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 나이듦에 관한 일곱 가지 프리즘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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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피스트회 수도사 토머스 머튼은 내 개인적인 성자 가운데 한 명이다. 비록 교회의 기준으로 보면 극적인 ‘실패’ 때문에 그가 속한 교회에 의해 성자의 반열에 오르지는 않을 듯하지만 말이다. 그는 기독교 바깥의 도교와 불교에서 지혜와 위로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말년에는 입원했던 병원의 간호사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번민의 시간이 오래 지속되는 동안, 머튼은 수도원을 떠나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야 할지를 놓고 씨름했다. 결국 그는 수도사의 서약을 지키겠노라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렸다.·······고통이 가라앉았을 때 머튼은·······놀라운 말을 했다고 한다. “내게 하느님 이외의 누군가를 사랑하는 능력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세계적인 수준의 신비주의자가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비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하기란 식은 죽 먹기다. 인간이 되기가 거룩해지기보다 더 어렵다.”라고 말하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머튼은 작가 미들턴 머리가 했던 말, “선한 사람이 선함보다 온전함이 낫다는 사실을 깨닫는 다는 건, 꽉 막힌 다른 생활로 살아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과거의 청렴은 이에 비하면 꽃처럼 분방한 방종이다.”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체성wholeness으로 나아가는 고된 길이다.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걸어야 할 이 길은, 끊임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걸을 수 있다. 또한 인간,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축하받을 일이다. 머튼이 켄터키주 루이빌 시내에서 통찰에 대해 쓴 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루이빌의 어느 쇼핑센터에서, 나는 이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깨달음에 갑자기 압도당했다. 그들은 내 사람이고 나는 그들의 사람이다.·······그 행복감은 이런 말로 표현될 수 있을 듯하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과 똑같다니요. 저도 다른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니요.”(205-206쪽)


파커 J. 파머가 “얼마나 놀라운가.”라며 놀라워하지만 나는 놀랍지 않고 안타깝다 못해 아프다. 토머스 머튼도 토머스 머튼이려니와 그 간호사 때문이다.


“토머스 머튼이 사랑한 간호사는 토머스 머튼에게 과연 무엇인가? 그는 그 뒤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런 내 감수성은 구도자 앞서 치유자라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버림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평범한 한 여성으로서 상대방에서 비롯해 사랑이 꺾였을 때 그가 받은 고통은 전혀 다른 무엇이었을진대 이 문제에서 토머스 머튼은 어떤 위치였을까 생각하면 심사가 불가항력적으로 날카로워진다.


날카로움을 달래면서 차분히 처음부터 다시 톺아보자. 토머스 머튼은 자신이 사랑한 간호사를 “하느님 이외의 누군가”라고 표현했다. 파커 J. 파머와 또 달리 내게는 그가 한 말 전체가 놀라운 게 아니라 이 하느님 이외의 누군가라는 표현이 충격이다. 레토릭이 아닌 한, 자신 바깥에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있는 하느님 개념은 근원적으로 가소롭다. 큰 하느님이란 게 고작 ‘덩치 큰’ 하느님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양量으로 입자로 하는 사고가 천형처럼 부과된 서구전통에서 사람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하는 것 바깥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저들의 개념적 신앙과 달리, 그렇다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란 신약성서 표현이 레토릭 수준일 수밖에 없다.


결국 지극히 작은 자 하나 “아닌” 하느님을 선택하면서 머튼은 ‘기묘한’ 전복의 메시지를 던졌다.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비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하기란 식은 죽 먹기다. 인간이 되기가 거룩해지기보다 더 어렵다.”


하느님 신앙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경천동지할 고백임에 틀림없다. 토머스 머튼의 이 놀라운 고백은 그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나? 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인간되는 길을 가다가 그만둔 그러니까 ‘실패한’ 경험의 소산이므로 그의 선택은, 이제부터 쉽고 거룩한 삶이다? 여기부터 문제가 꼬이기 시작한다. “쉬운” 길은 “거룩한” “꽉 막힌” “전체성wholeness으로 나아가는 고된 길”과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으니 말이다. 이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지 않은 채, 토머스 머튼에게 “축하받을 일”이 생겨버린다. “온전한 인간이 된”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깨달음에 갑자기 압도당했다. 그들은 내 사람이고 나는 그들의 사람이다.


