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에 참전했다 당한 부상과 그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는 구십줄 어르신이 몇년째 침치료 받으러 오신다. 요즘따라 거의 매일 오다시피 하신다. 띄엄띄엄 하시는 말씀을 이어보면 대략 이렇다.


밤새 아내 소변-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고-수발드느라 도통 잠을 잘 수가 없다. 자식들은 도리가 아니라, 면서 요양병원에 모시는 걸 반대한다. 그렇다고 손수 어머니를 보살피는 것도 아니다. 병든 아버지한테 떠넘기고 태평하니 너무 야속하고 힘들다.


한의원에 자주 오시는 까닭이 하나 더 는 셈이다. 나는 일부러 대화를 청하는 한편, 간호사에게 좀 더 쉬다 가시도록 유침, 온열치료, 저주파치료 시간을 늘이라 일렀다. 이 또한 하나의 치유가 아닐까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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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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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튼은 수도사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형제들이여, 이제부터 모두 스스로 서야 합니다.”


  우리의 주된 사회(정치, 경제, 종교) 제도들이 심각한 기능부전에 빠져 있는 역사적 시점에 내게 큰 울림을 주었던 그 연설에서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구조는 좋은 것이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며, 그것이 좋아질 수 있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회 구조라는 건 제거될 수도 있어요. 모든 것이 제거되었을 때, 무엇을 하시겠습니까?(98-99쪽)


사회구조가 모두 제거되는 상황이 과연 있을까? 있다면 스스로 서라는 충고는 무의미하다. 충고하지 않아도 그리 할 수밖에 없는데 거기다 입을 대는 것은 췌사일 뿐이니 말이다. 그러면 머튼이 말한 것은 어떤 상황일까?


현실국가가 엄존하는 한, 구조의 전면 제거란 없다. 오히려 극소수 과두지배층의 금고지기 노릇으로 영락해갈수록 구조는 강고해진다. 그 강고한 구조가 수탈당하는 다수 처지에서 보면 제거된 ‘구조’다. ‘구조’는 본디 “좋은 것이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며, 그것이 좋아질 수 있도록·······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므로 이런 모순이 발생한다.


이 모순 속에서 “이제부터 모두 스스로 서야 합니다.”라고 한 충고는 무엇을 향하고 있나? 머튼이 고답적 각자도생을 설파했다고 의심하는 것은 모독일 터. 구조의 부질없음을 간파하고 있으므로 그는 정확히 중도의 칼날을 세웠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다름 아닌 “‘고독의 공동체’ ‘홀로 함께 있는’ 한 가지 방식”(98쪽)이다.


각자도생도 아니고 구조도 아니다. 엄밀 공동체는 바로 이 경계에 서야 한다. 문제는 통속한 공동체 대부분이 구조(, 또는 그에 가깝다)라는 사실이다. 종교성을 띨 경우 더욱 위험하다. 그 종교성이 일극집중적일 경우 더더욱 위험하다. 이 위험한 사이비 공동체는 결국 지배구조에 부역하고 만다.


엄밀 공동체는 각자도생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하나가 되고, 구조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둘이 된다. 포개고 쪼개기를 찰나마다 가로지르며 평등과 자유, 그리고 평화의 파동波動장을 창조한다. 존엄한 개체 의식과 네트워킹을 통한 전체 지향에 동시성을 이루어야 가능한 일이다. 동시성이 구성원에게 일어나는 꼭 만큼이 참 공동체다.


동시성을 동시에 일으켜야 할 때도 있다. 우리 공동체는 얼마 전 그 묵시록적 사건을 특별한 방식으로 경험했다. 그 특별한 경험은 허다한 불길을 이루며 번지고 있다. 더디 날래게 묵시록적 과제를 골골이 공유해가고 있다. 극소수 과두지배층이 단말마의 광란으로 치닫는 동안 바리들은 고요히 공동체 무한 네트워킹에 배어든다. 세상을 바꾸는 분노는 고함치는 입이나 삿대질하는 손에 있지 않다. 변방으로 걸어가는 발에 있다. 이것이 희망이다.


