놓아 울라고 말해주었다. 빈소에서 만난 그는 비교적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관할 때, 죽음 얼굴에서 엄마가 진실에 가 닿은 증거를 보았다 한다. 죽음으로 가는 급박한 여정에서 그의 엄마가 진실을 맞이하기까지 대체 어떤 시듦이 있었을까. 답 있을 리 없는 궁금함에 젖어 나는 빠르게 소주잔을 비워냈다. 그와 작별인사를 나눈 뒤부터의 기억은 밤하늘로 훨훨 날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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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과 식물은 자기들이 단지 거기에 있음으로써 우리 삶을 고양시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그런 작용을 탁월하게 해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다! 반면에 우리 인간 종은 이 세상에서 늘 스스로를 의식한다. 우리가 어떤 결과를 겨냥해 노력을 기울일 수 있고, 올바르게 수행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환상으로 스스로를 부추긴다.

  그렇게 해서 고통스러운 세상이 펼쳐지는데, 자칫하면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를 그쪽으로 몰아갈 수 있다. 내 목표가 아무리 분명하고 내 기술이 아무리 탄탄해도, 내가 종국에 누구에게 도움을 주거나 무엇에 기여하는지는 종종 모르며 알 수도 없다는 것, 이것이 진실이다.


  ·······무엇을 왜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그래서 실제로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지에 관한 결정적인 실마리를 놓치고 있다면) 그것은 내 에고가 작동 중이고 그러므로 위험하다는 신호다.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더 심오하고 직관적인 장소, 즉 영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데서 우러나온다. 내가 무엇으로 누구에게 기여하는지를 정확히 알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내 말과 행동은 에고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36-38쪽)


파커 J. 파머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해주는 능력과 친절을 지니고 있다. 여기 ‘나는 모른다.’ 이야기를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읽는 독자는 아마 없으리라. 여든 줄에 든 노인이 들려주는 궁극 차원 이야기를 새파란 독자가 쓱쓱 읽는 풍경이 그려질 때 나는 그저 신통방통해할 따름이다. 쉬운 읽기 밑바닥에 매우 어려운 근원적 문제가 가라앉아 있으니 말이다.


2016년 3월 10일, 나는 숭산崇山의 사여四如에 짧은 소疏를 붙였다.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흔히 ‘모른다.’를 ‘알지 못한다.’로 새겨 부정어 취급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디 ‘모른다.’에서 출발해 길을 떠납니다[如如only don't know]. ‘모르지 않는다.’고 부정하면서 ‘안다.’의 세계로 진입합니다[無如]. 아무리 ‘안다.’의 세계를 헤매어도 ‘모른다.’는 상태가 해소되지 않음을 깨달으면서 ‘안다.’와 ‘모른다.’의 차별이 없는 세계에 다다릅니다[一如]. 결국 ‘모른다.’에 내맡긴 채 걸림 없이 살아갑니다[卽如only go straight]. 이렇게 살아감으로써만 실재 세계를 엽니다. 아니 오직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실재 세계 그 자체입니다[卽如是如如].


내 소疏에서 나타난 숭산 이야기의 흐름은 큰 맥락에서 파커 J. 파머 위 본문의 흐름과 동일하다. 무지와 무지 사이의 지를 부정적으로만 볼 때 누락시킬 가능성이 높은 중요한 에피소드 둘이 있다. 어떻게 무지로 다시 돌아갈 계기를 잡는가, 가 하나다. 앞의 무지와 뒤의 무지는 같은가, 아니라면 무엇이 다른가, 가 남은 하나다. 이 문제를 해소하려면 왕필王弼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夫無不可以無明 必因於有 故常於有物之極 而必明其所由之宗也。


여기서 무는 무한, 유는 유한일 테지만 우리 논의의 문맥으로 가져오면 무를 무지, 유를 (유)지로 보아 억지일 것이 없다. 인간의 근원적 무지 상태는 무지 상태 그 자체에서 깨달을明 수 없다. 반드시 지 상태를 거쳐야 한다. 지의 극한/극단極brink/edge에 도달해야 궁극宗, 그러니까 무지를 깨닫는 근원적 전복이 일어나는 법이다.


지의 극한/극단은 무엇인가? 분별지/추론지에 대한 자만이 이끈 양적인 파멸만 주목하면 안 된다. 분별지/추론지를 도저하게 밀고 가서 자발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질적인 부서짐에도 주의해야 한다. 지는 저주를 넘어 축복이기도 하다.


축복은 무엇인가? 지를 통과해 도달한 무지는 지를 통과하기 이전 상태로 복귀한 무지가 아니다. 무지를 통렬히 깨달아 스스로 기꺼이 무지 상태에 자신을 맡기고, 아니 무지 상태로 자신을 만들고 나아가는 겸허와 감사의 무지다. 겸허와 감사는 지식의 지에 더 얹어진 각성의 지가 불러온 축복이다. 이 축복에 힘입어 무지는 전체 진실을 향해 훌쩍 날아오른다. 날아오르는 찰나 무지는 무심의 세계로 들어가 무지의 경계를 벗어난다.