여인 하나 사랑하는 “꽃처럼 분방한 방종”, 그 “극적인 ‘실패’”를 딛고 일어나 “전체성wholeness으로 나아가는 고된 길”을 걸은 결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나아가 “인간이 되”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게송을 들어보라.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과 똑같다니요. 저도 다른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니요.”


한 사람 사랑하는 것을 버려서 모든 사람 사랑하는 전체성을 얻었다는 역설의 설파가 자못 통쾌해 보인다. 내가 보기에 이 통쾌는 유사품이다. 한 여인을 사랑했던 경험에서 길어 올린 관념의 복제품이다. 이는 마치 거의 모든 기독교인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네 몸과 같이”를 쏙 빼고 자기 기만하는 것과 같다.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에 비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하기란 식은 죽 먹기다. 인간이 되기가 거룩해지기보다 더 어렵다.”는 전복이 기묘한 것이 아니라 영묘한 것이 되려면 토머스 머튼은 여인 하나를 끝까지 사랑하는, 인간이 되는 “어려운” 길을 택했어야만 한다. 이 선택만이 토머스 머튼이 하느님과 사람을 하나 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는 끝내 하느님과 사람의 분리 벽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인간이 참 인간인 사건, 그것이 바로 하느님 사건이다. 서구기독교 전통이 참으로 구원의 전통이 되려면 인간과 분리된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내러티브를 넘어서야 한다. 몸 아닌 하느님을 몸인 인간이 구원해낸 역사가 성서의 장엄 전언임을 간파해야 한다. 몸 본질을 간과한 진리는 ‘구라’다. 저 ‘구라’ 은산을 깨뜨리지 못하고서 예수를 입에 담는 것은 전주 사람이라면서 모주 한 잔 권하자 운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파커 J. 파머와 토머스 머튼을 키운 서구전통에서 눈길을 돌려 우리 전통 원효를 본다. 주지하다시피 원효의 선택은 토머스 머튼과 정반대였다. 원효는 요석을 사랑해 스스로 파계하고 소성거사로 살아 부처와 중생을 일통했다. 요석은 운향이 되었다. 두 연인은 서로를 상승시키는 도반으로서 몸과 마음을 모두 구원했다. 나는 언젠가 운향 요석의 시선으로 원효를 들여다보는 글을 쓸 것이다. 그 글을 토머스 머튼의 연인이었던 간호사에게 헌정하련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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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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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도를 가다듬고, 영성을 갱신하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처받은 치유자로서 세상에 돌아가기 위한 안전한 공간이 있다면 그 모든 곳이 성소다. 이는 단지 폭풍우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생존과 지속해갈 수 있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190쪽)


토머스 머튼의 말을 들어보자.


이상주의자들이·······가장 쉽게 굴복하는 형태의 현대적 폭력이 만연한다. 행동주의와 과로가 그것이다. 현대생활의 분주함과 압박은 본질적인 폭력성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일 것이다. 수많은 갈등사안에 열중하기, 너무 많은 요구에 부응하기, 너무 많은 프로젝트에 관여하기, 모든 일에서 모든 이를 돕기 원하는 것은 폭력에 굴복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이는 폭력에 대한 협력이기도 하다. 활동가의 광란은 그의 일을 무효화한다.·······광란은 그가 하는 일의 결실을 파괴하며, 일을 유익한 것으로 만드는 내적 지혜의 뿌리를 죽이기 때문이다.


  머튼은 우리의 가장 심오한 요구들 가운데 하나를 거론한다. 일과 삶 자체를 유익한 것으로 만드는 ‘내적 지혜의 뿌리’를 보호하고 양성하기. 영성이라 불리는 원뿌리에서 영양분을 공급받는 우리는 세상에서 도망치거나 그것을 착취할 이유가 없다. 대신 인간 최고의 가능성을 열망하면서, 세상 (그리고 우리자신)의 모든 결점을 끌어안으며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살 수 있으려면, 세상을 사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 영성을 갱신시키면서, 언제 어디서 안식처를 구할지를 알아야 한다. 내적 지혜의 뿌리를 길러내는 모든 것에서 도움을 받을 때, 행동주의와 과로의 폭력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도 낮아진다. 이를 이해할 때, 우리는 비폭력-우리 문화의 폭력을 초월하고 변형시킬 기회를 열어주는 존재의 유일한 방식-의 중심을 향해 이동 중이라고 할 수 있다.(192-193쪽)


흠, 오늘은 길게 인용했다. 내친 김에 하나만 더 인용한다. 리베카 솔닛이다.