섣부른 낙관보다 더 나쁜 것이 가차 없는 비관이다. 그 가차 없음은 현실을 결결이 겹겹이 모르는 데서 온다. 현실을 결결이 겹겹이 모르면 적고 작은 존재들을 무시한다. 적고 작은 존재들의 공동체 운동이 신의 보행이다. 자작자작·······발맘발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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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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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보어가 말했듯이, “올바른 진술의 반대는 거짓 진술이다. 그러나 심오한 진리의 반대는 또 다른 심오한 진리다.” 역설적으로 생각하기는 창조성의 열쇠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향해 정신과 마음을 열어 놓으면서, 갈라지는 생각들을 끌어안는 능력이다. 역설적으로 사는 것은 인격의 온전함에 이르는 열쇠다. 그것은 자기모순을 끌어안는 능력에 달려 있다.

  나는 역설의 관점으로 삶의 프레임을 다시 짜면서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온전해지려면, 어둠과 빛을 둘 다 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인 생각은, 성장을 억제하고 가로막는 기독교 신앙관에서도 우리를 구원해준다. 그런 신앙관은 실제로는 살아 있는 하느님 위에 신학적인 추상화를 올려놓는 우상숭배다.·······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기독교 세계도 달라졌을 것이다.(96쪽)


내가 열아홉에 붙잡은 원효의 옷자락 하나가 바로 역설의 알갱이다. 물론 그것을 역설이라 이름 하지 않았다. 역설이란 표현은 형식논리의 관점을 반영한 서구 어법에서 왔다. 서로 모순인 진리를 자연스러운 논리로 받아들였던 동아시아 지혜에서 역설이란 표현은 호들갑스러운 무엇이다. 사십여 년 동안 궁굴려 나는 그것의 이름을 ‘비대칭의 대칭’이라 붙였다.


토머스 머튼과 파커 J. 파머가 역설을 종지 삼고 강조하는 것은 내게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이미 내 사유와 삶 깊숙이 들어와 있는 비대칭의 대칭 때문이다. 비대칭의 대칭은 나를 우울의 늪에서 구해 공적 참여의 지평으로 안내했다. 그 과정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내 말글의 도처에서 점멸하고 있다. 여기서 정색하고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파커 J. 파머가 언급한 기독교 세계 문제 때문이다.


파커 J. 파머가 그랬듯 나 역시 주류 기독교 세계에서 참된 하느님의 길을 찾다가 비대칭의 대칭을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목도하고 그만두었다. 파커 J. 파머가 퀘이커로 남은 반면 나는 기독교란 이름 밖으로 아예 나온 것이 다를 뿐이다. 기독교란 이름이 감당할 수 없는 전체성으로서 비대칭의 대칭이 예수에게 있으므로 기독교에 얽매일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나는 판단했다. 기독교인 가운데 성서가 비대칭의 대칭을 담고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 없지 않으나 문제는 그것이 이른바 성령의 감화와 무관한 우연이라는 사실이다. 성서 속 비대칭의 대칭은 “하느님 위에 신학적인 추상화를 올려놓는 우상숭배”를 타파해야 비로소 성령의 감화로 재구성된다. 사유에서도 삶에서도 기독교 세계가 비대칭의 대칭을 구가할 수 없는 것은 절대 일극집중의 자기거점을 지우는 하느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가 하느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않는 것은 그 길이 자기구조를 스스로 파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독교 세계는 자신이 믿는 하느님을 축출하고 자신이 만든 하나님을 등극시킨다. 하나님은 비대칭의 대칭과 전혀 무관한 가짜 신이다. 가짜 신을 놓고 더 이야기하기엔 내 말이 너무 아깝다. 땡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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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자아의 탐구와 하느님에의 탐구, 그것은 차이가 없는 구분으로서, 나의 영적 생활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으로 더욱 깊이 인도해주었다.(95쪽)


차이가 없는 구분”이 실제로 가능한가?


이 질문은 단단한 형식논리로 양육된 사람을 부득불 아포리아에 빠뜨린다. 파커 J. 파머도, 그를 이끈 토머스 머튼도 이 아포리아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듯하다. 참 자아 탐구는 참 자아“” 탐구이고, 하느님 탐구는 하느님“에의” 탐구라 하니 말이다. “의”와 “에의”는 다만 글자 하나 차이가 아니다. 절대타자로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결코 불식될 수 없는 개념이며 사유이리라. 혹은 아무리 참 자아라고 해도 결국은 자아의 확장에 지나지 않거나.