시원적 무지 상태에서 인간은 ‘무심코’ 살아간다. 지의 상태로 접어들어 ‘유심히’ 살다 보면 어느 변곡점에서 깨달음에 이른다. 깨달은 무지 상태에서 비상하는 순간부터 ‘무심히’ 살아간다. ‘무심히’ 살면 삶은 탱맑아진다. 탱맑은 삶의 바다에 ‘의미’는 미세플라스틱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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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렇다. 이제 생각난다. 나는 어떤 사람의 태양계 한가운데 있는 태양이 아니라는 것. 스스로를 거기에 두려고 안달하면서, 나는 특별하고 내 인생도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우긴다면, 아마 절망 또는 망상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만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새와 나무보다 더 중요하지도 덜 중요하지도 않다는 것을 이해할 때, 평화가 찾아온다.(35-36쪽)


내가 태양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만 하면, 햇빛을 가로막으면서 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을 멈출 수 있다·······, 한 발짝 물러나서 햇빛이 만인과 만물을 비추도록 할 수 있다·······, 그래서 생명의 빛으로 삼라만상을 무르익게 할 수 있다·······.(38쪽)


스스로 못났다고 낮추는 사람은 결코 겸손한 사람이 아니다. 자기조롱의 배후에는 ‘나는 너희들과 달라.’라는 거드름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잘났다고 뻐기는 사람은 결코 교만한 사람이 아니다. 자기자랑의 배후에는 ‘사실 나 쓰레기야.’라는 고자질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못났다, 잘났다는 평가가 근거 없음으로써 유지되는 극단이기에 이런 어긋남이 가능하다. 극단은 분리를 낳는다. 분리된 것들은 의미로 존부를 다툰다. 다투면서 극단들은 분열적으로 공생한다. 분열적 공생은 평가의 거절로 궤멸된다. 평가를 거절하면, 존재는 있는 그대로 평화다. 나는 새와 나무처럼 만물의 일부일 뿐이다. 특별하지 않으니 의미를 따질 일도 없다.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의미·무의미를 넘어 모두 존재할만한 존재라는 말이다.


자신에 대한 극단적 평가 때문에 분열적 삶을 살아가는 청년이 찾아왔다. 브라만과 언터처블 사이를 오가며 그의 영혼과 육신 모두가 기괴하게 뒤틀려 있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도망치기를 끝없이 반복하는 동안 앙큼하고 밉살스런 트릭스터 자아만 기괴하게 커졌다. 기만적 자기애에서 놓여나지 않으려는 영악함으로 똘똘 뭉쳐 집요하게 할퀴고 투덜거리고 징징거린다. 질병을 넘어 ‘자기 악’ 상태에 이미 침륜된 듯하다.


이럴 때만큼 급격히 모순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드물다. 새와 나무처럼 만물의 일부일 따름인 내가 특별한 능력을 바라게 되니 말이다. 한 발짝 물러나서 그에게 햇빛이 비추도록 하는 일이 가능한지 묻게 되니 말이다. 평가를 멈추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곡진하게 이른 뒤, 들이지른다.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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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이른 아침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천국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믿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 지옥에서는 커피콩을 볶을 수만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영혼의 양식은 유머로 발효되지 않으면 복통을 일으킨다.(32쪽)


유머는 웃음을 이끌어내는 유용한 기술에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거쳐 치유의 방편으로 넘어가더니 요즘 몸값을 올리는 전략으로까지 평가 받고 있다. 유머에 대한 일련의 도구적 이해가 만들어낸 추이다. 더 나아가 유머의 존재론적 이해를 시도해본다.


유머(에 해당하는 요소)가 있는 말글은 비대칭의 대칭이라는 전체성을 확보한다. 시종일관 진지한 말글은 이를테면 일극집중구조인 셈이다. 사물의 존재 이치에 맞지 않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이런 생각에까지 닿지 못해 유머를 대개 부차사항이라 여겼다. 유머는 다만 부차사항이 아니다. 존재론적 선택사항이다. 유머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겠다.


말글에서 비대칭의 대칭을 이루려 할 때, 내가 택한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산문에 운문(성)을 도입하는 것. 운문(성)은 리듬으로 유희를 일으킴으로써 진지함 일극구조를 흔드는 매력이 있다. 유머에 비해 은근하기 때문에 듣고 읽는 이가 감지하기 쉽지 않는 것이 문제다.


다른 하나는 유머와 반대편에 선 것이다. 웃음 아닌 눈물(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감성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여느 사람들이 웃음치유를 전파할 때 임상의로서 울음치유를 설파했던 맥락과 정확히 일치한다. 웃음=긍정, 울음=부정이라는 통속한 이해를 거절하는 입장에는 지금도 변함없다. 엉엉 우는 것이야말로 대大긍정이다.


유머, 그러니까 웃게 하기에 대한 자세를 정색하고 다시 생각하는 일은 entearing-적당한 영어가 없어서 만든 신조어-, 그러니까 울게 하기에 대한 자세를 정색하고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게 결과다. “영혼의 양식은 entearing으로 발효되지 않으면 변비를 일으킨다.” 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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