2006년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스Erica Chenoweth는 비폭력도 폭력만큼 체제 변화에 효과적인 전략인지 알아보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비폭력이 오히려 더 낫다는 결과를 얻었다. 인구의 약 3.5%만 가지고도 체제에 비폭력적으로 저항할 수 있고 심지어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결론에 많은 활동가들이 마음을 빼앗겼다. 한마디로,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 굳이 모두가 우리에게 동의하도록 만들 필요까지는 없다. 우리에게 열렬히 동의하여 기부하고, 운동하고, 행진하고, 체포나 부상을 무릅쓰고, 어쩌면 감옥이나 죽음까지 무릅쓰는 사람들이 얼마쯤만 있으면 된다.·······당신의 생각이 잘 여행하고 있는지에는 신경 쓰지 않고 어디에 도달해 있는지에만 신경 쓰는 것은 변화가 이루어지는 양상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153쪽)


리베카 솔닛의 이 글을 품고 있는 <성가대에게 설교하기> 전체 문맥의 표면적 지향은 오늘 우리 논점과 조금 다르지만 결국 영성이란 차원으로 가면 같아진다. “우리에게 열렬히 동의하여 기부하고, 운동하고, 행진하고, 체포나 부상을 무릅쓰고, 어쩌면 감옥이나 죽음까지 무릅쓰는 사람들”, 그 “얼마쯤”이 우리의 성소니까. “생각이·······어디에 도달해 있는지에만 신경 쓰는 것”이 “행동주의와 과로의 폭력”이므로 “생각이 잘 여행하고 있는지에” 신경 써서 “내적 지혜의 뿌리를 길러내는 모든 것에서 도움을 받을 때” “우리는 비폭력-우리 문화의 폭력을 초월하고 변형시킬 기회를 열어주는 존재의 유일한 방식-의 중심을 향해 이동 중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사실 이상주의 활동가의 “광란”, 그러니까 “행동주의와 과로”를 “폭력”이라 지적하는 일은 쉽지 않다. 광란의 활동가 자신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다 여기므로 폭력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주위 사람은 자격지심 때문에 감히 폭력 운운할 수가 없다. 나는 경계지대에서 오래 살아온 탓으로 이런 상황을 수없이 목도했다. 활동가의 광란은 공동체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 파괴하곤 했다. 파괴되고 나서도 많은 경우, “일과 삶 자체를 유익한 것으로 만드는 ‘내적 지혜의 뿌리’를 보호하고 양성하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광란은 이미 일극구조에 중독된 일종의 정신병이기 때문이다.


이 지경의 정신병은 악의 다른 이름이다. 악을 부수기 위해 비-집중 상태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곳이 성소다. “태도를 가다듬고, 영성을 갱신하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처받은 치유자로서 세상에 돌아가기 위한 안전한 공간이 있다면 그 모든 곳이 성소다.” 성소 공간은 반드시 장소적 공간일 필요가 없다. 사람일 수도 있다. 걷기일 수도 있다. 노래일 수도 있다. 우리를 비대칭의 대칭 상태로 놓을 수 있다면 멸치국수 한 사발도 성소다. 은폐된 폭력, 그 분주한 참여의 해정을 위해 나는 일어나 국수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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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우리의 유한한 언어 및 공식들 안에 담길 만큼 작다면 왜 신앙을 가질까요?·······하느님은 모든 생명에 생기를 불어넣는 근원적이고, 야생적이며, 자유롭고, 창조적인 충동이지만, 결코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가둬둘 수 없는 존재입니다.(146쪽)


중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인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왕소군王昭君. 날아가던 기러기가 그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을 잃고 떨어졌다落雁는 전설이 있을 만큼 아름다운 왕소군에게도 딱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좁고 비대칭인 어깨가 바로 그것. 하여 왕소군은 숄을 늘 걸치고 다녔다 한다.