이런 한계가 “신에게 부여받은 자아”(95쪽)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인연에 온전히 충실한 파커 J. 파머에게 더 오를 경지 운운하도록 독려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그의 삶에서 풍겨나는 거룩함이 내가 궁구하는 거룩함과 같은 점이 있는 한 감사함으로 교감할 수 있다. 내가 지닌 다른 점은 내 인연 속에서 거룩함으로 가꾸면 된다.


내게는 참 자아 탐구는 참 자아“” 탐구이고, 하느님 탐구는 하느님“에의” 탐구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 탐구도 하느님 탐구다. 내게는 참 자아가 자아의 확장이 아니다. 소거다. 내게는 하느님이 절대타자가 아니다. 네트워킹이다. 내가 드러내는 것은 신에게 부여받은 자아가 아니다. 신에게 배어들고 배어나는 자아다. 내게는 참 자아가 하느님이다.


구체적 실재에서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나는 내 경계 안팎에 있는 모든 하느님을 “각각 그들의 참된 이름으로 부른다.”(리베카 솔닛의 『CALL THEM BY THEIR TRUE NAMES』에서 영감을 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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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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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은 수준의 소통은 소통이 아닌 교감입니다.·······그것은 말을 넘어서고 개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토머스 머튼


  나는 토머스 머튼을 그가 죽은 이듬해에 만났다. 그의 글과 “말을 넘어서” 펼쳐지는 교감을 통해 만났다. 친한 친구들이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날 때처럼 매끄럽게 만났다. 머튼과의 우정 그리고 지난 45년 동안 그것이 내게 준 희망이 없었다면, 나는 내 직업에 대한 믿음을 그나마 그렇게 불완전한 채로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90-91쪽)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의 글을 읽고 있는데, 여전히 거기서 우정, 사랑, 그리고 구원(희망의 메신저가 되는 데 필수 요소들)을 발견한다. 희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뭔가를 촉구하거나 독려하는 것과 무관하다. 그것은 영혼을 존중하고 마음을 북돋우며 정신에 영감을 주는 것, 발걸음을 서두르는 것,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일 뿐이다.

  거의 반세기 동안, 머튼은 내 여정을 밝히면서 동행해주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볼 수 있도록 생기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93-94쪽)


파커 J. 파머는 토머스 머튼이 열어준 길을 참 자아, 역설, 커뮤니티, 부서진 세계 속 ‘감춰진 전체성’의 넷으로 정리했다. 이 넷을 내 버전으로 바꾸면 바리, 화쟁, 아미타림(바리누리), 일심(비대칭의 대칭)이다. 내 토머스 머튼은 분황 원효다. 원효의 영성은 바리에 젖줄을 대고 있다. 아니, 그는 성육신한 바리다. 바리는 버림받은 “사회의 주변부”(토머스 머튼) 사람들이다. 바리로서 바리를 향해 가는 화쟁의 도상에서 바리누리가 꾸려지고 마침내 비대칭의 대칭인 일심세계가 드러난다.


나는 바리로 태어나 바리로 살다가 열아홉에 원효의 옷자락 하나를 처음 붙잡은 뒤 45년째 “거기서 우정, 사랑, 그리고 구원(희망의 메신저가 되는 데 필수 요소들)을 발견”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발견은 “그의 글과 “말을 넘어서” 펼쳐지는 교감을 통해” 온다. 교감은 “친한 친구들이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날 때처럼 매끄럽게” 이루어진다. 처음 원효의 글과 만났을 적 기억과 느낌은 아직도 나를 전율케 한다. 마치 내가 쓴 것을 읽는 듯 어휘와 문장을 하나하나 새기지 않았음에도 뜻이 통짜로 빨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내 독서 태도 근본을 뒤집어 놓았다. 내 생각은 이렇게 전복되었다.


“글을 읽음으로써 그 너머의 교감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교감은 이미 이루어져 있다. 글은 그것을 일깨우는 확실한 기회이자 부족한 방편일 따름이다.”


교감은 근원적·존재론적 상호작용이다. 소비자본주의가 부추기는 무드의 교류가 아니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볼 수 있도록 생기 있는 길을 열어”주는 공현사건이다. 공현사건은 우리가 ‘따로 또 함께’ 존재한다는 진실의 증거다. 이 증거는 말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단 한마디 말만 허한다. 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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