천하의 파커 J. 파머, 그의 역설 미학에도 맹점이 하나 있다. 하느님에게만은 역설을 온전히 들여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하느님은 오직 큰 하느님이다. 인간의 “언어 및 공식들 안에 담길 만큼 작다면” 그의 하느님은 아니다.


내 하느님은 다르다. 내 하느님은 작디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내 하느님은 작디작아서 귀에 들리지 않는다. 내 하느님은 작디작아서 코로 냄새 맡아지지 않는다. 내 하느님은 작디작아서 맛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 하느님은 작디작아서 손으로 만져 느껴지지 않는다. 내 하느님은 작디작아서 언어에 담겨지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가 하느님을 가둘 수 없는 것은 그 언어가 너무 성겨서다.


내 하느님은 작디작기만 하지 않다. 내 하느님은 크디크기도 하다. 그러나 내 하느님의 크디큼은 파커 J. 파머의 하느님의 그것과 다르다. 내 하느님의 크디큼은 실체가 아니다. 사건의 실재다. 그것은 작디작은 하느님들의 무한 네트워킹이다. 무한네트워킹은 크디커도 삼라만상의 바깥으로 넘어가 초월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 하느님은 작디작아서 크디크다. 내 하느님은 크디커서 작디작다. 내 하느님은 모순의 공존이며 역설의 공현이다. 내 하느님은 비대칭의 대칭 운동 과정이다. 그러므로 내 하느님은 범신汎神도 아니고 범재신汎在神도 아니고 창조신도 아니다. “좁고 비대칭인” 서구전통에는 있을 수 없는 하느님이다.


파커 J. 파머라는 고수의 아킬레스건을 찾았다고 키득거릴 생각 따윈 없다. 하늘 아래 완벽한 인간은 없으니까 나 또한 그러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진실도 잘 안다. 이제부터 파커 J. 파머에게 선물해줄 “숄”이 혹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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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종종 제가 발견하는 것에, 그리고 그것이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거기에 앉아 있었다는 느낌에 놀라곤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제 책의 어떤 구절을 인용한 걸 보면 ‘내가 정말 그렇게 썼나?’라고 자문할 때가 많아요. 그것을 제 스스로의 생각이라고 여기기가 어려운데,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로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미지의 장소로 가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통찰입니다.(142쪽)


딸아이가 아기였을 때 잠들기 전에 내가 해준 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장가 부르기. 동요에서 오페라 아리아, 심지어 운동 가요까지 세심히 선곡해서 불러주었다. 다른 하나는 바리공주 이야기하기.


바리공주 설화를 처음 접한 것은 무속연구 서적에서 본 서너 줄짜리 요약 줄거리였다. 나는 그 ‘요약본’을 토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매번 상상력을 동원해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여 나아갔다. 나중에는 제법 길어져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아기는 잠들곤 했다. 잠든 뒤에도 이야기를 마저 다 해주었음은 물론이다.


아기가 더 이상 이야기에 실려 잠들지 않아도 될 만큼 자란 어느 날, 나는 한겨레신문사가 펴낸 <바리공주>를 서점에서 발견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고 숨죽이며 읽어 내려갔다. 아, 세상에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팔다리가 벌벌 떨려왔다. 내가 상상력으로 그려낸 큰 틀은 물론 세부적 묘사까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는 게 아닌가!


책을 덮으며 든 처음 생각은 ‘내가 바리공주 화신이 아닐까?’였다. 평소 신‘끼’ 있다는 소리를 들어온 터라 묘한 느낌에 잠시 잠겼다. 그러나 정작 감동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뒤에 들이닥친 벼락같은 깨달음이었다.


“나만 바리공주 화신인 게 아니다. 우리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무의식 속에 바리공주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랬다.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인 것은 내 상상력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는 이미 영혼의 네트워킹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거기에 앉아 있었다는” 표현이 더 실감날 수 있겠다. 교감하려고 마음만 열면 누구든 언제든 어디서든 “통찰”이 가능하다. 이 통찰은 의도하지 않았으므로 “우연”이라 할 것이나, 서로 이어져 있는 공동체 구성원에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의 사건이기도 하다.


어디 바리공주 이야기뿐인가. 잘나고 똑똑한 자들이 다 저 잘나고 똑똑한 줄 알지만 그 지혜와 지식 모두 함께 누려야 할 공동체 향유 재화일 따름이다. 권력도 부도 구원도 특정한 자의 소유 대상일 수 없다. 소유는 절도다. 절도범 전직 대통령이 둘이나 감옥에 있는 우리 어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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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좌절의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에 작가가 되었습니다.”

·······

  저는 곤혹스러움이 제 타고난 권리의 선물이라고 믿습니다.·······곤혹스럽게 하는 것이 많은 세상에 태어났기에 제게는 소재가 무궁무진합니다. 쓰기에 대한 접근도 간단하지요. 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을 찾아, 제 무지의 첫 번째 층을 벗길 수 있을 만큼의 글을 씁니다. 이 지점에서 계속 또 당혹스러움을 발견하고요. 그리고 되도록 멀리, 궁극적으로 제가 탐색한 마지막 층 아래서 신비의 층을 또 하나 발견할 때까지 계속해서 씁니다.

저를 곤혹스럽게 하는 몇 가지를 나열해볼까요.

·······

  ● 나는 무엇이 타인을 곤혹스럽게 하는지 그토록 잘 알고 있음에도 어째서 때로 내 믿음과 다른 것을 말하고, 행하는가?


  저는 내면과 주변의 모순들을 연료 삼아, 많은 시간을 들여 이에 대해 특히 신앙의 전통 안에서 발견되는 모순들에 관해 글을 씁니다. ‘육신이 된 말씀’에 기반 해 수립된 전통이 그토록 신체와 섹슈얼리티를 두려워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어떤 이들은 이런 유의 질문이 신앙에 반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우리가 우리 모순을 온전하게 의식하면서·······살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종교공동체 내의 모순들이 두려운 나머지 마치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이 하는 언행은 신앙심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영적인 삶에 모순이 없다고 믿는 것은 신앙이 없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133-135쪽)


좌절-곤혹-당혹-모순은 다소 다른 맥락 안에서 한 가족의 의미망을 구성한다. 종당 이들은 역설의 바다에 가닿는다. 파커 J. 파머의 기품: 해학, 실천: 사색, 영성: 자연의 역동적 평형은 죄다 이 역설의 바다가 일으키는 해류와 파도의 교향곡이다. 해류와 파도는 난경이다. 난경이 빚어내는 곤혹과 좌절, 마침내 칼날 위의 모순, 그 “마지막 층 아래서 신비의 층을 또 하나 발견할 때” 비로소 안·정·동·요에 깃들 수 있다.


파커 J. 파머는 신앙을 글쓰기와 같은 진리 위에 놓는다. “신앙이란 우리가 우리 모순을 온전하게 의식하면서·······살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그는 단호하다.


영적인 삶에 모순이 없다고 믿는 것은 신앙이 없는 것보다 더 나쁩니다.


가령 전능하고 의로운 하나님이라면서 왜 세월호 아이들을 구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 앞에 서보자. 명성교회 김삼환이처럼 말하는 것은 “모순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김삼환이처럼 생각하면서 자신이 영적인 삶을 산다고 주장하는 개신교도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이 따위 신앙을 가진 자들이 더없이 나쁜 것은 불문가지다.


그런데 저들보단 덜하지만 왜 신앙이 없는 사람도 나쁜가? 이들이 모순 없는 하나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이 올바른 하느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참 하느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은 세월호 가족과 교감하면서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실천에 참여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영적인 삶이다. 이들이 일으키는 영적인 삶의 네트워킹이 바로 참 하느님이다. 파커 J. 파머가 말하는 신앙 없는 사람이란 바로 이런 참 하느님을 살지 않는 사람이다. 가짜 하느님인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만으로는 ‘좋음善’에 가닿지 못한다. 참 하느님 사건을 일으켜야 좋음에 가닿는다.


김삼환이 같은 부류의 가짜 신앙인의 마지막 출구는 이른바 심판론이다. 하나님의 전능함과 의로움을 옹호해야만 하므로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 전능함과 의로움이 왜 하필 “최후”에야 나타나는가? 역사는 최후심판까지 괄호로 묶어야 하는 반 쪼가리 실재에 지나지 않는가? 심판론은 일관성이란 피상성에 기댄 옹색하고 비겁한 도피다. 현실의 악을 두호하는 속임수다. 결국은 자신들이 날조한 하나님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신성모독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이것은 더없이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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